※ 2024. 03. 26. 그림을 모두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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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1)
1. 작은 세 고을에서 시흥이 시작되다
2. 시흥의 맏딸, 영등포
3. 그때 그랬다면? - 영등포부 승격
4. 시흥의 둘째 딸, 안양
5. 시흥의 셋째 딸, 관악
이번에는 시흥의 셋째 딸, 서울시 관악구다.
관악구라는 지명이 기원하는 관악산 일대. 위키미디어 Gwanaksan Seoul KR.jpg에서.
1963년 서울 대확장 때 영등포구로 옛 형제였던 시흥군 동면과 신동면이 편입되었다. 한편 이때 영등포구는 부천군에서 소사읍과 오정면을, 김포군에서 양서면과 양동면까지 편입해, 지금의 서울 강서구부터 서초구까지의 여덟 구를 관할하는 무시무시하게 큰 구가 되었다. 이렇게 컸기 때문에 기존 영등포구청에서 모든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서, 관악·신동·오류·양서·양동 다섯 출장소를 두어 각 지역의 행정업무를 나눠 맡게 했다. 분리 당시의 관악구, 그러니까 지금의 관악·동작·서초 3구는 관악과 신동 두 출장소에서 나누어 맡았다.
1963년 서울 대확장으로 넓어진 영등포구. 서울 서쪽과 남쪽이 모두 영등포구다.
1967년, 관악과 신동 두 출장소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서울의 인구 증가로 인해 영등포구는 무시무시한 업무 폭증을 겪었고, 행정에서 소외돼 불편을 겪는 주민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될 당시의 기사를 살펴보자.
53.835 km2의 면적 중 도로 총연장 545 km가 차지하는 비율이 고작 2.8%(서울시 도로율은 10.74%)이고 그것도 포장된 도로가 전체의 20%밖에 안 되는 관악구는 6만 6천 7백 59동의 건물이 있으나 그 가운데 정상적인 것이 2만 8천 6백 83동으로 전체의 42.9%밖에 안 되며 나머지 57.1%인 3만 8천 76동이 불량건물이라는 점 하나만 들어도 이곳이 얼마나 많은 취약점을 안고 있는 지역인가를 알 수 있다.
더구나 이곳 주택들의 대부분이 산비탈이나 고지대에 밀집해 있어 56만 6천 8백 20명의 주민 중 50.5%밖에 급수 혜택을 받지 못하며 장마철이면 축대 붕괴, 산사태 등이 잦고 화재 위험이 많으며 소방도로도 제대로 뚫리지 않아 화재가 나도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취약점도 안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하수시설이 좋지 않아 여름이면 각종 질병의 발생 위험이 가장 많은 곳이며 청소 혜택도 제대로 받지 못해 전체 지역의 55%가 수거지역이고 나머지 45%는 비수거지역으로 서울 시민이면서도 주민의 반 정도가 서울시의 모든 행정 혜택을 못 받아 온 행정사각지대였다.
관악구 일대의 인구 급증은 동사무소 증설로도 확인할 수 있다. 본디 관악구 일대가 영등포의 일부로서 서울에 편입되었을 무렵, 봉천동과 신림동은 모두 봉신동사무소 하나에서 관할했다. 그러나 1970년 5월 5일, 봉신동 하나에서 전부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 봉천1·2·3·4동, 신림1·2·3동 무려 일곱 동사무소를 새로 설치해야 했다.
원래 두 동만 있을 정도로 해방 당시까지 전통적으로는 작은 마을에 불과한 관악구는 수도권 집중화로 인해 몰려드는 인구들로 바글바글해졌고,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봉천과 신림 두 법정동(주소의 기준이 되는 동)에는 무려 20개의 행정동(주민센터의 기준이 되는 동)이 있다. 이나마도 현대에 관악구 인구가 줄어든 결과고 가장 많을 때에는 무려 26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1973년의 영등포구 분할. 관악구 이동의 옛 시흥군 땅은 성동구에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되었다. 시흥의 셋째 딸, 관악은 이렇게 안양과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한편 옛 신동면 중 사당동을 제외한 동부 일대는 성동구로 넘어갔고, 나중에 서초구의 기반이 된다. 지금은 다들 서초를 강남이라고 생각하지만, 원래 서초는 영등포였다(!)
관악구 분리 직전 영등포구의 인구는 139만 7610명에 달했는데, 이에 버금가는 많은 인구를 관할한 구는 같은 시기에 쪼개진 110만 9850명의 성북구고 영등포의 기록에 도전할 구는 전무후무하다. 신설된 관악구의 인구는 60만 6007명이었다. (1973년 3월 2일 조선일보 1면)
이후에도 관악구는 서울대학교 캠퍼스 이전과 함께 고시생들을 대상으로 한 주거 공간이 공급되면서, 현재는 구 북쪽을 나중에 동작구로 분리하고 나서도 2023년 인구수 48만 1956명에 달하는 서울 내의 대표적인 베드타운이 되었다. 동작구와 합치면 2024년 인구는 약 86만 명까지 이른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서울대와 관악산 주변에서 자연보호 활동을 하는 모습. 서울대학교는 서울시의 도시개발계획과 함께 관악구의 발전의 한 축이 되었다.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유형에 1 따라 서울역사박물관(https://museum.seoul.go.kr)의 공공저작물을 이용하였습니다.
