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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6/10 20:15:08
Name aurelius
Subject [일반] [역사] 87년 6월 10일의 항쟁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닙니다 (수정됨)
87년 6월 10일,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기념비적인 날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은 결코 갑자기 일어난 게 아니라 수많은 행동하는 양심들의 노력, 그리고 이들의 철저한 계획과 조직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먼저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그 유명한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말이 나왔죠. 정부는 물론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양심있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다행히 박종철의 죽음이 묻혀버리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박종철이 고문당해서 죽었다는 것이 최초로 밝혀진 것은 당시 서울지검 공안검사 "최환"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은 자체적으로 박종철의 사인을 규명하려고 했지만 최환 검사는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검찰로 넘기는 데 성공합니다. 무엇보다 부검의의 용기있는 행동도 이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오연상 교수가 박종철이 물고문에 의해 죽었고 이를 은폐하려는 경찰의 음모를 알아채고 중앙대병원 측에 시체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경찰은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이 아닌 병원에서 숨졌다고 조작하려고 했지만 같은 죽음이라도 고문실에서 사망과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 중 사망은 뉘앙스 자체가 다릅니다. 경찰은 이후 오연상 교수에게 수사관 3명을 붙여 감시하였고 그 다음날(15일)에도 감시를 당하였으나 화장실에서 언론사 기자를 만나서 박종철이 고문으로 죽었음을 알렸습니다. 소리소문없이 은폐될 수도 있었던 박종철 사건은 한 의사의 양심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분노하였고 이를 규탄하는 산발적 시위가 여기저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책임자(라고 쓰지만 실제로는 그냥 말단직원 2명)들을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위의 양상이 보통 그러하듯 추동력이 약해지면 결국 사그라들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1987년 5월 17일 노동자였던 부산상고 출신 황보영국씨는 "독재타도"를 외치며 분신을 하고 그 다음날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인해 분노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 결과 1987년 5월 18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김승훈 신부의 폭로로 진상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당시 보도지침과 언론통제를 통해 이를 은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5월 21일,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추가적으로 3명의 범인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정 검사장의 회고에 따르면 수사 중 3명의 공동정범이 있음을 인지했고 이를 서동권 검찰총장에게 보고했고, 서 총장은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당분간은 우리만 알고 있자고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 시기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폭로했다는 것은 중요한 모멘텀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국민의 분노는 치밀어 올랐습니다. 대학가는 물론, 재야인사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전두환 정부는 점점 타도의 대상으로 비춰졌습니다. 반대로 이는 당시 일반인들은 1980년대 초부터 학생들이 부르짖던 '민주주의' 따위의 가치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너무도 부도덕하고 잔인한 사건이 터지고 이에 대한 은폐시도가 일파만파로 드러나자 그제서야 문제의식을 느꼈다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박종철 사건에 이어 6월 9일 연세대학교의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서울의 중산층 시민들은 그제서야 정부의 야만을 더이상 못본 척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야당인사들도 점점 조직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국의 재야인사 2200여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이 결성됩니다. 국본과 같은 거대 조직은 결코 장난으로 결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종교계의 진보인사들, 예컨대 문익환 목사나 함세웅, 문정현 신부와 같은 사람들, 그리고 통일민주당과 같은 정치집단이 주도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재야정치인들 그리고 대학교 학생회들이 비밀스럽게 서로 연락하면서 행동을 기획한 결과입니다. 

당시의 연대, 연계, 조직 등은 요즘 학부생 조모임 짜듯이 했던 것이 아니라 투철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사회각기 계층의 용기있는 사람들이 다음 행동을 공동으로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을 바탕으로 6월 10일 국본의 주최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합니다. 그리고 국본은 민중항쟁의 뜻으로 오후 6시를 기해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 것 또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지침을 만들고 이를 전국의 뜻있는 사람들에게 배포합니다. 그 결과 택시운전수, 버스기사는 경적을 울리고 또는 손수건을 흔들게 되고 사무실에서 흰 휴지 두루마리가 내려오고 시민들은 흰 손수건을 들게 되었습니다. 

