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은 백제 침공을 결정합니다. 6월 21일, 인천 앞바다 덕물도에서 소정방과 훗날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이 만났고, 7월 10일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만나자고 합의합니다. 신라군은 육지로 가서 7월 9일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를 치르죠. 계백은 열 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하루를 버팁니다.
한편 소정방의 당군은 바다로 진격, 백강(혹은 웅진강, 기벌포) 입구에서 상륙전을 펼칩니다. 이 때 백제군은 육지에서 상륙을 대비하고 있었고, 갯벌이 많아서 상륙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당군은 버들을 깔아서 길을 열었고, 상륙 후 백제군에 승리합니다. 이를 보면 상륙할 만한 곳을 백제군이 선점했고, 상륙이 어렵다 판단한 곳의 갯벌을 통해 상륙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상을 하고 준비한 건진 모르겠지만 허를 찌른 거죠. 이 때 전사한 백제군만 수천명이라 합니다. 당군의 피해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7월 10일, 당군은 사비성 근처에 도착했고 신라군은 11일에 합류합니다. 이 때 신라군이 하루 늦은 걸로 신라 장수 김문영을 처형하니 하는 협박을 했고, 김유신이 고구려 치기 전에 니들부터 치겠다면서 나서자 물러납니다.
이후 사비성 20~30리 밖에서 다시 한 번 전투가 벌어집니다. 양군이 합류한 후로 추측되고,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1만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다시 패했고, 사비성을 포위합니다. 뒤늦게야 협상이라도 해 보려고 신하들을 보내 음식을 보냈지만 거절당했고, 왕자와 좌평들이 나와 죄를 빌었지만(협상하려 햇지만) 역시 거부당합니다. 의자왕은 결국 사비성을 포기하게 되죠. 포위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의자왕이 탈출했을 때는 태자 부여효와 가까운 신하 정도만이었다고 합니다.
성 내에서는 둘째 부여태가 뜬금없이 왕을 자처하며 지키려 했고, 첫째(이자 태자였다 밀려난) 부여융에게 아들 문사가 항복을 제안합니다. 의자왕이 멀쩡히 있는데 둘째가 왕이라 하고, 문사가 항복하자고 한 이유는 "만약 적이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가 살 수 있을까요?"였다 합니다. 뭔가 안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부분이죠. 결국 이들이 성을 나가 항복하는 등 혼란해지면서 부여태도 저항을 포기, 항복하니 이 때가 7월 13일입니다.
그리고 5일 후인 7월 18일, 웅진성으로 갔던 의자왕과 부여효도 항복, 삼국의 한 축이었던 백제는 이 날로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됩니다. 나당연합군이 계획을 짠 지 한 달도 안 된 시간, 양군이 교전을 시작한 후로 겨우 10일만이었습니다.
의자왕의 타락과 황산벌 전투 위주로만 다뤄지다 보니 계백 외에는 저항이 없는 수준으로 알려지지만, 이 과정에서 보듯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 했고 사비성 앞에서도 요격이 있었습니다. 연합군에 별 타격은 못 주었지만요. 그래도 여기서 피해 규모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 멸망 과정에 대한 연구를 더 혼란에 빠뜨립니다.
황산벌에서 오천, 상륙 과정에서 수천, 사비성 앞에서 만여명이 전사합니다. 이러고도 잠깐이나마 농성을 생각할 정도의 병력이 남아 있었죠. 이걸 어느 정도 과장으로 보든 만 단위의 병력은 있었다고 봅니다. 보통 최대 5만까지 추정하구요. 이러면 머리가 아파지죠.
삼국사기에 나온 백제 멸망의 모습은 괴력난신을 믿지 않아야 할 삼국사기답지 않은 것들만 모여 있고, 신하들 간의 설전은 자세하지만 의문되는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설전 이외의 부분의 경과는 너무도 부족하죠. 전사자 수로 백제군의 규모를 추정해야 되는 것부터 말 다 했죠. -_-;
이래서 같은 걸로도 정말 다양한 추정을 할 수 있습니다. 위의 피해만 보고도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의자왕의 실정 때문에 주요 귀족이나 지방의 호응이 없어서 중앙군의 일부만 싸웠다 / 중앙군만으로 싸웠다 / 병력 규모 보면 의자왕의 실정은 핑계고 병력 동원은 잘 됐고 그냥 수도 공격과 쪽수에서 밀린 거다 / 이런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계백이 처자식을 죽인 건 어차피 당의 대군이 왔으니 내가 뭘 하든 망했다는 선견지명이었을까요? 아니면 싸울 병력도 있었고 백제부흥운동을 보면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것만은 아니었으니 지나친 (하지만 맞아떨어진) 비관주의였을까요? 혹은 그것 자체가 창작일까요?
