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6/09/29 21:53:24
Name sealed
Subject 데이트를 합시다.



본가와 회사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에 있어, 주 중에는 회사 앞에서 자취를 하고 주말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퇴근 버스에 몸을 싣고 버스가 출발함과 동시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오늘 늦는다고 그랬고 엄마는 모임이 있어서 지금 나가니까 아빠랑 같이 뭐 시켜먹어.

응응. 알았어. 대충 전화를 끊고 덜컹거리는 퇴근 버스에서 멀미를 참기 위해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한 시간 이십 분보다 조금 넘게 걸리는 퇴근 버스는 집에서 차로 십 여분쯤 떨어진 어느 마트 근처 육교 앞에서 멈춘다. 버스를 타고 가도 삼십 분 안에 도착할테지만,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딸을 데리고 오기 위해 금요일마다 이십 분 쯤 일찍 퇴근하는 아빠는 늘 마트 앞에서 차를 세워두고 기다린다. 매주 반복되는 지극정성이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아무리 훑어봐도 아빠 차가 보이지 않는다. 금요일이라 차가 조금 막히나 싶어 전화를 거니 잔뜩 미안한 목소리로 아빠가 전화를 받는다.

아빠, 나 도착했는데 좀 늦을 거 같으면 장 보고 있을까?
그래. 저녁에 먹을만한 거 뭐 사고 있어. 금방 갈게.

대형 마트가 아닌지라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쭉 훑어봐도 저녁으로 먹을만한 게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재료를 사다가 해먹는 건 무리고, 그냥 시켜먹어야 하나 싶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엉뚱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는데 뒷쪽에서 누군가 왁! 큰 소리를 내며 어깨를 툭 친다. 보나마나 아빠다.

결국 저녁은 시켜먹기로 하고 집에 뭐 떨어진 것은 없나 이리저리 둘러보며 생각나는 대로 장바구니에 집어 넣는다. 꼴랑 아이스크림 여섯 개와 에프킬라 하나가 든 장바구니를 들고 서로 내가 계산할 거다, 실랑이를 피우다 끝내는 내가 이겼다. 마지막까지 지갑을 꺼내 드는 아빠의 등을 카드 실적 올려야 한다는 말로 떠밀어 보내고 만 원도 안 되는 칠천 얼마를 계산한다.

차를 타고 십 분 남짓,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 메뉴로 뭐를 시켜먹을까 고민을 한다. 그래봐야 중국집이나 치킨인 것을, 한참을 둘이 머리를 싸매 보아도 메뉴를 결정하지 못한다. 결국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치킨으로 합의를 봤다. 배달이 오기 전에 먼저 씻어야겠다며 샤워하러 들어간 아빠를 대신해서 늘 먹던 집에 주문을 한 뒤, 야근하느라 늦는 언니에게 메신저로 약을 올린다.

[우리치킨먹는다부럽지?]

언니에게선 칼 같이 답장이 왔다.

[먹고살이나쪄라]



*     *     *     *     *



샤워하고 나온 아빠가 슬쩍 말을 흘린다.

계란찜 하나 할까? 국물 먹게.

좋은 생각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내가 할테니 아빠는 티비보고 있으라고 거실로 쫓아냈다. 그래도 나름 엄마의 주방 보조 십 몇 년 경력의 소유자인지라 자신감 넘치게 뚝배기에 계란 두 개를 깠다. 근데 물을 얼마나 넣어야 하더라... 기억을 더듬어 엄마가 하던 걸 떠올리며 대충 이쯤이겠지, 하며 물을 붓고 소금을 치고 파까지 썰어 넣은 뒤 뚝배기를 불 위에 올렸는데 어째 기운이 쎄하다.

아니나 다를까, 끓어오르는 걸 보니 이게 계란찜인지 계란국인지 모를 만큼 홍수가 났다. 티비에 빠져 주방 일은 잊고 있을 아빠는 모르게 아주 조금 떠서 한 입 먼저 먹어본다.

큰일났다, 이게 뭔 맛이냐.



*     *     *     *



똑똑똑. 치킨 왔어요. 집에서는 화장이고 뭐고 앞머리고 뭐고 아무 것도 없다. 아빠 손에 내 카드를 쥐어주고 후다닥 주방으로 숨었다. 기왕 주방 쪽으로 숨은 거 냉장고에서 소주나 꺼내 가야지.

