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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11/25 19:38:43
Name 나이스데이
Subject [일반] 울어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바보같은 투정글입니다.
기분 안 좋으신 일이 있으실 때 읽으면 더 기분이 안 좋아질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1992년 10월 1일, 보통의 존재가 빛을 보았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여자와 손을 잡았을 것이며, 주저 없이 가슴에 안겨 나긋한 호흡을 만끽하였을 것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분명 어머니와 함께 하지 않았을까? 그를 담았던 색 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그의 방안 한 구석에 걸려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기억은 5평도 되지 않는 초가집에서 시작한다. 아파트가 대량으로 양산되고 농촌에도 즐비하던 90년대에도, 흙으로 지어지고 아궁이에 불을 때어야만 방이 따듯해지는 곳에서 살았다. 그래도 내게 매일을 손 잡아주고, 밤마다 팔베개를 해주던 존재가 있었다. 나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를 재워주었고, 씻겨주고, 밥을 먹여주었다.

그녀는 집으로부터 30분이 넘는 거리에 있는 작은 텃밭을 가꾸었다.  새벽닭마저 잠든 시간, 그녀는 나를 태운 리어카에 곧게 피는 것조차 힘든 허리를 지탱하며 생계를 위한 걸음을 내딛었다. 나보다 높은 곳에 있던 옥수수를 따던 기억, 고추를 경작하기 위해 철심을 세우던 기억, 농사가 끝난 땅위에 갑바천을 덮어두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밭에서 응가가 마려웠던 나를 아무 곳에서나 배변을 보게 해준 뒤, 그녀가 신문지를 잘게 구겨 주었던 따듯함도 생각난다.

초등학생이 된 이후부터 나는 그녀가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 초등학교 운동회는 대게 부모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자식들을 위해 응원하며, 식사를 챙겨주고, 기쁨을 함께 나눈다. 나는 그 때마다 같은 반 아이들의 부모님과 그녀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의 도시락에는 김밥, 유부초밥, 치킨, 과일 등 평소에 먹지 못할 귀한 음식들이 담겨있는 반면 나에게는 도시락조차 없었으며 제사상에 올라가고 남은 돔배기 2조각과 밥뿐이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콩주머니(일명 '오자미')를 던지는 순간이 오면 나는 항상 두려웠다.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그녀는 김밥이 아닌 돔배기를 돗자리가 아닌 신문지를 정성을 다해 준비 하지만 철없는 내가 친구들과 비교하며 그녀 앞에서 투정을 부리고 눈물을 보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다른 어머니들과 비교해서 흰머리도 많았고 주름도 많았고 허리도 많이 굽어있었다. 돌돌이(유모차)가 없으면 거동조차 불편했다. 아무리 10살 남짓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애라고 해도, 더 이상 그녀를 어머니의 범주에 우겨넣기에는 너무나도 다른 것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며 나는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그녀를 할머니의 범주로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할머니를 만난 것이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이 계셨다. 그분들께 내가 버려지지 않을 수 있었던 역사를 듣게 되었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누나였고, 할아버지가 뿌린 3남1녀를 모두 거두었다고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생업을 위해 집을 비워야만 했고, 그 뒷감당은 모두 5평짜리 초가집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녀는 34년생이었으며,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위해 자신의 자식도 아닌 것들을 대려다 젖을 먹여가며 키웠다고 한다.
나는 3남 1녀 중 장남의 아들이라고 했다. 나의 아버지는 고집불통이어서 할아버지와 갈등이 많았고, 나보다 자신이 중요했던 사람이라 내가 어린이집을 들어가기도 전에 생모와 이혼한 후 그녀에게 나를 맡겼다고 한다. 그녀는 동생의 자식들을 키워 내는 것조차 모자라 손자까지도 감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런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란 사람에 대한 분노가 싹트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모진 세상의 풍파를 정면으로 들이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드는 모든 비용에 대한 책임을 내 스스로 짊어지었다. 그녀는 수십만 원이 넘는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었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의 아버지에게 떠넘겼으며, 아버지는 그저 돈이 없다며 둘러대기만 했다. 입학부터 3개월간 학비, 식비, 기숙사비 등 단 돈 10원도 제출하지 못했다. 덕분에 담임선생님이 나를 따로 불러 혼을 내셨다. "너 왜 돈 안내냐? 쪽지 나눠주면 집에다 안 가져가는 것 아니냐?"라며 질책하셨지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모든 것을 털어 놓았다.
선택을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근로 장학생이 되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교무실의 경비 시스템을 해제하고, 50개가 넘는 모든 교실의 문들은 열고 닫으며 학비를 감당했고. 또 식비를 위해 식사시간마다 왼손에는 바구니를 오른손에는 행주를 들어야만 했다. 전교생이 먹다 흘린 음식물들을 치웠으며, 몇몇 질 나쁜 학생들이 일부러 식판을 두고 가는 날에는 교복이 흠뻑 젖어야만 했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모든 학생들이 집으로 향하지만 나는 여전히 학교에 남아있어야만 했다. 열쇠 꾸러미를 들고 교실마다 창문을 닫고, 문을 잠그다보면 자정이 넘겨서야만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통제에 익숙해졌다. 돈으로 맺어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시간관리가 철저해야 했고, 이는 나아가 나를 기계적으로 생활하게 만들었다. 대소변마저도 거의 정해진 시간에만 처리하려 했고, 기상도 강제로 이루어졌다. 이 생활을 한지 1년 만에 몸무게가 20kg이 넘게 줄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움, 불만, 짜증, 한탄, 억울함 등이 지배적이었지만, 이마저도 익숙하게 통제하게 되었다. 그 여파로 나는 힘든 상황에서도 힘들다고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속으로 삭히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믿었다. 친구들이 '배고프다', '춥다'라고 툭툭 내뱉는 말들도 '저런 걸 왜 입으로 말하지? 그냥 속으로 생각하면 안 되나?'라며 비틀어진 사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통제는 내게 긍정적인 면도 남겨주었다. 환경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었으며, 규칙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가난해서 학원도 못 다니고 문제집도 살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것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었다. 학교 수업을 정말로 열심히 들었으며, 선생님들을 귀찮게 할 절도로 교무실을 찾았고, 덕분에 문제집을 교사용을 얻어가며 공부를 했다. 부지런히 일어나고 움직인 생활도 학업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대들보가 되었다. 친구들은 꾸벅이며 조는 시간에도 깨어 있을 수 있었고, 소위 자투리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가며 끈질기게 공부했다.