전국민적 저항이 명백하게 '시각화'되고 따라서 정부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중요한 기획이었죠. 사실 대규모 시위의 가장 큰 효용은 바로 이런 "시각적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재야단체와 시민단체의 시위가 터지자 정부는 야권의 집회가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법질서 파괴 행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발표합니다. 물론 국본은 비폭력을 고수하였지만, 일부 학생단체가 화염병이나 짱돌등을 이용한 '폭력(?)'을 사용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학생들은 "국민대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고 저항에 계속 에너지를 부여했습니다. 특히 이들이 시위를 계속하면서 명동성당에 들어가서 농성한 것은 각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학생들의 과격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취지에 공감했던 사람들은, 학생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故김수환 추기경과, 당시 박원순 변호사와 조영래 변호사가 명동성당에서 이들을 지원했습니다. 이에 따라 6월 12일에는 시위의 규모가 커지고 오후 1시 쯤에는 코스모스 백화점 앞에서, 그리고 그 이후 명동, 삼일 고가도로, 을지로, 광교 사거리, 시청 등에서 기습시위와 해산을 거듭했습니다. 자칫 단발적인 이벤트로 끝날 수 있었던 "국민대회"는 대학생들의 투지로 인해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또한 시위의 효율성을 재고하기 위해 대학교 학생회와 재야인사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동시다발적인 시시위를 기획하게 되고 이를 통해 경찰력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 18일 경찰의 최루탄 사용과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에 발발하고 거의 150만명이 되는 사람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군투입'을 진지하게 고려하였으나 당시 치안본부장은 경찰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보겠다고 전두환을 설득하였고 궁극적으로 당시 한국군의 평시통수권을 쥐고 있던 미국은 전두환에게 군사개입을 반대한다는 명백한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이로써 다행히 서울에서 광주와 같은 참극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6월 26일 국본은 전국 37개 도시에서 '국민평화대행진'을 개최하고 이는 정부에 대한 엄청난 규모의 압력이었습니다. 그 결과 6월 29일 호헌철폐가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의 이야기는 모두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6월 항쟁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당시의 항쟁은 수많은 용기있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는 분신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알렸고, 누구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죽었습니다. 다른 누군가는 안기부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다른 세력들과 비밀스럽게 연락을 취하고 조직을 결성하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검사나 의사의 신분으로서, 그 직무에 따른 양심을 지키면서 정의를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각자 모두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학생들은 학생회를 조직해서 그들의 '전매특허(?)'였던 시위를 하고 종교인들은 신의 가르침을 설파하면서 악을 규탄하고 의사는 부당한 압력에 맞섰으며 기자는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했고 검사는 범인을 밝히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은 사람들의 의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고 평범한 택시기사, 버스기사, 직장인, 학부모들은 경적을 울리면서 또는 손수건을 흔들면서 의로운 양심들을 외롭지 않게 하였습니다. 정말 각자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6월 10일을 매년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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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핀폐인
20/06/10 20:1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드랍쉽도 잡는 질럿
20/06/10 20:21
수정 아이콘
<1987>이 개봉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잊히면 안될 역사.
꿀꿀꾸잉
20/06/10 20:33
수정 아이콘
추천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카오루
20/06/10 20:39
수정 아이콘
학생 때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이대목에서 뭉클 하다가도 그 다음에 왜 노태우가...?하면서 띵하게 되지요
20/06/10 20:45
수정 아이콘
삼국지 읽을 때 매번 조조한테 호구잡히고 온갖 개고상 하던 유비가 한중공방전에서 처음으로 조조 털어버리는 걸 보고 희열을 느끼고 관우가 형주공방전에서 천하를 뒤흔들때 절정에 달하다가 갑자기 대뜸 손권의 뒤치기와 함께 관우가 죽으면서 현타 씨게 오는데 장비까지 엄청 허무하게 죽고 얼마 안가 유비까지 죽어버리면서 오는 그 좌절감과 유사한..(..)
VictoryFood
20/06/10 20:47
수정 아이콘
30년이 지난 후에 생각해 보면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순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결과적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87년 6월 이후 우리 사회는 큰 피를 보지 않고 민주사회로 연착륙했으니까요.
스칼렛
20/06/10 22:02
수정 아이콘
저도 결과적으로는 노태우 당선과 삼당합당이 민주화 연착륙에 기여했고, YS는 어쨌든 공언대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호랑이를 잡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회가 숙청된 이후인 DJ 당선때까지도 쿠데타 계획이 있었다 이런 썰이 있을 정도면 뭐...)
당시 사람들의 허탈함은 사실 상상도 안가네요.
VictoryFood
20/06/10 20:48
수정 아이콘
다시 되새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딪힘주의
20/06/10 20:53
수정 아이콘
현생에 치여 오늘 내일 날짜 분간도 못하고 사는데 좋은 글 덕분에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i_terran
20/06/10 20:58
수정 아이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전두환하고 노태우는 제3세계국가 독재자들이 하듯이 시위하는거 탱크로 깔아뭉개고 몇십만명 몇백만명이 됐건 학살하지 않고 얌전히(?) 6.29 선언을 해서 민주화의 발판을 만들어 준걸까요?

