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5/08 15:45:24
Name 두동동
Subject [15] 아빠 차가 최고에요!
1.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학교생활은 정말 즐거웠지만 안타깝게도 기숙사 생활은 저에게 잘 맞지 않았어요. 학습실 돌아와서 친구들과 카드게임 신나게 하고, 재밌는 소설 돌려보고 몰래 노트북으로 게임하고 이런 경험들은 아직까지도 추억이지만 그래도 집만 하겠어요? 내 방, 내 침대, 엄마 밥! 그 성향은 아직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어서 자취하는 지금도 주말마다 집에 와서 이틀동안 한발자국도 안나서다가 일요일 저녁에 집을 나섭니다. 한숨을 푹푹 쉬면서요...
고등학교때는 다행히 집이 가깝기도 하고, 주말마다 가야하는 학원들도 있었기에 매주 부모님이 오셨고 그때마다 보통 아빠가 데리러 오셨습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친구들끼리 카풀을 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빠가 거의 50%즘 하신 것 같아요. 그때 기준으로 10년 가까이 된, 구형 카니발을 몰고 오셨죠.

2.
학교 특성상 부모님들이 꽤나 잘 사시는 분들이 많았고, 당연히 주말마다 학교에 오는 차들도 삐까번쩍했습니다. 큰 제네시스 정도면 평균이고, 막 차 문이 위로 열리는 차부터 번쩍번쩍한 외제차 그런 차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차 문이 위로 열리는 것 빼고 다른 건 기억나지 않아요. 차 문이 위로 열리는 것도 신기해서 기억나는거고 무슨 차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엄마는 그런 차들을 보고 위축되셨다고 해요. 왜냐면 저희 집 카니발은 일단 낡았고, 아빠는 차를 철저하게 소모품 취급하셔서 절대 외장에 돈을 들이지 않으셨거든요. 엔진에는 온갖 공을 들이셨지만 범퍼가 녹이 슬든 찌그러지든 절대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하얀 카니발이라 뒤쪽 라이트 있는 범퍼가 찌그러져서 녹이 슨 것이 엄청나게 티가 났지만 그 녹은 차를 폐차하기 전까지 그대로였어요.

3.
아빠는 공무원 생활을 하시다가 최근 퇴직하시고 운송업을 시작하셨습니다. 트럭을 몰고서 핸드폰으로 실시간 퀘스트를 받으며 일을 하시는데 정말 즐거워하셔요. '일을 하면 그만큼 돈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너무 재밌으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어느날 약속이 있어서 어디를 가야 할 사정이 생겼는데 아빠가 일하는 루트랑 겹쳐서 태워주시겠더라고 하더라고요. 흔쾌히 감사합니다! 외치고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이제는 일이니까 외장도 말끔하게 뽑으셨는데 안은 더더욱 편하게 만드셨더라고요. 운전을 별로 즐기시지 않은 편이셔서 그런지 승차감을 위해 정말 여러가지 장치를 추가하신 것 같고, 관련해서 여쭤보니 가는 내내 뭘 추가했는지 그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평소의 잔잔하던 아빠의 운전 스타일이 공격적으로 바뀌신게 느껴져서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나 싶었어요. 우리 아빠가 이런 급가속을! 이런 끼어들기를 하시다니!

4.
10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엄마께서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카니발 학교에 오는 게 부끄럽지 않았냐고요. 반대로 아빠 차가 최고였다고 이야기했어요. 친구 3명과 일주일간 쌓인 빨래와 공부할 것들 들어있는 책가방 가지고 집에 가는 상황에서, 카니발 아닌 다른 차를 타는건 정말 고역이었거든요. 차가 좋은 승차감을 자랑하는 승용차면 뭐합니까 타는 사람은 비좁아 죽겠는데... 아빠 차는 유일하게 짐을 넉넉히 실고도 각자 자리가 하나씩 보장되어 있어 타기 위해 몸을 좁히지 않아도 되는 차였어요. 그 때의 경험이 워낙 강렬해서 제 차 취향은 연비 그런거 모르겠고 무조건 크고 수납공간 넉넉한 찹니다. 물론 취향을 이야기하기 전에 운전면허부터 따야겠지만 흐흐
엄마가 말씀하시길 아빠가 저번에 트럭에 태우고 데려다주실 때 정말 걱정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약속장소에서 트럭에서 내리는 걸 부끄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이셨대요. 교통비 굳었다 + 좀 더 늦장부려도 된다 이런 느낌으로 좋아하는 제 모습을 보고 위안을 많이 받으셨다고 하네요. 부끄럽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5.
