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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8/10/18 01:42:05
Name 신불해
Subject 메흐메드 알리가 이집트를 근대화 시키다 - "그래서 지금 행복합니까?"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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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흐메드 알리는 이집트에서 근대화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열강에 비해 뒤늦게 근대화에 뛰어든 여타 제 3세계 국가들 중에서 소위 말하는 '국부' 같은 타입의 사람들이야 많이 있기야 합니다만은, 메흐메드 알리의 근대화가 더욱 유명한 것은 바로 그 '시기' 때문입니다.




 메흐메드 알리의 생몰년은 1769-1849 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집트에서 자신이 추진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을만한 절대권력을 확보하고, 동시에 이집트의 '본국' 이던 오스만 제국, 즉 이스탄불에서의 압력을 두려워 하지 않을만한 안전을 비교적 확보한 시기는 1820년대 무렵입니다. 즉,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은 1820년대부터 시작된 겁니다.




 이건 정말 엄청나게 빠른 시기 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관련 이야기를 보다보면 느끼게 되지만 당장 그 유럽에서 러시아나 스페인 정도의 나라만 해도 무슨 '낙후' '전근대적' '야만' 막 이런 식의 묘사가 나오는 판이고, 무슨 구제국이 프랑스 혁명군과 나폴레옹의 군대를 본따 전근대적 용병 대신 상비군을 만들었네 어쩌네 하고 여러 책에 언급되는게 1790년대 - 1810년대 대니 말입니다.




 중국으로 치면 근대화 작업에 들어갔다도 아니라 '문을 열었다' 소리 듣는 아편전쟁이 1840년대이니 20년은 더 뒤고, 마찬가지로 미국의 페리 제독이 "문 열어라." 해서 일본이 이제 개항한 게 1853년, "서구식으로 개혁하자." 고 한 메이지 유신이 1868년 이니 40년은 더 뒤 입니다. 




 그 무렵 먼저 시작한 1860년대의 이집트엔 의회를 본딴 대표 회의에 근대적인 우편제도, 카이로 등에 오페라 하우스 등을 짓는 문화 부흥, 철도 건설 계획, 산업 발전 투자, 수에즈 운하 완공, 사회 간접 자본 구축이 되어 있었을 정도라고 하니, 비서구권 제 3세계 중에서는 정말 독보적으로 빨랐던 겁니다. 물론 그래봐야 나중에 이르러선 이집트의 엄청난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며 '국제 정치 시대에 나만 뭐 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라는 걸 증명하긴 했습니다만...




 아무튼 미완으로 끝나긴 했어도 이렇게 빨랐던 이집트의 근대화는 다른 후발주자들에게 큰 영감을 줬고, 성공은 물론이거니와 '메흐메드 알리의 원대한 꿈이 사후 결국 좌절 되고 열강들에게 농락 당하여 전락하고 만' 이야기는 근대화를 하면서도 서구의 힘을 두려워 했던 동아시아에도 지대한 관심거리 였습니다. 영국인들을 통해 이집트의 사정을 전해 들은 일본은 이집트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보이며 연구하며 '이집트를 본받아 개혁하는 동시에 이집트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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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개화기 및 일제 침탈 시기 일본에 저항하면서도 일본을 통해 여러 정보를 얻은 국내의 지식인들 역시 일본에서 간행된 이런 책을 번역하여 내놓았을 정도니.... 여러모로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이 여러 제3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룰모델이 되었다고 할만 합니다.






