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5/10/22 05:18:21
Name 기다
Subject 조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첫 가족해외여행.
그 시대에는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우리 아빠는 참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빠가 중학교 1학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6남매를 홀로 키우셨으니, 어쩌면 조금은 더 특별히 가난했을수도 있겠다. 그러한 가정에서 공부나 대학이라는건 당연히 사치에 불과했고, 아빠는 공고를 나와 스무살이 되자말자 공장에서 돈을 벌었다.

아빠는 군대를 제대하고 한달이 채 안되어, 말레이시아 페낭이라는 곳에 다리를 건설하러 가셨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돈은 아빠의 것이 되지 못했다. 아빠가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 곳에서 3년동안 일한 대가로 받은 돈은 고모들 결혼비용을 대느라,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신 큰아버지의 공부비용을 대느라 모두 쓰여졌고, 한국으로 돌아왔을때 아빠는 여전히 가난했다.
그리하여, 아빠가 엄마를 만나 결혼했을 때 첫 보금자리는 단칸방 월세일 수 밖에 없었다. 월세에서 작지만 우리가족 소유의 집을 사는데 10년이 걸렸고, 그 집에 걸린 빚을 갚는데 다시 10년이 걸렸으며, 방이 세개에 화장실이 두개 있는 조금 괜찮은 집으로 옮기는데 다시 10년이 걸렸다.

이제는 정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아빠는 먹고살기에는 충분한 돈을 버시지만, 젊었던 그 시절의 기역이 남아 있으셔선지 아직 가난하게 사신다. 스타벅스는 커녕 편의점 커피도 비싸서 기겁하며 자판기 커피를 고집하시고, 외식은 정말 특별한 날에만 하는 것이며, 마트에서 만원짜리 티를 고르는것에도 한참을 고민하신다. 아빠가 버신 돈으로 공부해서 이제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일을 하시는 큰 아버지에 반해, 아빠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냥 평범한 공장 노동자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난하게, 힘들게 가족을 위해 살아왔던 아빠에게 인정과 고마움을 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거 같다. 엄마는 가끔 친척모임에 다녀오신 후면, 아빠가 번 돈으로 시집가고 공부했던 고모들과 큰아버지가 아빠에게 고마운 마음은 전혀 가지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여기는것이, 할머니 마저 성공한 큰아버지만을 예뻐하시고 자랑스러워하시지 그 뒷바라지를 감당한 아빠에게는 조금은 소홀하시고 크게 관심을 두시지 않는것이  너무나 얄밉고도 억울하다 하신다. 그럴때마다 아빠는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 당연한 거라고,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엄마에게 화를 내실 뿐이다.

이번 추석 오랜만에 우리 네식구가 모여 식사하는데, 올 겨울에 가족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네명 모두 각자 해외여행은 몇 차례씩 다녀왔는데, 우리가족끼리 해외여행을 간적은 한번도 없으니 이번에 마음먹고 꼭 가보자는 것 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의논할 것도 없이 여행지는 말레이시아 페낭으로 바로 결정되었다. 아빠는 추억이 많은 장소에 가시는것이 설렌다며 좋아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리고 아마도 엄마와 동생도,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아빠가 20대 초반을 가족을 위해 온전히 희생했던 그 장소에서 아빠의 마음을 치유해 드리고 싶다. 아빠가 평생 살아오신 삶의 나날들이, 그 방식들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아빠가 가족들에게 아낌없이 주셨던 그 사랑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아빠는 정말 훌륭하게 평생을 견뎌내고 이겨오셨다고, 알려드리고 증명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아직 아빠의 마음속에 있는 가난을 지워버리고 존경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드리고 싶다.

조금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첫 가족 해외여행이 있기에, 이번 겨울은 따뜻할 것만 같다.



새벽에 갑자기 감성이 돋아 글을 쓰게 되었는데, 글 솜씨가 너무나도 형편없어 부끄럽네요 ㅜㅜ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02-12 12:52)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5/10/22 05:36
수정 아이콘
굉장히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좀 더 나이가 들면 가족끼리 제주도여행가는 것 조차 스케쥴맞추기가 힘들어 지더라구요
가서 좋은 추억 많이 쌓으시길 바랍니다
3막1장
15/10/22 06:59
수정 아이콘
좋군요~
가서 부디 아버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리기를
그리고 좋은 추억 많이 쌓길 바랍니다
기적소리
15/10/22 07:38
수정 아이콘
저희집도 비슷한데요. 5남매 뒤빠라지 한다고 학교도 제대로 못마치고 일자리로 내몰린 아버지를 뒤로하고 4남매는 아버지께서 버신돈으로 공부도 제대로 마치고 더 잘살고 있어요. 그런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은 전혀 없구요. 우리 4남매가 할머니께 이정도 하는데 장남인 아버지는 더 많이 해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을...

