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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4/06/28 15:52:59 |
Name |
라울리스타 |
File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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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분석] 2002년의 홍명보는 어디로 갔을까. |
2000년 12월.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거스 히딩크 감독의 첫 일정은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 관람이었다. 대표팀은 안정환의 판타스틱한 토킥으로 빠르게 선취점을 뽑아내었지만, 이내 퇴장으로 인해 10명이서 싸워야 했고, 70분간 일본에게 수 차례 찬스를 내주며 간신히 1-1로 비겼다. 경기력이 밀린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의 스루패스에 뒷 공간을 계속해서 내줬기 때문이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당시 한국 대표팀의 주력 포메이션은 세계 축구계에선 이미 사장된지 한참 된 스위퍼(최종 수비수)-스토퍼를 쓰는 3-5-2였다. 수비라인보다 좀 더 뒤에 위치한 스위퍼의 존재로 인해 일본의 2선 공격수들은 오프사이드의 부담없이 자유롭게 뒷 공간을 드나들었다. 히딩크는 자서전 '마이웨이'에서 이 경기를 '엉망진창'이라 표현했다.
이후 히딩크는 바로 국가대표팀에 플랫 4백을 가동하겠다고 선언하고, 2001년 1월 홍콩 칼스버그컵 대회부터 4-4-2를 시험하기 시작한다. 밀레니엄이 넘어서까지 세계 축구의 대세인 플랫 4백을 생소해 할 정도로 한국 선수들이 원시인들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이미 前 부천 SK 감독인 니폼니시를 필두로 K리그에도 4백 시스템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럼 유독 대표팀은 왜 3백을 고집하였는가 하면, 그것은 당시 국가대표팀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홍명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홍명보는 스위퍼란 특수한 포지션에 특화된 선수였다. 상대 공격수들과 직접 몸싸움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막강한 피지컬을 보유해야 하는 현대축구의 센터백들과는 달리 그의 호리호리한 체격은 유럽의 거구들을 감당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에겐 여타 한국 선수들에게 특히나 부족했던 경기를 전체를 읽는 넓은 시야와 정확한 롱패스 능력이 있었으며, 스토퍼들을 리드하는 카리스마와 리더쉽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상대 공격수의 피지컬적인 방해를 받지 않고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홍명보는 좌-우 스토퍼에게 정확한 커맨드를 내리고, 스토퍼의 대인방어가 뚫렸을 경우 환상적인 커버플레이를 보여주었다. 또한 정확한 킥력으로 한 번에 공격진까지 연결하는 롱패스와 기습적인 중거리 슈팅도 일품이었다.
미국 월드컵을 비롯하여 여러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홍명보의 활약 때문에, 어떤 감독이 국가대표를 맡아도, 홍명보는 반드시 일순위로 뽑혀야 하는 존재였다. 감독이 바뀌어도, 전술이 바뀌어도 수비진의 3백 스위퍼 시스템만큼은 절대 바뀌지 않았다. 가장 아쉬운 월드컵이었던 94년 미국 월드컵의 강렬한 활약 때문이었을까? 이상하게 감독들도, 선수들도, 협회도, 국민들도 홍명보는 대체불가한 선수라 믿었고, 세계가 플랫 4백으로 대세가 바뀌어도 우리는 스위퍼 시스템이 최선인 줄 알았던 시간이 무려 10년이었다. 홍명보가 빠진 대표팀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러나 히딩크는 뒷 공간을 훤히 내주는 구식 전술로는 국제 대회의 경쟁력이 없음을 깨닫고, 플랫 4백을 시도한다. 그리고 플랫 4백에 선수들이 생각보다 적응하지 못하자 5백에 가까운 플랫 3백으로 전환한다. 그에겐 상대에게 뒷공간의 빌미를 제공하는 스위퍼란 사라져야 하는 포지션이었다. 10년 동안 고정이었던 홍명보의 포지션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무대인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 컵에서 스위퍼가 아닌 센터백으로 출전한 홍명보는 피지컬과 대인마크의 약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프랑스에게 5-0으로 대패한 경기에서 히딩크는 당시 홍명보에게 실망했다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했을 정도로 홍명보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였다. 이 대회 이후 히딩크는 홍명보를 더 이상 대표팀에 선발하지 않게 된다. 물론 홍명보의 피로골절 부상도 있었지만, 부상 회복 이후에도 그는 대표팀에 승선하지 못한다.
대표팀의 수비는 4백에서 3백으로 바뀌었지만 스위퍼는 없었고, 센터백은 유상철과 송종국이 차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유상철은 홍명보가 갖지 못한 강력한 몸싸움과 제공권이 있었으며, 송종국은 빠른 스피드와 대인마크를 가지고 있었다. 천하의 홍명보도 받지 못한 합격점을 무려 '미드필더' 출신의 두 선수가 받아가고 있는 것은 홍명보의 자존심에 커다란 흠집을 내게 된다. 그의 자서전 '영원한 리베로'에서, 이 때가 선수생활 중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홍명보의 부상이 회복되자 언론들은 히딩크를 들들 볶기 시작했다. 홍명보는 대체 왜 뽑지 않는건가. 히딩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유상철과 송종국이 더 잘해서. 홍명보가 경쟁을 이겨내면 뽑겠다. 30대 중반인데다 부상을 겪은 선수가 대표팀에 복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월드컵이 가까워 질수록 대표팀은 경기내적으로, 피지컬 적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절치부심한 홍명보는 홀로 고된 재활을 묵묵히 이겨내었고, J리그에서 복귀한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에서 시즌 초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다. 그는 인터뷰에서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가 아닌 후배들과 정당한 경쟁으로 대표팀에 승선하고 싶다는 의사를 공공연하게 피력하였고, 2002년 3월, 드디어 오랜 공백 끝에 대표팀의 부름을 다시 받은 홍명보는 히딩크의 체력 테스트에서 괄목할만한 회복력을 보여준다. 이후 다시 주전자리를 차지하여 4강 신화의 화려한 주역이 된다.
더 이상 의무적으로 자신을 선발하는 국내 감독이 아닌 외국인 감독 체제에서, 10년 동안 지켜온 자신의 포지션이 사라졌다. 무서운 신예들이 빠르게 쫓아오고 있었으며, 30대 중반의 나이에 장기부상을 입었다. 감독은 노장에게 강한 피지컬을 요구했다. 홍명보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다시 대표팀의 주역으로 복귀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무한경쟁'과 그가 히딩크에게 보여준 K리그에서의 활약이었다.
이처럼 대표팀에서 경쟁 체제의 위력, K리그에서의 활약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한 홍명보가 이번 브라질 월드컵과 같은 엔트리와 선발구성을 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미 그는 12년 전의 신화를 그저 '추억'으로만 남겨둔 것일까. 감독 부임 전 히딩크 감독밑에서 코치 수업을 받고 왔다는 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0년 동안 대표팀에 터줏대감으로 당연히 자리가 마련되어 있던 그 시기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걸어온 길을 알고있기 때문에, 그의 결정 하나하나가 더욱 아쉬운 월드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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