그런데, 소위 '근대화' 라는 것은 나라를 강하고 부유하게 만들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라를 강하게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권을 빼앗기지 않고 타국에 휘둘리지 말자는 겁니다. 그럼 타국에게 몸을 맡기게되고 주권을 넘겨주지 말자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그래야 위험한 상황에서 자기가 자기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의지로 자기를 지키는 건 또 무엇 때문입니까? 그래야 자기가 권리와 행복을 위기시에 자기가 주도적으로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게 지내자는 것이 모든 기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하게 되지 않게 부유해지고, 아는 게 없어 농락 당하지 않기 위해서 "깨우치고," 그렇게 생긴 자신의 것을 남에게 마음대로 휘둘리지 않고 지키기 위해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다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맘루크의 통치 아래 수세기 동안 역사의 주 무대에서 벗어나며 낙후되고, 가난하고, 미개하고 이집트를 빠르게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 시키고,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수차례 격파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힘을 키우고, 유럽의 정치에 (일이 잘풀릴때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지분을 보이며 자기 목소리를 내게 한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은 여러 국가들로부터 룰모델로, 일종의 이상향으로(나중에 잘못된건 그의 큰 뜻이 사후에 외부 압력 때문에 좌절된 비운의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근대화를 한 메흐메드 알리의 이집트는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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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메흐메드 알리의 근대화는 바로 '군대' 부터 시작했습니다. 애초에 군대를 키우기 위해 모든걸 시작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야 자신의 권력을 무력으로 지킬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전까지 수천여명의 알바니아 출신 용병에 크게 의지하던 메흐메드 알리는 이들이 "돈 안 주면 안 싸운다." 고 명령을 잘 안듣거나, 심지어 통제에서 벗어나 난동을 피우거나 하는 상태를 우려해 자신만의 상비군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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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래 이전의 맘루크들은 그루지야에서 노예를 사와 어린 시절부터 이슬람 식으로 교육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방식을 썼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메흐메드 알리는 수단에서 사람을 최대한 많이 노예로 잡아와라고 인간 약탈을 지시했습니다. "노예 6,000명은 잡야아 한다." 는 것이 메흐메드 알리의 뜻이었지만 실제 결과는 훨씬 저조했을 뿐더러, 그냥 막무가내로 사람을 잡아오는 통에 수 많은 사람들이 짐승처럼 끌려가는 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는 들판에서 쓰러져 죽은 수백 수천여명의 사람들만 남기고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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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메흐메드 알리는 맘루크 식의 방식을 그만두고, 대신 이집트에서 사람을 동원하는 징병제를 실시했습니다. 징병제는 원래대로라면 3년간의 복무를 마치면 돌아갈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평생 군대에 잡혀 있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메흐메드 알리는 징병한 군대를 프랑스 장교 '세브' (나중에 술레이만이름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함) 의 도움을 받아 신식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맘루크들이라고 이집트에서 바로 사람을 잡아다 쓰면 더 쉽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왜 대신 그루지야 노예를 데려왔을까요? 만약 이집트인을 강제로 징집하면, 주민들이 들고 일어날테고 아무리 맘루크들이라고 해도 수천, 수만명이 들고 일어나는걸 모두 무력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모은 군대가 순순히 말을 듣는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하물며 대충 무기 쥐어주고 마는 구식 군대도 아니고, 엄격한 신식 훈련을 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에 메흐메드 알리는 징집병을 도시 근처에서 훈련 시키는 대신, 이집트 최남단의 비밀스럽고 으슥한 지역으로 끌고가 그곳에서 외부와 철저하게 연락을 차단시킨 채 훈련 시켰습니다. 병사들은 주민들과 절대 어울리지 못하게 차단한 채 죽어라 훈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끌려가 상비군이 된 숫자는 한때 13만명에 이르렀습니다. 이집트의 당시 인구가 500만 가량이었는데 13만명이라면 전 인구의 2.6%가 갑자기 어딘지도 모르고 가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곳으로 끌려갔다는 것으로, 그 사람들이 농촌 등에서 주요적인 역할을 하는 청년 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농촌 사회에 큰 타격이었습니다.






이렇게 군대를 유지하려면 당연히 돈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메흐메드 알리는 모든 곡물과 설탕에 독점제를 실시했습니다. 즉 농민들에게 싸게 사서, 해외에 비싸게 파는 겁니다. 이런 과정에서 전근대 시대에 의례 있기 마련인, 중간에서 세금을 걷어가면서 자기 몫을 챙기는 지방 세금 청부업자들을 어느정도 일소할 수 있는 효과가 있었고 농민들한테 바로 생산물을 거둬들인 메흐메드 알리는 모든 잉여 생산물을 통제하여 아주 부유해졌습니다.




 대신, 농민들은 무조건 메흐메드 알리에게 생산물을 싼 가격에 공급해야 하니,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큰 돈을 벌 수 없었습니다. 어떤 농민은 옷감을 독점하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보내는 대신 시장에서 독자적으로 팔다가 잡혀, 옷감에 둘러쌓인 채 불을 질러 태워죽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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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메흐메드 알리는 운하 공사에도 손을 대었습니다. 이런 운하는 완공되면 지방의 여러 생산물을 빠르게 확보 가능하고, 외국과의 교역 등에서도 큰 힘이 되어줄, 국가의 자산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만드냐는 문제만 뺴고 말입니다.




