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빌뇌브

에너미는 2013년 극장에서 본 가장 끔찍한 영화였고, 감독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탓에 시카리오로 그를 한 번 더 봐야만 했습니다. 또 그가 '네 인생의 이야기'와 '블레이드 러너'를 인질로 저를 극장으로 부를 것이란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의 전작을 다 보지 않았기에 작가로서 빌뇌브를 평가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직전에 보았던 시카리오에서 빌뇌브가 보여준 하나의 작가적 태도는 불성실함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영화적 세계에 시나리오와 연출에서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시카리오에서 FBI 현장 지휘관으로 제시된 주인공은 그러한 배경설정과 무관하게 취약한 여성의 육체라는 피사체로 변모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연약한 선(善)으로 대비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 악과 도덕적 선의 비대칭적인 대립관계가 결말부의 마초적인 복수극의 낭만으로 바뀌었을 때, 그가 FBI 요원이자 여성이며, 유약한 선에게 저지른 모든 서사적 폭력을 지탱해주던 현실주의는 순식간에 무너져버렸고 큰 실망으로 다가왔습니다. 탈 할리우드적 주제의식을 눈 앞에서 흔들지만, 결국 오락적 결말을 안일한 도피처로 선택하는 것은 제가 지금까지 본 그의 세 개의 영화에서 반복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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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인생의 이야기

'네 인생의 이야기'가 영화가 된다고 했을 때 전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되었던 주제와 연출들이 영상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결정론적 우주에서 공시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에게서도 인간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짜여진 이야기는 뛰어난 생각의 연속이었습니다. 영상매체가 이 모든 것을 전달하면서 얼마나 변용되고 각색될 수 있을지, 어떤 모습이 될 지 그 가능성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컨택트가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글의 영화적 변용이기를 포기한 순간 모든 가능성의 문도 같이 닫혀버렸습니다.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 빛의 경로가 모두 정해졌다는 이야기처럼, 매개를 달리한 예술사이에서 고민을 그만둔 순간 컨택트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그런 게으른 각색의 결과로,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와야할 카타르시스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전문가적 접근과 이성이 세상을 구한다는 영웅담이 남아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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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트

  소설에서 주인공은 유일한 서술자로서 서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언어의 습득에 따라 변화하는 사고방식을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이런 소설이 가진 서술적 연출을 그대로 차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 많은 영상연출적 고민을 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런 고민 대신 사고의 변화를 나레이션과 부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미래회상의 환각적 체험과 플래시백으로 대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고방식의 변화를 대변하느냐는 중요한 질문은 'HANAH'라는 준비된 반전으로 덮어버립니다.

  언어학자가 외계어를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소재입니다. 그런데 그 언어를 배우는 과정은 엉뚱하게도 물리학자의 입을 통해 '설명'됩니다. 짧은 테이크 몇 개를 거치고 나니 주연들은 태블릿으로 외계어를 구사하고 있습니다. 외계인들의 '휘갈김'들에 주연들이 어떻게 접근하고, 분석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는 전부 축약되어버립니다. 몽타주 기법으로 조립된 여러개의 짧은 장면들은 관객들이 절대로 짐작할 수도 없는 외계언어의 이해를 다루고 있지만, 어찌되었든 관객은 짐작하고 넘어가줘야합니다. 사실 영화의 다른 모든 부분이 기적적으로 짜임새 좋았다고 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한 불성실함은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인질에게 잔인한 죽음을 고했을 것입니다.

  위기가 발전하는 과정들이 유기적이지 못한 것은 온전히 고유한 각본의 문제이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시종일관 주인공과 그 주변을 떠돌던 카메라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너무나 편리하게 각본을 위해 봉사하곤 합니다. 주인공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은 병사들에게 노골적으로 두 개의 테이크가 할애되고 그로 인한 영화적 결과가 폭탄테러로 나타나고 클라이막스에 유언을 전달하는 장면에서 빠르게 교차되는 카메라와 음악이 억지로 긴장을 유발하는 일들. 각본이 준비한 오리지널한 위기들은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게 아니라 이질적으로 삽입되어있습니다.

  또 언어학적 전문가의 견해는, HUMAN을 화이트보드에 쓰고 자신을 가리키는 바디랭기지를 하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대체됩니다. 이러한 행동과 캥거루의 비유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은 언어학의 뛰어난 권위자이기 보다는 오락적으로 쓰기 편한 버전의 인류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페르마의 원리와 같이 소설에서 독자가 외계인과 그들의 우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물리학적인 설명들이 영화에서는 모두 거세된 덕분에, 영화에서 이안의 존재의의는 'HANAH'의 유전정보 캐리어와 나레이션으로 전락해버립니다. 반전을 이해시키기 위해 불필요하게 많은 플래시백에 정성을 들인 것에 비해, 외계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이안의 나레이션과 몽타주 기법, 미래회상으로 대변되는 것은 각색이라는 면에서도,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도 치명적인 수준의 게으름이었습니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H A N A H 라는 스펠링이 연출적 자부심을 드러내며 화면을 잠식할 때 저는 이 게으름의 일관성에 두려움마저 느꼈습니다.  