기벌포를 막아야 된다는 성충, 흥수의 주장이 기각됐고, 당군이 기벌포를 이미 지났다 했는데 백제군은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럼 기록된 것과 달리 기벌포부터 막은 걸까요? 아니면 당군의 상륙지점은 보통 금강 하구로 비정되는 기벌포가 아닌 걸까요?
이런 식으로 다양한 의문이 나오는 거죠. 다른 전투들도 결과만 달랑 나오거나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건 백제가 멸망한 전투, 그것도 순식간에 멸망한 전투니만큼 보다 더 자세한 분석을 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부족한 사료에 상상력을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제가 연합군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로 파악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하들 간의 설전을 보면 양군이 합류했다는 것 자체는 파악했음은 알 수 있지만요. 하지만 그 위치가 애매하긴 합니다. 양군이 북진하여 고구려를 치기에도 좋은 위치였으니까요.
백제로 온다면 어디로 오는지도 문제였습니다. 당군이 충청도 북쪽, 당진-천안 쪽으로 상륙해서 같이 남하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신라군도 충청도 북쪽을 노리기보단 우회해서 사비성으로 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백제가 먼저 생각한 건 북쪽이었을 겁니다. 6월 21일에 합의한 후 백제군과 싸운 게 7월 9일이라면 약 20일, 백제의 수도를 공격하는 걸 생각하면 의외로 시간이 걸린 겁니다. 애초에 신라군이 남천정(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었죠. 이 과정에서 연합군의 기만술이 있었을 법한 부분입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나 증보문헌비고의 면주(당진)도경에는 소정방의 당군이 당진에 상륙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서가 아니라 자세한 게 나오진 않지만, 최소한 상륙 사실이 전설로나마 남아있다는 거죠. 이후 흑치상지가 임존성에서 백제부흥을운동을 시도했을 때 10일 만에 3만여명이 모였다 합니다. 임존성은 현재 충청남도 예산으로 비정됩니다. 백제 멸망 과정에서 사비성 북쪽에서도 상당한 병력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부분이죠.
남쪽도 마찬가집니다. 그동안의 전투로 경상도 쪽에서 많은 영토를 획득했고, 신라의 대군이 북쪽으로 갔다 해서 이들을 당장 올라오라 하긴 힘들었습니다. 거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라왕 김춘추도 직접 병력을 끌고 금돌성(상주)까지 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목적지가 사비성인 걸 알았을 때는 타 지역의 병력을 더 동원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중 신라 쪽으로 뺄 수 있는 게 5천명이었겠죠. 계백은 그렇게 죽을 길을 찾아갔고, 남은 주력은 농성과 당군 요격을 노린 거겠죠.
기록에는 백제가 막아야 할 곳, 당군이 상륙한 곳에 대한 말이 백강, 기벌포, 웅진강 등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보통 이를 금강으로 보고, 이후의 백강 전투나 기벌포 전투와 같은 지역으로 봅니다. 저도 이에 맞춰 서술하고 있구요. 다만 당군이 상륙했다는 웅진강의 경우 금강 하구보다는 안쪽이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강 하구에 상륙할 필요는 없고 사비성에서 가까우면서 신라군과 합류하기 쉬운 곳이었을 겁니다. 기벌포를 막지 말자고 주장한 신하들도 당군을 좁은 길로 들어오게 만들어서 한 방에 잡자고 주장했었구요. 이게 되려면 안쪽은 상륙이 어려워야 할 텐데, 상륙이 어려운 상황에서 버들을 깔아서 쉽게 상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 지도에서 사비성 남쪽, 수직으로 꺾이는 부분을 후보로 볼 수 있겠죠.
백제군의 목표는 상륙을 막고 신라군과의 합류를 막는 것, 하지만 신라군을 막은 계백보다도 먼저 뚫려 버립니다. 당군은 쉽게 상륙했고, 너무 많았죠. 백제군이 얼마나 잘 싸웠는지, 그러니까 당군의 피해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피해를 줬더라도 유의미할 정도는 아니었지 싶습니다.
+) 사비성을 포위할 때 소정방이 꺼리는 걸 김유신이 설득해서 진격했다고 하고 이걸로 당군의 피해가 의외로 크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긴 합니다만...
이렇게 보면 황산벌에서의 하루 빼고는 기습적으로 잘 이뤄진 작전이었고 충분히 충격을 받을 만 합니다. 하지만 의자왕의 대응이 그리 좋진 않았습니다. 미리 외교적인 방법을 써 볼 수 있었고 (잘 먹히진 않았겠지만) 적들이 나타났을 때 방어하기 좋은 웅진성으로 미리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포위되기 전에 한 번 싸워보자고 했지만 양측의 규모는 엄청나게 차이났을 것이고, 백제군의 사기도 높을 리 없었습니다. 결국 전사자만 1만여명이 되는 큰 피해만 봤죠. 싸우자, 항복하자, 도망가자, 성 내부에서 얼마나 많은 혼란이 있었을 지 궁금한 부분입니다. 결국 의자왕과 태자를 비롯한 극소수만 도망치고 나머지는 항복하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죠.