6. 시흥의 넷째 딸, 구로
구로구와 동작구의 생일은 같은 1980년 4월 1일로, 각각 영등포구와 관악구에서 갈려 나왔다. 구로구가 동작구보다 더 사람이 많고, 당시 구 서열도 구로구가 동작구보다 앞섰기에(1979년 10월 25일 조선일보 6면) 비록 쌍둥이라고 해도 구로가 넷째, 동작이 다섯째가 되겠다.
구로구 지도. 가운데 고척1동과 구로2동 사이의 경계를 안양천이 지난다. 위키미디어 Guro.png.
구로구는 구 한가운데가 허리처럼 잘록하게 들어갔고 그 허리를 안양천이 관통하는데, 이런 지형은 우연이 아니고 안양천 이서는 예전에는 부평, 부천이었고 안양천 이동은 시흥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시흥의 딸들은 오로지 1914년 시흥에서만 비롯했기에, 구로가 시흥의 딸들 중에서는 첫 혼혈(?)이라 하겠다. 그러나 구청이 안양천 이동에 있으므로, 어찌되었든 구로도 시흥의 딸이다.
1960년대 이전까지 구로구 일대는 시흥과 부천의 변두리 땅에 불과했고, 1963년 서울로 편입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서울에서 몰려난 빈민들이 무허가주택을 짓고 살고 있었고, 그들을 위해 1961년 당시 공영·간이주택 2300세대를 지은 적이 있었다.
1968년 구로 무역박람회 개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유형에 1 따라 서울역사박물관
한편 온수동 일대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간 공업단지인 서울온수일반산업단지가 '영등포기계공업단지'라는 이름으로 1970년에 인가를 받아, 1973년에는 기계금속 및 비철금속 적격단지로 지정되었다.
구로공단이 완공되면서 구로공단 일대에 살고 있던 농부들은 공단 노동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공단의 인력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었고, 전국에서 구로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공단의 수요를 채워주었다. 이렇게 한적한 농촌이던 구로구 일대는 공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북적대는 현재의 모습으로 급격히 변모하였다.
수많은 주택이 구로구 일대에 생겨났으나 체계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개발된 주거 지역은 바로 개봉동 일대였다. 구로구 일대는 비록 개발되지는 않았으나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 경부고속도로와 경인고속도로가 지나는 교통의 요충지로 개발의 잠재력은 풍부했다. 그 교통의 경부 축을 따라 공업단지가 개발되었다면, 경인 축에 놓인 개봉동 일대는 주거지역으로 개발된 것이다.
대한주택공사는 1969년 택지조성사업에 들어가고 1970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 1차로는 시흥군 광명리(현 광명시 광명동) 30만평, 2차로는 개봉동 30만평 등 총 60만평에 달하는 택지를 71년까지 조성했다. (매일경제 1976년 7월 12일 '서울의 뉴타운 9 개봉지구') 이 조성된 토지 위에 주공아파트가 1971년 9월 준공되었는데, 처음에는 높은 집값을 부담스러워한 나머지 아무도 선뜻 들어오려 하지 않았으나 1972년 임대단지로 전환하자 1차 5월 9일 250가구 입주자 모집에 무려 3339명이 몰려들어 담당이사는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매일경제 2009년 8월 21일 [아파트 이야기] 개봉아파트) 물론 광명리가 포함된 만큼 이 택지조성사업은 광명시의 기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어차피 광명시도 시흥의 딸이니 그때 이야기하자. 사실 개봉동이 대표하는 안양천 이서 지역은 원래 시흥이 아니긴 하다.
이렇게 구 시흥군에 세워진 구로공단의 발전과 구 부천군에 갖춰진 주거 개발로 인해 구로구 일대도 성장해, 구로공단이 막 들어섰을 1970년의 인구는 (영등포구의 일부로서) 25만 5172명이었으나 1975년에는 34만 2526명, 분구 직전인 1980년에는 56만 8993명에 달했다. 결국 1979년 당국은 다시 인구가 백만에 육박해가는 영등포구를 도림천을 기준으로 나눠 구로구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결정 당시 신 영등포구의 인구는 43만 4896명에 면적은 27.58 km2, 구로구의 인구는 51만 7963명에 면적은 39.37 km2으로 구로구가 영등포구보다도 더 컸다. 이와 함께 관악구 일부를 영등포구에 편입하고, 시흥군 광명리와 철산리를 구로구에 편입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시행되지는 못했다.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시흥의 넷째 딸, 구로는 이렇게 태어났다.
