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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3/10 05:22:40
Name 王天君
Subject [일반] [스포]문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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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팝송으로 시작하며 영화는 후안을 비춘다. 그의 위압적인 눈을 통해 본 세상은 강한 자와 약한 자가 나눠져있다. 제발 마약 좀 주라고 간청하는 한 남자와 이를 밀어내고 꺼지라는 다른 남자. 카메라는 빙글빙글 돌며 도움을 구걸한다. 그 시선에 잠깐 들어오는 것은 이죽거리는 후안 뿐이다. 중독된 남자는 시야 바깥으로 밀려난다. 약한 자를 밀어낸 브라더후드의 세계는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답하며 다시 훈훈해진다.

한 소년이 후안을 지나쳐 허겁지겁 도망친다. 철조망 틈을 지나 그는 어느 한 건물로 숨어든다. 씩씩대다 그를 찾지 못한 또래 아이들은 돌아간다. 누군가 문을 두들기고 두려움에 질린 소년은 침묵한다. 창을 막아놓은 널빤지가 뜯어지고, 방에는 빛이 쏟아진다. 소년의 눈 앞에 나타난 거한은 나무라는 대신 웃으며 소년의 안부를 묻는다. 소년은 아직 모른다. 눈 앞에 선 자의 이름이 후안이라는 것도, 그가 마약 거래상이라는 것도, 자기도 모르는 비밀을 알려줄 사람이라는 것도, 검은 세계의 아름다움을 알려줄 사람이라는 것도. 먼저 태어난 자는 거대하고 강했다. 이제야 살아가기 시작하는 자는 마르고 연약했다. 거인이 그의 짝에게 데리고 가 다시 한번 먹을 것을 주자 리틀은 아주 조금 마음을 연다. 베풂에 못이겨 어린 인간은 먼저 리틀이라는 별명을 밝힌다. 세상이 그를 부르는 이름은 리틀이지만 그가 불려야 할 이름은 따로 있다. 마이 네임 이즈 샤이론.

후안은 샤이론을 집에 데려다주지만 샤이론의 어머니는 냉랭하다. 함부로 고마워할 수는 없다.세상의 그늘에 몸담고 있는 이를 어미되는 이는 경계한다. 어머니는 샤이론의 유일한 혈육이자 보호자다. 파란 간호사복을 입고 있던 그는 샤이론에게 필요한 인간이다. 샤이론이 만나는 또 다른 보호자가 있다. 동갑내기 친구 케빈이다. 샤이론이 빨간 옷을 입고 운동장에서 어슬렁거리기만 할 때도 그는 샤이론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는 재미없다며 샤이론과 함께 걷는다. 케빈은 남자답게 함께 엉키며 "지지 않아야 하는" 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법을 안다. 샤이론은 케빈의 얼굴에 나있는 상처자국을 본다. 검은 피부 위로 빨갛게 피가 맺혔다. 케빈은 샤이론을 그의 세계로 인도한다. 야, 넌 약하지 않아. 샤이론은 알고 있다. 난 약하지 않아. 케빈은 더 강하게 이끈다. 그럼 그걸 보여줘야지! 케빈이 샤이론을 먼저 밀추고 덤벼보라며 사나이의 언어를 가르친다. 이기거나 지거나. 이 세계는 싸움으로 나아간다. 약자일지언정 무조건 지지는 않는다는 신호를 보내야한다. 샤이론은 케빈을 쓰러트리고 둘은 드잡이질을 하며 육체의 언어를 배운다. 그날 샤이론이 배운 것은 이기는 법이었을까. 아니면 함께 쓰러지며 닿은 살결의 부드러움이었을까.

샤이론에게는 스포츠의 세계가 어렵다. 함께 뭉치고 때론 각자 찢어지며 속도와 힘을 자랑하는 것은 그에게 체질도 재능도 아니다. 그가 정말로 육체적인 것과는 먼 인간이라면, 그가 몸을 쓰는 댄스시간에는 어째서 그렇게 자유로울까. 푸른끼가 살짝 도는 체육관에서 남자 여자 너나 할 것 없이 춤을 출 때 수줍고 기죽어있던 샤이론은 음악을 따라 펄떡인다. 거울 속의 자신과 함께 그는 신나게 흔든다. 그리고 방과 후, 그는 다시 남자들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불청객으로서 우연히 들린 어느 교실에서 케빈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샤이론은 자기 물건을 꺼내 비교한다. 아직 성기로 기능하기 전부터 이들은 얼마나 늠름하며 우람한지 그 가능성을 사내들끼리 점치며 뽐낸다. 남자는 사내가 되어야 하고 사나이 아닌 남자는 환영받지 못한다.
  