  영화는 소설의 결정론적 우주에서 시간을 선형의 연속된 흐름이 아니라 공시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같이하지 않습니다. 시간에 대한 다른 관점은 관찰하는 방식의 차이를 뛰어넘어서도 인간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매개가 아니라 모녀의 삶을 비추는 반전의 도구이자, 사건을 해결하는 초능력처럼 묘사됩니다. 결정론의 우주는 절대의지가 지배하는 이원론적 세상이 구현된 공포스러운 공간입니다. 이것이 창작물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딜레마에 대해 소설은 순응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결정론적 우주도, 공시적 관점도, 또 그것을 마주한 외계인과 주인공의 순응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본다면 폭탄테러와 그로인한 외계인의 인명손실은 그저 흔한 할리우드적 모순이 되어버립니다. 극중에서 주인공은 불분명한 예지능력을 가지고 위기를 극복하는 것 처럼 묘사됨에도 그보다 훨씬 오래 전 부터 주인공과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인지해온 뛰어난 외계종족들이 소수의 인간군대가 준비한 폭탄때문에 '죽음의 과정'에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은 모순.

  영화에는 이러한 모순들이 끝없이 탄생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서 그에 대해 고심하지 않은 죄의 대가처럼. 이는 관객들에게 영화 제작자들이 결코 논리적으로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수 많은 질문들을 하게 합니다. 물론 폭탄이 올라가는 과정 그 자체나, 외계인에 대한 너무나 비이성적인 중국의 태도 등 시간과 무관계한 모순들도 있죠. 이러한 모든 것들이 온전히 '각색' 때문이라는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할리우드적 과학,정치,사회적 상상의 개연성에 문제를 제시하는 건 정말 무가치한 일이지만 지나치고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 폭탄더미를 올려보내고 그마저도 성공하기도 전에 들켜 사격으로 응전하는 수준의 반외계인 사상에 심취한 병사들에게 보안이 뚫린 연구기지.
-그 부피를 가진 우주선을 열이나 전자파 등 에너지를 발생하거나 소모하는 활동의 증거를 보여주지도 않고 안정적으로 떠 있게 할 수 있으며, 중력조차 조작하는 물리학적 상식을 뛰어넘는 기술의 우주선. 그 하이테크놀로지의 집합에 무사히 침입한 폭탄꾸러미, 그런 우주선이나 우주선의 제작자를 폭탄꾸러미 정도로 테러할 수 있다고 믿는 미군, 그 기술을 가지고도 주인공을 구하면서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외계인
- 3000년 후에 인간으로 부터 무언가를 받기 위해 그 시기보다 3000년 앞서 12기의 우주선을 지구에 위치시킨 뒤 주먹구구식으로 언어를 가르치는 외계인의 놀라운 사고방식.
- 공산당 상부도 말리지 못하는 중국의 장군, 외계인을 상대로 대 전쟁을 선포하고 전화통화 한 번에 입장을 180도 바꾸는 의사결정능력, 그런 비이성적 결정들에 대해 책임이나 처벌, 정치적 실각도 묘사되지 않고 오히려 세계 저명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에 유유히 나타나는 장군.

  영화의 각색된 각본은 뛰어난 소설을 영상예술로 옮기기 위한 노력을 하는 대신 배타적인 중국장군으로 형상화된 어리석은 인간들을 미래를 보는 선각자적 능력을 가진 이성적인 스콜라가 구한다는 영웅설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서 시공을 뛰어넘는 모녀의 관계는 영웅이 필히 가져야할 가족주의적 사랑이라는 위상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영웅설화가 되면서 언어,사고,시간,우주에 대한 생각들은 휘발됩니다. 과학자들의 다국적 협력이 등장하기에는 너무 미숙한 영화속 세상은 구원자를 위해 준비된 무대입니다. 하드 SF의 상상력이 이 영화에게 무언가 특별함을 부여하는 듯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영화는 극장에 걸렸고 앞으로도 걸릴 블록버스터들과 완전히 같습니다. 다르게 보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테드 창의 이야기의 뼈대에 게으른 연출과 식상한 이야기를 조금 더했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