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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11/04 09:55:44
Name 글곰
Subject [일반] 병원일기 2일차 (수정됨)
  1일차 - https://pgrer.net/?b=8&n=78744

난생 처음으로 입원한 병원은 신기한 곳입니다. 예전에 다른 사람 병문안으로 몇 번인가 방문했을 때의 기억과는 달리, 한 사람당 LCD TV가 한 대씩 제공됩니다. 머리맡에 메달려 있고 헤드폰으로 소리를 듣게 되어 있어요. 그 바람에 하필이면 넥센 대 SK의 플레이오프 5차전을 볼 수 있었고, 넥센이 10회말에 연타석 홈런을 얻어맞으며 결국 침몰하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습니다. TV가 없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반면 냉장고는 제 딸아이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구형 모델입니다. 하기야 냉장고의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일만 잘하면 되지. 나는 냉장고보다 더 많이 늙었는데......

  침상은 돌침대보다 조금 더 폭신합니다. 여기 누워 자도 괜찮은 걸까 하는 의문이 가끔씩 떠오르지만, 뭐 괜찮겠지요. 발치에 있는 판떼기를 당기면 간이형 식탁이 되는데, 인체공학적 설계 따위는 엿 바꿔먹은 물건이라 거기에 식판 올려놓고 밥을 먹다 보면 허리가 아파옵니다. 그렇잖아도 옆구리가 아파서 저는 차라리 침상에다 식판을 올려놓고 방문자용 의자에 걸터앉아 밥을 먹습니다.
  
  입원해 있으면 아무 일도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람들의 방문이 잦습니다. 간호사분이 하루에 너덧 번씩 와서 수액 갈아주고 혈압과 체온 재고 몸상태를 체크해 줍니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도 매일 오셔서 쓰레기통을 비워 주시네요. 주치의의 회진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디가 아프세요'라는 질문을 들을 때입니다. 그 때마다 아픈 데가 다르라고요.(......) 이거 누가 봐도 보험사기꾼으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간호사분이 '교통사고 난 분들은 원래 그래요!'라고 쿨하게 한 마디 하고 간 덕분에 안심이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물리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치료기를 어깨에 두 개 옆구리에 두 개 붙이고 전기의 찌릿함과 적외선의 뜨끈함을 만끽하며 치료를 받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이거 받고 나면 확실히 아픔이 가십니다. 자주 받으면 좋겠는데 토요일은 오전밖에 안 된다고 하네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려와 병원 밥을 먹습니다. 생각보단 맛있습니다. 생각보단 말이죠. 그러니까 뭐랄까, 요즘 군대 생각보단 괜찮더라, 딱 그 정도의 뉘앙스죠. 그래도 몸을 생각해서 삼분의 일 정도는 꼭 먹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가족의 방문이 가장 반갑습니다.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괜히 눈물이 날 것 같더군요. 한 이십 분 가량 시답잖은 수다를 떨다가 병원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나가라 재촉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내고 돌아서니 쬐끔 쓸쓸하네요. 근육이완제와 진통제를 섞은 수액을 두 통이나 맞은 탓에 감성적이 된 거라고 괜히 변명해 봅니다.

  몸이 아픈 데다 한팔에 수액용 주사바늘을 꽂고 있는 사람에게 샤워는 꽤 고단한 작업입니다. 어설프게 한 손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는 데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하필이면 오른손 손등에다 바늘을 꽂아 놓아서 더 불편하네요. 그래도 샤워를 안 하면 홀아비 냄새가 날 테니 씻는 건 필수입니다. 결국 오후에 수액 갈아주러 온 간호사에게 부탁해서 오른손 손등의 바늘을 왼팔 팔뚝으로 옮겼습니다. 한결 낫네요.

  저녁시간이 되자 슬슬 잠들 준비를 합니다. 약의 성분 때문인지 몰라도 병원에 있는 내내 조금 졸린 느낌입니다. 그래서 해가 떨어지면 곧 잠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슬슬 자볼까 하던 차에 병실 문이 열리더니 세 번째 환자가 들어옵니다. 음. 성인이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아무래도 발달장애인인 것 같습니다. 콧노래와 웅얼거림 사이 어디쯤엔가 있는 소리를 끊임없이 내는군요. 문제는 그 소리가 큽니다. 많이 큽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보호자인 어머님의 휴대전화는 끝임없이 진동소리와 카톡 소릴 냅니다. 병실에 들어오고 삼십 분 사이에 통화를 네 통째 하고 있습니다. 시계를 보니 열시 사십분입니다.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합니다. 안 됩니다. 너무 시끄럽습니다.

  결국 새벽 한시쯤에 비틀거리며 걸어나가 간호사 분께 부탁해 다른 병실에 침구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눕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습니다.

  아침 여섯 시. 옆 침상 할아버지의 잠꼬대 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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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
18/11/04 10:00
수정 아이콘
수액을 원래 손등에 꽂는 건가요? 평생 바늘 무서워한 적은 없지만 듣기만 해도 엄청 아플거 같은데;;
요슈아
18/11/04 10:30
수정 아이콘
손등은 딱히 아프진 않습니다.
대신에 손목 옆 툭 튀어나온 부분에 동맥이 지나가는데 수술 전 검사를 위해서 거길 찌를 수도 있습니다...그게 리얼로다가 아픕니다.
18/11/04 10:47
수정 아이콘
바늘 뺄 때 조금 따끔한 거 빼고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좀 불안하긴 해요. 바늘이 피부 뚫고 나올 것 같은 걱정이....
22raptor
18/11/04 10:24
수정 아이콘
입원해보면 같은 병실 쓰는 환자가 조용한것도 복입니다.
18/11/04 10:48
수정 아이콘
낮에는 상관없는데 잘 때 그러니까 좀 괴롭더라고요.
handmade
18/11/04 10:40
수정 아이콘
예전에 입원했을 때 휴가나온 군인이 병실 동료?였는데 저녁시간에 여친이 오더니 둘다 침대 속에 들어가서 이불덥고 애정행각을 계속 하는데 성질 같아선 두 년놈을 이불로 멍석말이 하고 싶었지만 여린마음 동호회 회원이라 그냥 병실을 옮기는 것으로 참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도 열받네
18/11/04 10:46
수정 아이콘
[대박][충격]병실에서 휴가나온 군인이 여자친구와.avi
handmade
18/11/04 10:53
수정 아이콘
그런 방법이?!
혜우-惠雨
18/11/04 11:28
수정 아이콘
편하게 쉬셔야하는데 쉽지않네요. 도리어 더 피곤하신 것 같은ㅠㅠ
18/11/04 11:38
수정 아이콘
예전에 기흉으로 입원했었는데 아시는분은 아시겠지만 폐에 관꼽고 그 뽀글거리는 산소 물 나오는 통을 연결해 놓는데
문제는 이게 소리가 되게 시끄러워요.. 계속 뽀글뽀글뽀글
달고있는 저도 시끄러워서 짜증났었는데 그걸 6인실에서 하고있으니 아마 저때문에 잠 못이루신 분들도 많을거같아요.. 항상 죄송합니다
잉크부스
18/11/04 21:50
수정 아이콘
수액줄은 첨에는 불편하지만 조금 지나시면 수액줄로 줄넘기하면서 샤워를 하실 수 있어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 다만 적응하시기 전에 퇴원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6개월 있었거든요
18/11/04 22:59
수정 아이콘
6개월...저는 사흘도 미칠 것 같은데 6개월을 어찌 버티셨습니까.
잉크부스
18/11/05 02:13
수정 아이콘
수액줄로 줄넘기하면서 샤워하며 버텼습니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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