1. 하고 싶었으나 미국이 그러지 말라고 했다.
2. 하고 싶었으나 그러면 북한이 남침(?)할 빌미를 준다.
3. 직선제를 하더라도 선거를 통해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4. 88올림픽을 앞두고 너무 모양빠지는 짓은 별로였다.
5. 그정도규모의 학살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일어났고 그래도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였다.

저는 4번에 한표 던집니다. 많은 가르침을 주십시오 교수님들.
VictoryFood
20/06/10 21:04
수정 아이콘
4번 70%, 1번 30% 봅니다.
DownTeamisDown
20/06/10 21:11
수정 아이콘
4->1 이라고 봅니다.
4번이 없었다면 1번이 그렇게 강하게 안나왔을지도 모릅니다.
metaljet
20/06/10 21:36
수정 아이콘
5번도 무시할수 없는게 국회 야당비율이 40%에 유력 신문사들도 다 민간 소유였던 당시 5공을 쉽게 천안문 깔아뭉갰던 중국과 비교하면 실례죠
20/06/10 22:02
수정 아이콘
광주는....
DownTeamisDown
20/06/10 22:06
수정 아이콘
이미 12.12로 군권을 잡은 사람이기도 하고 (국회는 5.17 쿠테타로 해산) 지방인 광주에서 있었던 일인것도 컸습니다.
서울에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똑같이 하는게 가능했을지 의문이긴 합니다.
20/06/10 22:16
수정 아이콘
서울과 지방의 차이군요
에휴 ㅠㅠㅠ
DownTeamisDown
20/06/10 22:19
수정 아이콘
아무래도 외국인도 많고 해서 당장 막기는 힘들었을거거든요... 특히 해당시위에 미국인이 있는데 미국인을 폭행하고 해했다면...
미국의 반응이 불보듯 뻔했겠죠...
metaljet
20/06/11 12:19
수정 아이콘
그보다는 군인과 군복을 벗은 정치인(적어도 흉내는 내던)의 차이라고 봐야겠죠. 80년과 87년의 시간적 차이는 큽니다.
20/06/10 22:21
수정 아이콘
4+1에다가 문어아재(더 심한 단어 썼다가 고칩니다...)가 정통성이 역대급으로 최하인 탓도 있습니다. 박정희에 향수를 갖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있지만 전두환 추앙하는 애들은 일베에 소수랑 전두환 친구들 밖에 없죠 뭐. 그리고 어느 정도는 3도 포함되는게 3을 만드려고 김대중 출마를 노태우측에서 부추겼다는 의견도 있어요. 사실 김영삼으로 단일화했으면 군사정권의 필패였죠.
루트에리노
20/06/10 22:22
수정 아이콘
3번은 아닌듯 합니다
메오라시
20/06/11 05:33
수정 아이콘
광주항쟁 때문입니다.

