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5/05/17 20:30:54
Name 시드마이어
Subject 할거 없으면 농사나 짓던가 (수정됨)
아버지는 6.25가 일어날 때 3살 아기였다.

전쟁통에 마을에 있는 땅굴에 들어가 목숨을 부지했다고 하신다.

그 이후로 삶은 다른 전후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반에 70명이 되는 학생들과 같이 초등학교를 보내셨고, 당시 초등학교 졸업식은 곧 사회로 나가는 것을 뜻했다.
아버지 말씀을 빌리자면 '목숨을 부지한 것과 사회로 나가야 될 상황' 때문에 졸업식은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초졸이다.

초졸의 아버지는 노름하시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14살 가장이 되셨고, 아래로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 둘을 키웠다.

14살 가장이 되어 가장 처음 얻으신 일은 아마도 나뭇꾼일 거다. 나무를 베어다가 가져오면 장에 내다 판다.
새벽 4시면 세수를 하시고 나무를 베러 나가신다. 중간중간 참을 드시고 16시간 일을 하셨다고 한다.
저녁 8시까지 나무를 베어오셨고, 노름하시는 할아버지는 노름돈도 없고, 술값도 없기에 소를 끌고 나무를 팔러 나가신다.

그렇게 아버지의 노력으로 집안의 돈은 조금씩 쌓여갔고, 라디오, TV 그리고 여러 비싼 농기계도 사셨다.
그렇게 이젠 농기계도 빌려주면서 돈을 받고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이 났다.

아버지의 둘째 동생이 5살쯤 되었을 무렵, 가스불을 가지고 장난치다 집에 불이 났고,
집을 빙 둘러서 마른 장작을 둘러두었던 우리집은 활활 불탔다.

아버지는 그때 맨발로 자전거를 타고 나가셨었고, 집에 돌아왔을 땐 신을 신발조차 없었다.
모든게 불탔고, 아버지는 3일동안 아무것도 드시지 않았고, 잠도 오지않았고, 죽을거 같았다고 하셨다.
14살 부터 수년간 매일 일해오셨던 모든게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는 어찌보면 심심하다.
아버지는 서울로 가셔서 공장에서 일을 하시게 되었고,
할아버지는 여전히 무책임하게 사셨고,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와 함께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아버지는 서울에 올라가 버는 돈의 대부분을 고향으로 보냈지만,
저축하라고 준돈, 옷입히라고 준돈, 먹이라고 보낸 돈 모두 한 푼도 남지 않고 다 쓰여진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니가 보내준 돈으론 턱없이 모잘러."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 아버지를 보고 자란 아버지의 동생들은 그래도 제대로 살게 되었다.
야학을 하면서 일하고 공부해서 학교를 나가서 기술로, 먹고 살게 되었다.
아버지의 동생들은 평범한 어른이 되었고, 집도 꾸리고 잘 살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잘 사셨다.
워낙 손기술이 좋으셨고, 고생을 많이 해보셨기에 공장을 나와 목수일을 하시게 되었는데,
30대 초반 나이에 대목이 되어 인부 200명을 관리하셨다. 초졸이라 건축학을 아시진 모르지만,
공사장에서 목수로 30년 동안 일을 하시면서 아버지의 자녀 4명 역시 잘 키우셨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집은 가난하다.

가끔 생각해본다. 우리 아버지는 무엇을 잘못했길래 여전히 가난한걸까.
부자가 된 사람들은 무엇을 했길래 부자가 된 것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이제는 작아진 아버지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5-08-17 18:42)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5/05/17 21:13
수정 아이콘
정말 존경할만한 아버지이시네요.
Tchaikovsky
15/05/17 21:18
수정 아이콘
존경합니다. 아버지.
15/05/17 21:23
수정 아이콘
아빠..보고싶어요
15/05/17 21:32
수정 아이콘
열심히 산다는거랑 부자가 되는건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싶네요..
던져진
15/05/17 21:38
수정 아이콘
부자가 되려면 부자여야 합니다?
Tyler Durden
15/05/17 21:45
수정 아이콘
우리 아버지께서도 나름 열심히 힘들게 사셨다 생각했는데
더더욱 후덜덜하군요..
가장은 위대합니다 ㅠㅠ
효도하세요~
친절한 메딕씨
15/05/17 21:54
수정 아이콘
숙연한 본문에 좀 뻘 글일지 모르겠는데...

