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4/29 04:27:20
Name Kaestro
Link #1 https://kaestro.github.io/%EC%8B%A0%EB%B3%80%EC%9E%A1%EA%B8%B0/2024/04/29/%EB%82%98%EB%8A%94-%EC%99%9C-%EB%B0%A9%EB%AC%B8%EC%9D%84-%EC%97%B4%EA%B2%8C-%EB%90%90%EB%8A%94%EA%B0%80.html
Subject [일반] 방 문을 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너 어제 밖에 나갔다 왔니?]

저는 원래 집에 들어오는 순간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일이 없으면 방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히키코모리였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친구들과 만나기 위한 외출은 종종 했으며 디스코드로 친구와 대화하며 게임을 하고, 회사를 나가서 일하는 등의 사회적인 활동도 충분히 했습니다. 한동안 집에 돌아왔을 때 제 방문은 항상 단단하게 걸어잠궈져 있었습니다.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한국 사람은 집에서 혼자서 쉬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는 사람의 전형 중 하나가 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제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던 사건이 바로 어머니께 ‘어제 나갔다 왔어? 나갔는지 몰랐네’라는 이야기를 외박하고 집에 돌아온 다음날 오후에 집에 들어오면서 들은 일이었습니다. 전날 점심때 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잠을 자고 돌아올 때까지 집에 있는 그 누구도 제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이 사실은, 저에게 우리 가족은 서로에게 그로톡 무관심하지는 않은데 왜 집에 있는지와 같은 가장 기초적인 사실 조차 모를 정도로 소통이 불가능한 단절을 가운데에 두고 지내고 있게 됐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아파트, 방, 문, 단절]

최근 셜록 현준님의 영상을 많이 보면서 현재 제 주거 공간이 어떻게 제 삶을 영향을 주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굉장히 인상 깊게 들은 이야기 중 하나는 ‘아파트 방들에는 거실을 향하는 창문이 필요하다’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해당 글에서 셜록 현준님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건축에서 벽은 공간을 나누고 단절하는 장치이며, 문은 벽을 뚫고 두 공간을 적극적으로 연결해주는 장치이고, 창문은 시각적으로만 소통하게 해주는 소극적 연결 장치이다. 사람 간에 가장 좋은 관계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관계가 너무 가까우면 사생활이 없어지고, 관계가 끊어지면 외롭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주는 건축 장치는 창문이다.”

저는 이 말씀을 듣고 항상 굳게 걸어잠겨 있는 제 방의 문을 되돌아보면서 우리 가족이 단절돼있던 것이 세대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 같은 것에서도 기인하는 부분이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소통 자체의 총량이 모자란 것이 주 원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마치 제 블로그의 디자인이 변화하면 기존에 제가 작성해 뒀던 글이 주는 경험이 여태까지 주던 것과는 다르게 변하는 것과 동시에 이후에 작성한 글들이 변화했던 것처럼, 제 방의 디자인을 바꾸는 것을 통해 가족과 단절된 시간을 줄이고 연결되어 소통하는 시간을 늘리는 노력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방 문을 열어 프라이버시를 잃고, 가족을 얻었습니다]

유현준 교수님께서 가장 이상적인 소통 방식으로 방에 창문을 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만, 애석하게도 전세집인 이 아파트에 창문을 뚫는 시공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차선책으로 제 방 문이 기본적으로는 열려있는 상태가 되도록 변화를 줬습니다. 이전에 방에 들어오면 문부터 닫았다면, 지금은 제가 방에서 혼자 조용하게 해야 집중해야 하는 시험을 보는 등의 일이나, 전화 통화 같이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하는 상황이 아니면 대부분 문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저는 이제 동생이 공부하다가 간식을 먹으려고 주방에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같이 먹자고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됐습니다. 어머니께서 보고 있는 tv 프로그램에 어떤 사람이 나오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됐습니다. 식사 준비를 위해 칼질하는 소리를 듣고 옆에서 이를 도와줄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게 저는 방 문을 열어 프라이버시는 잃었지만 대신 가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물론 집에 돌아와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갖는 것은 재충전을 하는 데에 있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 역시도 이런 글을 쓰는 게 가장 잘 되는 시간은 가족이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 시간에 혼자 음악을 틀어놓고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저는 집에서 모든 순간에 혼자만의 시간을 추구하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내 삶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삶도 이루어 가족의 일원으로써 함께하고 외롭지 않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지만 제 방 문을 가능한 열어두는 것을 선택했고 그 결정에 만족합니다.

응답하라 1988과 같은 가족 드라마에서 나오는 가족들은 풍족하지도 못하고 갈등이 계속해서 발생하지만 그들이 끈끈하게 있을 수 있는 것은, 같은 공간과 시간을 요즘의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공유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요즈음 그 시절 가족들은 다툼이 있었지만 더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하고 친했으며, 외롭지 않고 행복했다 느꼈던 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아파트에는 벽이 있고 그 방문이 굳게 걸어닫혀있는 것이 기본 상태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자료]

- [집에선 쉬고 싶은 한국인…"혼자 있을때 가장 즐겁다" 40%](https://www.sedaily.com/NewsView/2D43FCI7Z5)
- [창문으로 세상을 바꾸는 방법](https://m.blog.naver.com/hyunjoonyoo/221701794032)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카즈하
24/04/29 09:25
수정 아이콘
작은 변화지만 결심하고 실천하기 쉽지않죠.