 알렉산드리아와 나일 강을 잇는 마흐무디야 운하(Mahmudiyah canal)는 가히 최대의 성과였는데, 3년에 걸친 이 공사를 위해동원된 사람이 30만명 이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이집트의 전인구가 500만명 가량이었으니 거의 인구의 6%를 공사에 갈아버린 셈입니다. 이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노역자가 혹독한 공사로 인한 과로, 굶주림, 질병으로 죽어나자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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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메흐메드 알리는 '쥐멜' 이라는 프랑스 출신 직물 기술자에게 이집트의 면화 관목을 가지고 실험할 수 있게 후원하고 투자해줬고, 1821년 이른바 '쥐멜 면화' 의 수확에 성공해 이를 유럽 시장에 공급, 큰 돈을 만졌습니다. 이 면화는 순도 100% 메흐메드 알리의 독점 제품이었기에 말 그대로 자기 마음대로 부르는게 값이라 메흐메드 알리의 전체 수입에서 4분의 1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대단한 돈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도입하면서, 과거에는 겨울에 작물을 재배하고 여름에는 휴경하던 이집트 농민들은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는 면을 도입하면서 이제 1년 내내 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이 작물을 경작하고 수확하기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이는 완전하게 강제적인 정책으로, 만약 면화를 함부로 뽑아버리면 '무기징역' 이었고, 경작 노동을 거부하거나 세금을 납부와 부역을 피하려고 도망치면 체포되어 처벌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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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원정 등을 시행했고, 나바리노 해전에서 함대를 잃은 메흐메드 알리는 함대를 재건하며 "유럽에서 배를 사지 말고, 우리가 만들어서 쓰겠다" 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를 위해 8,000명 가량의 죄수를 동원해 거대한 알렉산드리아 조선소를 만들었고, 동시에 여러 총과 군복 등을 역시 자신의 기술로 만들어서 공급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군수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외에 직물 공장들 역시 여러개가 생겨났고,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수입했으며, 1300개가 넘는 제니 방적기를 도입하고 이를 수입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 자체 제작할 수 있는 기술까지 확보했습니다.



 이런 '산업화 공장' 은 이집트를 산업 국가로 바꾸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찬탄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공장에 동원된 노동자 중 절대 다수는 강제 동원 되었고, 여자와 아이들까지 강제로 끌려왔으며, 메흐메드 알리의 부하들이 이를 감시하면서 가혹하게 그들을 대했습니다. 공장을 가동하는데 동력이 모자란 나머지 그냥 인력을 갈아버리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경우도 아주 흔했습니다. 그런 강제 노동에 동원된 노동자의 숫자만 3만 ~ 4만에 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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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하부 구조를 설립하기 위해 부역 노동은 점점 갈수록 강제적이며 길어지면서 잔혹해졌고, 자기가 생산한 농산물을 자기가 소비할수도 없을 뿐더러, 강제로 끌려가서 군대에 입대해야 하는 등등... 갈수록 메흐메드 알리의 정치가 폭압적이 되어가자 당연히 불만은 팽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집트에서는 메흐메드 알리에게 대응할 수 있는 반대 권력이 아예 없었습니다. 다른 국가에서 '호족' 의 역할을 한다 볼 수 있는 맘루크들은 메흐메드 알리가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수천명 단위로 몰살 당했고, 국가에 있는 유일한 군사 세력은 메흐메드 알리의 손아귀에 있는 상비군이며, 국가를 구성하는 엘리트들은 메흐메드 알리가 수년에 걸쳐 자신의 친족 및, 자기에게 줄을 선 자신의 사람들로 전부 채워넣은 후였습니다. 




메흐메드 알리는 쥐어짜내서 얻은 막대한 부를 이들과 '공유' 하면서 나눠주었고, 이들은 메흐메드 알리와 사실상 운명 공동체로서 그가 쓰러지면 지금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에 적극 협조하면 협조했지 반항은 꿈도 못 꿀 사람들 입니다.




 여기에 더해 메흐메드 알리는 첩보조직을 가동, 위에서 아래 수십명을 감시하며 보고를 받고, 다시 그 아래에서 자기 아래의 수십명을 감시하고 보고를 받는 감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워낙 비밀이 철저해 조직 구성원들은 서로가 같은 조직원인지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이를 통해 거의 대부분의 음모는 사전에 전부 분쇄 가능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파샤는 어디에도 있고, 파샤의 눈은 모든 것을 지켜본다." 는 이미지를 철저하게 여러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휘하 사람들은 메흐메드 알리에게 자신이 감시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반역은 꿈도 못 꿀 지경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영국의 총영사는 당시 이집트를 돌러 보고 이런 보고를 올릴 정도였습니다.




 "이집트에선 모든 것이 조용하다. 파사 그 자신, 그의 매우 충실한 지지자드은 모든 일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직접 조사하기에 음모는 매우 쉽게 교란되고, 체제에 대한 저항은 정말로 엄청나게 위험한 일일 것이다."




 이런 것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급기야 '이집트' 가 곧 '메흐메드 알리' 고 '메흐메드 알리' 가 곧 이집트인 상황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집트의 이해관계가 통치자의 이해관계가 완전히 등치되어서, 이집트의 정부, 상업, 정책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메흐메드 알리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것과 진배가 없다. 그는 자기만큼 전제적인 어느 권력자의 말을 빌려 그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집트는 바로 나다.' 라고."