나는 성균관대를 입학하였고, 평점평균 4.0을 넘기며 전액 장학금을 받는 우수한 학생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면접까지 보고 최종탈락을 하며 취업에 실패를 했다. 다들 면접까지 갔으면 스펙에는 문제가 없었을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라며 매일 똑같은 생각에만 갇혀있다. 혹시나 내가 자라온 성장배경이 인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기에 면접에서 떨어지지 않았을까? 이 지경이 되면, 통제가 지닌 부정적인 면이 불쑥 나타나, 내가 나를 부정하게 하며 존재의 의미를 퇴색하게 만든다. 면접에 떨어진 이유를 죄다 내 탓이라고 우기며, ‘넌 아버지를 잘 못 만났어.’, ‘가난했기 때문이야’, ‘더 노력하지 않았어.’ 등으로 나를 채찍질 한다. 사실 이 행위가 적절치 못함을 알고 있지만, 요즘 정인의 미워요를 들며 ‘내 가슴 아픈 것까지 맘대로 말아요.’라는 가사가 계속 맴돈다.
그런데 더 이상 이러고만 있을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나를 너무 아프게 하니 정말로 힘듦에도 헤어나갈 길이 없다고 느껴진다. ‘나마저 나를 부정하는데 누가 나를 위로해줄까’라고 생각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피지알에 짧은 글을 남긴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하지 못하는 내가 머저리 같지만, 굳이 피지알에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지난 1월, 전역이후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깊이 생각하던 때 피지알에 소심하게나마 자살에 관한 글을 올렸다. 활동이 거의 없는 눈팅 회원임에도 불구하고, 여초 커뮤니티답게 많은 회원께서 친절하고 따듯한 댓글과 쪽지에 휴대전화번호까지 남기며 위로의 말을 전해주었다.
대놓고 위로만 받기위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보통의 존재로 인정받고 싶다. 내가 살아온 역경들도 이렇게 글로 남겨 다른 사람들과 떠들고 나눌 수 있다는 것, 지금 겪는 어려움도 지나보면 그저 그랬다며 웃어넘길 수 있다는 것. 내가 유별나게 잘난 사람이 아니기에 힘들 상황이 닥쳐오는 것도 당연하지만, 이를 딛고 일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 하다는 것을 느끼고 싶다.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 나조차도 보이지 않는 순간에 누군가는 내가 존재함을 텍스트로나마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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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tersuweet
15/11/25 19:44
수정 아이콘
저도 제게 과분하다고 생각했던 기업 최종면접에서 떨어지고 나서 멍하니 있었습니다.
사실 최종면접이라는 게 인상면접에 가까운 느낌이라, 여태까지 내가 살아온 길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걸까 하고 되돌아보게 되더라구요.
사실 아직도 아쉬움이 가시지않았고, 가슴 한편이 아리기도 한데, 뭐 어쩌겠습니까. 살아야죠.

