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실, 이제는 코퍼 사무라이와 동화된 채 그녀가 귀요미라고 별명을 붙인 클레이 고렘 세 명
을 이끄는 워밴드 리더가 던전에 들어섰다.
코퍼 사무라이 은실이 맨 처음 느낀 것은 강렬한 먼지와 곰팡이 냄새였다. 던전 안에는 오랫
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탓인지 바닥에 1센티미터 두께의 먼지가 쌓였고,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습기 탓에 마법 광원이 닿지 않는 곳이나 구석진 벽에는 곰팡이가 외계생명체 같은
기괴한 모습을 자랑하며 듬뿍 피어 있었다.
코퍼 사무라이 은실이 머리 위를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건강에 안 좋을 것 같아요.”
*
조력자이자 관찰자인 수성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방금 저한테 말 건 것 맞죠.”
“네? 아, 네.”
“그럼 왜 옆에 있는 사람한테 머리를 쳐들고 말을 걸어요. 건강에 안 좋다는 소린 또 뭐예
요.”
은실은 자신이 상상력이 뛰어나 잘 만들었거나 재미난 세계에 곧잘 빠지며, 한번 빠지면 계
속 그런 상상과 몰입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내내 금세 들켜서 놀림받았던 기억이 선명한데, 간신히 승부욕을 돋아 공
부와 업무에 성공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다시 과거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 수 없었다.
은실은 우물쭈물하다가 궁색한 변명을 댔다.
“갑자기 목이 결리네요. 어제 잘못 잤나 봐요. 그건 그렇고 여기 공기가 안 좋아서요. 목이
간질간질해요.”
“아, 그런가요. 물 줄까요?”
“네.”
수성은 가방에 걸어놓았던 물통을 건넸다. 은실은 대충 한 모금 머금으면서 앞에 앉아 있는
상대를 훔쳐보았다.
디앤디 미니어처 공식 토너먼트 첫 출전 상대의 이름은 마이크. 그는 백인 남성이며 군인으
로 키가 190대에 몸무게는 100킬로그램이 훨씬 넘어 보이는 덩치였다. 면도한 듯한 민대머
리까지 감안한다면 우격다짐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단언하기 쉬운 인상이었
다. 하지만 지적으로 보이는 금테 둥그런 안경 너머, 교활해 보이는 푸른 눈은 꼭 그러라고,
그러고 실수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마이크는 아내(필리핀 인이라는 소릴 들었다.)가 천천히 앞뒤로 끄는 유모차 속 자신의 한 살
배기 아들과 놀고 있다가 톰이 시작하라고 외치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잘 부탁yo."
그는 어눌한 한국어와 함께 크고 손등과 팔뚝에 털 슝슝 난 손을 내밀었다. 1.5센티미터 곱
하기 1.5센티 격자가 가득한, 맵이라 불리우는 1미터 남짓한 회색 빛 종이 지도 위에 타일이
라고 부르는 지형지물 종이 7개를 놓고, 쌍방 가장 거리가 먼 대각선 방향의 스타트 존 타일
위에 서로의 전투 유닛을 놓은 전장 위로, 토너먼트 시작 전 예의가 행해지는 순간이었다.
은실은 잡고 나니 쏙 들어가는, 그의 1/4밖에 안 되는 작은 손으로 악수한 뒤 자리에 앉았다.
수성이 마치 날씨 이야기인 듯 최대한 평범하게, 하지만 어쩐지 은밀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속삭였다.
“조심해요. 은지 씨도 느꼈겠지만 마이크는 쉬운 상대가 아니에요. 별명도 고약하고요.”
“별명이 뭔데요?”
“비열 마이크.”
*
코퍼 사무라이 은실은 다시 던전으로 되돌아왔다. 귀요미 세 명은 모아이 상을 닮은 무뚝뚝한
얼굴로 그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실은 우선 배운 대로 보통 6면밖에 없는 주사위와
달리 14면이나 더 있는 20면체 주사위를 굴려 우선권 굴림에서 높은 수를 획득했다. 6 차이로
마이크를 이겼다. 규칙대로 은실은 두 개의 유닛을 움직였다. 선두의 두 귀요미가 먼지를 풀
풀 풍기며, 느린 발걸음으로 여덟 칸을 움직였다.
남자는 등으로 말한다는데 한 명당 네 칸씩 차지할 정도로 크고, 근육질이고, 진흙을 굳혀 만
든 재질이어서 딱딱하고 믿음직스러운 뒷모습에 코퍼 사무라이 은실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하아, 역시 귀요미는 귀여워. 최고야.’
귀요미성애자 은실이 황홀해할 무렵 저 멀리서 심상치 않은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곧 적 워밴
드 리더가 처음으로 내보낸 두 마리의 유닛이 시야에 나타났다. 사람 크기의 스몰 화이트 드래
곤이었다. 스몰 화이트 드래곤들은 코퍼 사무라이가 활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엄청
난 속도로 날더니 복잡하게 얽혀 있는 중앙 미로로 쏙 들어가 버렸다.
머리 위에서 조언자 “근육 수염수염”이 속삭였다.
“조심하시오. 저것들은 원추형 범위로 냉기를 쏠 수 있소. 아마도 지휘관인 당신을 노릴 것이
오.”
“알겠어요.”