7월 13일, 부여융을 비롯한 이들이 사비성에서 항복하고 나옵니다. 김유신, 김법민을 비롯한 신라군에게는 정말 기쁜 상황이었죠. 김법민은 부여융을 꿀어앉힌 후에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억울하게 나의 누이를 죽여 옥중에 파묻었던 일이 나로 하여금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였더니, 오늘에야 너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
대야성에서 죽은 누이 고타소의 복수를 햇다는 것이죠. 아직 금돌성에 있었을 김춘추도 그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을 겁니다. 물론 아직 복수의 주 대상이 남아있었지만요. 그 복수도 얼마 기다릴 필요 없었죠.
적을 외통수에 몰아넣고도 왕을 놓쳤습니다. 연합군에게 좋기만 한 상황은 아니었죠. 당군은 속전속결을 원했습니다. 대군을 끌고 온 이상 장기전은 불리했고, 고구려를 쳐야 했으니까요. 당군이 그러니 신라 입장에서도 애가 탈 수밖에요. 거기다 하루라도 더 빨리 복수하고 싶었을텐데요.
웅진성은 고구려에 밀려난 후 도읍으로 삼은 곳입니다. 전쟁으로 밀려났으니 당연히 방어하기 좋은 곳으로 잡았겠죠. 계룡산과 금강으로 둘러쌓여 있어서 방어에 유리했고, 지방군이 합류한다면 장기전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의자왕이 어느 정도의 계획을 짜고 있었을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단 도망간 걸 보면 큰 계획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요. 그래도 버티자는 계획까진 하고 있었겠죠. 지휘부가 엉망이었던 백제부흥운동이 3년을 갔습니다. 만약 왕이 제대로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결과를 바꿨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보단 바뀐 게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추측도 불과 5일 만에 허사가 되죠.
"18일,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의 병사 등을 거느리고 웅진성으로부터 와서 항복하였다."
+) 방령은 백제의 지방장관직입니다. 5개의 방이 있고 웅진방이 북방이었죠.
허무한 마지막이었죠. 버텨봤자 안 됐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마지막 모습도 영 아니네... 뭐 이런 생각이 드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한 일족의 묘가 중국에서 발굴되면서 그 마지막이 다르게 그려지고 있죠.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이 때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왕보다 대장이 더 중요하게 나오는, 특이한 부분이죠. 삼국사기의 웅진방령과 동일인으로 볼 만 하구요. 신채호가 웅진의 수비대장이 의자왕을 잡아서 항복하게 했다 주장하긴 했지만, 사료들에서 정확히 나오진 않았기에 가능성 정도로만 남아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2006년, 중국에서 예식진이란 자의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이 인물과 동일인물로 여겨졌고, 비문의 내용에 따라 그가 의자왕을 배신하고 붙잡아서 당에 바쳤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 공이 김일제보다 더 하다고 하는데, 김일제는 흉노 출신으로 이민족 출신일 때 주로 비유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공이 뭔지 구체적으로 나오질 않았었죠. 그렇다면 의자왕을 잡은 공이 아닐까 한 건데... 2010년에 그의 일족들의 묘지명이 추가로 발굴되면서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웅진방령인 예식진(혹은 예식)과 그의 형 예군이 의자왕을 무력으로 잡아서 투항했다는 것이죠. 주동자는 예군이었다 합니다.
또한 웅진성이 있었던 공산성의 발굴 과정에서 건물들이 화재로 무너진 흔적 등이 발견되면서 이것이 반란의 흔적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죠.
예씨 일족은 5호 16국 시대에 중국에서 백제로 건너와 웅진에 정착합니다. 동성왕 때 백가가 왕을 시해했고, 무령왕이 그를 진압하게 되었죠. 그는 백씨를 진압하고 다른 귀족들을 끌어들였는데, 그 중에 예씨가 있었습니다. 이후 삼대가 좌평에 임명됐고, 예식진도 의자왕 때 웅진의 방령을 맡을 정도였다면 이 시기 백제의 주요 귀족 중 하나였을 거구요. 하지만, 그들의 손으로 백제를 끝내버렸죠. 그들 입장에서야 어차피 끝날 나라라 여겼을 것이고, 중국계였으니 거부감도 덜 했겠지만요.
+) 위의 백씨 등 백제의 주요 8개 귀족가문을 대성팔족이라 합니다.