저도 내년 아버지 환갑을 맞이해 "첫" 가족여행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동감하고 많은 추억 쌓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15/10/22 14:23
수정 아이콘
저 뿐만 아니라 기적소리님과 같이 아버지 세대에서는 꽤나 흔한 케이스인거 같아요. 시대적 상황이 그러했으니..그 시대를 겪지 않아 잘 모르는 저는 그저 감사만 할 뿐입니다.
기적소리님도 정말 행복한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NiceCatch
15/10/22 07:58
수정 아이콘
즐거운 여행 되시고 많은 추억 쌓으시기 바랍니다~~
당시 가족 중 누군가 희생하고 뒷바라지하는 경우가 많았나 봅니다.... 뒷바라지 해준 사람에게 고마움이 없는 것 까지 저희집과 판박이네요.
15/10/22 08:11
수정 아이콘
행복한 여행 되세요~
삼성우찬해민성환
15/10/22 08:45
수정 아이콘
누군가의 희생으로 경제발전을 했지만 좋은건 일부만 누리는 현 상황과 비슷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국가공동체, 가족공동체라는 이름 아래서의 희생은 당연시 되어 왔는데 희생에 대한 결과는 대부분의 가족 관계에서 좋게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요. 원래 사람이란게 그런건지 공동체의 범위가 단위가족으로 급속히 축소되었거나 사회가 탈가족화 되서 그런지 나이가 들수록 안타깝네요.
암튼 좋은 가족 여행 다녀오세요. 뭐니뭐니해도 그 힘든 시간 겪으시고 무섭게 절약하셔서 잘 세우신 가정이니까 아버님께 특별한 선물이 되겠네요.
40대쯤 되니까 형편이야 어쨌건 아버지가 더 존경스러워집니다.
15/10/22 14:21
수정 아이콘
삼성우찬해민성환님 의견에 공감이 많이 되네요.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어쩔수 없는 것이지만, 그 희생에 대한 존중은 사회적으로도 이루어지지 않는거 같네요
토다기
15/10/22 09:47
수정 아이콘
저희 부모님도 작년에 부모님 친구분들과 뉴질랜드 다녀오셨습니다. 예전에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태국 다녀오시고 제가 얼마전 일본 다녀왔는데 부모님은 한번도 해외 나가신 적이 없어서 간다고 하셨을 땐 기뻤고, 다녀 오셔서 정말 좋았다고 저 데려갈걸 이라고 말하실 때는 조금 가슴이 아렸습니다.
아마존장인
15/10/22 10:16
수정 아이콘
여행지 정말 잘 정하신 것 같네요 추억담 많이 들어주고 오시면
아버님께서 정말 행복해하실듯
늘지금처럼
15/10/22 10:34
수정 아이콘
행복한 가족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보드라운살결
15/10/22 11:24
수정 아이콘
글솜씨 좋으신데요? 마음을 울리는 글만큼 좋은 글이 있나요 ㅠ
아이고배야
15/10/22 11:51
수정 아이콘
저도 올 초에 베트남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는데..부모님도 좋아하시고 같이 가신 분들도 정말 좋게 봐주시더라고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자식들이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이 바빠지느라 온가족이 모이기 힘든데, 시간 맞춰 가족 모두가 같이 다녀오니, 그것만으로도 그동안 고생하신 부모님께 좋은 추억 만들어 드린 것 같아 참 좋앟습니다.
밀물썰물
15/10/22 11:53
수정 아이콘
훌륭한 아버님 두셨습니다. 어머님은 좀 아쉬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꼭 표현을 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니 좋은일 하고 사시면 좋은 것이지요.
글쓰신분과 형제분들이 아버님 어머님 잘 모시면 되겠네요. 조금지나면 고모 큰아버지 들은 점점 더 멀어지고, 사촌도 멀어지고 글쓰신분 형제자매 그리고 부모님들이 계속 가깝게 지내게 됩니다.

아버님께서 아주 기대가 많으시겠습니다. 좋은 여행 되세요.

글 잘 쓰시네요. 느낌도 확 오고 무슨 말인지도 잘 알겠는데요. 글에서 또 뭐가 필요하지요?
15/10/22 14:18
수정 아이콘
사실 부모님께서 친가쪽 친척 분들과 아주 잘 지내시고, 큰아버지 가족과는 같은 동네에 살기도 하고 해서 친가족같이 지내고 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하는 친척들을 싫다기 보다는 서운하다 정도로 느끼시는거 같아요.