샤이론은 다시 후안을 찾는다. 후안은 샤이론을 물로 이끈다. 대지 위에서 빠르게 나가며 다른 이를 제치고, 종국에는 대지에 눕히는 것. 흙과 바위의 세계에서 배운 규칙은 부드럽고 찰랑이는 물의 세계에서 무의미해진다. 세계의 중심에서, 그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세계에 눈을 뜨는 것. 물이 카메라 화면에 차오르며 호흡을 방해한다. 넘실거리는 세계는 또 다른 방식을 가르친다. 서있다는 것은 중력을 거스르며 땅을 밟고서, 승리와 지배를 발에 익히는 과정이다. 물 속에서 인간은 힘이 아닌 흐름을 느낀다. 물결대로 흔들리면서 숨을 쉬는 법. 살아간다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녹아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빨간 핏속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배웠던 아기는 그렇게 푸른 물속에서 자맥질을 배운다.

거인은 샤이론에게 스승이자 아비가 된다. 그가 들려주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샤이론은 같은 피부를 지닌 이들의 과거와 연결된다. 달빛 아래서는 푸르게 빛나는 자들. 이 전에 자고 나란 자들이 그랬다.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이 후안에게서 샤이론에게로 넘겨진다. 밤이 되면 달이 뜬다. 검은 세상에서 하나의 아름다움이 새하얗게 퍼진다. 짙은 암흑에서 하나의 백白이 두 색을 다 알린다. 검은 피부는 늘 검게만 존재하는가? 있는 그대로의 존재는 빛을 받아 색을 반사한다. 파란 빛의 뿌리는 어디인가. 검은 하늘일 수도, 하얀 달일 수도 있다. 혹은 둘 다를 품고 있는 인간이 아닐까. 그 누구도 너 자신을 결정하게 두지마. 너가 누구인지는 너가 결정해야해.

샤이론은 지켜지지 못한다. 그의 보금자리는 어머니에게서부터 천천히 깨진다. 있어야 할 티비가 없다. 푸른 벽지의 집은 조금씩 황폐해진다. 샤이론은 다시 한번 물을 찾으려 한다. 욕조에 파란 입욕제를 쏟아붓고 그는 그 안에 몸을 담근다. 그러나 집은 점점 빨간 빛이 침투한다. 모르는 남자가 와있고, 어머니는 탁자 위를 황급히 치운다. 샤이론의 세계는 후안에게 답을 묻는다. 여느 때처럼 차를 끌고 자기 구역에 도착한 후안은 겁도 없이 약을 하는 커플을 발견한다. 차 안에는 샤이론의 엄마, 폴라가 있다. 후안은 힘으로 쫓을 수가 없다. 정신차리라고 꾸짖을 수도 없다. 폴라에게 약을 파는 것은 후안 자신이다. 자식은 점점 부숴져가는 어미로부터 벗어나 거인의 품을 찾고, 거인은 자식이 있을 어미를 야금야금 갉아내려간다. 내 새끼 너가 키워줄거야? 어? 친절한 보호자는 가해자의 본분을 깨닫는다. 무정한 어미는 피해자로서 당당히 자기파괴를 이야기한다. 물의 세계를 알린 거인은 힘의 세계에서 지켜줘야 할 이를 짓누르며 서있었다.

