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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03/23 12:48:46
Name 요한
Subject 페미니즘에 관한 개인적인 이야기. (수정됨)
쓰다보니 반말이되서 경어 생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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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복수전공 중 하나가 영어영문학이었다.



예전에 이런글도 쓸정도로 (https://pgrer.net/?b=8&n=72384) 내 대학생활은 인생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로 모교에 대한 혐오를 대외적으로 표출하고 지금도 내가 학교에 대해 가지는 증오심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전과하고 난 뒤의 전공 수업들은 제법 인상깊었다.

워낙에 학교가 전공 교수진도 별로 없고 커리큘럼도 빈약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 트랙에 속하는 수업은 거의 전부 다 신청해서 들었었는데 사실상 유일하다시피 했던 문학트랙의 전공 여교수가 한 분 계셨고 내가 대학에 지니는 뿌리깊은 원한과는 별개로 이분의 수업을 들은것 만큼은 이 학교에 있는 동안 누릴 수 있었던 몇안되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수강한 전공수업의 거의 절반 이상이 이 교수의 수업이었다. 영미문학개론부터 영미소설 심화, 영미희곡 심화, 영미시 심화, 영미문학비평사 등등등.....


나의 전공교수는 누구라도 보는 순간 지적인 매력이 외적으로 뿜어져 나온다고 공통적인 반응을 보일만한 조용하고 차분한 여교수였다. 중년 이상의 여성에게 순전히 지성이라는 것으로 매력을 느껴보게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기는 글 읽는 것이 좋아 대학을 갔고 그러다보니 유학을 가고 그러다가 박사트랙을 밟고 정신차려보니 인문대 교수가 되어있었다고 했다. 나는 동기들끼리 그 분을 문학소녀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충분히 그렇게 불릴만했다.


내가 재학 당시에는 그렇게 크게 개의치 않았던 사실이었지만, 교내 교수진 소개란에 있는 그분의 프로필에는 다소 특기할만한 이력이 있었다. 어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어느 교수 프로필에서나 볼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어느 주제로 연구를 했으며 어떠한 글들을 기고했는지, 교수 경력이외에 무슨 협회나 기관 등에서 자문을 했는지 등등의 이력이 기재되어있는데 그 분의 연구과제와 소속협회, 그리고 졸업논문 주제에서 공통적으로 표기되었던 단어가 있었다.




[페미니즘]





그렇다. 그 분은 국내에 있는 [서양 페미니즘 문학]에 있어선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이었다.





여기서 그 분의 명성에 혹여나 누가 될까 싶어 확실히 단언 하자면 그 분은 페미니즘을 다루는 문학의 권위자였던 것이지 본인을 단 한번도 페미니스트로 지칭한 적이 없다. 나는 그 분의 수업을 4년 가까이 들으면서 그 어떠한 수업에서도 페미니즘의 피읍도 본인의 입에서 먼저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학생들이 그런 주제로 에세이나 리포트를 쓰는 것에 대해 같이 논의하면서 몇 번인가 언급된 적은 있긴했다. 우리가 강의중에 다뤘던 텍스트 중에는 [버지니아 울프][실비아 플라스],[샬럿 길먼] 등의 작가들이 등장하긴 했었으니까.

하지만 결코 그녀는 페미니즘 자체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 자신의 강의주제를 해당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적극적으로 다루는 주제 또한 아니었다. 애초에 그 분께서는 수업중에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굉장히 경계하며 또한 조심스러워했었다. 그나마 당시에는 생소했던 서양의 페미니즘 운동 이었던 [슬럿 워크] 등을 소개하는 정도 수준의 언급만 있었을뿐, 본인이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 홍보한적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다.



우리가 어쩌다 수업에 다루는 페미니즘이란 요새 언급되는 것들이랑은 좀 달랐다. 일례중에 그분의 수업중에 다뤘던 중편 소설중 [틸리 올슨][Tell me a Riddle]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시놉시스를 대충 훑자면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한 늙은 노여사가 지금까지 남편과 자식, 손자 손녀들을 위해 온전히 희생당했던 본인의 삶에 회한을 느끼고 노년기라 불리우는 이 시점에 와서 한 가정의 엄마되기를, 한 남편의 배우자 이기를 포기하고 말년에 와서야 진정한 본연의 자유함을 누리고 싶어하는 내용으로 요약할수 있겠다. 그 교수께서 작품에서 주목하는 점은 [좋은 엄마 노릇하기]라는 개념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에 대해, 그것이 과연 진정한 여성성 내지는 인간성을 담보로 해서 구축될 수 있는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는 것에 가까웠다.



