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9/03/19 17:29:32
Name 유쾌한보살
Subject 그, 순간.





어제 오후, 간만에 작년 여름 이 후  발걸음을 하지 못했던 들깨칼국수 집엘 들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실내엔 아무도 없었다.
손님은 물론이고 주인장 부부의 모습도 보이질 않는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오후 4시이긴 하나... break  time이 없을텐데...


엉거주춤 서서 중얼거리는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바이올린 선율....이라기보다 소리.
듣기에 그다지 매끄럽지도 아름답지도 않는 소리.
초등학생이 무슨 대회 출전 곡이라도 연습하나 ...여기며
화장실로 가기 위해 뒷뜰로 난 쪽문을 열었는데...


엄 ~ 훠 !!    주인 아저씨,   어깨에 바이올린을 얹어놓고 계셨다 !!
몸집에 비해 너무 작아 보이는 바이올린.
짜집기 등산바지와 누비 등산조끼와 너무나 안 어울리는 바이올린.


아저씨는 느닷없는 나의 침입(?)에 그야말로 소스라쳐 놀라 뒷걸음질까지 쳤다.
야동 보다가  들키신 것 같잖아요.  크크
나 또한 놀라기는 마찬가지.
尿氣를 잊었다.


주인장 아저씨는 오날날 이 정도 연주 실력을 갖추기까지
정말이지 마누라의 온갖 핀잔과 불평과 구박을 견뎌내어야만 했다고 하소연했다.
연습하는 소리가 듣기 싫다고..  듣기 싫다고 .. 얼마나 퍼붓낌을 당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악기 두 번 바꾸었는데 그 때마다 잔소리 엄청 들었단다.
좀 전에도 손님이 없을 시간이라.... 마누라가 오일장 간 틈을 타 뒷뜰에서 켜본 거란다.
하기사 내가 마누라였대도 그 소음을 견디다 못해 확 - 바이올린을 깨부숴버렸을지도 모른다.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그 순간엔 모든 것을 잊고 그냥 행복하다는 아저씨.
듣는 사람 생각은 안 한단다.
왜 하필 배우기 어렵고 진도 안 나가는 바이올린이냐고 물었더니...
그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씨익 - 웃는다.


이런 경우 나라는 사람은,  바로 상상 시나리오 엮기에 들어간다.

아저씨 행복의 원천엔 분명히 여자, 그것도  소년시절의 `소녀`가 있을게야.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하고,  머얼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소녀.
찐빵가게 아들로서 늘 부모님을 도우느라 공부도 못 하는데다가,
또 팔고 남은 찐빵을 먹어쌓다보니 그 때부터 이미 배가 나온 아저씨.
감히 소녀 앞에 나설 엄두도 못 내고...
근데 그 소녀의 이층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들려오던 바이올린 선율..

그래서 지금 바이올린과 함께하는 이 순간엔,
그 시절, 그 안타깝고 가슴 설레던 잊지 못할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어 행복하다....뭐 그런 스토리.
심히 만화스럽지만 가능성 없지는 않다.


아저씨에게 있어 연주를 잘 하고 못 하고는 의미가 없다.
누가 들어주고 말고에도 관심이 없다.
열심히 연습해서 어디 요식업 조합 장기자랑 같은 데에서 뽐낼 생각도 없다. 
무슨 곡을 언제까지 마스터 하겠다는 목표도 없다.

오로지 바이올린에 몰두한 그 순간만 누리면 되는 것이다.




옛 선비들은 유람길, 유배길, 과거길.. 여튼  어디론가 떠날 때,
배낭에다 반드시 시도詩刀라는 칼과,  필묵을 넣어갔다.
길을 걷다가 경치 좋은 곳을 만나 시상이 떠오르면
소나무 둥치 한 쪽 껍질을 시도로 얇게 깎아내고,
거기에 시 한 수 적어두고 떠나곤 했다 한다. 