샤이론은 다정한 푸른 세계와 차가운 붉은 세계 사이에 놓인다. 샤이론은 아침 일찍 후안의 집까지 걸어가 문을 두들긴다. What is faggot? 약하고 조그맣고 비실대는 그에게 쏟아지는 그 단어의 뜻을 묻자 후안은 난감해한다. 시원찮은 녀석들은 치워버리고 강자들끼리 손을 맞잡던 그에게 강자의 법칙이 흔들린다. 그건...게이를 욕할 때 쓰는 말이야. 게이라고는 해도 되지만 faggot이라는 말을 들을 땐 화를 내야해. 약한 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로 동치된다면, 진짜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은 스스로 정해야 한다는 그 대답이 faggot이란 단어 앞에서는 당당해지지 못한다. 그건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지금은 몰라도 돼. 샤이론이 두번째 질문을 던진다. 아저씨가 엄마한테 약을 팔죠? 후안은 힘겹게 대답한다. 그래. 샤이론이 후안에게서 받은 풍요와 지혜, 자긍심과 신비는 붉게 물든 죄에서 거둔 것들이다. 그것이 강한 자로서 약한 자를 뜯어내며 살아왔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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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의 세계가 막을 내리고 Chiron으로서의 2막이 시작된다. 그 막간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번쩍이는 빨간 빛이다. 이 불길한 전조는 필연이다. 싸우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는 있는 그대로 자랐고 흑인남성들의 세계에서 못난이로 찍힐 수 밖에 없었다. 약자는 더 이상 쫓기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한 채 강자의 사정권 안에서 간신히 버틸 뿐이다. 딱봐도 강해보이는 터렐은 샤이론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어렸을 때 틈사이로 넘어가야했던 철조망은 성장한 이후에도 샤이론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리틀은 여전히 리틀로 불린다. 그를 향한 시선들은 더 노골적으로 변했고 외부의 힘은 더 흉흉해졌다.

약한 인간의 욕망은 진실이라 불리지 않는다. 그것은 늘 비밀이 되어 혼자만 아는 색깔로 빛난다. 2장의 막이 올라가자 카메라는 누군가의 입술을 잡는다. 샤이론은 욕망을 배워간다. 어쩔 수 없이 눈이 끌리고 멍해지는 것. 그 입술의 주인인 케빈은 아직도 샤이론의 친구로 남아있다. 우정인줄만 알았던 게 아닐 때, 마음이 자꾸 복잡해진다. 그런 샤이론 앞에서 케빈은 사내다움을 뽐낸다. 그 여자애 따먹다가 정학 먹을 뻔했어! 샤이론은 위화감을 느낀다. 교차할 수 없는 욕망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비밀을 으시대는 그의 태도가 어색하다. 왜 항상 "그 년"이어야 하고 "엉덩이가 죽이고" "내 굵다란 몽둥이"가 "죽여놓을"까. 말이 험해졌어도, 케빈은 여전히 좋은 친구다. 친구 이상은 될 수 없다 해도 좋다. 입이 무거우니까 특별히 이야기해줬다는 그를, 샤이론은 잔인하다기보다는 착하다고 생각한다. 철창 옆 푸른 차광을 지나 샤이론은 집으로 돌아간다.

그의 집은 망가져있다. 어머니는 푸석해지고 헝클어져있다. 마약 앞에서 모정은 힘을 잃는다. 올 사람이 있다며 어머니는 샤이론을 쫓아낸다. 그럴 때는 늘 가던 곳을 간다. 샤이론은 후안의 집을 찾는다. 그 때처럼 음식에 고개를 처박고 묵묵히 먹거나 아주 어렵게 대답한다. 테레사는 친절하고 따뜻하다. 그에게 러브 앤 프라이드를 되새긴다. 샤이론은 간신히 웃는다. 건강하고 당당한 사람들의 집에서 발에 채이는 자존감은 간신히 빛을 찾는다. 그날 밤 샤이론은 꿈을 꾼다. 꿈 속에는 어쩐지 대낮의 말처럼 거칠게 섹스하는 케빈이 보인다.

