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09/08 21:30:47
Name 활자중독자
Link #1 https://brunch.co.kr/@4c20fb3d157646f/32
Subject [일반] 남몰래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다"는 말을 했다지요(다케시가 '하나-비' '소나티네' '기쿠지로의 여름' 등의 영화로 한국에서 나름 인기를 끌었을 때, 그래서 다케시의 에세이마저 국문으로 번역되어 출간되던 시기에 유행하던 말로 기억합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저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가족을 '애증의 관계'라고 하지요.  사랑하는 것 같긴 한데 막상 마주하면 거슬리고, 오랜만에 만나면 잠깐 반가운데 긴 시간을 함께 보내면 짜증나는.  재산 분쟁이나 학대와 같은 불행한 일을 겪지 못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지인들로부터도 이런 불평을 들은 적이 있는 것을 보면, 과거의 불운이 애증의 필요조건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이런 애증이 '가족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운명의 굴레에 속박되어 저주밖에 할 수 없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처럼, 누군가에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것 이외에는 가족에게 실제로 취할 수 있는 조치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이거든요.  물론 상대방의 부당함을 설득하거나 심지어는 의절할 수도 있지만, 분가하여 물리적으로 떨어져 산다면 명절에 하루이틀 웃는 척 하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니, 굳이 극단적인 조치까지는 취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지요.

제 경우에는 주로 가족의 '원치 않는 호의'가 애증의 결과를 불러오는 편입니다.  분명히 저는 필요 없다고 말했고 객관적으로도 불필요한 일임에도, 제 가족은 지레짐작하여 호의(라고 생각하는 것들)를 베풉니다.  실제로 그 호의는 저에게 어떠한 효용가치가 없음에도(심지어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킴에도), 어쨌든 무언가를 받은 저는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게 되고, 그에 따라 보답(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양 당사자는 각자 호의와 보답을 자신의 쓰레기통에 처넣으며 '적어도 할 일은 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물론 뭔가를 제공할 만한 여유가 있는 가족을 둔 것이, 서로 헐뜯고 소송하는 가족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저에게는 가족을 '의절'할 어떠한 객관적인 이유도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이렇게 가족에 대해 불평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결코 행복한 처지에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가족이 -100을 제공함에도 나는 계속 +100을 주어야 한다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합니다.

한국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통해 성장하면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부족했듯, 저와 제 가족들도 먹고사니즘에 급급하여 어느 정도 자리잡기 전까지는 깊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친 소통의 단절이 지금의 애증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랬다면 과연 달라졌을까'는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래도 사랑하시나요?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人在江湖身不由己
22/09/08 21:40
수정 아이콘
다른 말 필요없이 [가족 by 가족], [케이스 by 케이스] 라고 생각합니다.
비온날흙비린내
22/09/08 21:48
수정 아이콘
누군가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아프다고 하면 눈물이 나지만 뒤집어 놓은 양말 하나에 살의가 느껴지는 게 가족이라던가요 크크
대박났네
22/09/08 22:16
수정 아이콘
잃은뒤에 후회할걸 알면서도 오늘도 역시 모질게 대하고야 마는 존재들
박보검
22/09/08 22:18
수정 아이콘
할아버지 유산문제로 아빠친척들간에 개싸움중이라 더 와닿네요
22/09/08 22:23
수정 아이콘
뭔가 의절이나 원수같은 가족이라고 하면 좀 전형적으로 생각나는 구성이 있는데(도박, 술, 폭력, 무관심, 빚, 상속문제 등등)
사실 그렇게 단순한 경우만 있지는 않죠.

뭐 하나빼면 그래도 정상적인데 그 하나가 쌓이고 쌓이면 꼴뵈기가 싫은걸 넘어 어느샌가 마음속의 연결선자체가 잘려나가있다고 해야되나..
가족은 잠깐 보는게 아니라 수십년 보는거라 이런 언뜻보면 사소한 뒤틀림을 좀 제때제때 교정을 해줘야 하는거 같아요.
앙겔루스 노부스
22/09/08 23:04
수정 아이콘
혈연이라는 점을 빼고 봤을 때도 성격이나 취향이 맞는 사람인가가 문제라고 보긴 합니다. 애초에 가족이란게 상호간에 강한 책임감을 가질것이 강요되는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저런게 안 맞을 경우의 스트레스는 월등히 올라갈 수 밖에 없죠. 이것도 물질적 트러블이 없이 평화로울때의 이야기일 뿐이지 싶고, 물질적으로 일방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관계라면 더 말할 것도 없겠죠.
minyuhee
22/09/08 23:22
수정 아이콘
자식이 미워서 유언장에 그놈 죽어야한다고 써놔도 재판걸면 재산 상속받고, 부모가 미워도 부모가 재판걸면 부양비 내야합니다.
스노우
22/09/09 01:28
수정 아이콘
네. 세상에 찾는 이 아무도 없이 혼자이고 싶진 않으니까요. 나이를 먹을수록 나를 찾는 사람이 줄어드는 와중에 그래도 연락하는 사람들은 결국 가족입니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뭔가 얻거나 잃는다는 걸 따져본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이 제겐 신선하게 느껴지긴 합니다. 아무래도 가족 나름이 겠죠.
카이.엔
22/09/09 03:08
수정 아이콘
가족을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좋아할게 없어도 사랑해야 하는게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랑할 수 있을지는 세월과 인내만이 말해줄 겁니다. 상처를 봉합하려는 대화보다 때로는 상처를 잊기 위해 거리를 두는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새살이 돋아 새롭게 관계를 만들 기회를 기다리는 거지요.
아니아니
22/09/09 04:42
수정 아이콘
저는 부모님과 형제의 차이가 큽니다. 형과는 좀 어긋나는 바람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반면, 부모님과는 별 일이 다 있었지만 여전히 제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죠.
임전즉퇴
22/09/09 06:41
수정 아이콘
어린애마냥 싫으면 싫구나 투명하게 서로 알리고 알 수 있어야 가족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그렇지 못할수록 가족 아닌 다른 존재가 되죠. 그런 기준에서 보면 화목함도 외부평가일뿐 경우에 따라 허실이 있겠죠.
물론 막질러대서 화목하지 않은 동거자들보단 차라리 일정 수준의 사교성이 보장되는 화목한 단체가 낫다고도 하겠습니다. 다만 앞의 조건이 쉽지 않은 것이라서.. 민낯을 보일 수 있되 깨끗이 씻기는 하는 관계여야겠죠.
크라상
22/09/10 07:42
수정 아이콘
편치 않은 가족을 둔 사람으로서 주변에 매주 모이고 화목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더군요
화목하면 응원군이 되고
그렇지 못할 땐 족쇄같은 느낌이죠
밀리어
22/09/11 04:01
수정 아이콘
가족은 친구나 지인처럼 밉다고 손절할수 없는 관계기에 틀어지면 정말 난감하지만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믿을수 있는 우리편입니다.

