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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6/20 00:28:01
Name legend
Subject [일반] 너와 나에게 보내는 시들. 두번째.
부르는 이

나를 불러주오 한번만 불러주오

내가 떠나지 못하는 까닭 이해해주지 말고 그저 불러주오

겁 많고 게을러서 그렇단 말로 넘기려 하는

돈 없고 아파서 그랬단 걸로 변명하려는

그럼에도 언젠가 이야깃 속에서 튀어나온 말 탄 주인공이

내 손을 붙잡고 펄쩍 뛰어올라 무지개다리 너머

눈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지 그 자체로 이끌 것이라

믿어버린 나를 전혀 이해하지 말고 불러주오

이 나약한 나를 포기하지 말고 불러봐주오



사람

너 사람이여

터질듯 가득 채운 그대도

텅텅 비워내고 남은 그대도

만욕의 큰 사발을 들고

거룩하게 드높이며

내가 아닌 것의 제단을 만드니

생애는 물레방앗간의 수레바퀴

마소가 끄는 물레방아는 누구를 위함인가

알지 못하기에

깨닫지 못하기에

그렇기에 너는

한결같은

사람이었음이라



걸음마

철이 없다는 말 들을 나이

정말 철없던 시절엔 들어보지 못했다

항상 바르거라

항상 말 잘 듣거라

항상 의젓하거라

그렇게 착한 아이는 어느새

꺼칠한 수염과

군데군데 잔주름과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하게 되었다

껍데기는 낡아버렸는데

마음은 그대로 남아버렸는데

걱정스레 쳐다보는 당신

철없음을 탓하지 마오

늙은 아이가 이제야 스스로 걷기 위함이니



생사

가슴을 조여오고 숨 못 쉬게 만드는

지독한 답답함

온 몸을 뒤틀고 신음을 흘려도 풀리지 않는

굳어버린 몸뚱아리

둔탁한 무거움과 빙글 도는 어지러움 그리고

텅텅 비어버릴듯 시린 머릿 속

찢기고 터져나온 핏자국 핏덩어리들의

시뻘건 두려움

망가져 죽어가는 과정을 자각해야 하는

이 지성이 원망스러워

언젠가, 혹은 곧 찾아올 지 모르는 그것이

차마 이름으로 부르기 힘든 그것이

설마 문 앞에 서 있진 않겠지

아닐거라며 애써 무시한다

무서워서 눈감고 도망친다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아니니까 오지마



이상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

죽어가는 것처럼 살고 싶지 않다

빈 소리 울리는 삶이 아니고 싶다

가득 채워가는 삶이고 싶다

내 바램에 진실된 인생을 원한다

무기력과 공허함에 짓눌리지 않는 인생을 원한다

이것이

더 이상 더할 게 없는

나의 이상이다



MIDNIGHT JAZZ

한 밤에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갈 길 잃은 눈길 손길

멍하니 아무런 이야기 아무런 웃음거리

찾아다니며 방황하네

거리의 화려한 드럼쇼와

신기한 연주기계와

어울리지 않는 그로울링 성가를

의자에 축 늘어져

메마른 입매로 빈 눈가로 웃어보다가

어떤 재즈연주에서 여행을 멈추었다

고요히 잠든 새벽의 지친 영혼을 채우는

피아노의 반짝임, 베이스의 울림, 드럼의 약동

예전처럼 치유받을 것이라

예전처럼 살아숨쉴 것이라

잠깐은 그랬는데

조금 지나고 나니 다르다

많이 달랐다

너가 없어서

언제나 함께 듣던 너가 이젠 없으니

오히려 마음만 더 시려온다

너만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좋아했을 이 순간이 아픈 추억으로 물들고

우울해진 선율만이 시곗바늘 따라

하염없이 돌아가네

잊힐 수 없도록 시간 속에

깊숙이 새겨지네



눈꽃송이

삼월 첫 주에 슬슬 날 풀릴까 싶어

저녁 저무는 해 보며 노을빛 등 아래서

새로이 마음 다지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내리지 못 한 마지막 눈꽃송이가

날 잊지 말라는듯 찾아왔더라

올 해 마지막 찬바람과 함께 인사하더라

은은하게 피워오른 연탄난로에 손대고

온기를 나눠받고 있자니

너의 다정한 온도가 떠올라버려

이젠 없는

불씨 한 톨 없이 식어버린

부서진 허연 연탄재가 되어

어느 겨울날에 묻은 너의 모습

그게 단단히 얼어

