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3/01/12 02:14:15
Name reefer madness
Subject 라오스 호스텔 알바 해보기
안녕하세요 현재 라오스의 두번째 도시 루앙 프라방에서 이 글을 적어봅니다.

모든게 싫증이 나고 삶에 변화를 주기 위해 캐나다를 떠난지도 7개월차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가 살고있던 토론토를 떠나 포르투갈에서 시작해서 유럽을 좀 돌아다닌 후, 터키 이스탄불에서 직항으로 한국으로 간 다음 이제 동남아에 온지 2개월이 지나갑니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이 또한 무료해지더군요. 항상 며칠 후 어딘가로 떠나야한다는 불안감, 혹은 반복대는 호스텔에서의 대화(너 어디서 왔니? 어 이제 거기로 가니? 응, 거기 XX 추천해. 히히)의 형식에 질릴도록 질려버리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돈을 아끼느라 보통은 호스텔에 머무는데 제가 나이가 조금 있는 편인지라 좀 더 성숙한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든 경우도 있더군요(만 35세. 호스텔 가기 아슬아슬하죠?). 그리고 다들 특정한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저는 이제 일절 '여행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사원에 가야한다, 어느 절벽에서 지는 해를 보려 가야한다, 뭐 이런 이야기들은 수없이 들리지만 아마 제 성격상 어디 돌아다니는건 정말 좋아하지만 막상 가면 편안한 '집'안에 있는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타입이라 그런가 봅니다.

그러던 와중 제가 태국 가기 전에 여기 라오스에 한 3주 정도 머물게 되었는데 마침 어느 작은 소도시에 위치한 호스텔에서 일을 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워낙에 여행에 질릴대로 질린 터라 한곳에 장기간 머무르게 되는 기회다 싶어서 호스텔 주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 결국 저는 타켁(Thakhek)이라는 작은 소도시로 가게 되었습니다.

타켁은 4만명이 안되는 작은 도시이며, 관광이라 하면 타켁에서 시작되는 타켁 루프를 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방문한다고 알고있습니다. 이 도시에서 오토바이를 빌려서 3-4일간 멋진 광경들을 보며 절벽, 호수, 동굴 기타 등등을 탐험하는 제대로된 여행자들을 위한 곳이라 보면 되죠. 저는 이 도시에 위치한 호스텔에서 리셉션을 해주며 공짜로 자는 조건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일단 첫날 그 호스텔로 들어가자 마자 좀 고난이였습니다. 제가 이메일로 이야기를 주고받은 호스텔의 주인은 태국 사람으로서 현재 라오스에 있지 않은 상황이였고 호스텔을 관리하는 여자애가 한명 있었는데 그 여자애가 아프다며 제가 오자마자 자기 집으로 쉬려 간것입니다. 뭐 대충 열쇠는 어디 있고 이야기는 했지만 체크인이나 체크아웃 과정, 등의 아주 기초적인 호스텔 운영에 대한 지식전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여자애는 집으로 가버립니다.

그런 후 저는 혼자 그 작은 호스텔에 남겨지는데 일단 그 호스텔에 대해 설명하자면 3개의 방이 있고 각자 6명, 4명, 4명 총 14명이 묵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뭐 시설이라고는 화장실 몇개랑 샤워실이랑 거실공간이 다여서 무척이나 심플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들어올 게스트들이 몇명 있어서 저는 잔뜩 긴장한 채로 호스텔 리셉션을 봤었죠. 

첫날 밤 한 2-3명 체크인하는거 도와준걸로 기억하는데 인당 80킵(한화 6000원 이하)를 받고 도미토리의 침대로 안내합니다. 와이파이? 벽에 적혀있음. 수건은? 음, 여기 있네. 빨래 서비스는? 아 모르겠는데... 일단 저를 조금 난감하게 하는 부탁들이 슬며시 다가옵니다. 그때마다 태국에 있는 주인에게 메세지를 보냈고 시원찮은 대답이 안나올때는 그냥 제가 알아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죠. 일단 세탁기를 찾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낸 후 손님들로 하여금 스스로 빨래하게 만들고 최대한 '오늘만 대충 수습하자' 마인드로 호스텔을 돌보았습니다.