이후 예씨는 웅진도독부에서 요직을 맡고 당의 신하로 살게 됩니다. 웅진도독부가 망한 이후에는 당나라로 가서 살았구요. 그리고 최근의 연구 결과로 매국노 명단에 이름을 추가로 됩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 적이 사비성을 포위하려 할 때
7월 29일, 김춘추가 사비성에 도착합니다. 642년 이후 오랫동안 품어 왔던 꿈을 드디어 이룬 것이죠. 8월 2일에는 잔치를 열었는데, 소정방과 김춘추는 위에 앉고 의자왕과 부여융은 아래에 앉게 해서 술을 따르게 했다고 합니다. 이걸 보고 백제의 신하들은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죠. 여기에 대야성에서 배신했던 검일과 모척을 잡아서 처형하고, 검일의 사지를 찢어 강물에 버렸다 합니다. 딸의 복수만을 위한 전쟁은 아니었지만, 얼마나 이를 갈며 기다려왔을지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 대야성 때 얘기했듯 김품석이 부하 검일의 아내를 빼앗았고, 분노한 검일이 모척과 함께 백제에 투항한 거였습니다. 김춘추가 이런 사정을 봐 줄 리는 없었지만요.
마음 같아서는 의자왕 등을 신라로 끌고 가고 싶었겠지만, 소정방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에게 바쳐야 할 거였으니까요. 그는 돌아가는 길에 의자왕과 융, 태, 효, 연 등 아들들, 대신과 장수 88명, 주민 12807명을 당나라로 끌고 갑니다. 그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전리품을 가지고 가는 것도 있겠지만, 백제의 구심점을 없애려는 것도 있었겠죠.
그 해 11월, 당 고종은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들을 보고 꾸짖은 후 '자비롭게' 용서해 줍니다. 당나라가 특별히 백제에 원수진 것은 없었고, 이후 백제를 통치하는 것도 생각해야 했을 테니까요. 의자왕은 그 며칠 후에 죽었다고 합니다.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는 낙양 북쪽 북망산에 묻힙니다. 삼국시대 손오의 마지막 황제 손호와 남북조시대 남진의 마지막 황제 진숙보의 옆에 묻혔다 합니다. 보시다시피 망국의 군주를 모아놓은 거죠. 당 고종은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백제 신하들의 조문을 허락해줍니다. 그의 아들 부여융은 웅진도독을 맡는 등 당나라에서 나름의 대우를 받았고, 그를 비롯한 다른 왕족들도 그런 듯 합니다.
의자왕과 백제의 멸망, 이 과정에서 확실하다 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의자왕의 상징이나 다름 없는 삼천궁녀는 근거가 전혀 없으니 안 하겠습니다.
"그 나라가 우덜 나란가? 느덜 부여씨 나라제."
하나는 655년을 전후로 큰 변화가 있었다는 것,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는 게 655년부터 쭉 이어지고, 대좌평인 사택지적이 654년에 은퇴하고, 죽습니다. 656년에는 성충이 감옥에 갇혀 죽었고, 흥수도 이 무렵 귀양간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657년에는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죠. 김유신은 임자라는 좌평과 내통해 백제의 정보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 역시 655년입니다.
일본서기에 642년으로 기록돼 있는 백제의 숙청은 655년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 때 죽었다는 사택지적이 정작 자신의 비문에는 654년에 은퇴한 걸로 돼 있거든요. 이 때 왕의 어머니(백제 무왕의 정비인 사택적덕의 딸로 추정됩니다)가 죽었고, 의자왕은 일본에 가 있던 아우 새상의 귀국을 막고, 조카 교기와 누이 4명, 내좌평 4명 등 40여명을 섬으로 추방합니다. 655년으로 보면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죠.
그의 태자는 보통 부여융으로 알려져 있는데, 삼국사기에만은 멸망 직전 태자가 부여효로 돼 있습니다. 태자까지 바꿔버린 친위쿠테타였을 수 있는 거죠. 백제 멸망 때의 판타지 같은 기록 중에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는 부분이 있는데, 어떤 은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백제부흥운동 부분에서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의자왕의 나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간접적으로나마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태자가 된 게 632년(무왕 33년)인데, 부여융의 묘지에는 그가 615년생이라 기록돼 있습니다. 10대 중반에 낳았어도 30살이 넘어서야 태자가 된 거죠.