녹지 않고 겨울 내내

떨리고 움츠려들게 만들어

그 냉기가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더는 춥지 않도록

봄이 오면

녹아내린 기억의 책장을 잘 말려

사진 한장 두장

햇빛에 반짝이게 두고

웃고 있는 순간이길 위해

보낸다

마지막 눈꽃송이와 함께 너를 보낸다



밤빛

오전 세시 이십팔분, 눈 감은 자들의 세상

삼 층 주공 연립 어딘가에 깨어있는 나는

몇 칸 남짓 사각 공간 안에 형광등 불빛을

그저 모아놓고 흑야의 도시에 작은 창 하나를 뚫으니

그것은 밤을 밝히는 등대가 되어

끝나지 않는 항해를 계속하는 존재에 이르렀다

별빛 항구 사이 유영하는 태양 빛 함대가

밤 바다 물결 헤쳐 동쪽으로 힘차게 솟아오르니

스피카, 데네볼라, 아르크투루스 봄의 대삼각을 지나

목동의 안내로 북의 왕관을 쓴 빛이

천궁을 환하게 비추어 나의 등대에 도달하여

유리에 비친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눈동자에 가득 채워보인다

원시의 반짝임이 가득 새겨진다

잠깐 점멸하고 사라질 존재에게 전해진 영원이란 단어를

나는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어서

그 밤빛은 백열광과 함께 녹아들어 잊혀진다



검생

한 번도 칼집에서 나와 휘둘려 본 적 없는 칼이

벨 수 없는 날로 무우를 잘라 국을 끓이고

빛나지 않는 검면으로 화려한 검무를 추고

다 쓰고 나면 제대로 닦지도 갈지도 않은 채 아무렇게나

책상 구석쟁이에 쳐박혀 먼지 쌓인 어둠에서 잠깐 울다

정신차릴 틈 없이 보이지 않는 손에 다시 붙잡혀

이리 구르고 저리 부서지고 그래서 칼은 파르르 떨며 또 울고

자아를 부여잡고 서글픈 생애를 돌이켜보니 묻고 싶어지더라

나는 왜 만들어 진 것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진정 검신이 향하고 싶었던 것은 어디였나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은 개의치 않고 칼을 휘두른다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그 소리

밤 늦게 직장에서 벗어나 하루종일 묶여있던 몸 조금은 풀어헤치고

늘어뜨린 팔을 흐부적 흔들다 등 뒤를 감싸는 시원한 압박감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다리 밑 하천에서부터 풀더미를 스쳐 지나 온

유월의 밤바람이 내 펼쳐진 손바닥을 맞잡고 살며시 포옹하고선 귓가에 대고 소리를 울린다

사람의 말만 고막이 부서질듯 들어 그런지 정령의 속삭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모르겠구나 피곤하니까 지쳤으니까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괜찮습니다

네 정말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날 내버려둬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며 관성처럼 걷다보니

어느새 멈춰선 곳엔 집 앞 현관등이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계단 몇 칸을 올라 이 층 오른편 낡은 스티커와 군데군데 녹슨 대문이 보이고

주머니에 왼손을 넣고 뒤적거리다 만져진 쇠의 감촉과 오른손이 쥐고 있던 둥그런 손잡이에

나도 모르게 아주 살짝 입꼬리가 올라간 순간

뒤늦게 바람이 전한 그 소리가 마법처럼 한 글자씩 한 단어씩 풀려가 따스하게 속삭인다

오늘도 끝났어 너 참 잘 버텼구나 힘들었지 이제 푹 쉬어도 돼

위로받지 못했던 여린 마음은 그제야 아프게 고개 끄덕일 뿐이다




-----

두번째, 많이 아픈 것들의 시.
최근으로 올수록 할 말이 많아지나 봅니다. 아픈만큼 더욱 절실히 마음을 담 아끼는 시들입니다.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내용이 한구절이라도 있었다면 만족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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