도망칠 때마다 돌아와야한다는 의무가 벌로 내려진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들을 반긴다. 목적은 약이다. 약을 해야 하니까, 아들이 받았을 용돈이 필요하니까 어머니는 다정해졌다가 이내 난폭해진다. 어머니는 늦겠다며 학교에 빨리 가라고 재촉한다. 자신은 망가졌으면서도 어머니로서는 아직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믿음에 샤이론은 더는 말하지 않는다. 학교가 끝나면 다시 지옥이 이어진다. 터렐은 샤론의 옆에서 죽이겠다며 으르렁거린다. 니 애미는 창녀! 라는 욕에도 샤이론은 위험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는 약하고 빼빼 마르고 그가 입는 청바지는 힙합풍이 아니다. 그를 지켜줬을지도 모르는, 위로해줬을지도 모르는 후안은 죽은지 오래다. 파괴된 세계에서 약한 채로 매일매일을 버티기 버겁다. 샤이론은 Real Nigga가 아니고 세계는 그에게 더 검게 변해야 한다고 불친절하게 말한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야한다. 집이 있는 사람들, 집이 돌아갈 곳인 사람들에게만 그렇다. 샤이론은 떠돈다.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 역에서 졸고, 그러다 바다로 향한다. 딱딱한 세계에 지친 인간은 부드러운 물을 향한다. 케빈의 집근처 백사장에서 그는 앉아있다. 케빈이 나온다. 어쩐지 보고 싶은 마음은 우연을 성사시킨다. 둘은 대마초를 나눠피며 조금 더 솔직해진다. 맨, 난 운 적이 없어. 남자가 다 된 케빈 앞에서 샤이론은 최소한의 남자다운 척을 멈춘다. 난 맨날 울어. 너무 많이 울어서 어쩔 땐 내가 눈물로 되버릴 것 같아. 아픈 마음이 닿고 사내답게 어깨를 감싸안았던 팔은 조금 느슨해진다. 둘은 바라보고 입술이 맞닿는다. 입술이 떨어지고 케빈은 그를 응시하며 바지지퍼를 내리고 샤이론을 만진다. 밤하늘 달 아래에서 숨소리가 빠르고 부드럽게 퍼진다. 샤이론은 미안하다고 하고 케빈은 뭐가 미안하냐고 묻는다. 샤이론이 순간 움켜쥐었던 모래는, 케빈이 손을 닦았던 모래는 부드러웠다. 집에 돌아온 샤이론은 미소짓는다. 바다에서 그는 몰랐던 것을 배운다.

달이 떠있던 밤이 가면 푸른 색은 새하얀 빛과 검은 그림자 속에 숨는다. 터렐은 케빈에게 샤이론을 때리라고 명령한다. 후안을 봤던 것처럼 카메라는 터렐을 따라 빙글빙글 돌며 수컷의 세계를 만든다. 케빈은 겁쟁이가 되지 않기 위해, 자기보다 강한 터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사내다운 세계의 규칙을 따른다. 샤이론의 얼굴에 친구의 주먹이 날아든다. 샤이론은 다시 일어서서 케빈을 쳐다본다. 그는 케빈을 이해한다. 케빈은 터렐이 시키는 대로 한방을 더 날린다. 샤이론의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을 때 강한 자들의 발길질이 시작된다. 선생님이 나타나고 모두가 도망친다. 샤이론은 누구에게도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한다. 소중한 사람을 자기 입으로 신고할 수는 없으니까. 케빈이 맞았다. 샤이론은 입이 무겁다.

얼음물에 담근 그의 얼굴은 거울 속에서 피로 붉게 어지러져있다. 형광등 푸른 빛이 깜빡거리고 세계는 이전처럼 불안하게나마 고요하지 않다. 푸른 문을 열고, 푸른 벽을 지나, 사나워진 샤이론이 교실에 들어온다. 검은 옷을 입고 강하게 굴던 터렐을 의자로 후려친다. 폭력의 세계, 피의 세계, 그가 그렇게 발을 담그고 있으면서도 따르지 않았던 빨간 색의 세계가 샤이론의 파란 세계 위로 덧입혀진다.

피해자였던 그는 잊혀진다. 세계는 그를 리틀이라고 불렀지만 샤이론이라는 이름의 가해자로 체포한다. 그의 얼굴 위로 경광등의 푸른 빛이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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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삐쩍 마른 뼈인간은 온데간데 없다. 핸들을 쥔 근육질의 사내, 그가 바로 샤이론이다. 그는 변신에 가까운 변화를 이뤘다. 케빈이 붙인 별명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만들고 말았다. 검은 인간들의 세계에서 요구하는 힘과 질서, 그것에 완전히 복무하는 인간으로서 그 누구도 샤이론을 의심할 수 없다. 그는 꼬마시절일 때 본 후안을 답습했다. 남성의 역사는 어리고 마른 인간에게 폭력이라는 검을 쥐어주고 기어이 계승시키고 말았다. 그의 차에서는 웅장한 비트의 음악이 울려퍼지고 앞에는 왕관이 설치되어있다. 지배하느냐 지배당하느냐. 금빛으로 빛나는 가짜 치아 악세사리와 그가 곁에 둔 권총이 그를 상징한다. 3막에서 그는 샤이론이란 이름이 어색하다. 그는 검다. 그는 black이다.