두서없이 써내린 글인데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생각을 글로 쓴다는건 정말 어려운 일이더라구요
*alchemist*
15/10/22 14:01
수정 아이콘
원래 올해 그만뒀으면 저렇게 부모님이랑 해외나 다녀올까 싶었는데.. 음.. 아.. 가긴 가야겠어요 진짜
서늘한바다
15/10/22 14:38
수정 아이콘
스산한 삶에 대한 한풀이가 아닌 인정과 치유의 여행을 계획하신거 같아서 몹시도 따뜻함을 느낍니다.
15/10/22 17:31
수정 아이콘
딸애가 내년에 가족 해외여행 하자고, 지가 경비 대겠다고 해서, 많이 기뻤습니다. (속으로 서로 일정이 맞지 않을텐데, 실행 가능성이 없는데 했지만)
어디를 갈까 행선지 얘기하면서 잠깐 행복했습니다.

저는 '기다'님이 속이 꽉 찬 분으로 보여서 좋네요.
유부초밥
16/02/12 17:19
수정 아이콘
후아... 회의하다 딴짓하면서 읽었는데

눈물나올뻔 했네요... 잘 읽었습니다.
하쿠나마타타
16/02/12 17:39
수정 아이콘
매우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서연아빠
16/02/12 19:43
수정 아이콘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신 여자분이 계시다면 글쓴분이야말로 정말 최고의 남편감입니다.

정말 아들은 아빠랑 판박이가 되는경우 많거든요...개인적으로 성실이야말로 남편이자 가장이자 아빠로서 최고의 미덕이 아닌가 싶네요.
16/02/12 20:20
수정 아이콘
예전에 쓴글에 왜 리플이 달리지 했는데 추게를 왔었군요 부끄럽습니다 으헣허헐

저 여행은 결국 못갔습니다. 원래 정해뒀던 날짜에 동생이 갑자기 급한일이 생겨서...시간을 맞춰보러 했지만 잘안되더라구요 워낙 바쁜 동생이라 ㅜㅜ어쩌다보니 네명 각자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크크

그래도 이번 설날에 이리저리 좋은 일들도 많았어요.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이제는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쌓아오신 덕들이 보상으로 돌아오구나 느껴지는 일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부족한 글응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곧미남
16/03/08 02:02
수정 아이콘
정말 멋진 여행되셨기를.. 뒤늦게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415 2021 플래너 모아보기 [26] 메모네이드1708 22/01/12 1708
3414 [NBA] 클레이 탐슨의 가슴엔 '불꽃'이 있다 [19] 라울리스타2317 22/01/10 2317
3413 [팝송] 제가 생각하는 2021 최고의 앨범 Best 15 [16] 김치찌개2050 22/01/09 2050
3412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홈술 해먹는것도 나름 재밌네요.jpg [25] insane1966 22/01/08 1966
3411 우량주식 장투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이유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이유) [84] 사업드래군2655 22/01/04 2655
3410 결혼 10년차를 앞두고 써보는 소소한 결혼 팁들 [62] Hammuzzi6945 22/01/02 6945
3409 대한민국 방산 무기 수출 현황 [48] 가라한6285 22/01/02 6285
3408 나도 신년 분위기 좀 느끼고싶다아아아! [10] 깃털달린뱀2890 22/01/02 2890
3407 중년 아저씨의 베이킹 도전기 (2021년 결산) (스압주의) [34] 쉬군6657 21/12/31 6657
3406 게임 좋아하는 아이와 공부 (feat 자랑글) [35] 담담3871 21/12/30 3871
3405 허수는 존재하는가? [91] cheme5756 21/12/27 5756
3404 고양이 자랑글 (사진 대용량) [31] 건방진고양이2676 21/12/30 2676
3403 마법소녀물의 역사 (1) 70년대의 마법소녀 [8] 라쇼3253 21/12/26 3253
3402 경제복잡도지수, 그리고 국가경쟁력 [27] cheme4332 21/12/21 4332
3401 등산 그리고 일출 이야기(사진 많음 주의) [36] yeomyung1492 21/12/21 1492
3400 [역사] 삼성 반도체는 오락실이 있어 가능했다?! / 오락실의 역사 [13] Fig.13065 21/12/21 3065
3399 [NBA] 현대 농구의 역사적인 오늘 [27] 라울리스타4058 21/12/15 4058
3398 그들은 왜 대면예배를 포기하지 못하는가 (1) [75] 계층방정7446 21/12/13 7446
3397 위스키 도대체 너 몇 살이냐 [부제] Whiskey Odd-It-Say. 3rd Try [40] singularian3155 21/12/11 3155
3396 수컷 공작새 깃털의 진화 전략 [19] cheme4007 21/12/10 4007
3395 가볍게 쓰려다가 살짝 길어진 MCU 타임라인 풀어쓰기 [44] 은하관제4399 21/12/07 4399
3394 고인물들이 봉인구를 해제하면 무슨일이 벌어지는가? [66] 캬라10286 21/12/06 10286
3393 [역사] 북촌한옥마을은 100년도 안되었다?! / 한옥의 역사 [9] Fig.14285 21/12/06 428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