어쩌다보니 제 자랑글이 되었지만 (쓰고 나니 부끄럽네요) 아마 지금까지 효도 중 best 3안에 들어갈 일이 아니었을까 으쓱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 진짜 이걸 왜 적었지... 효도했다고 자랑하고 싶으면 그건 정말 효도가 맞는 걸까요?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네. 부모님이신 분들은 카네이션 받고 좋은 추억 만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1-05 21:1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김연아
22/05/08 15:49
수정 아이콘
요샌 카니발이 회장님 차입니다^^
22/05/08 16:17
수정 아이콘
저도 어렸을 적에 아버지 차가 정말 낡은 기아 베스타였습니다. 글쓴분 아버지 차처럼 넓었지만 외장이 정말 낡았었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희 아버지도 이번에 트럭을 구입하셨는데, 그 핸드폰 실시간 퀘스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두동동
22/05/08 19:09
수정 아이콘
한번 여쭤볼께요. 아시는 분이 그런 트럭 배차 담당하시는 분이라고 그분 통해서 소개받으신 것 같긴 한데..
토끼공듀
22/05/08 16:30
수정 아이콘
카니발 비웃는 사람은 진짜 차알못이죠.

카니발이 필요한 경우는 벤비아페람포가 와도 카니발 대체 못합니다.
Euthanasia
22/05/08 16:34
수정 아이콘
제가 이해를 잘 못하는 걸까요. 어떤 효도를 하셨다는 거죠?
살려야한다
22/05/08 17:12
수정 아이콘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요. 큰 효도 맞지요.
수정과봉봉
24/01/09 09:05
수정 아이콘
부모님께서 걱정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아버지 차량을 부끄러워 하는 것) 만으로도 효도지요
레저렉션
22/05/08 16:4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부모님 입장에서 자녀가 부끄러워하지는 않을까 친구에게 창피는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셨겠지만 더 좋았다고 하는 자제분을 보고 많이 기쁘셨을 것 같네요.
22/05/08 17:52
수정 아이콘
두동동님같은 아들이 못된게 부모님에게 죄송하네요... ㅜㅜ
ItTakesTwo
22/05/08 18:28
수정 아이콘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제가 원하던 차량과는 엄청 거리가 먼 SUV 탑니다만 아기들이 "아빠 붕붕이 좋아!!"라고 하는 거 보면 제 만족도 따위는 저 멀리 사라져버리더라구요. 다만 아기들이 더 커서 SUV가 필요없게 되면 전 제가 원하던 차를 사겠지만요 ㅡ.ㅡ
22/05/08 18:43
수정 아이콘
어릴때 카니발 정도면 꽤 좋은차라고 생각했었는데 저게 안부끄러운걸 가지고 효도까지 되는건가... 했더니 저와는 다른세상에서 기준이군요 ㅠ
Winter_SkaDi
22/05/08 22:44
수정 아이콘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엄마 보고 싶당...
22/05/09 00:49
수정 아이콘
신문배달하셨던 부모님이 오토바이로 태워주실 때 교문 멀리서 내려달라고 하던 것. 평생에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 best3 중 하나입니다. 저는 갖지못했던 그 마음씨에 질투가 나네요.
22/05/09 08:54
수정 아이콘
기숙사 있는 (+학부모들이 잘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면 과고, 영재고, 외고, 특성화고, 자사고 중 하나일텐데...자녀가 그런 곳을 나왔다는 것만으로 부모님은 자랑스럽겠네요
지니팅커벨여행
22/05/09 09:06
수정 아이콘
아빠 차가 기아차여서 기아가 가장 좋다고 하는 저희 아들래미가 생각나네요.
차를 매우 좋아하는 녀석이고 아우디며 BMW, 볼보 등 알 건 다 5살 경부터 알고 있었죠.