1980년, 시흥군과 다섯 딸들, 영등포구, 구로구, 동작구, 관악구, 안양시.
7.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
동작구의 이름이 유래한 동작진 근처를 지나 동작대로로 이어지는 동작대교. 위키미디어 File:Dongjak Bridge.jpg에서.
1914년에 시흥군에 합병된 이전의 과천군은 한강을 끼고 있어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는 나루터가 있었는데, 노량진 곧 노들나루와 동작진 곧 동재기나루다. 지금은 둘 다 동작구에 있다.
노량진은 백로 또는 버드나무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하고, 동작진은 검붉은 구릿빛 돌들이 많은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주며 조선시대 9대 간선로 중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가는 제6·7·8호 간선로에 있었고, 동작진 역시 제6·7호 간선로의 경유지로 꼽히며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과거 급제하고 고향길로 돌아가는 길에 언급되는 서울과 삼남 지방을 이어주는 나루였다. 조선에서 더 중시한 것은 노량진 같은데 구의 이름은 노량구가 아니라 동작구가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어쩌면 동작진은 동작대교를 거쳐 동작구에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에는 한강의 나루터로서 번성하였고 경인선 노량진역이 세워지기도 한 동작구 일대는, 1917년 한강인도교가 건설되면서 변화를 맞기 시작한다.
1917년 준공된 한강인도교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srd-239198)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도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널 수 없는 자동차로 강을 건너고자 다리를 놓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이 배 대신 다리로 강을 건너면서 나루터는 쇠퇴했고, 나루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동작진 주민들은 한강변에서 자그마한 돌멩이 즉 사리를 채취하면서 여전히 괜찮은 소득을 올렸으나, 동작진을 관할하는 시흥군수였던 일본인 신미수(神尾修)라는 사람이 조선사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리채취권을 확보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사리 채취 노동자도 동작진 주민이 아닌 외지인을 불러다 쓰면서, 한때 건너편 검은돌(흑석리) 사람들이 부자 동네라고 부르던 동작진 주민들은 반대로 살길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한편 1941년 설립된 조선주택영단은 영등포공업단지의 배후 주거지로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상도동과 대방동에 영단주택을 건설하였다. 이는 조선주택영단의 첫 사업지였고, 지금도 주거지역이 대부분인 동작구의 역사를 대변해준다 하겠다. 상도동의 영단주택은 동작구 독립 당시인 1980년대까지도 그 모습이 지속되었으나 이후 도시계획이 실시되면서 옛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70년대에는 노량진 일대에도 주거지역이 조성되는데 이는 1967년 첫 유료 자동차전용도로인 강변1로(현 노들로)가 한강의 범람을 막는 제방 구실을 해주면서 가능해졌다. 1971년에는 지금의 노량진수산시장인 한국냉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1976년의 노량진 수산시장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H-TRNS-84344-765)에서.
동작구에는 숭실대학교, 중앙대학교, 총신대학교 세 사립 대학교가 일찍이 들어서 있었다. 숭실대학교는 1957년부터 상도동에 자리를 잡았고, 중앙대학교는 1933년 흑석동에 들어왔고, 총신대학교는 1961년 사당동으로 옮겨왔다. 그러나 노량진을 한때 유명하게 만든 고시원과 학원가는 이와는 기원이 다르다. 원래 종로에 있던 대성학원이 1975년 노량진으로 이전해 왔고, 1977년 정부가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 계획을 세우면서 사대문 안에 있던 학원들이 줄줄이 노량진으로 옮겨 온 것이다. 수능 이후 수많은 학원들이 대치동으로 옮겨가고, 그 빈 자리를 공무원 학원이 채우면서 공무원 수험생을 노린 고시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이는 동작구 탄생 이후이니 여기까지만 하자.
동작구 일대는 1936년 영등포가 시흥에서 서울로 편입될 때 함께 영등포의 일부가 되었고, 1973년 영등포구에서 관악구가 분리될 때 관악구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웃 영등포처럼 관악구의 인구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불어나면서, 영등포에서 구로가 분리될 때인 1980년 4월 1일 관악에서 동작이 분리되어 태어났다. 이때 관악구 일부 동들을 영등포로 복귀시키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동작구는 상도동과 봉천동 사이의 능선을 따라 관악구와 경계를 지었고, 면적 16.76 km2, 인구 38만 8365명을 관할하게 되었다. 면적으로는 서울시 구 12위, 인구로는 16위에 해당하는, 시흥의 다섯째 딸 동작의 탄생이었다.
1980년, 시흥군과 다섯 딸들. 동작구는 관악구의 북쪽에 있다.
※ 이 글은 밀리로드의 “시흥의 열두 딸들” 연재글을 묶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