그의 아버지 무왕은 위덕왕 이후 혜왕-법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왕이 되었습니다. 둘 다 재위기간은 1년 전후고 기록은 없지만 세력다툼 속에 이렇게 됐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익산 천도를 시도하면서 왕권 강화를 하려 했다는 설도 있죠. 신라와도 자주 전쟁을 했구요.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에는 왕비가 사택적의 딸로 기록돼 있습니다. 서동요의 선화공주가 부정되는 순간이었죠. 그래도 왕이 되기 전 다른 아내가 있었거나, 아예 다른 왕비가 있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의자왕의 태자 책봉이 늦은 것, 사택씨를 숙청한 것에서 의자왕이 친어머니가 따로 있었을 수도 있는 거죠. 물론 친자식이라 하더라도 권력을 위해 외척을 숙청했을 수도 있겠구요.
+) 이래저래 선화공주, 혹은 모티프가 될 사람이 있었고, 의자왕이 그 아들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신라를 공격한 무왕이나 의자왕이 어떤 생각에서 그랬을지 궁금해지죠. 이 부분이야 창작의 영역이겠죠.
"밖으로 곧은 신하를 버리고 안으로 요망한 계집을 믿어 오직 충성되고 어진 사람한테만 형벌이 미치며 아첨하고 간사한 사람이 먼저 총애와 신임을 받아" - 대당평백제국비명, 소정방
"백제가 스스로 망했다면서 임금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 무도하여 마음대로 국가의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일본서기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이 끌려갈 때 그의 왕비 이름을 '은고'라 하고 있고, 대부인과 동일인물로 봅니다. 소정방의 말은 달기부터 시작된, 망한 왕을 얘기할 때 나오는 전통적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일본서기에도 나오니 뭔가 있긴 했었다고 봐야됩니다. 저 은고라는 왕비가 실제로 권력을 휘둘렀든, 그녀의 외척을 중심으로 세력교체를 한 것이든 말이죠.
중국의 통일왕조나 고려, 조선에 비해 삼국시대는 왕권이 약했습니다. 왕과 귀족, 귀족들 간의 정쟁이 심심하면 일어났죠. 백제에서도 살해당하거나, 그런 의혹을 가진 왕들이 많습니다. 율령이나 불교를 받아들이고, 전쟁을 했니, 숙청을 했니, (의자왕의 문제로도 나오는) 토목공사를 했니 등을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로 해석합니다. 의자왕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같은 거죠. 대외적으로는 원수 신라를 공격해서 엄청난 성과를 내고, 대내적으로는 숙청으로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당대에는 성충과 흥수의 예를 들며 이것을 비판하고, 백제 멸망의 이유 중 하나로 삼습니다. 물론 그보다 큰 건 사치와 향락이라 하지만요. 현대에는 이 때문에 중앙이나 지방에서 반대파가 많았고, 적의 침공에도 제대로 손을 쓰지 못한 이유로 꼽습니다. 물론 이게 그냥 나당연합군의 명분 쌓기로 보기도 하죠.
이런 왕권강화를 위한 숙청의 결과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를 알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래도 그 직후에는, 많은 인재가 죽고 반감도 클만큼 부정적인 면이 더 컸겠죠. 그래도 이게 멸망과 연결될까 하기엔 부족합니다. 만약 기간이 더 길었고 기록이 더 자세했다면 그 해석을 더 쉽게 할 수 있을텐데 말이죠.
"우리 백제는 망해부렸어 줄을 잘못서갖고"
두번째로 확실한 건, 나당연합군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는 거겠죠.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대군이라 할 건 5만 정도입니다. 황산벌 때 신라가 쥐어짠 게 5만이고, 이것도 과장이 끼어 있을 수 있죠. 그런데 당군은 13만이고, 합치면 18만입니다. 5만에 패했다면 당연하고, 10만에 패했다 하더라도 방어하는 입장에서 잘못했구나 할 만한데, 이건 상상을 넘는 수죠.
20만에 가까운 대군과 단 며칠 사이에 결정된 운명, 이건 전쟁 동안 귀족들의 대응이 어땠는지를 판단하기 힘든 이유가 됩니다. 짧은 기간이었으니 하고 싶어도 못 했을 수 있고, 당군이 워낙에 대군이었던 것이 더 큰 이유일 수가 있습니다.
백제 멸망의 가장 큰 이유로 뽑는 건 다름 아닌 당의 말을 무시하고 신라를 공격한 겁니다. 옛날에야 이걸 징악의 개념으로 봤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이게 가장 크죠.
중국이 통일된 이후, 수나라와 당나라는 동쪽의 삼국에 본격적으로 개입합니다. 고구려는 계속 공격했고, 신라와 백제에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고구려를 칠 때 도우라고 요구하죠. 백제는 무왕 때까지는 신라처럼 고구려를 쳐 달라고 요구하지만, 의자왕 즉위 후에는 신라 공격 일변도로 변합니다. 무왕은 신라를 계속 공격하기는 하되 당이 막으면 그만뒀고, 의자왕도 초기에는 그랬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시하고, 고구려 공격에 도우라는 말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구겨를 공격하는 틈을 타서 신라를 공격했죠. 신라는 이걸 잘 노립니다. 당에 바짝 엎드리면서 자신들이 고구려를 칠 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어필하고, 백제가 공격해 올 때마다 당의 도움을 받습니다.