따끈한 치킨과 맛 없는 계란찜을 두고 두 부녀는 나란히 소주잔을 기울인다. 나는 일주일 동안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빠는 언니와 엄마가 주중에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얘기한다. 둘이 성격이 불 같은 게 똑같아서 싸우기도 잘 싸운다고, 웃다가 문득 지난 주에 자취방에 데려다 주고 돌아서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아빠, 그래도... 엄마 지난 주에 나 자취방에 데려다 주고 울더라. 나 혼자 두고 가는 게 짠하다고.

아빠는 묵묵히 숟가락을 움직여 식었어도 여전히 맛 없는 계란찜을 한 입 떠먹고는 잔에 남아있던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너네 엄마가 독하긴 해도 마음이 여려서 그래.



*     *     *     *     *



둘이서 나란히 소주 한 병 씩을 나눠 마시며 치킨을 열심히 뜯었지만 고작 반 마리 밖에 먹지 못했다. 배가 터질 것 같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아빠는 상을 치운다. 그릇 몇 개 되지도 않는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 이불을 깔고 티비를 보며 뒹굴거리고 있자니 엄마가 돌아왔다. 약간 알딸딸하게 취기도 올랐겠다,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찡찡이 스위치에 불이 들어온다.

둘이 밥 맛있게 먹었어?
내가 계란찜 했는데 하나도 맛 없고 비렸어, 물 조절 잘못해서.

샤워하고 나온 엄마를 붙잡고도 또 한참을 징징댄다.

엄마, 나 너무 많이 먹었더니 배 아픈 거 같애.
약 먹어, 그럼.
소화제 말고 나 배 쓸어줘.

평소엔 안 먹다가 간만에 많이 먹어서 그러지. 타박하는 엄마에게도 일주일 간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그렇게 엄마는 다 큰 작은 딸에게 한참을 붙잡혀서 가만가만 배를 쓸어주었다.

엄마, 우리 삼청동 갈까? 북촌 한옥마을 이런 데.
좋지.
아빠랑 가본 적 있어?
연애할 때 가봤지. 요즘은 바빠서 갈 수가 있나.
그럼 오랜만에 언니랑 나랑 가자. 응?

몇 주 후에 오는 주말이 연휴를 끼었으니 그 때가 좋겠다, 많이는 안 걷고 가깝게 돌아다니면 괜찮겠지? 엄마는 점심으로 뭐 먹고 싶어? ...