샤이론 안에서 피가 붉은 만큼 푸른 빛이 진해진 것일까. 모든 색은 진해질 수록 검정에 가까워진다. 블랙은 지지 않는다. 블랙은 강하다. 그는 쫄따구에게서 순식간에 웃음을 앗아갈 정도의 분위기를 갖추었다. 말을 더듬는 쫄따구에게 그는 다시 여유를 허락한다. 농담이었어. 쫄지마. 아마 터렐이 추구했던 것이 이런 류의 힘이었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 어머니는 붉은 방에서 빨간 옷을 입고 그에게 소리를 지른다. 샤이론은 잠을 잘 자지 못한다. 그리고 방의 푸르스름한 빛과 냉기에 기댄다. 잠의 공백은 힘으로 채워진다. 그는 아령을 들고 푸쉬업을 한다. 붉은 고통을 그는 어떻게 때려눕히는지 안다.

그날 밤도 전화가 온다. 어머니의 하소연이겠거니. 전화 속의 목소리는 자신을 블랙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불렀던 사람은 딱 한명 뿐이다. 샤이론이냐고 재차 묻는 전화 속 목소리에 맞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날 일에 대한 사과와 함께 문득 떠올랐다는 안부가 멍하게 만든다. 블랙은 블랙이라 불리고 샤이론이라는 이름을 되찾는다. 그렇게나 근육이 붙었고 인상이 험악해졌지만 그는 샤이론이 맞다. 강한 외피 속에는 바꿀 수 없는 그 때의 그 순간과, 그 순간에 닿기 전까지를 살았던 샤이론이 있다. 전화 속 목소리는 일하는 식당에 한번 들리라며 전화를 끊는다. 그는 꿈속에서 나이든 케빈을 만난다. 아침에는 젖어있는 속옷을 만진다.

샤이론은 어머니를 찾는다. 중독이 거의 완치된듯한 어머니는 하늘색 옷을 입고 아들을 반긴다. 마약으로 엄마를 잃고 버림받아야 했던 이가, 마약을 뿌리고 있다. 누군가는 그의 어머니처럼 망가질 것이다. 샤이론은 어머니가 싫다. 붉은 세계에서 그의 잠을 괴롭히는 것은 터렐도 케빈도 아니고 어머니다. 애정 없는 도리 속에서 어머니는 걱정한다. 이제 그런 일을 그만하면 안되겠니. 아들은 자기 몸 하나 간수못한 어미의 충고가 싫다. 그는 화가 치밀어오른다. 어머니는 사과한다. 어찌보면 그의 무책임함과 방종이 아들을 죄의 길로 이끌었다. 그래도 사랑한다며 운다. 아들도 운다.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 몇천번의 악몽을 꾼 이후에야 샤이론은 어머니를 되찾는다. 그가 잃었던 과거 하나가 되돌아온다.

샤이론은 차를 몰고 전화 속 목소리의 식당으로 향한다. 식당에는 샤이론을 이끈 그, 케빈이 있다. 케빈은 샤이론을 알아채지 못한다. 바에 앉아있던 그를 보고 케빈은 놀라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블랙이 아닌 샤이론은, 덜떨어진 표정을 짓는다. 이전처럼 말도 더듬고 별 대답도 안한다. 변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여전하다. 케빈은 요리를 가져오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간다. 샤이론은 이전처럼 어깨를 뻣뻣이 유지하지 못한다.

맛있는 요리와 술이 오간다. 총과 돈과 마약을 건네는 세계가 아니다. 케빈의 근황은 다시 한번 잔인하게 다가온다. 그의 지갑 속에는 딸의 사진이 있다. 그는 같이 살았던 애인의 이야기를 꺼낸다. 언제까지고 거리 생활을 할 순 없잖아. 그는 어떻게든 가정을 꾸리고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 샤이론은? 그는 굳은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한다. 나는 마약을 팔아. 불안하고 어두운 삶이다. 애인 같은 것도 없다. 당연해진 현재는 과거를 만나며 물음표를 찍는다. 왜 이렇게 됐을까. 나는 행복하지 않았을 수도. 둘은 붉고 검은 와인을 연거푸 들이킨다.