일단은 그렇게 첫날밤이 지나고 내일이 되었는데 문제는 그 여자애가 아직 아프답니다. 그 사실을 태국에 있는 주인에게 이야기 하니까 어떻게든 사람들을 오늘 보내서 도와주겠다. 이렇게 무작정 홀로 남겨둬서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요. 그래서 두번째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11시가 되자 몇이들 슬슬 체크아웃을 하고, 몇명은 하루밤 더 있고 싶다고 하네요. 계속 시간은 지나가고 그날 체크인 하는 손님들의 리스트도 주어지는데 아직 방들을 청소할 사람들이 오지 않네요. 아, 이래도 되는 것인가? 그렇게 계속 주인에게 재촉해보았지만 결국에는 역시 제대로된 대답이 오지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 혼자서 손님들 체크아웃한 침구들을 빨래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타켁 루프를 하기전에 짐들을 맡기려하는 손님들도 있고요. 짐 어디다 두지? 음, 여기 짐 보관방 열쇠가 있군. 그렇다면 한번 그 방을 찾아보자... 뭐 이런식으로 완전히 대충 날리는 호스텔 운영을 하면서 어설프게 침구들을 정리하고 방을 정리합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저녁 무렵에 그 여자애가 오더니 와우, 방들 참 잘 준비했네? 이러면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집으로 가버립니다. 저는 좀 어처구니가 없죠. 애초에 처음부터 해야할 일을 제대로 말해주면 쉽게 해버릴 것을, 이렇게나 아무렇게 내팽겨쳐놓고 일이 될대로 되라라는 마인드가... 부럽습니다. 이건 제가 워낙에 제대로 일을 하고 책임감 넘치는 환경에서만 살다온 제 탓이겠죠?

그렇게 해서 제 3일날도 저혼자였습니다. 3일날에는 그 여자애가 아픈건 아니였지만 주변 지인 결혼식때문에 못온다네요. 이제는 애초에 남이 도와줄거라는 기대도 안하고 계속 리셉션 보면서 사람들 체크아웃 하자마자 침구 빨래 들어갑니다. 한때 시급 3만원 넘게 받다가 하루저녁 6천원이 안되는 호스텔에 하루저녁 재워준다고 하루종일 일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면서 살짝 미소가 나오더군요. 사실, 이러한 겸허함이 제게 필요했던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사람들을 맞이한다는게 사실 꽤나 즐거웠네요. 물론, 평생 그렇게 하고 살으라고 하면 당연히 스트레스 받아 죽을 일이지만 당분간 이렇게 해본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니 제겐 생소하고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항상 호텔이든 호스텔이든 손님으로서만 있어봤기에 청소하는 입장이 되어보니 얼마나 인간들이 지저분하고 뒷정리가 안되는지 잘 느끼게 해주는 경험이였습니다. '인간이 지나간 곳에는 항상 쓰레기가 있다'라고 명심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3일날 저녁이 되서야 호스텔 관리자 여자애(얘 이름은 코이)가 돌아옵니다. 저는 녹초가 되어서 일찍 잠을 청하고 그다음 날부터는 걔도 이제 자기 볼일 다 끝났는지 같이 서로를 도우며 호스텔을 운영해 나갑니다. 원래 일하던 사람이 한명 들어오니 제 부담도 줄고 그 이후로부터는 편안하게 타켁을 좀 즐기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보통 이런식으로 일과를 보냈죠:

아침 8시: 일어남. 코이가 사다놓은 바나나랑 아보카도 먹으면서 인스턴트 커피를 흡입.

아침 10시: 이때 즈음 사람들이 체크아웃하기 시작함. 오후에 너무 밀리면 안되니까 재빨리 침구들 꺼내서 빨래 돌리기 시작함.

점심 12시: 코이가 시장에서 점심(매콤한 쌀국수, 혹은 돼지고기랑 밥) 사옴. 역시 퐁풍 흡입.