 그래도 일단 농민들이 들고 일어서긴 했습니다. 1824년 여러 촌락과 도시 사이에서 무려 3만 명에 달하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메흐메드 알리에게 이는 상당한 위협이었습니다. 이를 진압하려면 육성한 상비군을 동원해야 했는데, 만약 그 상비군이 본래 자신의 마을 사람들에게 힘을 합쳐 군사 반란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메흐메드 알리는 농민 반란자도, 군 반란자도 무자비하게 죽이면서 대응 했습니다. 그냥 아예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쏘아서 죽였고, 농민도 죽였고, 장병도 죽였고, 장교들도 의심스럽자 죽였습니다. 처음부터 어떠한 망설임 없이 근대적으로 육성된 부대의 화력을 일개 농촌들에 퍼부어대자, 뭐가 흔들리고 말것도 없이 대학살이 전개되어 일이 다 술술 풀리게 됩니다.



 이 가운데 어떤 사례로, 농촌에 투입된 어떤 병사는 우연찮게도 시위에 가담한 자기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고 "항복하라. 그만둬라." 고 했고, 아버지는 "그만둘 수 없다." 며 버텼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를 쏘아 죽여버렸고, 메흐메드 알리는 그 병사를 모범적인 사례라며 승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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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을 이용한 공격과, 여러 감시와 불복종에 대한 학살, 아들이 아버지를 쏘아 죽이는 것도 칭찬받을 일이 되는 '마음' 에 대한 공략 등으로 이집트 백성은 이제 군사적 저항은 꿈도 못 꾸었고, 단지 징집 담당관들이 오면 마을을 아예 버리고 도망가는 일 등으로 대응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메흐메드 알리는 여기까지 통제를 가해 농민들은 다른 마을로 이동하려면 공식적인 허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만약 도망자를 숨겨주었다가 걸리면 큰 처벌을 받았습니다. 




 군대에서도 탈영병이 넘처녔습니다. 당연하게도 탈영병은 잡히면 거의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거나 실제로 처형 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망가는 사례는 끝이 없었습니다. 혹은 어떤 경우에는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불구자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총을 쏘지 못하게 검지를 잘라버린다던가, 총탄을 담은 것을 이로 찢지 못해 장전을 하지 못하게 이를 아예 뽑아버린다던가 하는 것 말입니다.




 이런 일이 성행하자, 메흐메드 알리는 그런 장애인들도 징집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기저기가 성하지 않은 불구자들도 강제로 군대로 끌려와서, 불구만으로 구성된 장애인 부대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신체가 건장한 사람도 끌려와서 고통을 받아 어떻게든 탈영하려고 했던 곳에, 몸도 성치 않은 사람들이 부대 단위로 모여서 이러저리 끌려가는 모습... 상상만 해도 짓물이 흐르는듯한 광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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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흐메드 알리는 교육시설도 정비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집트 전역에 수많은 학교를 만들었고 학교에 다니는 농민의 자녀들에게 책과 숙식, 옷을 모두 무료로 제공하고 매월 장학금까지 주는 '무상교육' 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메흐메드 알리는 어디까지나 돈 많이 드는 외국인 기술자를 대신할 '공장 돌리고 기술 다룰 인간 기계' 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었기에, 학생들은 무조건적으로 암기식 수업을 받았고 창의력을 개발하는 따위는 일절 없었습니다. 학교 역시 군대식으로 운영 되어 학생들은 강제로 학교에 끌려가면, 학교에 머물러서 가족을 볼 수도 없었고, 학교 선생들은 군대에서 하듯 체벌을 일삼았습니다. 학교를 도망치면 그 학생은 물론 부모까지 매질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어떠한 직업선택의 자유도 없이 메흐메드 알리의 기관에서 일해야 했습니다.





 이건 농민들에게 사실상 악명높은 징병제와 다를 바가 없는듯 보였고, 부모들은 학교에 아이를 보내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 눈을 멀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메흐메드 알리는 그런 어머니 중 일부를 잡아다 나일 강에 던져 죽여버렸습니다.




 메흐메드 알리의 여러 개혁 중에서 당대에 이집트 인들에게 호평 받았던 유일한 건 바로 의료 관련이었습니다. 여러 병원이 세워졌고, 천연두 백신을 어린이들에게 접종하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이런 병원 역시 애초에 목적은 군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적을 만나 싸워 죽는것보다 오히려 병 때문에 죽어나자빠지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더 큰 동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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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러니하게도 메흐메드 알리는 일종의 사명감을 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야 그냥 권력을 잡는 게 목적이라 그런 게 있지도 않았지만, 완벽한 권력을 장악하며 점점 자신이 곧 이집트가 되고 이집트가 곧 자기가 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이곳에 올때까지만 해도 과거의 영광은 모조리 잃어버리고 사막의 먼지 속에서 무지와 빈곤에 빠진 이 불쌍한 이집트를 구원하고 계몽해야한다." 는 생각을 품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메흐메드 알리의 시기를 거치며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고, 그 오스만 제국을 거푸 격파할 정도의 군사력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그가 죽고 수십년 뒤 열강의 패권 다툼 틈바구니에서 다시금 몰락하고 말긴 했지만 수세기 동안 몰락한 변두리로 전락했던 이집트를 훨씬 발전 시켰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절대 다수 이집트 인들의 생활은 아무것도 모른채 사막 속에서 맘루크에 시달리며 빈곤하게 살때보다도 더욱 비참한 지경이었습니다.