"왕이 병탄한 신라의 성은 의당 되돌려 주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신라에서 잡아간 백제의 포로들 역시 되돌려 주게 할 것이다. 왕이 조서에서 말한 대로 하지 않을 경우에는 왕과 결전을 치르기 위해 장차 거란과 여러 나라의 군사를 출동시켜 요수(遼水)를 건너 깊이 쳐들어가게 할 것이니, 왕은 깊이 생각해서 후회가 없도록 하라."
+) 공격하는 대상을 고구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백제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은 확실하겠죠.
648년부터 651년까지, 백제는 조공을 하지 않습니다. 651년에 간만에 조공을 하러 가니 당에서는 저렇게 말했죠. 의자왕으로서는 참 듣기 짜증나는 말이었겠죠. 그래도 다음 해에 다시 조공을 하긴 합니다만.
그 이후, 660년 나당연합군이 오기까지 양국간의 외교는 없었습니다. 어차피 신라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는 이상 사신을 보내봤자 오는 대답은 같았겠죠. 당 입장 역시 자기 편을 확실히 고른 이상 백제를 더 달랠 필요가 없었을 거구요.
성충은 감옥에서 죽기 전, 의자왕에게 마지막 글을 올립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헌데 그 내용은, 의자왕의 아이콘인 사치와 향락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뒤를 이어 나오는 것이 탄현과 기벌포죠. 백제 멸망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여기서 말하는 전쟁은 땅따먹기 수준이 아닙니다. 수도로 들어오는 마지막 길목, 신라로 따지면 바다로 오면 울산항 내지는 낙동강은 막고, 북으로 오면 포항까지는 막아야 나라가 멸망하지 않는다, 이 수준의 얘기입니다.
왕에게 간언하다 죽은 신하의 마지막 말이 내정이 아니라 이거였다는 것, 둘의 갈등에 이것이 컸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당이 반드시 쳐들어온다는 것 말입니다. 의자왕은 이걸 무시한 거죠. 성충만 그랬을 리는 없고, 조공을 하지 않은 걸 보면 당의 말을 듣자, 혹은 당을 경계하자는 쪽이 숙청당했을 겁니다.
수운이 중요했던 과거, 백강-기벌포로 비정되는 금강은 백제에게 정말 중요한 요지였을 겁니다. 하지만 기록상 거기에 외적이 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당과 백제는 고구려로 막혀 있었고, 공격도 쭉 고구려만 했습니다. 무왕 때부터 당이 계속 신라와 화친하라 했고 나중엔 협박 수준까지 갔지만, 그래도 수십년간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이 올까, 그것도 말도 안 될 정도의 대군을 끌고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겠죠. 이 점에서는 이해할 만한 부분도 있긴 합니다. 당군이 오지 않았다면, 그는 왕권 강화를 시도한, 어쩌면 신라를 멸망시키거나 그 직전까지 간 왕으로 남았을 수 있습니다. 왕권 강화책이 긍정적이었을지 부정적이었을지도 지금보단 더 명확히 얘기할 수 있었겠죠.
하지만 중국에 초강대국이 들어선 상황, 그것도 삼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에선 거기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국난의 군주, 멸망의 군주 중에 웬만한 왕보다 더 못했을까 하면 아니다 할 왕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임진왜란 없었으면 선조의 평가가 어땠겠어요? 의자왕도 그래요. 중국의 개입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할 때, 성충처럼 그것에 대해 확실히 경고하는 신하도 있는 상황, 그럼에도 의자왕은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고구려 얘기할 때 나오듯, 중국에 무조건 긴다는 게 생존에는 좋을지 몰라도 자주적이진 못하죠. 그래도 예상은 하고, 준비는 했어야죠. 양군이 사비성 앞으로 왔을 때의 모습만 봐도 의자왕의 대응은 좋지 못 했어요. 협상 시도는 너무 늦었고, 제대로 버티지도 못 했죠. 도망친 것도 태자 등 소수만 데리고 갈 정도로 늦은 상태였구요. 개로왕처럼 부끄러워서라도 마지막까지 싸우거나, 개로왕처럼 후계자라도 제대로 도망치게 해서 후일을 기약하게 했으면 역사의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었을 겁니다. 뭐 결국 이도저도 못 했죠.
+) 개로왕은 바둑 때문에 나라 망하게 했다고 욕 먹지만, 바로 그게 적힌 삼국사기만 봐도 의문이 들고, 특히 최후의 모습은 불쌍하기 그지 없습니다.