6월항쟁 참여자와 기자, 연구자 가운데는 6월항쟁에 군이 나오지 않은 것은 미국이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중략)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은 미국과 직접 관계가 없다고 볼 수밖에 없다. (중략)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내부에 있었다. 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위원의 서명이 필요한데, 총리서리나 내무부장관 등은 계엄에 반대할 수 있었다. 더 큰 이유는 노태우와 민정당에 있었다. 노태우는 6월 19일 군 출동 준비 지시를 듣고 이기백 국방부장관, 안기부장 등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출동만은 불가하다는 점을 건의해달라”고 말했다. (중략) 노태우와 민정당 당직자들은 국이 나오면 모든 정치 일정이 뒤바뀌어 자신들의 제2기 권력 창출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심지어 쿠데타가 일어나면 자신들이 희생양이 될 수도 있었다. (중략) 군이 나오지 않으려는 중요 요인은 광주항쟁에 있었다. 광주항쟁에서의 경험과 그 이후 운동권의 광주 학살자 처단 주장은 군을 괴롭게 했을 터인데, 6월항쟁에서도 광주처럼 사생결단하고 시위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군이 출동하더라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중략) 전두환도 6월항쟁에 군이 나서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전두환은 어느 누구보다도 광주항쟁이 뇌리에서 떠날 수 없었다.

책 『6월 민주항쟁』 중 「6월항쟁의 전개와 의미」 편에서 질문에 대한 답변과 관련된 부분을 발췌했습니다.
메오라시
20/06/11 05:43
수정 아이콘
그리고

6·29 전날인 6월 28일 전두환은 “군대가 나오면 항상 쿠데타 위험이 있어”라고 말했는데, 이 부분이 특히 중요하다. 12·12, 5·17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인 전두환은 쿠데타가 일어나면 자신도 정승화(12·12쿠데타)나 김종필(5·17쿠데타)처럼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6월항쟁은 쿠데타 군의 전두환 처단에 더 없이 명분이 좋을 수 있었다. (중략) 전두환은 퇴임 후 자신의 안위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썼다. 전두환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해도 이긴다고 권한 사람들도 대개는 두 김이 경합할 것이라는 점을 깔고 권했을 것이다.

같은 책에서 발췌.

위 다섯 항목 중에서 가장 진실에 가까운 항목은 3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퀵소희
20/06/10 21:24
수정 아이콘
오죽하면 앞날이 고속도로인 분들조차 인생을 거셨을지. . 그시기가 그만큼 처참했다고 생각되네요
호머심슨
20/06/10 21:31
수정 아이콘
죽쒀서 새누리에게 준
HYNN'S Ryan
20/06/10 21:5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20/06/10 22:0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미국은 전두환에게 군사개입을 반대한다는 명백한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왜 미국이 이때는 이랬으면서 광주에서는 그랬는지...
스칼렛
20/06/10 22:04
수정 아이콘
광주에서의 침묵으로 한국 민주화진영의 반미감정이 늘어난 것을 보고 아 또 그러면 안되곘구나 싶었을 수도 있지요.
눈시BB
20/06/10 23:19
수정 아이콘
당장 구체적인 걸 찾아드리기에는 나무위키 이상은 힘들겠고...