 "...슬프게도, 수백만의 이집트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메흐메드 알리가 성취한 것들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들은 엄청난 어려움과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집트에 올 때부터 이들의 삶을 개선시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메흐메드 알리는 자기가 바로 그런 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자기인식에도 불구하고, 아랍어를 쓰는 그의 이집트 인 신민들이 수백만 년은 아니더라도 수백년 동안 겪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고생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메흐메드 알리의 개혁 중에서 일반 백성들에게도 이익이 되었던 것은 그들에게까지 '우연히' 파급된 무료 의료 서비스 뿐으로, 그럿만으로 메흐메드 알리의 다른 혁신들이 가져온 참상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메흐메드 알리의 중과세, 독점, 강제 노동, 징집 등은 그 실행과 지속에 있어서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했다. 



 거의 50여년 동안 이집트 인들은 메흐메드 알리의 가혹한 정책들에 자기들이 쓸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즉 육체적 수고와 집단적 의지로 항거했는데, 그들은 민중 반란, 마을으로부터의 도주, 군대와 학교와 공장에서의 탈주, 관료들에 대한 공격, 그리고 가장 극적으로는 자기 몸을 불구로 만들어 파샤가 노동의 이득을 보지 못하게 하는 등의 방법을 썼다.' 


- 메흐메드 알리, 칼레드 파흐미





 이런 메흐메드 알리의 통치는 당대 역사가들에게 부터 논란이 되었는데, 그 뒤를 이은 헤디브 왕가에서는 메흐메드 알리의 이미지를 방어하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이미지를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백성들은 안전과 평안을 빼앗긴 상태' 에서 이집트에 와 '백성을 안전하게 하고 나라를 문명화하는데 헌신' 했다고 주장하면서, 메흐메드 알리를 '백성들의 행복과 복지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는,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도 이해를 받지 못한 채 낡고 노쇠한 이집트를 모든 장애에 맞서 발전시키려고 했던 시대를 앞서간 고독한 선구자' 로 묘사하는데 중점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이윽고 민족주의 사상이 대두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독립을 이뤄낸 메흐메드 알리는 단순 개창자 뿐만 아니라 고귀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 분투한 인물로 격상되었고, 근현대에 접어들어 헤디브 왕가에서는 메흐메드 알리에 관한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여 80권이 넘는 전집을 만들었습니다.



 이윽고 메흐메드 알리에 대한 여러 서구 역사학자들의 연구서가 나왔는데, 헤디브 왕가에서 이런 역사학자들을 지원해준것도 있고, 무엇보다 1900년대 초만 하더라도 서구 역사학자들은 아랍어나 튀르크어 사용에 능하지 않았기에 헤디브 왕가에서 준 자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습니다. 헤디브 왕가가 그렇다고 무슨 없는 기록을 조작했다거나 그러진 않았겠지만, 왕실 문서고에 있는 수많은 자료 중에 최대한 우호적인 자료 위주로 보관하여 건네줬을거라고 상상하기에는 어렵지 않습니다.




 헤디브 왕가가 존속하던 195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성향이 이집트 역사학계에서도 강하다가, 나세르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에는 "메흐메드 알리가 근대 이집트의 건설자임은 분명" 하지만, "개인적인 모험만 관심 있었을 뿐, 백성의 복지와 염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진적이 없다." 는 게 입장이 되었고, 1960년대부터 농업 정책이랄지, 산업 정책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거나 연구가 되어 이런 비판적인 의견도 상당히 강해졌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개혁의 성과' 및 나중에 수십년 뒤 파국이 처하게 된 부분에 대해선 "애초에 잘못되었다." "아니다, 외국의 개입으로 뜻이 꺾인 것이다." "성과가 좋았다" "사실 나빴다" 막 이런 논쟁이 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근대화라는 작업의 과정에서, 그동안 무시 되었던 농민의 고통이라는 것이 기존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는 것은 적어도 틀림없지 않나... 싶습니다.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9-03-08 11:24)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18/10/18 02:12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뭐로하지
18/10/18 02:22
수정 아이콘
중간 중간 이집트랑 상관없는 이미지들은 뭐죠.. 의도가 있으면 말을 하시죠 글로..
뭐로하지
18/10/18 02:23
수정 아이콘
제가 너무 과민반응한건가요
Hastalavista
18/10/1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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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애초에 말도 다르고 혈통도 다른 외국인이 권력을 탈취해서 개인의 이익을 목적으로 민중을 수탈해 댄 꼴인데
그냥 개인의 식민지냐 열강국가의 식민지냐의 차이지 국민국가의 근대화라는 거하곤 별 상관이 없는 전개 같네요-_-;
뭐로하지
18/10/1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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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니까 남북 사진을 하나씩 쓰신거군요 제가 괜히 오해했네요 흑흑
뭐로하지
18/10/1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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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Hastalavista
18/10/18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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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신 거 같은데...
뭐로하지
18/10/18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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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부끄러움
앙겔루스 노부스
18/10/18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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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근데 진짜 다른거 떠나서 모든 가치요소를 배제하고 볼 때 정치능력 하나는 괴물이네요...