의자왕은 백제 망국의 군주로,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충신들을 벌 줘서 망한 걸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천궁녀로 대표되죠. 하지만 그건 폄하를 위한 과장이 의심될 수밖에 없고, 있었더라도 멸망에 큰 역할은 했을지 의문이 됩니다. 그보단 655년을 전후로 한 숙청,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면서 당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 결국 그것이 백제의 마지막 불꽃을, 정말 마지막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황제께서 백제 땅은 내게 준다캤는데, 이제 와가 당나라가 직접 식민통치한다 카면, 내는 뭐가 되는교?" "의자왕 그놈도 내 맘대로 몬하는구먼."
백제 멸망 후, 소정방은 백제를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5개의 도독부로 나눕니다. 백제의 현황을 37군, 200성, 76만호로 파악했고, 도독부 밑에 중국식으로 주와 현을 설치합니다. 당시 호는 평균 4~5명으로 봅니다. 이후 고구려 멸망 때 인구가 69만 호라 백제가 인구가 더 많았네? 하면서 여러 논의가 나오는 부분입니다. 아쉽지만 여기서 얘기하기엔 너무 길겠네요.
신라로서는 어이가 없을 겁니다. 약속이 시작부터 지켜지지 않은 거니까요. 이후 대야성으로 압독주를 옮긴 걸 보면 백제가 점령한 신라영토는 되찾은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백제 땅을 주기는커녕, 의자왕조차 당으로 보내줘야 했습니다. 신라가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김유신의 열전에는 당이 신라를 칠 계획이 있었고, 백제군으로 변장해서 당군을 공격하자고 했다가 김춘추가 거부했다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열전이니만큼 믿기는 어렵죠. 고구려를 치는 게 남았으니 당이 그걸로 달랬을 순 있겠네요.
소정방은 9월 3일에 철수합니다. 고구려 침공이 이미 계획돼 있었고, 소정방의 역할도 이미 정해져 있었죠. 백제를 잡았으니 이제 신라군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옛 백제 땅은 당군 1만과 신라군 7천이 남아서 다스리면서, 혹시 모를 저항을 진압할 계획이었습니다.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적의 수도를 노려서 왕을 잡았고, 빠르게 치고 목적을 달성해서 빠르게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그 후의 상황은 예상 이상이었습니다. 백제의 잔당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 저항도 생각보다 빨랐습니다. 소정방이 백제를 떠나지 않은 8월에 이미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되었죠.
마지막으로 확실한 건, 백제의 지방세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는 것이죠. 나당연합군은 지방세력들이 그대로 복종하길 원했겠지만, 그들의 생각보다 더 거센 저항을 받게 됩니다. 그것도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 말이죠.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공식적으로 멸망합니다. 하지만, 백제의 역사는 아직 끝이 아니었습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7-31 12:55)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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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바로 가야죠. 아 판타지 같은 기록은 의자왕 때 얘기요. 다를 때도 이런 기록이 섞여있긴 한데 백제 멸망 때는 정도가 좀 심하죠 '-'
655년 여름 5월, 붉은 색의 말이 북악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 불당을 울면서 돌아다니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659년 19년(서기 659) 봄 2월, 여우떼가 궁궐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5월, 왕도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었다.
가을 8월,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울었는데 마치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으며, 밤에는 궁궐 남쪽 길에서 귀신이 곡을 하였다.
660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쪽 바닷가에서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어졌다.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여들었다. 왕도의 시장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에 넘어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두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동쪽과 서쪽 공중에서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으로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왕도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서 짖기도 하고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에 들어와서 큰소리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 자쯤 깊이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쓰여 있었다.
임금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게 되는 것이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이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기뻐하였다.
드릴 건 추천뿐. pgr 그만 두신 줄 알았어요. 허허헛.
덕택에 예식진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알게되었습니다. 진짜 몰랐어요. 655년 이야기도 그렇고 많이 배워갑니다. 개인적으로는 요 근래 역사책을 읽지않아 속은 편한데 이렇게 시대에 뒤쳐지며 후달리는 지식을 느낄때마다 가끔씩 역사책을 파고싶은 미칠듯한 욕구를 느낀답니다. 흑흑.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계백의 결사대는 나중 임진왜란의 신립의 부대처럼 급한 김에 긁어모아 중요한 교통로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중앙군 일부라고 봅니다. 삼국이 뻔질나게 싸우던 시대라 상비군이 오천 밖에 없을리가 없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전교생이 4천명이었는데...) 그 상비군은 대개 신라의 동부전선이나 고구려 상대하는 북부전선에 각 성들에 있었을테고 그 성들은 독립적인 성주들이 지배하고 있었을겁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못한, 아마도 당하는 당시까지도 국가 존망의 전쟁일지 모르는 상태에서 독립적인 성주들이 자기 근거지 비워두고 중앙으로 달려오는 건 어려웠을 겁니다. 그전까지 신라와 백제의 전쟁 양상도 땅따먹기였으니 갑작스레 수도와 왕만 노리는 전략을 더욱 더 예상하기 힘들었겠죠.