나한테 왜 전화한거야? 샤이론은 알 수 없다. 자기가 여기까지 와야했던 이유를 잃어버린 지금, 더 확실히 실망해야 할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스스로가 바보같다. 케빈은 다시 말한다. 그 때 어떤 노래를 손님이 틀었는데, 네 생각이 났어. 쥬크박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안녕, 낯선 사람- 다시 보니 참 좋은 것 같아요- 이게 얼마만인가요- 너무 오랜만이에요- 기뻐요- 인사 한마디 하려고 여기를 다 들러주고- 케빈은 샤이론을 바라본다. 샤이론의 어깨 위로 푸른 빛이 어스름하게 깔린다. 종소리가 음악을 자른다.

그 때는 케빈이 자신을 데려다줬었다. 지금은 빠방한 음악을 틀고 자신의 차로 케빈을 데려다준다. 알딸딸한 얼굴로 팍팍한 삶을 이야기하던 도중 케빈이 샤이론에게 묻는다. 그런데, 진짜 그냥 여기에 들려본거야? 애틀란타에서 차를 끌고 그냥 한번 들릴려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정말? 샤이론은 답을 찾지 못한다.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그럼 잠은 어디서 잘 건데? 둘은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다. 권유도 제안도 아닌 이상한 질문에 부탁도 거절도 하지 못한다.

잔뜩 취한 샤이론이 투덜거린다. 케빈은 파란 티셔츠로 갈아입는다. 차를 끓이며 케빈은 이야기한다. 변해버린 그를 보고 처음엔 알아채지도 못했다고. 남 걱정할 처지도, 충고할 여유도 없지만 그래도 한마디한다. 그건 진짜 너가 아니야. 샤이론은 대꾸한다. 너가 날 아니. 난 그 날 이후로 다 잊어버리려고 했어. 그리고 날 바꿔야했어. 약한 인간은 사랑을 배울 틈도 없다. 사랑하는 인간은 약한 인간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강해지고, 사랑도 하지 않는다. 진짜 자신이라는 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라도 그것이 용납되느냐는 다른 이야기다. 약한 인간은 빨간 피를 흘린다. 새파란 세상에서 얼음물에 얼굴을 담그고 스스로를 차갑게 만든다. 샤이론이 블랙으로 다시 살아남은 세계다. 케빈이 묻는다. 내가 널 몰라?

가스렌지의 불꽃이 타오른다. 불꽃의 끝은 빨갛고 그 뿌리는 늘 파랗다. 푸른 색깔은 열기를 더한다. 물이 끓는다.

이제야 난 나다운 삶을 사는 것 같아. 케빈의 만족스러운 회고에 샤이론은 반쯤 풀린 눈으로 대답한다. 날 만진 건 오직 너뿐이었어. 너 하나였어. "자신"으로서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이가 아주 어렵게 꺼낸다. 두터운 검은 껍질 속에서 내피가 부르르 떤다. 어쩌면, 아주 외로웠고 그리웠으리라. 파랗게 빛나는 자신을 어둡게 물들이고, 진해지고 진해져서 그렇게 아닌 척 살았다. 딱 한번의 키스로, 딱 한번의 부드러움을 숨기고서. 아주 오래 걸렸다. 깨닫기까지, 그것을 파묻기까지, 그리고 다시 꺼내기까지 온 인생이 걸렸다. 약한 인간이 정말로 약해질까봐 강해지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어쩔 때는 무시했고 어쩔 때는 이를 따랐다.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약하고 강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검은 남자가 검은 남자와 입맞춰도 된다고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살고 싶었지만 단 한번도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았다. 딱 한명, 딱 한번 울어도 되는 자신을 안고 감싸주었다. 검은 자는 강해야 되는가. 검은 자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었다.

푸른 바다를 바라보던 소년이 뒤돌아 위를 바라본다. 푸른 세상, 부드럽게 밀려오는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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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니시아
17/03/10 11:26
수정 아이콘
[딱 한명, 딱 한번 울어도 되는 자신을 안고 감싸주었다. 검은 자는 강해야 되는가. 검은 자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싶었다.]

이 문장을 위해 한자 한자 정성스레 쓰신 것 같군요. 글로 읽는 문라이트 또한 재밌네요.
17/03/11 09:15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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