가족이 본인의 일에 개입해서 도와줄수도 있지만 반대로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을거구요. 이게 문제가 심해지면 자신의 사업이나 결혼에도 훼방을 넣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에게는 분명하게 이렇게 하면 된다 안된다 의사표현을 해야합니다
22/09/11 08:53
수정 아이콘
다섯번째 문단 정말 공감되네요, 마치 제 마음처럼...
특히 [가족이 -100을 제공함에도 나는 계속 +100을 주어야 한다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합니다.] 이 부분... 정말로 차라리 가족이, 정확히는 부모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22/09/11 18:21
수정 아이콘
가족은 사실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죠
특히 형제자매는..
라라 안티포바
22/09/12 13:48
수정 아이콘
눈치빠른 한국인들이 출산과 가정을 이루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기도 하죠.
서로가 서로를 너무 속박하는 관계랄까요.
그런데 결속력이 약한 가정은, 외부로부터 총력전을 펼쳐야하는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상 생존이 어렵고,
결국 결속력이 강하면서 긍정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가정만이 살아남고, 가치있다는 국민적 합의가 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런 가족 시스템에서 '깍두기'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수 밖에 없고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555 [일반]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연휴에 읽을만한 웹소설 추천.txt [33] 헤후17039 22/09/09 17039 3
96554 [일반] 2022년에 방영된 애니 주제가를 들어봅시다 [10] 라쇼15816 22/09/09 15816 6
96553 [일반]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9] 영호충12904 22/09/09 12904 5
96552 [정치] KAI 사장 취임 3일 만에 KF-21 개발의 산증인을 해고했네요. [94] 아무르 티그로26611 22/09/09 26611 0
96551 [일반] 영국 엘리자베스2세 건강에 대한 상황 [110] 조말론27519 22/09/08 27519 1
96550 [정치]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사퇴 / 새 비대위원장 정진석 / 이준석은 또 가처분 신청 [35] Davi4ever19659 22/09/08 19659 0
96549 [일반] 남몰래 내다 버리고 싶은 가족 [16] 활자중독자17067 22/09/08 17067 8
96547 [정치] 바이오 주식은 질병관리청 관련 주식이 아니다? [52] 능숙한문제해결사17439 22/09/08 17439 0
96546 [일반] 네이버 지식인 엑스퍼트 신청 후기 [34] SAS Tony Parker 14058 22/09/08 14058 7
96545 [일반] MSI: 공식 스토어에서 AMD X670 메인보드 가격 공개 [33] SAS Tony Parker 18545 22/09/08 18545 0
96544 [일반] 책 후기 - <페스트의 밤> [5] aDayInTheLife16447 22/09/08 16447 0
96543 [일반] [테크히스토리] 애플이 프린터도 만들어? / 프린터의 역사 [5] Fig.177385 22/09/07 77385 15
96542 [정치] 대통령이 국민을 개무시하는 신박한 방법 [110] 갈길이멀다31454 22/09/07 31454 0
96541 [정치] 이상민 장관 "주요기업 및 대학 지방이전 추진" [161] 우주전쟁25127 22/09/07 25127 0
96540 [일반] 정통 판타지 감성 노래 모음 [20] 라쇼14599 22/09/07 14599 8
96539 [일반] 심상치 않은 러우전 전황 소식 [54] 겨울삼각형17192 22/09/07 17192 1
96538 [일반] (스포)요즘 본 만화 후기 [9] 그때가언제라도10093 22/09/07 10093 0
96537 [정치] 여성의당 해산위기 [18] 나디아 연대기16167 22/09/07 16167 0
96536 [일반] 결국은 걸리네요. [22] 네오크로우15151 22/09/07 15151 0
96535 [정치] 전광훈이 이겼습니다: 전국단위 세력의 부동산 알박기는 필승전략인가 [105] 계층방정20533 22/09/07 20533 0
96534 [일반] 시하와 칸타의 장 - 마트 이야기 : 이영도 감상 [4] 닉언급금지7859 22/09/07 7859 2
96533 [일반] 러시아, 북한에서 포탄과 미사일 구입협상 중 [76] 어강됴리15726 22/09/07 15726 1
96532 [일반] 망글로 써보는 게임회사 경험담(15) [25] 공염불11297 22/09/07 11297 17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