오후 2시: 이때부터 대충 빨래가 정리되고 다들 체크아웃 하면 제일 한가로울 타이밍. 이때 해먹에서 낮잠을 취함.

오후 6시: 저녁을 먹으려 밖으로 나감. 코이한테 맡기고 이때서야 타켁 시내도 조금 돌아다님.

오후 8시 - 11시: 이때 많이들 체크인.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에서 타켁으로 오는 버스가 하도 오래 걸려서 다들 늦게 도착함.

12시 자정: 취침. 그러나 간혹 새벽에 도착해서 깨우는 손님들 한번씩 있음.

이렇게 일상을 보내며, 간혹 시간이 있을때 헬스를 하려 가거나 메콩강을 바라보며 조깅도 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물론 마음에 맞는 여행자가 있으면 라오스 맥주도 사와서 한잔하는것도 잊지 않았죠.

그렇게 한 2주일 안되게 타켁에서 즐겁게 보냈습니다. 장기간 여행을 하다보니 한곳에서 살면서 루틴대로 생활하는게 너무나도 즐거웠네요. 물론 미치도록 답답하게 일을 하는 라오스의 정서에 적응하느라 조금 애를 먹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즐겁게 보내고 가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앞으로의 여행하면서도 또 이런 봉사활동을 해보고 싶네요. 

PXL-20230106-014845781호스텔 풍경

PXL-20230106-100125977
호스텔 풍경

리셉션

PXL-20230107-010041987
타켁 루프를 준비하는 여행자들






* 오르골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8-06 20:43)
* 관리사유 : 좋은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1/12 03:07
수정 아이콘
요새 라오스 가고 싶은 마음에 루앙 프라방 등등 알아보고 있는데 이 글을 보니 신기하네요. 라오스가 태국보다 못 살아도 물가는 비슷하고 호텔은 적어서 더 비싸다고 하던데 북미에서 호스텔은 가봤지만 라오스에서 호스텔을 갈 용기는 없는데 재미있는 글 잘 봤습니다. 라오스 매력있어요.
reefer madness
23/01/12 10:28
수정 아이콘
흐흐 네 매력이 많은 곳이죠
23/01/12 03:34
수정 아이콘
제주에서 게하 스텝만 해도 이색 경험인데.

라오스에서 저러면 이색경험 끝판왕이겠네요,.

잘읽었습니다
reefer madness
23/01/12 10:29
수정 아이콘
이색경험 뭐 끝판왕은 아직 인도라는 최종보스가 있지 않을까요? 흐흐
여수낮바다
23/01/12 07:37
수정 아이콘
와 결혼 전에 저런거 해봤으면 정말 잼있었겠다 싶습니다
(물론 막상 일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흐흐)
비슷한 글, 종종 부탁드립니다
reefer madness
23/01/12 10:29
수정 아이콘
댓글 감사드립니다
꿈트리
23/01/12 08:59
수정 아이콘
그랜드 써클은 알았는데, 타켁루프란 것도 있군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서지훈'카리스
23/01/12 09:05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글을 통해 안해본 것을 조금이나마 대리경험 한 것 같네요
MakeItCount
23/01/12 09:09
수정 아이콘
라오스 시엥쿠앙에서 ngo 생활로 2년 정도 했던 입장에서는 아주 반가운 글이네요. 라오스분들.. 참 우리입장에선 답답하지만 그래도 불교국가라 그런지 한없이 순하디 순했던 기억이 있네요. 앞으로 어딜 가시든 건승하시길!
reefer madness
23/01/12 10:30
수정 아이콘
감시합니다!
아이슬란드직관러
23/01/12 09:58
수정 아이콘
돈 주고도 못 하는 경험이란게 바로 이런 거...? 멋지십니다 부럽습니다!
답이머얌
23/01/12 10:08
수정 아이콘
숙박업이 참 힘들지요.
한달만 하면 독서실 총무가 참 난이도가 낮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더군요.
소이밀크러버
23/01/12 10:11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네요
23/01/12 10:30
수정 아이콘
좋은 경험 잘 읽었습니다
북극곰이크앙해따
23/01/12 12:50
수정 아이콘
추천추천
23/01/12 13:17
수정 아이콘
분명 라오어 호스텔이었는데...
지탄다 에루
23/01/12 13:34
수정 아이콘
와 이런게 바로 대리체험인듯. 넘나 신기합니다!!
reefer madness
23/01/12 14:1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아유카와마도카
23/01/12 13:47
수정 아이콘
라는 유튜브 채널 어디 없나요?
reefer madness
23/01/12 14:11
수정 아이콘
그동안 해온 여행 유투브가 있긴 합니다:

