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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2/21 09:04:00
Name VrynsProgidy
Subject 이름모를 강아지를 떠나보내며 (수정됨)

중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해, 친한 친구 둘과 함께 은우라는 친구의 병문안을 갔던적이 있다.

은우와 나의 관계는 지금 생각해도 퍽 이상했다. 우리는 같은 반이었던적도 없고, 이야기를 딱히 많이 나누지도 않았다. 함께 게임을하거나 밥을 먹은 기억도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우리는 단지 같이 노는 친구가 겹친다는 이유만으로 원래 친했던것처럼 서로를 대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겹치니까 친해지는 케이스는 흔하지만, 마치 여태까지 많은 시간을 공유해온것처럼, 자연스레 서로를 친하게 대하고 여기는 경험은 처음이었는데, 아마도 은우가 마음이 따뜻한 친구라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은우에게 따뜻한 치킨을 사먹이고,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때는 오후 10시경, 환자의 안정을 위해 서둘러 병원을 나와 집에 돌아가는 남중생 세명은, 으레 그 나이대 남자 셋이 모이면 저지르는 객기를 저지르기로 하는데, 바로 병원에서 집에 걸어서 돌아가는것이었다.

누군가는 고작 그것이 무슨 객기냐고 할 수도 있을테지만, 병원은 당산역, 우리가 살던 동네는 가양동으로 버스로 10 정거장 자동차로도 20분 정도가 걸리는 꽤 긴 거리였고, 무엇보다도 셋다 초행길에 심지어 길조차 제대로 몰랐다는 것, 깊은 밤이었다는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미친짓이이라 할만 했다, 그것을 허락해준 우리, 친구들의 부모님도 참 대단하신분들이다.

여섯개의 다리는 버스창으로 스쳐 지나가는것이 익숙한 풍경들의 뒤를 좇으며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걷는 다리가 여섯이 아닌 열이 되었음을 느낀다. 괴한 둘이 우리를 쫒아온것도, 우리중에 누군가가 닥터 옥토퍼스로 변한것도 아니었다. 단지 고가도로 근처를 지날때, 강아지 한마리가 이유없이 우리를 쫒아오기 시작했을뿐이다.

나와 함께 걷던 두 친구중 한명은 키우던 강아지와 너무 정이 깊어진 나머지 그 어린 나이에 벌써 수의사를 진지하게 지망하던 친구였고, 나머지 한명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개를 기르는 친구였으니 우리는 아마 강아지 입장에서 개 냄새를 맡았던가 어쨌던가 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서로 그 강아지가 자기를 쫒아오고 있는거라며 뜬금없이 자존심 싸움을 시작한다. 개를 길러본적도, 특별히 강아지를 좋아하지도 않고 인연도 없던 나로서는 그냥 조용히 멋쩍은 표정으로 셋과 그저 걸음을 맞추어야만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좀 같이 걷다 돌아가겠지하던 강아지의 근성이 심상치 않다. 어느새 목동을 지나 염창과 등촌의 경계선까지 도달했는데, 지치지도 않고 발발대며 계속 우리를 쫒아온다. 저러다가 자기가 있던곳까지 돌아갈 수는 있나? 하는 내 걱정은 안중에도 없이, 친구들은 누굴 끝까지 쫒아갈지 내기하자는 실없는 소리를 한다.

집이 가장 가까운 친구 한명이 가장 먼저 대로에서 이탈한다. 셋의 시선이 모두 강아지에게로 쏠린다. 그러나 강아지는 하나가 아닌 둘을 택했다. 버림받은 친구의 부들대는 모습이 퍽이나 꼬숩다. 그냥 니네가 둘이라서 그렇다, 더 걷고 싶어서 그렇다. 다른 목적지가 있다.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친구의 뒷모습을 뒤로하고, 선택받은 승자와 그를 승자로 만들어준 강아지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선다. 역시 수의사 지망생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전생이 궁금해진다.

그렇게 5분 정도 더 걷고, 집이 조금 덜 멀었던 그 친구, 그리고 임시 동행인과 헤어져야 할 그 순간이 다가온다. 친구와의 이별뿐이라면야 일시적인것이고, 수없이 겪은것이라 아무렇지도 않았을테지만, 두시간 가까이를 함께했던 아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네발 달린 친구와의 이별은 생각보다 씁쓸했다. 그렇게 둘을 보내고 뒤돌아 걷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한 걸음을 내딛는데 덤으로 발소리 네번이 더 들려온다. 친구가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본다. 나의 어떤면이 제법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마치 누군가와 진짜로 나눠 걷는듯이 가볍게 느껴졌다.