권력기반을 형성하고 특정 인간집단을 장악한다는 거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인데, 그걸 장악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수족으로 만들어서 자의적으로 부린다는거 정말 엄청난 능력인데 말이죠. 어저께 올리신 글에서 맘루크 숙청장면 정도만 보고도 절로 스탈린동지께서 하셨다는

"그 친구 대단해 정적은 그렇게 다뤄야지!"

라는 말이 떠올랐는데(저 말은 장검의 밤 사건을 보고 한 말) 그 뒤의 일들은 더 하군요.

메흐메트 알리의 일대기를 제대로 사용해야 할 사람들은 근대화를 꿈꾸는 리더들이 아니라, 권력장악의 비법을 알고 싶어하는 독재자들이어야 할 거 같습니다. 박정희가 메흐메트 알리의 비법을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정권과 생명을 잃지는 않았을 듯
앙겔루스 노부스
18/10/18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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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런 의미에서 어제 글을 읽고 궁금했던 부분은, 수백만명이 사는 광활한 일대국가에서 수백년동안 그 지역의 정치질서를 주도해온 집단, 세력이 일소되었을 때, 그 정치리더쉽의 공백이란게 어지간해서 메꿔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메흐메트 알리는 그 리더쉽을 무슨 수로 대체해 냈는지 그게 궁금하긴 했습니다.

오늘 글에 그에 대한 답이 어느정도 있는 듯.
신불해
18/10/18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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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신불해
18/10/18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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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내용 절대다수가 '메흐메드 알리, 칼레드 파흐미 저' 라는 책에서 인용한 내용인데, (책은 다소 한국인 입장에서 낯설수 있는 시대상을 다루면서도 꽤 쉽고 재밌고 그러면서 생각보다 자세한 편입니다)



그 책의 번역자 서평도, "번역하는 내내 메흐메드 알리의 폭압과 폭력에 전율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악한소설을 읽는듯한 재미가 있었다" 라는 평이 있었을 정도니, 뭔가 권모술수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흥미로운것 같습니다.
뭐로하지
18/10/18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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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혼자 오해하고 망상한걸 적은거라 혼란을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ㅠㅜ
18/10/18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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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근대화이며 누구를 위한 성장이냔 면에서 지금도 시사할 점이 많죠
그게 당시 사람들의 크나큰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후의 이집트 국민들의 생활에 이득을 주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기에 알리의 정책의 정당성을 논할 거리가 되었다는 것도요
율리우스 카이사르
18/10/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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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서 교육 강화한거를 의도적으로 엏었다 뭐 그렇게 보신건가 싶긴한데 그냥 오해신거 같아요
창조신
18/10/1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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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수준 높은 글 감사합니다.
이치죠 호타루
18/10/1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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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대부분 다수 민중의 땀과 눈물과 피를 불러오는데 메흐메트 알리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네요.
창조신
18/10/1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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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편 글에 대해서 의문점이 있는데, 당시 중동의 오랜기간 패자였던 티무르의 영향력이 후계자들을 모아서 날려버린 것 만으로 일소가 될 수가 있던건가요?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면 티무르의 영향력이 반 무하메드 알리로 모아지고 방계나 살아남은 직계 쪽으로 모아져서 큰 골칫거리가 되었을텐데 어떻게 한번에 쓸어버리는게 가능했던 건가요?
신불해
18/10/1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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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초기 이성계, 이방원 시절 중앙 아시아의 패자였던 인물이고, 메흐메드 알리가 맘루크를 척살한건 나폴레옹이 몰락하던 정도의 시기입니다.


티무르와 맘루크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뭔가 혼동 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맘루크의 세력이 일소된건 애초에 맘루크가 무슨 거대한 통합된 단체가 아니라, 여러 지도자들이 난립하는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군소 호족들의 난립을 생각하면 되겠네요. 그런 상태에서 타격을 입으니 무엇을 구심점으로 뭉칠수도 없고, 메흐메드 알리가 그런 기회도 주지 않고 색출해서 잔당을 토벌하기도 했구요.



그나마 중심이 될만한 맘루크 거대 지도자가 없지는 않았는데, 모아놓고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전 메흐메드 알리와 전쟁하던 중 죽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알리가 "이제야 이집트는 나에게 즐거운 곳이 되었다." 며 안심했다고 하니, 이 죽음이 알리에게 큰도움을 주었다고 할만합니다.