그냥 같은 아픔 겪고 있을 저같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을 거라는 데에서 위로를 전하고 싶어요. 힘냅시다 우리.
시노부
15/11/25 19:46
수정 아이콘
마음이 느껴지는 좋은글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생활환경이 저랑 비슷하신부분도 보여서 여태껏 살아오면서 방만했던 시절도 있었기에
비슷한 환경에서 어찌 나는 그러했나 싶은 부분도 있어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가지게 되네요.
(오히려 저의 환경이 좀 더 -사회적이든 객관적이든-윤택했으리라 생각해보면 더더욱)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살자고 더 열심히 하자고 다짐해봅니다.
여담이지만 윤하의 괜찮다 저도 참 좋아합니다.
15/11/25 20:11
수정 아이콘
저도 최종면접에서만 몇번의 고배를 마셨고 결국 좀 더 눈 높이를 낮추어서 지금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님은 뵙지는 못했지만 저보단 나이가 적은듯해도 저보다 더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신것 같습니다. 높이 뛰기 위해 낮게 움추리듯 지금은 그런 시기라 생각하시고 절대 절망마시고 화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더 좋고 나은 자리를 위해서 지금 잠깐 후퇴하신거라 생각하세요~
배주현
15/11/25 20:39
수정 아이콘
저 자신이 부끄럽네요.
부끄럽지 않게 잘 살게요. 응원합니다
15/11/25 20:59
수정 아이콘
마지막 문단을 보고 댓글 답니다.
나이스데이님은 보통의 존재가 아닙니다. 보통 이상이죠.
오마이러블리걸즈
15/11/25 21:06
수정 아이콘
뭐랄까... 악수를 하고 싶달까... 주먹을 맞대고 싶달까... 손을 꼭 잡아드리고 싶달까... 그렇네요. 나눔의 의미로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15/11/25 21:20
수정 아이콘
너무나도 멋지게 살아 오셨네요.

보통 이상의 존재이시고, 지금 취업에 있어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지만 이 또한 곧 이겨내시리라고 믿습니다.

힘듦을 인정하는 것은 포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힘드셨었고, 지금도 힘든 것이 당연할 수 있지만, 여태껏 너무나도 잘 이겨내셨다고 생각되네요.

여담이지만 (3) 저도 윤하의 괜찮다 참 좋아합니다.
장가갈수있을까?
15/11/25 22:09
수정 아이콘
그저 추천으로 응원하겠습니다. 그냥 다 잘 됐으면 싶어요.
15/11/25 22:46
수정 아이콘
울어도 괜찮습니다.
가슴 아픈 것까지 어찌 하겠습니까.

저와 같은 나이라, 더 먹먹합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케미
15/11/25 23:36
수정 아이콘
제가 취업준비에 괴로워하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저주하다가, 덜컥 취업이 되어 회사에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는 과정을 보고 나서야 깨달은 게 있습니다. 그건... 정말로, 취업은 운이라는 겁니다.
내가 뭐가 부족해서 떨어질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냥 그 직장에 자리가 몇 없어서, 자리가 난 팀에서 특정 성별만 원해서, 최종후보 중 특정 학교 출신이 너무 많아서, 하다못해 그날 면접관이 다른 일로 심기가 불편했어서... 실력, 인성 등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 이외의 변수가 정말 많더라구요. 그러니까 이건 다 운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끝없이 불운하지는 않다고 저는 믿습니다. 더구나 나이스데이님처럼 자신의 운을 스스로 터 오신 분이라면요.

상투적인 말밖에 쓰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결국에는 다 잘될 겁니다. 힘내세요.
15/11/26 02:30
수정 아이콘
거기 있다는거 알려줘서 고마워요.
https://pgrer.net/pb/pb.php?id=humor&no=257744 같이 노래들어요..
15/11/26 09:31
수정 아이콘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몇년의 취준생 생활에서 깨달은것은 정말, 취업은 운입니다.
절대로 나이스데이님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언제 상황이 더 좋아질거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힘내세요.
나이스데이님의 행복을 응원합니다.
케로니
15/11/26 12:28
수정 아이콘
글을 읽고 한참을 먹먹하게 있다 댓글답니다.
종류는 달랐지만 비슷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제가 느꼈던 많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어서 더 맘에 닿는 글이네요. 특히 그저 다른 이들 만큼만. 보통처럼만 살고 싶다라는 마음 깊은 갈망.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취업난에 절망했던 경험까지. 같은 학교 동문이란 점은 덤으로 치구요. 이런 글을 적고 있는 저는 어느새 직장생활 8년차 결혼해 처자식을 둔 보통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울어도 괜찮아요. 저 역시 눈물로 지샜던 많은 날들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네요. 다만, 지금 힘드시더라도 이제껏 지내온 본인에 대한 믿음을 다잡으시고 힘내시길. 이미 보통이상의, 훌륭한 삶을 지내오셨는걸요. 언젠가, 아니 조만간 지금의 시간들도 본문의 과거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거에요. 혹 가능하다면 훗날 소주라도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삼선짬뽕
15/11/26 23:06
수정 아이콘
힘들게 살고 계시지만, 절망적이지는 않습니다.
저역시 그 정도는 아니어도 어려울 때가 있었고, 지금은 애들 키우며 그럭저럭 잘살고 있습니다.
한 이십년 지나 이 글 다시 한번 읽게 될, 그럴 날이 오면 제 답글도 그때 읽으실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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