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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3/22 15:52:47
Name 남편
Subject [일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유부남 생활 만 4년차. 아직까지 아내와 싸운 적은 없고(본인 잘못으로 일방적으로 혼난 적은 몇 번 있음), 아직까지 재밌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안 싸우고 잘 살고 있으니 바람직한 결혼생활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후배와 이야기 하는 도중"정상은 아니다"라는 말에 정말 그런가 궁금해서 글로 결혼생활을 돌아보려 합니다.

우선 사람들은 왜 싸우는 지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보통 싸움 앞에서는 분노의 감정이 우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리고 왜 화를 내게 되는 걸까요? 저는 부부 생활에서 화가 나는 이유를, 부부 중 한 사람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원하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 분노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싸우지 않으려면 둘 중의 한 가지만 하면 된다고 봅니다. 상대방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기. 그리고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

그렇지만 화를 내지 않고 살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100% 이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보니 화를 내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지요. 이 때, 어떻게 대처하는 지에 따라 싸움으로 넘어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뭐, 화를 내는 사람도 잘 내야겠고,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대처를 잘 해야겠지요. 물론 사람들마다 갈등 상황이 발생했을 때의 대처 방법은 각기 다르겠습니다만....

저희 부부가 결혼 시작부터 가장 크게 갈등을 겪었던 요소를 생각해보면 "청결"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청소나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자취할 때는 한 달에 한 번 청소를 할까 말까 했지요. 가끔 어머니가 자취방에 오신다고 해야 잔소리 듣기 싫어서 청소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먼지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자기들끼리 뭉쳐. 그럼 그거 집어서 버리면 되" 이딴 소리나 하고, 바닥에 쌓인 먼지와 던져놓은 옷들 때문에 방에 오솔길(;;)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죠. 설거지는 있는 그릇을 다 쓰고 더 이상 쓸 그릇이 없을 때 하는 게 보통이었고요. 7년 자취를 하면서 화장실 청소를 한 건 손에 꼽을 것 같네요. 반면 아내는 지저분한 걸 못 참는 성격입니다. 생활 필수품이 핸디 진공 청소기고 청소를 하면 최소한 눈에 보이는 부분에 있는 먼지는 전부 치워야 하는 사람이지요. 이미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당연 이 두 사람이 같이 살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서로가 기준이 다르니까요.

생각해보면 연애할 때부터 서로 다른 점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이라면, 결혼 전에 그 부분을 서로 이해하고 협의 과정이 있었다는 것이죠. 결혼을 준비하며, 그리고 결혼 이후에 생활하면서 서로에 대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대부분은 아내가 하는 걸로... 대신 음식물 쓰레기를 포함한 모든 쓰레기 버리는 것과 화장실 청소 두 가지만 제가 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아내는 다른 청소는 다 괜찮지만 음식물 쓰레기는 만지기 싫다고 했으며, 화장실 청소도 똥에 익숙한 P모 커뮤니티 유저인 제가 하는 것이 적합하다  판단되어 서로가 이런 역할 분담에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집안 전체를 진공청소기로 청소하고 세세한 곳 걸레질 하는 아내의 청소량과 비교했을 때 가끔 쓰레기 버리고 화장실 청소 하는 정도의 역할 분담은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신혼여행 이후 실제로 청소를 하며 청소시간은 일요일 오전에 하기로 합의되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주일 청소를 건너 뛰기로(물론 아내는 그렇다 하더라도 짬짬히 자신이 맡은 부분을 청소하더군요.) 이 역시도 타당한 수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살게 되는 것인데 이 정도는 서로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했고요.

한동안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청소라고 해봤자 화장실 들어가서 음악 좀 틀어둔 뒤, 청소용 세제 뿌려서 변기 닦고, 욕실 벽과 바닥의 때를 수세미로 제거한 다음, 타일 틈새를 전용 솔로 박박 문지르고 마지막으로 세면대와 거울을 닦은 뒤, 샤워를 하니 대략 1시간이 지나가더군요. 익숙하지 않은 청소를 매주 하려니 참 귀찮더군요. 초반에는 군기(?)가 들어서 공들여서 청소를 했는데 몇 주 지나니 꾀를 부리게 되더군요. "저긴 지난 주에 공들여서 청소했으니 이번 주는 안 하고 넘어갈까?"와 같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청소하다가 밖을 내다보니면 아내가 윙윙거리며 군시절 내무검사를 연상시키도록 청소하고 있습니다. 평소 손에 붙이고 다니는 핸디청소기를 생각했을때 굳이 저렇게까지 청소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반면 살짝 미안한 마음도 들더군요.

아마 아내 입장에서는 화장실 청소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태껏 아내가 제 화장실 청소에 대해 부족함을 지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저 고생했다, 화장실이 깨끗해졌다는 이야기만 해줄 뿐이었지요. 사실 청소 강도로 보면 아내가 훨씬 많은 것이 사실이었습디다. 실제로 제가 화장실을 청소하는 시간의 1/3은 샤워하는 시간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샤워 마치고 뽀송뽀송하게 밖에 나오면 아내는 녹초가 되어서 청소를 마무리 하고 있었고요.