그 뒤 근소세력은 앞서 말했듯 회유하는척 하고 모아서 죽였고...
창조신
18/10/18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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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왜 맘루크를 티무르라고 머리속에 입력해 놨는지 모르겠네요.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먼저 머리를 없애고 후환이 더 없으니 불러놓고 다 죽여 버린거 엿던거군요
Lord Be Goja
18/10/18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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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도 이전에 어떤 상황이였냐가 이후에도 영향을 미치죠.일본은 본격적 개항이전에도 네덜란드와의 교역으로 서구의 문물이 좋다는걸 지배층들이 이미 알았고 지방의 세력가들이 있었으며 그 세력가들이 중앙정부를 엎어버렸을때 구심점으로 세울수있으면서 실권은 없던 덴노가 있었죠.
청나라는 서양의 문물중 쓸만한게 있다는거는 무역으로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아쉬워하지도 않았고 무역자체는 엄청난 흑자였고.. 이홍장같이 지방에 세력이 있는 군력자라도 해도 중앙에서 활동하고 싶어했지 중앙을 엎어버리고 싶어한건 아니고 황제를 엎어버리고 내세울 구심점도 없었죠.그렇다고 서테후나 황제가 스스로를 엎어 버릴리도 없고.그러다보니 낡은체제를 유지하며 전쟁을 하려고하니 국력을 모두 발휘할수가 없어 서양의 무기를 사는 정도로는 영국이나 일본에게도 이길수없는 나라가 되었고..
조선은 체제를 엎어버릴수도 없고 서양과 교역을 한것도 아니니 힘들죠.경제력도 많이 모잘랐고...

이집트의 근대화 결론이 저리난것도 결국 이전의 상황이 영향을 미친거같네요.
이슈타르
18/10/18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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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뭐 조선이나 이집트라 근대화 초엽에는 서로 비슷하다고 보이는군요..본문에서의 제반조건이 같이 이집트 주민들은 조선에도 거의 같았다 할수가 있죠

