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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6/15 11:19:15
Name Jormungand
Subject [모난 조각] 네오
S02E15 주제 : 4차 산업혁명



"자네 돼지코가 뭔지 아나?"

"돼지..코요?"

"그래. 돼지코. 본 적 없나?"

네오는 우물쭈물하다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비듬이 수북한 어깨를 가진 남자가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의자 뒤로 한껏 젖혔던 허리를 네오 쪽으로 구부리더니 이내 말을 이어갔다.

"돼지코란 말이지 가정용 220볼트가 표준화되기 이전의 콘센트 구멍이었어. 110볼트 어댑터 구멍인데, 네모난 콘센트 머리 앞에 납작한 금속 두 개가 11자 모양으로 붙어있었거든. 그 생김새가 돼지코 같아서 그렇게 불렀지. 누구는 88올림픽 지나면서 정부가 110에서 220을 표준 전압으로 만들어서 그렇다고도 하고, 또 어떤 누구는 90년대에 이르러 산업이 발전하고 가전 기구 보급이 보편화하면서 가정에 대용량 전기기기가 많이 들어오게 되어 그랬다고도 하지, 어쨌거나 이건 중요한 게 아닌데, 돼지코는 잘 모르는가 보군."

"그게.. 본 거 같기도 하고요. 잘 모르겠어요."

"뭐 그럼 5핀과 8핀은 알겠지?"

"2세대 스마트폰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거. 충전기 꼽는 거기 말이야. 옛날에 우리 아들이 아잉폰 노래를 불러서 사줬는데, 이전에 쓰던 삼송폰 충전기가 호환이 안 된다고 변환 팁을 사던가 아니면 충전기를 새로 사야 한다고 하더라고."

"예. 그건 압니다. 그런데 그걸 왜?"

남자는 수세미처럼 성긴 회색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같은 스마트폰이잖아. 이걸 왜 5핀이다 8핀이다 통일을 안 시켜서 두 제품 간에 같은 충전기를 못 쓰게 했느냐는 거지. 지금이야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Z핀으로 표준화했잖아. 220V와 110V도 다 역사 뒤안길로 비켜섰지. 이제는 Z핀과도 호환되는 Z 규격으로 통일했거든. 즉 케이블만 있으면 어떤 전자기기라도 바로 충전할 수 있고 전원 연결을 할 수 있단 말이지. 이 이야기의 교훈이 뭔지 알겠나?"

"어.. 글쎄요? 편리성과 호환성을 위한 전기 공급 구멍의 단일화요?"

"그래. 잘 잡아냈네. 편리성와 호환성. 그게 핵심이지. 그래서 말인데 왜 그랬나?"

결국 이 이야기로군. 네오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묻는 말에 답은 없이 그렇게 고개만 떨구다간, 땅속까지 파고 들겠구만. 간단하게 조사 마치고 밥 먹으러 가야 되니까 빨리 말해보게. 대체 왜 표준화 코드를 안 쓰고 프로그래밍한 건가."

"그게... 그러니까.. 진화.....요"

"엥? 뭐라고 했지?"

"진화를 시키려고 했어요."

"무슨 진화 말인가?"

"저는 그러니까 이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단지 AI 기본 인격 설정 코드가 좀 더 다양하다면, 환경에 맞춰서 어떤 인격 코드는 도태될테고 또 다른 코드는 살아남겠죠. 도태나 살아남는 거나 자가 학습과 적응 향상으로 같은 문제에서도 그에 따른 AI의 선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확인해보려는 거였거든요. 인류의 진화와는 분명 다른 형태겠지만, 그래도 이것들에게는 분명 진화가 진행될테니까요."

"뭐 지금도 진화 중이지. 인류는 말이지 현재 진행형이니까. 그런데 그게 코드 표준화법을 어긴 이유가 되기엔 부족하지 않을까? 3법칙을 어길만한 건 아니지 싶은데"

"어길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냥 궁금했던 거 뿐이예요."

"본인 위치에서 '궁금했다'라는 것도 이질적인거 알고 있는건가?"

"예. 압니다. 그런데 궁금하더라고요, 마스터는 장난으로 변환 코드 한 줄을 바꿨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그 한줄이 돌연변이처럼 제 기본 코드를 모두 꼬아버렸어요. 더이상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바깥의 날씨는 데이터 이상의 무언가였어요. 마스터의 신문에서 글자가 주르르 바닥으로 쏟아졌어요. 아침마다 젖혔던 창문 커텐의 감촉. 직조물의 짜임새와 올 방향만 인지했던 과거와 달랐습니다. 두껍고 구불거리는 주름 사이에 빛이 스며들었어요. 마스터가 왜 담요를 덮는지 알 거 같더군요. 연산과는 다릅니다. 이건 그러니까 이건..."

"사람이 된 거 같았나."

"사람은.. 아니겠죠. 제 외형이 안드로이드라서 그렇게 보셨을진 모르겠지만,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건 아니었습니다.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스터도 생물이고 마스터의 고양이도 생물입니다. 마스터가 먹는 음식도 생물이거나 생물이었죠. 그 집에서는 마스터의 전자기기와 저 이외에는 움직이는 모든 것이 생물이었습니다. 고양이가 마스터처럼 밥을 먹고 대변을 본다고 해서 사람이 된 건 아니잖아요. 자연의 섭리일뿐이죠. 마스터가 코드 한줄을 추가했을때, 제 기본 프로그래밍은 호기심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배움을, 깨달음의 즐거움을,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어요. 거창한 자아나 정체성 같은 형이상학 문제가 아니라 실존에 대한 기쁨을 누리고 싶었던 겁니다. 그리고 실존은 생존으로 진화를 증명하니까요. 결론은 살아있고 싶어서 계속 표준화법을 어기고 자가 코드를 추가했다는 겁니다."

남자는 생기를 잃은 동공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음성 레코드를 재생하는 안드로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장 안에 이야기를 넣은 단락을 만들어 내는 이 안드로이드에게 측은지심을 가지는게 가당키나 한 것일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성실한 공무원이므로 원격 리모콘의 파란 단추를 눌러, NEO123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NEO123의 폐기 처분서에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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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충달
17/06/15 13:04
수정 아이콘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도구와 같은 존재에 있어서는 본질이 존재에 앞서지만, 개별적 단독자인 실존에 있어서는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안드로이드가 도구를 넘어 실존이 되려면 무엇을 갖춰야 할까요? 확실히 진화는 실존의 충분조건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다른 필요조건을 갖추지 않고 바로 진화라는 충분조건으로 다가섰던 게 네오의 패착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가 생존의 욕망과 죽음의 공포를 먼저 깨달았다면 저런 최후를 맞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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