이거저거 신나서 묻다가 절로 쏟아지는 잠의 홍수에 휩쓸려 가만히 눈을 감는다. 가물가물 잠들어가는 작은 딸의 배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엄마는 야근하느라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큰 딸을 기다린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6-11-18 16:39)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6/09/29 22:02
수정 아이콘
연애얘기가 아니고 더 달달한 가족얘기네요
추천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6/09/29 22:03
수정 아이콘
'먼저' 라는 두글자만 박으려고 클릭했다가 급반성하고 정독했습니다 짠하네요ㅠ 추천
평범한소시민
16/09/29 22:12
수정 아이콘
행복한 가족이네요. 가족 모두 건강하세요
16/09/29 22:15
수정 아이콘
가족 이야기 완전 좋아합니다. 예전에 퐁퐁퐁퐁님도 이런 글 가끔 올리셨었는데....
권민아
16/09/29 22:27
수정 아이콘
제목에 어그로 끌려서 들어왔는데 이런 훈훈한 글이라니요.
지금뭐하고있니
16/09/29 22:36
수정 아이콘
좋네요.
그녀지킴이
16/09/29 22:45
수정 아이콘
추천 드리고 갑니다.^^
제랄드
16/09/29 22:46
수정 아이콘
솔직히 저도 '먼저' 라는 두 글자 쓰려고 들어왔으나 정독 후 추천 찍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천국의날개
16/09/29 22:48
수정 아이콘
아주 좋네요. 중2짜리 아들과 초5짜리 딸을 둔 입장에서 6~7여년 후.... 이 이야기와 같은 모습이면 아주 행복할거 같습니다.
꿈꾸는사나이
16/09/29 22:51
수정 아이콘
추천 오랜만에 누르네요.
따뜻한 기분 감사합니다.
LadyBrown
16/09/29 23:42
수정 아이콘
따뜻한 글 감사드립니다!
스카리 빌파
16/09/29 23:44
수정 아이콘
저도 우리 가족이랑 이렇게 살갑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아들놈 나이도 많은데 아직도 아버지랑은 서먹서먹해서... 추천 누르고 갑니다.
하카세
16/09/29 23:49
수정 아이콘
염장글 부들부들.. 하면서 들어왔다가 추천누르고 갑니다
치킨엔콜라
16/09/29 23:56
수정 아이콘
좋네요...저도 어머니모시고 나들이 한번 가야겠어요
16/09/30 01:41
수정 아이콘
저희 가족도 형제끼린 좀 으르렁거려도 주변에서는 다들 부럽다 할 정도로 화목한 집인데,
지난 몇년간 사정상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어서 글 읽고나니 너무 부럽고 좋아 보이네요ㅠㅠ
따뜻한 글 고맙습니다
강동원
16/09/30 10:32
수정 아이콘
제목이 다분히 낚시성 아닙니까? 상당히 불-편하네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어머니랑 동생이랑 놀러 한 번 가자고 가자고 말만 하는 못난 아들이라 죄송하네요 ㅠㅠ
16/09/30 14:55
수정 아이콘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가 방송될 때 썼던 글이라 덩달아 제목에도 영감을 받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목부터 분노를 유발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피지알러 여러분, 금요일인데 일찍 마무리하시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데이트 하세요!
걱정말아요 그대
16/09/30 16:40
수정 아이콘
긴말 필요한가요. 추게로!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353 영화 1622편을 보고 난 후, 추천하는 숨겨진 수작들 [44] 최적화7129 21/09/17 7129
3352 나 더치커피 좋아하네. [33] Red Key7183 21/09/17 7183
3351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어떤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27] 카페알파10020 21/09/15 10020
3350 [역사] 나폴레옹 전쟁이 만든 통조림 / 통조림의 역사 [23] Fig.15448 21/09/14 5448
3349 와인을 잘 모르는 분을 위한 코스트코 와인 추천(스압) [89] 짬뽕순두부10722 21/09/11 10722
3348 [콘솔] 리뷰) <토니 호크의 프로 스케이터>가 위대한 게임인 이유 [29] RapidSilver5837 21/09/08 5837
3347 Z플립3의 모래주머니들과 삼성의 선택 [115] Zelazny13966 21/09/08 13966
3346 [역사] 몇명이나 죽었을까 / 복어 식용의 역사 [48] Fig.18726 21/09/07 8726
3345 유럽식 이름에 대한 대략적인 가이드 [53] Farce10721 20/10/09 10721
3344 내 마지막 끼니 [5] bettersuweet5989 21/09/06 5989
3343 이날치에서 그루비룸으로, 새로운 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 [38] 어강됴리11976 21/09/03 11976
3342 만화가 열전(5) 청춘과 사랑의 노래, 들리나요? 응답하라 아다치 미츠루 하편 [84] 라쇼8820 21/09/02 8820
3341 DP, 슬기로운 의사생활 감상기 [23] Secundo8560 21/09/02 8560
3340 집에서 레몬을 키워 보겠습니다. [56] 영혼의공원7405 21/09/02 7405
3339 공식 설정 (Canon)의 역사 [100] Farce7814 21/08/30 7814
3338 타인의 시선에 대한 공포 [20] 원미동사람들6140 21/08/26 6140
3337 대한민국, 최적 내정의 길은? (1) 규모의 경제와 대량 생산 [14] Cookinie6590 21/08/26 6590
3336 독일에서의 두 번째 이직 [40] 타츠야7241 21/08/23 7241
3335 차세대 EUV 공정 경쟁에 담긴 함의 [50] cheme9666 21/08/23 9666
3334 잘지내고 계시죠 [11] 걷자집앞이야9565 21/08/17 9565
3333 [역사] 라면 알고 갈래? / 인스턴트 라면의 역사 [38] Fig.19784 21/08/17 9784
3332 다른 세대는 외계인이 아닐까? [81] 깃털달린뱀13805 21/08/15 13805
3331 LTCM, 아이비리그 박사들의 불유쾌한 실패 [18] 모찌피치모찌피치9794 21/08/15 9794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