그러면 일본은 왜 성공??...일본은 그 본질이 군국주의적 억압적 구조가 내재화된 사회이죠,,,, 그러니 백성들은 위에서 시키는대로 아무 저항도 불평 없이도 해냄니다 ..정권에 대항해 반란은 생각도 못하고 어지간한 고통 정도는 참아내고 하니 이런 나라가 급속한 개혁이나 발전 요구에 잘 순응을 하죠
글고보니 근대 일본하고 유사 체제가 하나 더 있네요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러시아 바로 소련이죠
다른 예를 역사상 찾아보니 법가적 통치 사상으로서 국력을 급속히 강화시켜 천하 통일 달성한 중국 고대 진나라가 되겠네요 ..결국에는 독재 없이는 근대화내지 국력 배양은 불가,,라고 하는 결론이 나옴니다
이슈타르
18/10/1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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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집투 인구가 7800명 이람니다..우리 남북한 합쳐진 인구가 7500만명 인데 조선말 시점 인구가 1600만에서 1800만명이거든요
19세기경 이집트 인구가 1000만명 이하가 되기는 어려울 검니다,,이집트는 나일강의 비옥한 델타 삼각주에서 소출 농업력을 고려하면 인구 부양력이 아주 높습니다
저격수
18/10/18 18:45
수정 아이콘
이집트에게는 자신을 지켜줄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이 없었습니다.
저격수
18/10/18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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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해님을 비롯한 pgr 작가분들의 진짜 능력은, 제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야의 글을 끝까지 읽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18/10/1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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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가 비슷한시기에 별다른 외부 유립 없이 인구 300만에서 1억3천만으로 증가한거 보면 단순히 현대의 인구를 바탕으로 과거 인구를 판단하는거는 무리가 있는거 같네요. 근대에 들어서면서 의학발전, 농업생산량 증가로 인구가 늘어날 만한 요소가 많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집트는 나일강 유역의 높은 인구 밀도 때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서 인구가 많이 줄어드는 시점이 여러번 있었기 때문에 인구가 적었다는게 딱히 이상하지는 않네요.
18/10/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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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같은 경우는 이미 제정 러시아 시절 gdp가 세계 6위의 열강이였습니다. 스탈린이 아무것도 없는데서 발전한것도 아니고 강대국을 더 강하게 한거니 맞는 예시는 아닌거 같군요.
일본의 경우 본인들이 잘하기도 했지만 주변 여건들이 굉장히 좋게 작용한 결과물이라 그런 결론을 내는건 좀 비약 같네요.
이슈타르
18/10/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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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는 러시아는 국토 ,인구가 커서 경제력이 더 크고해도 후진적인 농업 국가 였죠..선진 공업국이 아님니다..재정러시아시절만 해도 농노 같은 전근대적 요소가 다분하고 한 중세적 국가체제인데 이조차도 피료르트 대제의 서구화로 그나마 근대화되서 군사력에서 서구수준에 따라간게죠,,짜르 같은 전제 군주 아니라면 그같은 서구화 발전시도 마저도 귀족들 방해로 ,농민들 무지로 실패로 가고 했을것 입니다
일본은 개국전에 유럽 열강들의 직접적 침입을 번 자체만의 힘으로 막아내고 한 전력이 있죠..일본이 특별하게 유럽측 외침을 피한다든가 하는 행운을 누리고 한 부분은 없습니다
이슈타르
18/10/1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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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이집트는 대양도 아닌 지중해 건너에 유럽이 존재 하므로서 서구화의 필요를 일찍 받아들여 본문 같은 선진적 개혁이 시작되고한거라 지리적으로 유럽에 근접 한건 오히려 발전의 강력한 동기가 되죠..조선이나 일본이 이 지구에서 가장 늦게 서구 유럽 하고 군사적 충돌을 합니다..그러함에도 일본은 16 세기부터 유럽하고 교역을 하고한 나라이죠..대서양이나 인도양에 의해 동북아시아가 유럽하고 격리 되어 진것이 반대로 근대화에 방해물로 작용하고 한 검니다
18/10/18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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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이나 짜르나 독재적인 권력을 가졌는데 짜르는 근대화에 실패했고 스탈린은 성공했죠. 둘다 독재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스탈린이 성공해서 근대화에는 독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이상하죠. 동시대 대부분의 전제군주들이 근대화를 시도했고 성공한 경우가 몇 없는데 독재가 없어서인가요?
일본을 유럽과 거리가 있어서 이집트, 오스만 같이 간섭을 덜 받았고 뜯어먹을게 훨씬 많은 중국이 있어서 관심을 덜 받은게 행운이였죠.
이슈타르
18/10/18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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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그럴리가요..짜르가 서부 유럽을 추종해서 러시아에서 전근대성을 밀어내고 근대화에 성공한건 맞습니다...재정기 시절만 해도 러시아가 아무도 무시 못하는 유럽내 열강중 1국가 였던검니다..짜르시절 근대화는 그 당시 시기 인문적 .문물 기준에서 이고 전세계를 놓고 보아도 선진화된 사회란건 분명하죠..
그러한 연유로 영국 제외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이 이른바 [대육군] 을 끌고 원정을 감행 함해도 러시아 정복에 실패 했었던 것이고 말이죠
즉 다시말해 낙후한 후진 사회는 전제적 정권이 근대화 같은 나라 전체를 갈아 업는 대업을 성공시키는데 주요한 요소가 된다는거이 확실해 보입니다
메흐메드 알리가 똑똑하고 유능한 인물이란거가 단박에 증명이 되죠,,,, 독재화 통해 개인 권력을,그 기반을 단단히 하고 서구화, 근대화에 착수 한거니까요
조선하고 청나라를 놓고 보면 이 2나라는 내정에서 혼미를 거듭해서 내부 반란도 진압을 못하며 외세침략에 휘둘리고한 건 역사적 사실이죠 ....아 글고보니 유사 한 예가 프랑스에다 먹힌 베트남이 있군요..당시 베트남 왕조가 조선의 판박이 스러웠습니다
신불해
18/10/1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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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군대는 10년 동안 엄청나게 성장하여 13만 명이라는 노랄운 숫자에 달하게 된다. 인구가 500만 정도인데 군인이 13만 명이면 총인구의 약2.6%라는 뜻으로, 이는 군인의 비중이 엄청나게 높다는 뜻이다..' - 칼레드 파흐미 저, 메흐메트 알리 中



https://en.wikipedia.org/wiki/Demographics_of_Egypt

이집트의 인구는 1900년대 넘어 급속도로 증가한 것으로,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빈곤에 시달리던 지역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올 무렵만 해도 이집트의 인구는 300만명 언저리에 불과한 수준이었습니다.
18/10/1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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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불해님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young026
18/10/18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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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근대화'로군요.
young026
18/10/18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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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구 1억이 넘는 필리핀은 30년 전만 해도 남북한 인구보다 적었습니다.
10년째도피중
18/10/1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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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반서구화, 반근대화에 대한 저항운동들이 반일 혹은 항일운동으로 읽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근대화로 인해 개인의 삶이 좋아졌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대답이 항상 오묘해요. 특히 한국의 근대화라는 부분에 있어 '일본식민지 시대'보다는 '박정희 집권기'에 집중하는 탓에 더 괴상해지는 것 같구요. 둘을 연결지어 하나로 생각하는 역사학도 있긴 하지만... 으흠...

여하튼 근대화라는 것은 늘 다수의 희생을 필요로 했던 것이었고, 본질적으로 특정 지배계층의 이득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렇다고 피지배계층에게 집중한다는 체제가 더 좋은 결과를 불렀냐하면 그건 아니었다는 거겠죠.
하이웨이
19/04/06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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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주의의 어두운 면이네요 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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