누가 그 시를 봐도 좋고  못 봐도 좋다.
또 비에 씻겨 없어져도 좋다.
시를 적는 그 순간만 누리면 되는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나무토막으로 사람像을 곧잘 조각했는데,
어떨 땐 침식을 잊고 한 달씩이나 몰두하기도 했다 한다.
그래서 흡족한 작품이 완성되면, 그 순간 그것을 불타는 아궁이에다가 던져 버렸다.
조각에 몰두한 그 경지만 누리면 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스스로만 즐기는 것으로 끝나는  비전문적인 예술인들이
어쩌면 재능을 타고난 전문적 예술가들보다 더 행복할런지 모른다.
이들에겐 창조나 창작의 고통이 없다.
상을 타고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없다.  
세상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없다.


왜냐 ?  
이미 그 순간을 즐겼으므로..


평어체를 양해 바랍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사악군
19/03/19 17:35
수정 아이콘
좋네요. 정말 좋네요.
그런 즐길 수 있는 순간을 많이 누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겠지요!
메존일각
19/03/19 17:42
수정 아이콘
매글 추천 박고 갑니다.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웃집개발자
19/03/19 17:4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19/03/19 17:48
수정 아이콘
(수정됨) 친구가 20대후반에 첼로를 배울때도 아빠가 50대 후반에 클라리넷을 배울 때도 이나이에 저나이에 그걸 배워 뭐할라구 그럴까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 부러워요.비전문예술인이 진짜죠^^ 예술이 나이와 어우러지면 더 풍부해지는 뭔가가 있더라구요
19/03/19 17:52
수정 아이콘
이런게 몰입에서 말하는 자기 목적적 경험이 아닌지...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Quantum21
19/03/19 18:07
수정 아이콘
좋네요.
요즘, 여기 오는 재미가 한가지 더 생겨서 좋습니다.
소소한 미소와 함께 나도 모르게 배우는 맛이 스며 있어서 더 좋아요.
19/03/19 18:13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쓰시면서도 순간을 즐기셨겠군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응~수고
19/03/19 18:3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cluefake
19/03/19 18:38
수정 아이콘
하고 싶어서, 그게 아무 쓸모가 없더라도 하고 싶은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쓸모가 있는 것이고 최고의 즐거움이죠.
인생에서 최소한 여가는 쓸모를 찾으면 너무 팍팍한 것 같아요.
나한테만 의미있고 내가 즐거우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19/03/19 18:50
수정 아이콘
페이커보다 제가 행복한 건가요? 흐..
19/03/19 18:59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쓰시는 순간도 행복하셨겠죠? 잘 읽었습니다
19/03/19 19:38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폐가 안된다면 살포시 퍼가도 될까요?
유쾌한보살
19/03/19 21:05
수정 아이콘
물론, 마구 퍼가셔도 되고 말고요~ 근데...조끔 부끄럽네요..
19/03/20 08:0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부끄러워하시지 않아도 될만큼 저에겐 좋은 글입니다.
19/03/19 20:16
수정 아이콘
저희 아버지도 요즘 클래식기타를 치십니다.
19/03/19 21:09
수정 아이콘
아니 왜 우리 사장님 배를 어렸을 때부터 나오게 하고 그러세요!!!

는 농담이고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세인트
19/03/19 21:20
수정 아이콘
보면 항상 글을 참 잘쓰시는 것 같아요.
내공이 느껴지면서도 담백하니 좋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퀘이샤
19/03/19 21:29
수정 아이콘
제게는 낚시를 즐기는 그 순간이겠네요
그 즐김이 있고없음은,,,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벌써2년
19/03/19 23:19
수정 아이콘
저는 소설 쓰고 있습니다. 벌써 두편 썼네요.
그것도 현실성 제로인 판타지..
그냥 혼자 세계관 만들고 캐릭터 만들고 이야기 쓰고 고치고 하는 순간이 너무 즐겁네요.
웹소설에 올려볼까 했는데 괜히 인터넷 올려서 무시 내지 싸늘한 평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순간을 즐기지 못할것 같아서 혼자만 즐거워 하고 있습니다.
VinnyDaddy
19/03/20 00:47
수정 아이콘
하긴 바이올린이 배울 때 참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악기이긴 합...크크크