광주 때는 이란 대사관 인질 사건 등으로 거기에 정신이 더 팔려있었던 점은 있겠죠. 그리고 설마 그런 짓까지 벌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 싶구요.
6월에 미국이 한 걸 보면 광주의 참상을 안 충격이든, 막나가는 모습에 대한 반감이든, 이후 민주화 세력의 반미 움직임 때문이든간에 오히려 그 때의 광주가 미국을 바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6/10 23:30
수정 아이콘
나무위키라도 검색어를 주신다면 열심히 읽어 보겠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눈시BB
20/06/11 10:10
수정 아이콘
답이 늦었네요. 그냥 5.18 항목이랑 6월 항쟁 항목이라 ^^;; 간단히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머심슨
20/06/10 23:48
수정 아이콘
(수정됨)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미국은 원래 3세계에서 민주정권보다는 (친미)독재정권을 선호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친미지만 약간 개기던 박정희가 예상밖의 사고로 가고 다른 독재자가 대신 한다고
설치니 당연히 미국은 묵인해주고 대가로 친미독재 받는게 이득이죠.
독재자가 다른 독재자로 대체되는 과정은 굉장히 혼란스러우나 (미국도 어버버 했을지도)
이미 7년해먹은 독재자가 시민들 또 쏴죽이고 정권연장하는거는 간결한 사태이고 그거까지 묵인한다?
부패한 베트남정권의 악몽이 없었으면 그렇게 했을지도??
LightBringer
20/06/10 22:08
수정 아이콘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죠. 1987 극장에서 볼때 차올랐던 국뽕과 감동이 또 그리워지네요...
20/06/10 22:24
수정 아이콘
저 중산층의 정치세력화가 성공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저 요소의 부재때문에 중국의 민주화는 택도 없는 소리고 설사 된다 한들 한국에서 바라는 그런 형태의 민주화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중국처럼 독재 권력이 중산층들을 흡수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리는 순간 민주화는 요원하다고 봐요. 그 시스템의 극단이 싱가포르고.
20/06/10 22:26
수정 아이콘
제가 대학들어가고 바로 일어난 역사죠. 87년. 저도 서울역 앞에 모였던 그 인파속에 있었습니다!
저당시 "넥타이"부대가 바로 제 부모님, 삼촌 세대시고 (30-40-50)년대 생들...그 분들중 많은 분들이 현 정부에 반대하는게 아이러니 합니다.

당시 제 여친이 연대다녔는데, 우상호 서대협 회장 멋있다고 얼마나 자랑하던지...
ArthurMorgan
20/06/10 23:04
수정 아이콘
어릴 적에 큰 대학교 근처에 살았습니다. 친구들과 개울에서 놀고 화단을 뛰어다니던 시절에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동네를 덮치면, 아주머니들이 나오셔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셨죠. 아직 환한 빛이 가시지 않은 시간에 더 뛰어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재채기에 기침이 나는 그 냄새가 싫어서 엄마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때 그것이 '데모'때문이라고 들었지만, 데모가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동네 파출소에 걸려있던 대머리 대통령 할아버지의 사진이 언젠가 보통사람 할아버지로 바뀌고, 또 눈이 작은 학실히 할아버지로 바뀌는 것이 이 땅의 역사에 어떤 의미인지 그 때엔 몰랐습니다. 그리고 자라고 배우며 그 의미를 깨닫게 되면서 새삼 생각했습니다. 그 매캐한 냄새를 온몸으로 받아가며 싸웠던 많은 국민들이 무엇을 쟁취해낸 것인지를... 그 열매가 달콤함을 많은 시간 잊고 사는 것이 죄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달콤함의 가치와 의미가 퇴색되는 일이 없도록, 그 달콤함을 전용하고 독점하는 일이 없도록 그날 진압봉과 최루탄 앞에 서 있던 많은 선배들이 '당시에' 가졌던 마음을 우리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20/06/11 01:25
수정 아이콘
(수정됨) 87년 헌신과 희생으로 이룩한 6공화국 체제가 지금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졌죠.
새강이
20/06/11 08:33
수정 아이콘
한국 근현대사는 시대의 과업을 이뤄낸 위대한 세대들의 집합이죠..

광복 - 산업화(경제) - 민주화(정치) - 정보화(과학기술) - 한류(문화) 로 이어지는 흐름..

과연 이 흐름이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까지 이뤄낼지는 지켜봐야하겠네요
유료도로당
20/06/11 13:53
수정 아이콘
영화 <1987>이 좋은 점이 바로 본문과 같은 점을 잘 살려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87년 항쟁은 어떤 한 영웅이 이끌어간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조금씩 힘을 보태고 용기를 낸 결과가 합쳐진 것이라는 그 사실을, 한명의 메인 주인공을 두지 않고 여러 인물들이 군상극으로 풀어나가는 연출을 통해 너무나 잘 드러냈다고 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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