수업시간의 절반 이상은 토론시간이었고 해당 교수의 다른 과목들은 항상 그런 강의 포맷을 고수했다. 텍스트는 수업전에 읽고 오고 수업시간 30-40분 가량 정도만 텍스트에 대한 메타포 분석. 그리고 나머지는 전부 토론.  난 그녀의 수업 스타일이 너무 좋았다.




비록 내가 수박 겉핱기 식일수도 있지만 여튼 나는 이점은 확실히 말할 수 있을것이다. 페미니즘을 인터넷이 아니라 텍스트로써 배웠다는 것을.  



실제 삶과는 유리된 고등교육으로 꼰대부심 부리는거 아니냐고 비아냥거릴수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인정한다. 나 꼰대 맞다.





그녀가 페미니즘에 언급하는 것에 조심스러웠던 것처럼, 나 역시 페미니즘 논의에 항상 조심스러웠고. 그건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이 하나도 없어서도, 아는게 없어서도 아니다. 문학으로, 영화로 페미니즘에 대해 보고 읽고 들었던 나의 경험까지 전부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그것조차도 실재와 유리되 있다고 말할것인가? 인터넷 기사와 트위터 몇줄로 페미니즘을 논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인가? 나는 그저 나의 지식이 온전히 옳음을 상정할 수 없을때 나는 입을 다무는 편을 선택했을 뿐이다.





나의 또다른 대학시절 멘토 중 하나였던 전공 교수께서는 이런 글로 졸업생을 배웅한 적이 있다.
[너의 올바름이 우리 모두의 올바름이 되지 않을 일이라면, 차라리 침묵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침묵하는 지성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그 점도 인정한다. 나는 지금의 사태가 온전히 올바른 세태로 가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요새 페미니즘과 그 일련의 프레임에 대한 세태를 보며 그 교수께서는 과연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실지가 궁금하다.




조만간 메일로 안부나 한번 여쭤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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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ngjyess
18/03/23 13:43
수정 아이콘
뭐.. 그분 나름의 생각이 있으시겠지만 개인적으로 요즘 같은 난리통에는 바보들 꽥꽥대는 자리에 제발 끼어들지 마시고 더더욱 침묵으로 일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 오는거 아니죠.
빛날배
18/03/23 13:51
수정 아이콘
멋진글이네요 잘읽혀요! 근데 페미니즘 초기사상이 어찌됬든 자기들이 선택한 노선이고 핸들을 그쪽으로 꺾고 악셀을 밟고 있으니 자신들로 인해 발생하는 비판 또한 온당히 받아야한다고 봅니다
18/03/23 14:09
수정 아이콘
침묵하는 지성에도 의미가 있죠. 침묵도 훌륭한 의사표현이니까요.
키비쳐
18/03/23 14:43
수정 아이콘
단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죠.
18/03/23 14:34
수정 아이콘
제 아내는 대학교에서 여성학을 부전공했습니다. 저는 페미니즘 네 글자밖에 모르고요.

아무튼 아내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2000년대 초엽에 자신이 배운) 페미니즘은 남녀에게 동등한 의무와 책임을 강조하는 사상이었지, 편을 갈라 싸움박질하는 사상은 아니었다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저와의 첫 소개팅에서 돈을 반반씩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군요. 요즘도 제가 짐을 대신 들어주려 하면 거절합니다. 자기가 들 수 있다고. 그게 페미니즘의 수십 갈래 중 어디에 속한 페미니즘인지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저는 아내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페미니즘이 마음에 듭니다.

글쓴 분이 느낀 감정도 저와 대강 비슷하지 않을런지요.
수지느
18/03/23 20:04
수정 아이콘
그게 보통 말하는 구시대적 사람들의(저를 포함한) 일반적인 페미니즘 인식이었긴 합니다....만
그런걸 요즘 페미니스트에게 말하면 오빠들이 허락한 페미니즘, 혹은 흉자라고 욕을 먹는 현실입니다 크크
오티엘라
18/03/24 15:13
수정 아이콘
대부분의 남자들이 페미니즘이 뭔지 제대로 모르고 남성우월주의가 만연하고 여성멸시가 분명한데도 인정하지 않으니 말이 험해질수밖에 없는것이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여성혐오 라고하면 아닌데? 나 여자좋아하는데? 라는 멍청한소리가 듣기싫어서 여성혐오보다는 여성멸시라는 말을 더 쓰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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