그 '이 순간을 즐겼으니 그거면 됐지'하고 만족할 수 있는 마음 자체가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싶네요. 그걸 못해서 망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죠.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19/03/20 03:41
수정 아이콘
인상깊게 읽고 갑니다...
19/03/20 06:16
수정 아이콘
감명받고 하드 비우러 갑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9/03/20 08:53
수정 아이콘
유쾌하네요!
고무장이
19/03/20 11:4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요즘은 뭘해도 좀 지루한 편인데.
즐거운 순간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을 해봐야 겠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301 웹소설 추천 - 이세계 TRPG 마스터 [6] 파고들어라1382 24/04/19 1382 0
101300 문제의 성인 페스티벌에 관하여 [94] 烏鳳5855 24/04/18 5855 39
101299 쿠팡 게섯거라! 네이버 당일배송이 온다 [25] 무딜링호흡머신4659 24/04/18 4659 3
101298 MSI AMD 600 시리즈 메인보드 차세대 CPU 지원 준비 완료 [2] SAS Tony Parker 2190 24/04/18 2190 0
101297 [팁] 피지알에 webp 움짤 파일을 올려보자 [9] VictoryFood2507 24/04/18 2507 8
101296 뉴욕타임스 3.11.일자 기사 번역(보험사로 흘러가는 운전기록) [9] 오후2시4719 24/04/17 4719 5
101295 추천게시판 운영위원 신규모집(~4/30) [3] jjohny=쿠마4789 24/04/17 4789 5
101290 기형적인 아파트 청약제도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부분 [80] VictoryFood10405 24/04/16 10405 0
101289 전마협 주관 대회 참석 후기 [19] pecotek5339 24/04/17 5339 4
101288 [역사] 기술 발전이 능사는 아니더라 / 질레트의 역사 [30] Fig.15279 24/04/17 5279 12
101287 7800X3D 46.5 딜 떴습니다 토스페이 [37] SAS Tony Parker 5452 24/04/16 5452 1
101285 마룬 5(Maroon 5) - Sunday Morning 불러보았습니다! [6] Neuromancer2855 24/04/16 2855 1
101284 남들 다가는 일본, 남들 안가는 목적으로 가다. (츠이키 기지 방문)(스압) [46] 한국화약주식회사7431 24/04/16 7431 46
101281 떡볶이는 좋지만 더덕구이는 싫은 사람들을 위하여 [31] Kaestro6795 24/04/15 6795 8
101280 이제 독일에서는 14세 이후 자신의 성별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302] 라이언 덕후19091 24/04/15 19091 2
101278 전기차 1년 타고 난 후 누적 전비 [55] VictoryFood11987 24/04/14 11987 7
101277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세계사 리뷰'를 빙자한 잡담. [38] 14년째도피중8232 24/04/14 8232 8
101276 이란 이스라엘 공격 시작이 되었습니다.. [54] 키토15339 24/04/14 15339 3
101275 <쿵푸팬더4> - 만족스럽지만, 뻥튀기. [8] aDayInTheLife5022 24/04/14 5022 2
101274 [팝송] 리암 갤러거,존 스콰이어 새 앨범 "Liam Gallagher & John Squire" 김치찌개2925 24/04/14 2925 0
101273 위대해지지 못해서 불행한 한국인 [24] 고무닦이7270 24/04/13 7270 8
101272 [강스포] 눈물을 마시는 새 고이(考異) - 카시다 암각문 채우기 meson2786 24/04/13 2786 4
101270 사회경제적비용 : 음주 > 비만 > 흡연 [44] VictoryFood7345 24/04/12 7345 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