어쨌거나 저에게 화장실 청소는 일상이 되더군요. 심지어 빌라로 이사오면서 집 앞 복도와 계단 청소도 추가가 되었지만 할만 하더라고요. 가끔 일요일에 여행을 가거나 본가여 다녀오게 되어 청소를 1주일 빼먹게 되면, 전에는 안 보이던 지저분함을 느끼게 되고, 청소 후에 수고했다고 아내에게 궁디팡팡이라도 받으면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어느덧 화장실의 청결함이 집안에서 내 가치를 좌우하는 척도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주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니 억울할 것도, 불편할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의 제 책상은 지저분 합니다. 외투도 의자에 적당히 걸어두고 있고요. 처음에는 아내의 잔소리를 들을만한 부분이었습니다만, 오염구역이 저만의 공간에 한정되어 있고 아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다보니, 그리고 최소한의 청결도(이건 저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를 유지하고 있기에 크게 아내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던 것은 먼저 서로에 대한 이해가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아내는 바닥에 먼지나 머리카락이 보이면 불편한 사람이고, 그에 반해 저는 바닥의 먼지가 뭉쳐서 굴러다닐 정도가 되어도 그런가보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걸 결혼 전부터 서로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결혼 전부터 같이 사는 환경에서 청소에 대한 일종의 구조화가 진행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제가 아내가 원하는 수준의 청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서로가 인지했고, 아내는 지저분한 것은 아내가 청소하되, 저도 아내의 불편함을 덜어줄 수 있도록 최소한의 역할 분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만 4년이 다 되도록 매주 일요일마다 진행되는 청소 시간에 별 문제 없이 서로가 자신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던 것이지요.

물론 요즘도 아내가 약속이 있어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면, 총각 때처럼 옷은 벗어서 바닥에 던져둡니다. 설거지도 바로 하지 않고 개수대에 담아두고요. 티비 틀어놓은 채로 팬티 바람으로 게임도 하고요. "빼앗긴 들에 봄이 왔다"는 심정으로 총각 때의 자유, 사소한 일탈을 실컷 즐깁니다. 그러다 아내의 도착 1시간 전 연락을 받으면 황급히 옷을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넣고 후다닥 설거지를 합니다. 마치 평소 아내가 있을 때와 다름 없는 모습을 위해서요. 아직까지도 이러는 걸 보면 전 분명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약간만 신경쓰면 아내와 잘 지낼 수 있다는 것. 맥주 한 잔 하고 온 아내에게 외로웠다면서 가증스러운 투정을 부리면 아내로부터 이쁜 짓 한 강아지 토닥거리는 것과 같은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결국 싸우지 않고 4년(연애 기간은 1년이었습니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이해 덕분인 것 같습니다. 서로 잘 알고 있기에 상대방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특정 행동이 얼마나 서로를 배려한 행동임을 이해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보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어느 한 쪽이 선을 넘었을 때에는 그에 대한 분노와 잘못한 사람의 사죄가 따라오긴 합니다만, 이 역시도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를 설명하고 서로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하면 자연스럽게 다음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론이 나오고 거기서 분노가 잘 마무리 되더라고요.

결혼에 대해 고민 글들을 많이 보는데,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마무리가 잘 안 되는군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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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3/22 16:07
수정 아이콘
저도 비슷한 의견이에요. 전 연애1년 결혼3년차인데 아직까지 싸운적이 없네요. 의견이 서로 다르거나 성격의 급한 정도가 달라 약간 삐지는 정도는 있긴해도 금방해소가 됩니다. 다만 이제 아기가 생기고 아무래도 교육관이라던지 육아의 피로도등이라던지로 인해서 트러블이 생길까 걱정이 되긴하는데 결국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상대방이 이해가 안되는 행동을 하거나 혹은 알면서도 내 기준에 안맞는 행동을 한다면 다 이유가 있겠지 하는 생각. 신뢰로부터 오는 이해라고 할까요.
작은마음
17/03/22 16:07
수정 아이콘
결혼 준비하고 있는데 한참 싸우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너무나 부럽네요 ㅠ
남들은 쉽게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 같은데
막상 제가 할려니 연애도 쉽지 않고
결혼은 더 힘드네요 ㅠㅠ
마스터충달
17/03/22 16:12
수정 아이콘
저도 연애하면 거의 안 싸우더라고요. 이해할 줄 아는 커플은 안 싸우죠. 그게 비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근데 본문 보니 아내분이 글쓴분을 잘 조련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7/03/22 16:28
수정 아이콘
조련당하고싶다!
17/03/22 16:59
수정 아이콘
좋은글입니다.
한번 고민해봄직 한 내용을 잘 풀어주셔서 저도 되돌아보게 되었네요
Chandler
17/03/22 17:03
수정 아이콘
뭔가 저와 제 와이프 보는것같네요 크크 첫줄부터 공감했습니다
이쥴레이
17/03/22 17:45
수정 아이콘
아니 저는 집안일도 다하고 애도 제가 보고 밥도 제가 해먹고
전부 제가하는데도.. 왜 아내는 늘 나에게 잔소리일까요.
ㅠㅡㅠ
마스터충달
17/03/22 19:04
수정 아이콘
벌이가 적어서? 월 수익 천만 원 넘으면 이혼률이 0%라던데...
산울림
17/03/23 04:22
수정 아이콘
모든걸 다 하니까요.. 오히려 좀 더 제 목소리를.내시고 아내분에게 분담을 요구하면 잔소리가 줄어들겁니다. 정말 죄송한 말이지만 상황이 이쯤되면 무의식적으로 함부로 대하는 것이 잔소리의 이유일수가 있어서요..
Nasty breaking B
17/03/22 21:26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흐흐 이런 글 좋아요
17/03/22 23:03
수정 아이콘
크 저희 부부도 10년 연애-결혼 생활에서 크게 싸운건 3번정도? 불만이 커지기 전에 얘기하고 생활 리듬이나 패턴이 겹치다 보니 싸울 일이 별로 없더군요.
근데 이제 애가 50일도 안 지난지라 앞으로 이래저래 다툴 일이 많겠죠?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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