그렇게 잠깐의 착각이 끝나고, 어느새 당시 내가 살던 우리 집, 세현 빌라의 정면이 눈에 보인다. 도착했다. 여전히 강아지는 날 쫒아와 내 옆에 서있다. 그리고 난 그제서야 중요한 사실을 눈치챈다. 나는 이 아이와 결국에는 헤어져야 하며, 어차피 그래야 했다면 다른 친구들과 함께가 더 좋았다는것을 말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유리로 된 대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위로 걸음을 옮긴다. 그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올라가 집 문을 열고 들어가야만 하지만,신화적 영웅이었던 오르페우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내가 해낼 수 있을리 없었다. 채 몇계단 올라가지도 못한채 나는 뒤를 돌아본다, 그 이름모를 강아지는 유리문 너머 날 쳐다보고 있다.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위에서는 우리집이라고 했지만, 사실 세들어 사는 집이고, 가족들 셋이 살기도 벅찰만큼 좁은집이다. 우리 먹고 사는것도 빡빡한 상황에 강아지를 키울수는 없었다. 헤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나는 멈춰서는것을 택하고 MP3을 꺼내고 계단에 주저앉는다. 그렇게 오늘 두시간을 함께 걷던 둘은,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쳐다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1시간 가량이 지난 후에, 4개의 다리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동물의 표정을 읽을 줄 모르지만 한시간동안 바라본 강아지의 표정은 결코 기분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표정조차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동물 한마리가 등을 돌려 걷고 있는 모습일뿐인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파온다. 시야에서 강아지가 사라진후에야,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간다.

이 날 이후로, 형편이 나아지고 동물을 키우자는 이야기가 집에서 몇번이고 나왔지만, 나는 그 강아지의 뒷모습을 생각해 매번 고개를 내저었다. "이 정도 여건에서 동물을 키울거라면, 차라리 그때 그 강아지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나를 어울리지 않게 완벽주의자로 만들었다. 이만하면 키워도 괜찮지 대체 뭐가 문제냐는 동생의 투정도, 우리 형편에 죽어도 동물은 안된다고 역설하시던 어머니의 변심도 나를  움직이게 만들 수 없었다. 집에는 동생과 어머니의 욕구 불만의 상징인 인형들만 늘어갔고, 인형들은 어느새 서로의 이름을 헷갈릴 정도로 대가족을 이뤘다.

그리고 최근, 수입면에서 한결 또 큰 발전이 있었던 우리집에선 또다시 동물을 키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는 우리가, 내가 새 식구를 맞이할 준비가 되었음을 느낀다. 어떤 핑계도 이제는 댈 수 없다는것을 알기에, 마음을 다잡고 글을 적기 시작한다.

잊혀지지 않을 하룻밤을 같이 보낸 작은 친구를 추억하고 보내며, 이제는 그때의 너처럼 나도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나 걸어보려 한다. 이제는
진짜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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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owWarriors
18/02/21 09:27
수정 아이콘
아 글 좋네요. 이름모를 강아지의 눈이 자꾸 떠올라 좀 울컥했습니다.
사악군
18/02/21 09:38
수정 아이콘
나를 선택해준 것을 나의 상황때문에 내가 원함에도 선택할 수 없다는 공포는 어린 시절 막장드라마들이 깨우쳐줬죠..

행복한 반려동물 입양이 되시길.
VrynsProgidy
18/02/21 09:43
수정 아이콘
어린 시절 무슨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그런 교훈을 깨우치셨나요... 덜덜
사악군
18/02/21 09:46
수정 아이콘
아 사실 평범한 드라마들이죠..자넨 우리 딸(아들)과 어울리지 않아! 류있잖아요 크크크
글루타민산나룻터
18/02/21 09:47
수정 아이콘
포켓몬스터...?
한종화
18/02/21 10:10
수정 아이콘
글 좋네요. 짧은 성장소설 읽은듯한 느낌..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도 생각나고요..
18/02/21 10:41
수정 아이콘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침부터 눈시울이 붉어져서 혼났네요.
집에서 자고있는 저희 강아지도 생각나고 몇년전 무지개다리 건넜던 강아지 두 녀석도 생각나고 그러는군요.
사람과 강아지는 서로에게 정말 축복인거 같습니다.
좋은글 너무 감사 드립니다.
18/02/21 14:04
수정 아이콘
호오... 개덕후로서 정말로 즐겁게 읽었습니다.

제가 일하는 동물보호소에 얼마전에 들어온 큰 개가 하나 있는데, 워낙에 크다보니 여성 봉사자들이 산책을 시킬 엄두를 못 냅니다. 근데 동물보호소 봉사자들은 대다수가 여성이기 때문에, 이 개는 결국 산책을 다른 개에 비해서 반 정도밖에 하지 못하지요. 그러다보니 스트레스가 쌓여서 성질을 내기 시작했고, 그러니까 더더욱 아무도 산책을 못 시켜요. 보호소에 얼마 안되는 남성 봉사자다보니 제가 갈 때는 그 개를 데리고 노는데, 다른 개들은 20 분 정도 산책하고 나면 개집으로 돌려보낼 때 거의 저항이 없는데, 이 놈은 30분 넘게 놀아줘도 다시 자기 방에 들여보낼 때에는 슬퍼하는게 막 느껴지더라고요.

뭔 소리를 하고 싶었던 건지 저도 잘 모르겠는데, 하여튼 개들은 사람이 놀아줄 때 제일 행복한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본의아니게 그렇게 개조했지요. 그러니까 일단 개를 입양한 사람이라면, 자기 개랑 많이 놀아줍시다.
콩탕망탕
18/02/21 15:59
수정 아이콘
강아지의 눈빛이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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