하루는, '아빠는 왜 아우디 안 샀어요?'라고 물어봤는데, 그 차는 비싸기도 하고 수리할 때 돈도 많이 들고 아빠 눈에는 멋이 없어서 별로 관심이 없단다... 라고 하며 위기를 넘긴 적이 있었죠.
그 이후론 아빠 차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철이 너무 일찍 들어 버린 건 아닌지 서글퍼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게 두동동님 처럼 진심이겠죠?
정회원
22/05/09 11:46
수정 아이콘
옛날 아버지 차는 별로 좋은 차가 아니었는데,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고, 교문 앞에 바짝 대 달라고 했던 저를 급반성합니다.
Faker Senpai
22/05/09 15:57
수정 아이콘
잘읽고 갑니다. 훈훈해지네요. 아버님이 카풀을 50%쯤 하게되신것도 아이들이 카니발이 더 편하다고 피드백을 하니까 부모님들끼리 아버님께 더 부탁드려서 그렇게 된거 같기도 하네요.
24/01/13 12:10
수정 아이콘
저도 고등학교 기숙사에 가끔 밤마다 간식 주러 XD아반떼 끌고 오신 아버지 생각나서 눈물 살짝 괴이네요.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들어가면 그랜져 뽑는다 하시더니 또 대학등록금 한다고 안뽑으셔서, 회사 취직하자마자 그랜져 사드렸는데 두고두고 잘한 일 같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500 [테크 히스토리] 전세계 콘센트 하나로 통일 좀 해줘라 / 전기 플러그 역사 [43] Fig.13822 22/05/09 3822
3499 [15] 아빠 차가 최고에요! [18] 두동동4402 22/05/08 4402
3498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365] 여왕의심복4984 22/05/06 4984
3497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그 맛.. [62] 원장2830 22/05/04 2830
3496 [15] 장좌 불와 [32] 일신2728 22/05/03 2728
3495 퇴사를 했습니다 [29] reefer madness3351 22/05/02 3351
3494 집에서 먹는 별거없는 홈술.JPG [23] insane8015 22/04/30 8015
3493 인간 세상은 어떻게해서 지금의 모습이 됐을까 - 3권의 책을 감상하며 [15] 아빠는외계인4844 22/04/29 4844
3492 [테크 히스토리] 인터넷, 위성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 해저 케이블의 역사 [32] Fig.13921 22/04/25 3921
3491 소수의 규칙을 증명..하고 싶어!!! [64] 라덱4943 22/04/25 4943
3490 웹소설을 써봅시다! [55] kartagra5362 22/04/25 5362
3489 믿을 수 없는 이야기 [7] 초모완3682 22/04/24 3682
3488 어느 육군 상사의 귀환 [54] 일신4476 22/04/22 4476
3487 (스크롤 압박 주의) 이효리 헌정사 (부제 : 어쩌다보니 '서울 체크인' 감상평 쓰다가...) [76] 마음속의빛3980 22/04/19 3980
3486 [테크 히스토리] 커피 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아내를 두면 생기는 일 / 캡슐커피의 역사 [38] Fig.12986 22/04/18 2986
3485 『창조하는 뇌』창조가 막연한 사람들을 위한 동기부여 [12] 라울리스타2934 22/04/17 2934
3484 코로나19 음압 병동 간호사의 소소한 이야기 [68] 청보랏빛 영혼 s3348 22/04/16 3348
3483 [기타] 잊혀지지 않는 철권 재능러 꼬마에 대한 기억 [27] 암드맨3915 22/04/15 3915
3482 [일상글] 게임을 못해도 괜찮아. 육아가 있으니까. [50] Hammuzzi2957 22/04/14 2957
3481 새벽녘의 어느 편의점 [15] 초모완2940 22/04/13 2940
3480 Hyena는 왜 혜나가 아니고 하이에나일까요? - 영어 y와 반모음 /j/ 이야기 [30] 계층방정2840 22/04/05 2840
3479 [LOL] 이순(耳順) [38] 쎌라비4084 22/04/11 4084
3478 [테크 히스토리] 기괴한 세탁기의 세계.. [56] Fig.13638 22/04/11 363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