개인의 사생활은 잃었지만, 가족을 얻었으면 성공하신겁니다.
24/04/29 09:55
수정 아이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워낙 문을 닫고 산 지가 오래 돼서 말씀대로 결심하고 실천하는게 쉽지 않더라구요
열어 놓은게 불편할때도 좀 있다만 가능하면 그래도 열어두고 살아보려고 합니다
24/04/29 11:06
수정 아이콘
방문을 닫아야 하는 나 혼자만의 공간은 딱 사춘기까지고
나이먹은 지금은 방문 열어놓고 오며가며 서로 볼수있는게 좋더군요.

퇴근하고 잘때까지 몇시간 되지도 않는데 이시간 마저 방문 닫아놓고 있으면
글쎄요..
24/04/29 11:23
수정 아이콘
말씀대로 저 역시 한참을 문을 닫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지내다가 문을 열고 함께하게 되니 보이는게 많이 다르더라구요
김삼관
24/04/29 11:11
수정 아이콘
의지도 보여주시고 실제로 실천하시는 모습들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네요.
24/04/29 11:25
수정 아이콘
그렇게 변변한 일은 아닌데 기쁘다고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정진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팀원에게화내지마
24/04/29 16:53
수정 아이콘
저희 가족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는 방문을 닫고 있고, 그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두는 룰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주로 열어두는데 그러면 오며가며 한마디씩 추임새 하는 것이 은근히 가족들끼리 소통을 하게 만드는 것이더라고요.
24/04/29 17:03
수정 아이콘
저희 집은 디폴트가 문을 닫고 지내는 것이었는데 말씀하신 그런 것이 소통하게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더라구요
좋은 습관을 가진 가족이라 멋지네요
24/04/29 21:34
수정 아이콘
어째서 한국인에게 쉼은 혼자만의 시간이 되어버렸으며, 가족과 보내는 시간, 집을 위하는 시간은 집안[일]이 되어버렸을까요. 친척을 만나러가는 부모님을 따라가는 자녀들은 어찌나 그 시간을 귀찮고 힘들어하는지. 사람의 행복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으니 사람이 덜 행복한 거 같습니다.
24/04/29 22:54
수정 아이콘
말씀대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분적인 행복은 집에서의 시간인데, 이를 잃어버리게 된 데는 굉장히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그 사실을 잊게 만드는 공간이 팽배해있단 늓이 한가지 원인이지 않을까?하는 글이었습니다 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375 [일반] 맴찔이가 외국 나가면서 느끼는 점 [27] 성야무인12920 24/04/30 12920 3
101374 [일반] 10km 달리기 추천 (서울하프마라톤) [33] 무민8880 24/04/30 8880 8
101372 [일반] 3년간 역사 글을 쓴 회고 [19] Fig.19436 24/04/30 9436 43
101371 [일반] 연휴 앞두고 드라마 추천드립니다. [6] 뜨거운눈물10309 24/04/30 10309 1
101370 [일반] 엔터 vs it플랫폼 [37] kurt12442 24/04/30 12442 1
101367 [일반] (락/메탈) Black Veil Brides - Knives And Pens (보컬 커버) Neuromancer7089 24/04/29 7089 2
101366 [일반] 무사고 기원!! 카니발9인승 하이브리드 하이리무진 [79] 아이유IU11380 24/04/29 11380 35
101364 [일반] 7800X3D,7950X3D 토스페이 역대가 오픈 [63] SAS Tony Parker 12342 24/04/29 12342 0
101363 [일반] 서하마 후기 [16] pecotek11558 24/04/29 11558 8
101361 [일반] 방 문을 열자, 가족이 되었습니다 [10] Kaestro12297 24/04/29 12297 27
101360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9) 시흥의 열한째 딸, 시흥 [3] 계층방정18120 24/04/28 18120 8
101359 [일반] <범죄도시4> - 변주와 딜레마. [39] aDayInTheLife9440 24/04/28 9440 4
101358 [일반] [방산] 마크롱 : 미국산이랑 한국산 무기좀 그만 사 [84] 어강됴리17750 24/04/28 17750 5
101357 [일반]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8) 시흥의 열째 딸, 군포 [9] 계층방정20979 24/04/27 20979 4
101354 [일반] 삼성 갤럭시 S팬의 소소한 기능 [34] 겨울삼각형15540 24/04/27 15540 0
101353 [일반] (락/메탈) Killswitch Engage - My Last Serenade (보컬 커버) [5] Neuromancer8010 24/04/27 8010 3
101352 [일반] 5년 전, 그리고 5년 뒤의 나를 상상하며 [6] Kaestro9669 24/04/27 9669 4
101351 [일반] 키타큐슈-시모노세키-후쿠오카 포켓몬 맨홀 투어 [11] 及時雨10078 24/04/26 10078 13
101349 [일반] 인텔 13,14세대에서 일어난 강제종료, 수명 문제와 MSI의 대응 [63] SAS Tony Parker 15767 24/04/26 15767 9
101348 [일반] [개발]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기술 블로그(完) [4] Kaestro8878 24/04/26 8878 5
101347 [일반] 테일러 스위프트 에라스 투어 도쿄 공연 후기 (2/7) [5] 간옹손건미축10726 24/04/26 10726 12
101346 [일반] 민희진씨 기자회견 내용만 보고 생각해본 본인 입장 [325] 수지짜응24970 24/04/25 24970 10
101345 [일반] 나이 40살.. 무시무시한 공포의 당뇨병에 걸렸습니다 [51] 허스키16038 24/04/25 16038 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