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의 말대로 별장은 쿠페를 타고 시내에서 한 시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거리는 X
가 언급한 것과 같았으나 주위 환경은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다. 일부러 인적 드문 곳에 만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별장은 다리가 놓인 강을 지난 뒤 꼬불거리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올
라간 뒤에야 나타났다.
약간 당황해서 제자리에 서 있는 김강 수사반장을 X가 앞질러 먼저 들어가며 말했다.
“저녁 드셔야죠? 제가 요리할 동안 뭐라도 마시고 계세요.”
“요리까지?”
“얼마 안 걸려요.”
별장은 꽤 작아 가운데에 돌출한 방 하나를 제외한다면 원룸 같았다. 반장은 방구석 한편에서
지붕 닿는 데까지 벽 전부를 선반으로 만든 작은 홈 바를 발견하고 입맛을 다셨으나 이내 외
면했다.
요리는 진짜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요, 드세요.”
앞서 주방에서 향기로 존재를 과시하던 웰던으로 구워진 스테이크에 으깬 감자, 데친 아스파
라거스가 든 접시가 앞에 놓였다.
“고맙소.”
반장은 시원스레 대답하고서도 새하얀 식탁보가 인상적인 식탁 너머의 상대가 스테이크를 잘
라 먼저 먹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입을 댄
물과 샐러드를 전전한 다음 김강 반장은 자신이 이 작고 호젓한 산장에 어떻게 와서 상대와
함께 있는지 되짚어 보았다.
*
강은 오늘처럼 날씨 좋은 주말에도 생전처음 접하는 사람들과 취미를 잔뜩 접해야 하는 막내
정은실이 고생하는 게 안타까워 313명의 용의자 중 자기 몫보다 많은 열댓 명을 취조한 다음
서를 나서는 길이었다. 그래도 좀 미진한 감이 들길래 집에 갈까 아님 어차피 기다릴 이 없는
이혼남, 간단히 저녁 먹고 서류 작업이나 더 할까 고민하는데 근처에서 어떤 이가 말을 걸었
다.
“안녕하세요, 반장님.”
경찰서 근처 차도에 대고 비상등을 켠 투 도어 쿠페의 문이 열리더니 X가 내려 정중히 인사했
다. X는 제2용의자 그룹으로써,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313명 외에 완광남의 지인 중 다툼이
있었거나 그를 마뜩찮아 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사진 한 번 보고 통화 한 번 한 사이지
만 워낙 특징적으로 생긴 사람이라 강은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안녕하시오. X 아니오. 여긴 웬일이요.”
“제가 근간에 해외 나갈 일이 있어서요. 일정에 차질이 있으면 안 되겠기에 먼저 조사를 받을
수 있나 알아보러 왔어요.”
“난 들은 적 없는데. 직원들에게 했다고 해도 직원들이 내게 말을 해 줬을 테고.”
“직접 뵙고 접수하려고요.”
보통 사람들이 보일 만한 반응은 아니어서 반장은 약간 긴장했다. 살인범이 수사를 돕는다는
핑계로 경찰서를 드나들거나 경찰관과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일은 은근히 흔한 축에 속
했다.
반장은 X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물었다.
“전화부터 하고 오지 그랬소. 그것도 그렇고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왜 여기에 서 있었소?”
X가 웃었다.
“막 주차하려던 참이었어요. 반장님을 마주친 건 우연이죠.”
“난 어떻게 알아보았고?”
“요새 가장 유명하신 거 모르세요? 신문에도, 텔레비전에도 나오셔서 알아보기 쉽더라고요.”
반장은 그 또는 그녀의 얼굴과 눈빛, 눈동자의 움직임을 세밀히 살피던 눈을 거두었다. 별다
른 게 없었다. 30년 경력의 수사반장의 눈에 별다른 게 걸리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정말로 결
백하거나 아님 연기력이 엄청나게 뛰어난 자였다.
“어딜 가시는 길인가 봐요.”
“집에 가오.”
“그렇군요. 반장님, 제가 따로 말씀 드리고 싶은 게 여럿 있어요. 시간 되세요?”
“뭘 말이오.”
“광남이가 죽어서 취한 자세 있잖아요. 그게 예사 자세가 아니에요. 충분히 용의자를 추릴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죠. 그것 말고도 제가 아는 실마리가 몇 개 더 있어요.”
“……대체 어떻게.”
담담하게 말하려다가 목소리가 좀 커졌다. 주위를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힐끔거리다가 제 갈
길을 갔다.
“대체 어떻게 알았소? 그래서 그 말하려는데 따로 말씀 드리고 싶다는 얘기는 경찰서를 들어
가고 싶지 않다는 소리요?”
“일테면 그렇죠.”
“그 정도의 발언으로도 24시간 구류 후 심문이 가능하다는 사실 아시오?”
“그럼 전 변호사 올 때까지 묵비권을 행사할 거고, 변호사가 풀어준 다음 단서는 평생 바이바
이죠.”
“건방지시군.”
X는 고개를 저었다.
“광남이 사랑받지 못하는 스타일이라는 점은 조사해 보셔서 아시죠? 저도 걜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진범이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알 게 뭐냐 뭐 그런 느낌이에요. 저한테 억지로 얻으려
고 들지 마세요.”
반장이 혀를 차며 물었다.
“그럼 어디서 얘기하자는 겐가?”
*
대충 먹다 말고 반장이 물었다.
“피살자의 자세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X는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대답했다.