농사나 짓던가? 라는 제목하고 무슨 관계가..........???
농사 이야기는 없는 거 같아서요...
시드마이어
15/05/17 22:01
수정 아이콘
아버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라 적어봤어요. 지금 보니 별 상관없는 제목이네요. ;;
신세계에서
15/05/17 22:26
수정 아이콘
이유가 없는 것에서 이유를 찾으려고 하지 마셔요
안쓰러우시겠지만 시드마이어 님을 있게 한 것 만으로도 아버님은 대업을 이루신 겁니다
레이스티븐슨
15/05/18 00:36
수정 아이콘
아버지 존경합니다 허나 저도 글쓴분처럼 모르겠습니다. 후..
15/05/18 10:05
수정 아이콘
농사가 을매나 힘든데 ㅠㅠ
좋은글 감사합니다. 추천드립니다.
불멸의 이명박
15/05/18 11:56
수정 아이콘
여담이지만 농사 짓는게 정말 힘들다고 하더군요. 농사 안지은 사람들이나 '할 거 없으면 시골 내려가서 농사나 짓지'
이러는데 실제 해보면 절대 그런말 못한다고..제 친구 부모님이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시는데 친구한테
'너도 할 거 없으면 부모님 한테 가서 농사나 해라' 이랬는데 '너가 안해봐서 그렇지 농사 진짜 힘들다. 난 죽어도 못하겠다'
라고 하더군요.
15/05/18 12:03
수정 아이콘
국제시장(보기싫어서 보진 않았지만,,)이 추구하는...벅찬 무엇인가가 느껴지는 글입니다.
건이강이별이
15/08/18 14:37
수정 아이콘
요즘 느끼는 건 집안의 누군가가 블랙홀이 되버리면 정말 힘듭니다....
가족이라 내칠수도 없지만 존재만으로.. 가족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요.
그래도 가족이라는 틀에 같이 있으니 같이 가는 거겟죠.
천무덕
15/08/19 21:16
수정 아이콘
가족구성원중에 하나라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나머지 구성원들의 삶은 지옥이 됩니다.
가장의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면 가족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가족구성원의 씀씀이가 커진다면 그거또한 마찬가지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고요. 아이의 입장에선 계속 아프다던가 하면 나머지 구성원들이 자기 역할에 전력을 다 하기 어렵게 되죠.

근데 희안한건 누군가가 의도적이든 환경적이든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고 망나니,개차반처럼 사는 사람이 나타날때 누군가 그 사람의 역할까지 짊어지는 사람이 한명은 있다는게 참 묘합니다.
내가 벌어 나만 사는게 아니고 형의 가정의 기초생활보장(..)을 하며, 그 형이 죽고 나서 끝났나 했더니 이젠 사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여 방세까지 대납하고 계신 아버지를 보며 참 대단하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끊는게 덜 힘들지 않겠냐고 이제 사위도 30대 중반인데 알아서 살지 않겠냐고 했더니 '애비된 도리로 해야만 하는거다.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사위는 아버지도 없으니 내 아들이나 마찬가지인데 제 역할을 못한다고 해서 포기하는게 애비가 할 짓이냐, 좀 힘들더라도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해줘야지. 그게 부모의 도리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짊어지는거 보면 참..안쓰럽습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에 참 많은게 담겨있는것 같아요. 아직 전 아버지가 되려면 멀었지만(애인도 없으니..) 아버지처럼 희생하며 사는 삶은 전 못 살것 같아서.. 이 글 보니까 참 아버지라는 이름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굉장히 버거울정도로 큰거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53 영화 1622편을 보고 난 후, 추천하는 숨겨진 수작들 [44] 최적화7129 21/09/17 7129
3352 나 더치커피 좋아하네. [33] Red Key7183 21/09/17 7183
3351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27] 카페알파10020 21/09/15 10020
3350 [역사] 나폴레옹 전쟁이 만든 통조림 / 통조림의 역사 [23] Fig.15448 21/09/14 5448
3349 와인을 잘 모르는 분을 위한 코스트코 와인 추천(스압) [89] 짬뽕순두부10722 21/09/11 10722
3348 [콘솔] 리뷰) <토니 호크의 프로 스케이터>가 위대한 게임인 이유 [29] RapidSilver5837 21/09/08 5837
3347 Z플립3의 모래주머니들과 삼성의 선택 [115] Zelazny13966 21/09/08 13966
3346 [역사] 몇명이나 죽었을까 / 복어 식용의 역사 [48] Fig.18726 21/09/07 8726
3345 유럽식 이름에 대한 대략적인 가이드 [53] Farce10721 20/10/09 10721
3344 내 마지막 끼니 [5] bettersuweet5989 21/09/06 5989
3343 이날치에서 그루비룸으로, 새로운 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 [38] 어강됴리11976 21/09/03 11976
3342 만화가 열전(5) 청춘과 사랑의 노래, 들리나요? 응답하라 아다치 미츠루 하편 [84] 라쇼8820 21/09/02 8820
3341 DP, 슬기로운 의사생활 감상기 [23] Secundo8560 21/09/02 8560
3340 집에서 레몬을 키워 보겠습니다. [56] 영혼의공원7405 21/09/02 7405
3339 공식 설정 (Canon)의 역사 [100] Farce7814 21/08/30 7814
3338 타인의 시선에 대한 공포 [20] 원미동사람들6140 21/08/26 6140
3337 대한민국, 최적 내정의 길은? (1) 규모의 경제와 대량 생산 [14] Cookinie6590 21/08/26 6590
3336 독일에서의 두 번째 이직 [40] 타츠야7241 21/08/23 7241
3335 차세대 EUV 공정 경쟁에 담긴 함의 [50] cheme9666 21/08/23 9666
3334 잘지내고 계시죠 [11] 걷자집앞이야9565 21/08/17 9565
3333 [역사] 라면 알고 갈래? / 인스턴트 라면의 역사 [38] Fig.19784 21/08/17 9784
3332 다른 세대는 외계인이 아닐까? [81] 깃털달린뱀13805 21/08/15 13805
3331 LTCM, 아이비리그 박사들의 불유쾌한 실패 [18] 모찌피치모찌피치9794 21/08/15 979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