은실은 일본도를 든 손을 드래곤의 형상을 일본풍에 녹인 투구 턱끈 앞까지 올려 굳게 주먹을
쥐었다. 이길 것이다. 꼭 보란 듯이 이겨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워밴드 리더인지, 훌륭한 여성
지휘관인지 보여줄 생각이었다.
은실은 십자형 진을 고안하고 이를 행했다. 전방에 귀요미 셋으로 진흙 벽을 세운 뒤 그 뒤 십
자가의 한 축이 되는 자리에 코퍼 사무라이 은실이 자리했다. 대각선, 그러니까 적 스몰 화이트
드래곤들이 숨은 자리 쪽으로는 이동력을 추가로 소모시키는 자갈이 쫙 깔려 있어서 다음 라운
드에 적 워밴드 리더가 선공을 잡아도 속도를 늦추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자리요, 진
형이었다.
적의 다음 유닛은 스몰 화이트 드래곤들 뒤로 붙었다. 은실은 흥분해서 그게 무언지 확인도 안
하고 라운드 끝났으면 얼른 20면체 주사위를 굴리자고 말했다.
은실 17, 마이크 8.
코퍼 사무라이 은실이 가진 커맨더 능력은 2니까 19. 마이크가 가진 아이 오브 그룸시의 커맨
더 능력은 1이니까 9.
“이번에도 선공이네!”
은실은 골목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귀요미 중 하나를 집어 여덟 칸을 보냈다. 마지막 칸에 닿을
무렵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은실이 물었다.
“왜요?”
“그러면 곤란해질 가능성이 있소.”
“왜요. 설명을 해 봐요.”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반대쪽, 아까까지 적 워밴드 리더와 적 워밴드가 있었던 구석에서
시작된 어두운 악의 그림자가 온 던전 천장을 메우더니 크고 붉은 눈을 부라리며 은실을 쳐다
보았던 것이다. 이에 놀란 코퍼 사무라이 은실은 빠른 속도로 현실로 끌려나왔다.
*
마이크가 벌떡 일어서서 수성과 은실을 번갈아 바라보며 영어로 퍼부었다. 워낙 빠른 속도이고
영어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은실은 불만에 찬 그의 목소리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목소리의
크기도 크기거니와 큰 몸집을 가진 낯선 백인이 허우적거리는 제스처와 함께 항의하는 모습은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이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은실이 물었다.
“뭐, 뭐래요?”
“쉽게 말해서 자신은 한 명이랑 싸우고 싶지, 두 명이랑 싸우고 싶지 않대요.”
“그게 무슨 소리죠?”
“원래 토너먼트는 혼자서 싸워야 해요. 누가 옆에서 충고를 해 주면 안 되죠. 제가 그래서 플레
이 전 룰 알려줘도 되냐고 물어봤거든요. 그땐 흔쾌히 그러라고 그러더니 지금은 반칙이래요.
자신이 불리할 수도 있으니 입 다물라는군요.”
“역시 별명답군요.”
“네. 기본 룰만 알려주래요. 은지 씨가 이번 턴에 크게 당할 것 같아서 미리 말을 해 주려고 했
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미안해요.”
*
코퍼 사무라이는 곧바로 왜 먼저 움직이면 손해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양쪽 통로를 점거하려고
움직인 귀요미들 사이의 간격으로 화이트 드래곤들이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자갈밭에서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마치 화살처럼, 거대한 악몽처럼 그대로 3순번의 귀요미 바로 앞까지 도
달했다.
은실이 외쳤다.
“디피컬트 터레인은 이동력 2를 먹는다면서요? 왜 그냥 오죠?”
“저 악룡들은 플라이 속성이 있어서 지상의 장애물에 구애를 받지 않소.”
머리 위로 뜬 놈이 입을 쩍 벌렸다. 그 모습은 거대한 귀요미 등 뒤에 있는 은실도 똑똑히 볼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미리 말 좀 해 주지 그랬어요!”
“난 그대가 아는 줄 알았소. 척 보기에도 날개 달렸잖소.”
그거랑 게임이랑 능력치가 같다고 바로 생각하면 내가 초보냐고 따지려는데 드디어 스몰 화이
트 드래곤이 냉기를 뿜었다. 아까 들은 대로 주변의 공기가 모조리 얼어붙으면서 에어컨에서
바로 나오는 바람을 천 배 차갑게 만든 것 같은 폭풍이 귀요미와 코퍼 사무라이 은실을 뒤덮었
다.
“어머!”
그녀의 구리색 갑옷이 바로 하얗게 물들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몸을 움츠려 냉풍을 피하려 들었
지만 실패했다. 적이 준 10 데미지 탓에 은실의 HP가 55에서 45로 줄었다. 동공과 눈꺼풀, 볼
등의 안면과 주위를 가득 얼린 냉기 속에서 덜덜 떨고 있을 때 두 번째 스몰 화이트 드래곤의
콜드 브레스 웨폰 공격이 이어졌다. 첫 번째 놈 바로 뒤에서 터진 냉기 역시 원추형을 이루며
방사되어 귀요미와 은실을 덮쳤다.
은실은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거듭된 통증 속에 고통에 찬, 누가 들어도 딱하게 여길 만
한 길고 비통한 신음을 내질렀다.
“어머, 어머!”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12-31 02:32)
* 관리사유 : 연재글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