백제의 부흥운동이 거셌던것 역시 마찬가지 이유였을 겁니다. 애초 고대 왕국이 헌법에 유지되는게 아니라 핏줄에 의해 정통성이 결정되는데 남아있는 영토가 있고 군사가 있고 무엇보다 왕의 혈통이 남아있으니 당시 사람들은 백제가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개로왕 때처럼 수도 옮기고 다시 시작한다는 느낌 정도 였겠죠.
감사합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게 좀 자세히 남아있었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결국 남은 건 분석과 상상력으로 채울 수밖에 없죠.
애초에 당이 쳐들어왔다고 바로 멸망시키러 왔을까, 하는 사람도 그리 많진 않았겠죠. 그 설마, 설마가 합쳐지긴 했을 겁니다. 개로왕 때도 망하진 않았으니까요. 확실히 개로왕 때가 비교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느 사이트에서 읽었던 글을 기억하자면, 신라도 저 당시 동원한 5만이 한산주나 충주, 대야성 인근의 남부전선에서 소집한 병력이 아니라 수도인 경주 일대의 장정을 총동원하여 긁어모은 사실상 결전병력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예비 장교층인 화랑들까지 대거 동원되었다고도 하고.
당시 신라가 백제, 고구려와의 여러 전선에서 따로 병력을 빼지 않았다고 하면 백제 역시 신라와 접경하고 있는 여러 지역의 병력을 마주 빼기 힘들었겠죠. 양국 모두 수도 주변의 중앙군 + 예비군을 총동원하여 전쟁에 나섰고, 백제는 그 병력으로 신라와 당 양군을 상대해야 한 터라 치명적인 병력부족상태에 이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백제의 마지막과 이후 수도가 털리면서도 줄기차게 항전하던 고려, 조선시기의 여러 전쟁을 비교하면 확실히 고대와 중,근세의 차이. 특히 행정력이나 중앙집권화의 차이가 크게 느껴지기는 하네요.
신라군의 구성에 대해서도 말이 많죠. 어느 쪽이든 최대한 병력을 쥐어짠 건 맞을 거구요. 신라군 5만 만으로도 백제에게는 크나큰 위험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병력을 한 데 모으기도 힘들었을 거고...
아무래도 중앙집권이 약한 나라에선 별 수 없죠. 심할 경우 지방은 다른 나라 수준이니
조선 시대까지도 해협을 건너는건 불가능에 가까워서 중국을 갈때 근해를 따라서 요동반도 해안길을 타고 갔는데요 그래도 목숨이 위험해서 대신들이 서로 안갈려고 했었습니다. 근해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었으니 고구려가 건재한 이상 당시 조선 기술로는 무려 13만의 병력이 해협을 건너 백제를 공격한다는건 사실 당시 시대상으로는 정신나간 소리로 밖에 안들렸을것 같아요
성충이나 흥수의 말이 신빙성 있게 다가오기 힘들것 같아요 설사 오더라도 그 만한 대병력이 오기 보다는 고작 1~2만 정도 수준이 아니였을까 생각 합니다.
실제로 의직을 보내서 요격을 시도 하기도 하구요
몽골이 일본 공략 준비 하다가 2번이나 수만 병력이 태풍에 휩쓸려 갔던 그 행운이 백제에게는 없었네요 생목숨 13만은 수장 시킬 각오로 한번에 드랍시킨 당나라도 놀라울 정도 입니다. 그렇게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싶었었나...
몽골의 일본원정은 쿠빌라이의 의도된 한족청소정책이라는 이야기도 돌 정도로(강남군과 고려-몽골군이 따로 출진합니다.) 대체 왜 태풍시즌에 크지도 않은 배들까지 사람으로 채워 둥둥 띄워 보냈는가 싶어서...
여하튼 말씀대로 당시 시대상으로는 정신나간 소리로 들을만 한 것 같아요. 고구려 공략 때에는 수군을 동원한 일이 있긴 하지만 저 정도 수준은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게 의자왕을 변호할 수 있는 부분이죠. 확실히 크나큰 생각의 변화가 필요하니까요.
그래도 수나라 때부터 대동강에 상륙했고, 당나라도 지속적으로 수군을 운용한 것도 생각해 봐야 될 부분이죠.
당의 고구려에 대한 집착은... 정말 지나칠 정도죠. -_-; 고구려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발해를 생각해 보면 그걸 성공이라 봐야 할 지도 의문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