“일본 만화에 『내일의 조』란 작품이 있어요. 고아원 출신의 권투 선수가 열심히 살다가
마지막에 링 위에서 죽어요. 광남이의 자세는 주인공의 마지막 자세와 같아요.”
“만화라고?”
“네.”
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살자를 살해 후 특정 자세로 만들었다면 분명 자신만의 해석에 따
른 뚜렷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용의자가 많은 가운데 X의 이야기로 하나라도 거를 수 있는
망이 생긴 셈이었다.
“사망자의 마지막 자세는 어떻게 알았소.”
“유성 씨 있죠.”
가죽점퍼를 입은 뚱땡이 형사의 본명이었다.
“친구 삼촌이에요. 그리고 입이”
“싸지. 다른 얘긴?”
“모임 참가 명단에 있던 사람 중 딱 한 명이 거기 참석 안 했어요.”
X는 잠시 양해를 구하더니 홈 바에서 꼬냑 한 병을 꺼내왔다. 반장은 속으로 무척 놀랐다. 아
까 잠시 살펴볼 때 가장 마시고 싶어서 눈을 떼기가 힘들던 술이었다.
점성이 약간 있는 진한 붉은 액체가 컵에 출렁이며 담겼다. 본인 잔을 채운 X가 물었다.
“전 술 없으면 저녁 먹을 때 허전하더라고요. 한잔 드려요?”
“아니.”
술!
술술!
술술술!
“제가 와인을 좋아하다가 꼬냑으로 넘어왔는데요. 포도의 정수를 먹는 것 같은 그 감각이 좋
아요.”
반장도 충분히 동감하는 바였지만 이미 X의 말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 공간 안에는
그와 술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금기를 잘 지켰다 싶었는데 저주가, 아니 마법이 시작되었
다. 좀 전의 굳은 결심은 완전히 사라졌다. 한잔이면 괜찮겠지, 이것만 마시고 절대로 안 마
실 수 있겠다 싶어 반장은 망설임을 끝내고 얼른 청해 그대로 삼켰다.
아아, 술!
목구멍부터 시작한 찌르르한 취기는 식도를 타더니 위장에서 제자리를 찾았다. 비단을 삼킨
듯한 부드러운 첫 식감이 곳곳에서 자극을 던지며 행복을 노래했다. 지상에는 없는, 그래서
더욱 좇고 찾아야 하는 그런 행복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가혹한 현실을 못 이겨 금세 없어졌
다. 밝고 따뜻한 불이 들어왔던 위장과 식도, 목구멍은 금세 어둡고 칙칙해졌다.
“한 잔 더.”
“한 잔 더.”
반장이 10분 안에 한 병을 다 비우는 동안 X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취했음에도 취하지 않은 척하는 취객 특유의 뻣뻣한 목소리로 반장이 한 병 더 가져오
라고 시키자 그 또는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일그러졌다.
“아직도 모자라세요?”
“한 병 더.”
X는 꼬냑을 가져오려다 이미 주종에 상관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냉동고에 재워 놓았던 보드
카를 꺼냈다. 아무래도 독극물의 맛을 가리려면 얼음이 낀 술이 유리했다. 서서히 시작되는
술주정을 등 뒤로 들으며 X는 주사기 형태로 미리 준비해 놓았던 비소 용액을 뚜껑을 딴 보드
카 안에 쏟아 부었다.
“자요.”
“하라쇼!”
반장은 뜻 없는 단어와 얘길 지껄이며 병째 술을 비웠다. 보드카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한 5
분 정도? 지금까지 20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의 비소를 마신 반장이 말했다.
“딱 한 병만 더.”
X가 근처 있던 책꽂이에서 『사인(死因)1000선』이란 책을 꺼내 펼쳤다. X는 책을 판 속에 숨
겨놓았던 22구경 권총을 꺼내 반장의 가슴에 대고 쏘았다. 한 탄창 분의 총알을 전부 맞은 반
장이 마치 크게 기지개를 펴듯 의자의 등받이 부분에 몸을 걸쳤다.
“휴.”
X가 침묵과 호젓함을 즐기며 시체를 처리할 다음 방법을 생각하는데 반장이 끙 하며 깨어나서
의자에 제대로 앉으려고 애썼다.
“머리가…… 숙취가 벌써…….”
가슴으로 피를 뿜으면서 반장은 머리를 감싸며 일어섰다. X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만…… 가보겠소. 술 잘…….”
반장은 문벽에 손을 짚고 문 여는 시늉을 했다. 그 다음 한 걸음 더 걷고, 당연한 결과로 벽에
세게 부딪혔다.
“아이고야. 아이고, 머리야…….”
어찌어찌 문을 열어 그가 나갔다. 문턱에서 발이 걸린 그가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X는
마법이 풀린 것마냥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보았다. 취해서 그랬는지, 아님 비소
를 많이 먹어서 그랬는지, 아님 총탄을 잔뜩 맞아서 그랬는지 구르던 반장은 전혀 일어서지
못한 채 가속도가 붙었다. 가뜩이나 비탈길로 이뤄진 비포장도로에서 반장은 <동킹콩>의 나
무통처럼, <소닉>의 소닉처럼 아래로 계속 뒹굴었다.
반장의 기묘한 여행은 강가로 나 있는 벼랑에서 끝났다. 벼랑에서 붕 뜬 반장은 헝겊인형처럼
펄럭거리는 자세로 긴 포물선을 그리더니 강에 큰 소리를 내며 빠졌다.
내려다보던 X가 한참 후 중얼거렸다.
“뭐야.”
* Toby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3-12-31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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