https://youtube.com/@akimtravel
복타르
23/01/12 13:52
수정 아이콘
문득 몇년전 지인에게서 루앙프라방에 있는 호스텔을
인수해 운영해볼 생각없냐는 제안을 받은 기억이 나네요.
23/01/12 15:35
수정 아이콘
이 또한 여행이네요!
나혼자만레벨업
23/01/12 21:36
수정 아이콘
와 저는 절대 못할 일이라... 이렇게 글로 간접경험 하고 갑니다~
허경영
23/01/13 09:47
수정 아이콘
너무 좋아 보입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김정환
24/08/07 10:40
수정 아이콘
우와! 라오스..!! 예전에 갔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넘 좋은 추억이 되셨겠어요!
짐바르도
24/08/10 11:31
수정 아이콘
멋있는 경험이네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661 웹소설의 신 [19] 꿀행성12999 23/02/01 12999
3660 60년대생이 보는 MCU 페이즈 1 감상기 [110] 이르13498 23/01/31 13498
3659 도사 할아버지 [34] 밥과글13866 23/01/31 13866
3658 전직자가 생각하는 한국 게임 업계 [83] 굄성14637 23/01/30 14637
3657 엄마와 키오스크. [56] v.Serum13295 23/01/29 13295
3656 워킹맘의 주저리 주저리... [17] 로즈마리13147 23/01/28 13147
3655 육아가 보람차셨나요? [299] sm5cap13742 23/01/28 13742
3654 라오스 호스텔 알바 해보기 [26] reefer madness14894 23/01/12 14894
3653 나에게도 큰 꿈은 있었다네 – MS의 ARM 윈도우 개발 잔혹사 [20] NSpire CX II13859 23/01/03 13859
3652 첫 회사를 퇴사한 지 5년이 지났다. [20] 시라노 번스타인14260 23/01/04 14260
3651 더 퍼스트 슬램덩크 조금 아쉽게 본 감상 (슬램덩크, H2, 러프 스포유) [31] Daniel Plainview13381 23/01/08 13381
3650 지속불가능한 우리나라 의료비 재원 - 지금부터 시작이다. [145] 여왕의심복13633 23/01/04 13633
3649 Always Learning: 박사과정 5학기 차를 마무리하며 [56] Bread.R.Cake15243 22/12/30 15243
3648 개같은 남편 [63] 마스터충달16275 22/12/24 16275
3647 Ditto 사태. [45] stereo15618 22/12/24 15618
3646 여성향 장르물에서 재벌과 왕족이 늘상 등장하는 이유 [73] Gottfried15456 22/12/23 15456
3645 교육에 대한 개인적인 철학 몇 개 [23] 토루14439 22/12/23 14439
3644 (pic)2022년 한해를 되짚는 2022 Best Of The Year(BOTY) A to Z 입니다 [42] 요하네14385 22/12/21 14385
3643 설득력 있는 글쓰기를 위해 [30] 오후2시14478 22/12/21 14478
3642 요양원 이야기2 - “즐기자! 발버둥을 치더라도!” [4] 김승구14261 22/12/15 14261
3641 빠른속도로 변화되어가고 있는 일본의 이민정책 [33] 흠흠흠14674 22/12/14 14674
3640 [풀스포] 사펑: 엣지러너, 친절한 2부짜리 비극 [46] Farce14427 22/12/13 14427
3639 팔굽혀펴기 30개 한달 후기 [43] 잠잘까16010 22/12/13 1601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