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3/12 03:24:13
Name 소집해제
Subject 희미한 기억 속 남아있는 몇몇 선명한 순간들
0.
어느 정도 큰 지금은 이런 대화를 할 일이 거의 없지만,
어렸을 시절(초~중고등학교)에는 종종 부모님과 나와 동생의 영유아 시절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애지중지 애쓰며 키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아빠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기억 안 나? 엄마나 이모한테 물어봐 봐~'를 던지면
'아빠가 나 무등 태우다가 문턱 위쪽에 이마 박고 떨어진 기억은 나'라고 대답하는 게 단골 레퍼토리였다.

무려 말도 못 할 시절 딱 한번 일어난 사고였다는데, 고통이 매우 컸는지 선명히 기억나는 게 부모님도 나도 신기해했다.
지금도 선명하다.


1.
중학교 시절 친구의 자전거를 가로채 학교에서부터 집 근처 골목을 뺑뺑 돌며 잡힐랑 말랑 약 올렸던 적이 있었다.
그 녀석의 화가 점점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서로 늘 짓궂은 장난을 치던 사이였던 터라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 같다.

친구가 여러 번 지쳐 주저앉은 뒤에서야 나는 손잡이를 돌렸고,
친구에게 자전거를 돌려준 보답으로 나는 발로 복부를 아주 강하게 걷어차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닥에 뒹굴며 볼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늘 함께 돌아다니던 가장 친한 내 친구. 그런 친구에게 처음으로 감정이 실린 발차기(?)를
맞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당황했고, 고통보다는 이 친구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길거리 한복판에서 엉엉 울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귀여운 다툼이지만, 이때 처음으로 아무리 친한 친구끼리도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어렷품이 느낀 것 같다.



요즘은 여자친구랑 알콩달콩 노느라 이 녀석 얼굴을 많이 못 본다. 마지막 치맥은 내가 샀는데. 나쁜 놈.
기억하고 있다


2.
중학교 3학년 반 회장을 맡았을 때, 반에 꼭 한 명씩은 있는 양아치(속칭 일진)에게 찍힌 적이 있다.
수업이 시작해도 선생님이 안 오시자 가지 말라는 일진의 말을 무시하고 선생님을 모시러 내려간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수업이 끝나자마자 벽에 강하게 밀쳐지며 학교 끝나고 보자는 아주 식상한 협박 멘트를 난생 처음 직접 듣게 되었고,
앞으로 남은 1년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학교 끝나고 끌려가서 맞게 되는 건가? 엄마한테는 어떻게 말해야 하지 친구들은 도와줄까?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죽고 싶다.
16년 짧은 인생에서 가장 큰 공포를 느끼며 동시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감에 눈물이 찔끔 날 찰나, 다른 양아치가 나를 협박하던 아이를 진정시키며 데려갔다. 겁에 질려 대화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지만 이 한마디가 똑똑히 들렸었다.

'쟤 공부 잘하는 애야'


결과만 말하자면 남은 1년 별 탈 없이 중학교 시절을 끝마칠 수 있었다.
왜 그 말이 나왔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마 학교 선생님들의 관심을 많이 받기 때문에 피곤해질 수 있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당시 과학고등학교를 준비하며 나름 최상위권에 속했었다. 떨어졌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별게 아닌 일로 한순간에 인생이 박살 날 수 있었던 경험은 영 달갑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저 그런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주변을 통해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늪처럼.

세상이 마냥 공평하진 않구나. 나는 많은 특혜를 받고 있구나.
이 뒤로 따돌림을 당하는 다른 학우를 외면할 때마다 죄책감 뿐만이 아니라 어딘가 뒤엉킨 무언가를 더 느끼게 되었다.
매우 끈적이고 더러운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다.




* 첫 글이기에 가독성에 눈을 찌푸리실 수도 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Normalize
19/03/12 03:33
수정 아이콘
왜 죄다 공감이 가는지...추천합니다.
구양신공
19/03/12 05:51
수정 아이콘
저희 학교 일진도 그랬어요. 공부 잘 하는 애는 안 건드렸죠. 일진이래봤자 사실상 학교 내의 권력은 선생님한테 있었고 공부 잘 하던 애들은 선생님의 관심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악군
19/03/12 13:0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많이 공감가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196 웹소설 추천 : 천재흑마법사 (완결. 오늘!) [34] 맛있는사이다5560 24/03/28 5560 0
101195 도둑질한 아이 사진 게시한 무인점포 점주 벌금형 [144] VictoryFood9375 24/03/28 9375 10
101194 시리즈 웹툰 "겜바바" 소개 [49] 겨울삼각형6416 24/03/28 6416 3
101193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마침표와 물음표 사이.(노스포) [4] aDayInTheLife4264 24/03/28 4264 3
101192 고질라 x 콩 후기(노스포) [23] OcularImplants5776 24/03/28 5776 3
101191 미디어물의 PC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81] 프뤼륑뤼륑9610 24/03/27 9610 4
101190 버스 매니아도 고개를 저을 대륙횡단 버스노선 [60] Dresden11924 24/03/27 11924 3
101188 미국 볼티모어 다리 붕괴 [17] Leeka11195 24/03/26 11195 0
101187 Farewell Queen of the Sky! 아시아나항공 보잉 747-400(HL7428) OZ712 탑승 썰 [4] 쓸때없이힘만듬4622 24/03/26 4622 5
101186 [스포없음] 넷플릭스 신작 삼체(Three Body Problem)를 보았습니다. [52] 록타이트9592 24/03/26 9592 10
101185 시흥의 열두 딸들 - 아낌없이 주는 시흥의 역사 (5) [3] 계층방정6422 24/03/26 6422 8
101184 [웹소설] '탐관오리가 상태창을 숨김' 추천 [56] 사람되고싶다7674 24/03/26 7674 20
101183 진짜 역대급으로 박 터지는 다음 분기(4월~) 애니들 [59] 대장햄토리7131 24/03/25 7131 2
101182 '브로콜리 너마저'와 기억의 미화. [9] aDayInTheLife4611 24/03/25 4611 5
101181 탕수육 부먹파, 찍먹파의 성격을 통계 분석해 보았습니다. [51] 인생을살아주세요5692 24/03/25 5692 71
101179 한국,중국 마트 물가 비교 [49] 불쌍한오빠7402 24/03/25 7402 7
101177 맥주의 배신? [28] 지그제프9073 24/03/24 9073 2
101175 [스포있음] 천만 돌파 기념 천만관객에 안들어가는 파묘 관객의 후기 [17] Dončić6634 24/03/24 6634 8
101174 [팝송] 아리아나 그란데 새 앨범 "eternal sunshine" [2] 김치찌개3180 24/03/24 3180 4
101173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143] 천우희7699 24/03/23 7699 109
101172 모스크바 콘서트장에서 대규모 총격테러 발생 [36] 복타르10767 24/03/23 10767 0
101170 대한민국은 도덕사회이다. [58] 사람되고싶다9659 24/03/22 9659 30
101168 올해 서울광장서 6월 1일 시민 책읽기 행사 예정 [46] 라이언 덕후7676 24/03/21 7676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