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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1/11/15 23:45:56 |
Name |
nickyo |
Subject |
삼만, 하고도 일천, 하고도 칠백여일의 여정. |
1923년에 태어나신 할머니께서는 본인이 14세즈음 될 무렵 우리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고 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전라북도에서 손에 꼽힐만한 남원의 부자였는데, 엄청나게 커다란 술 만드는 공장과, 그보다 더 광활한 땅에 농업을 하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지아비의 얼굴도 모른 채 시집을 왔고, 그 당시엔 하늘같은 지아비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내의 덕목이라고만 알았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좋게 말하면 큰 사람, 나쁘게 말하면 시정잡배같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내가 세상을 보기 전에 할아버지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셨으니까. 할아버지는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 큰소리 치며 사는 것 밖에 모르는 분이었다고 한다. 할머니께서는 14세에 시집을 오셨지만, 한창 마음이 여릴 나이에 작은 할머니를 들이는 할아버지를 바라보아야만 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망할놈이었다며 단 한번도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눈망울에 맺힌 할아버지의 기억은, 원망과 그리움, 한과 용서가 뒤섞인 듯이 울렁거렸다. 그렇게 갈 거였으면 이 양반아. 하고 읇조리듯이..
나의 아버지는 6.25 전쟁이 터진 뒤에 태어나셨다. 1951년 봄의 일이었다. 그 때부터 초등학교 2학년때 까지 아버지께서는 전라북도에서 아주 힘 있는 집안의 아들로, 학교에 가죽책가방을 메고다니는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작은 할머니 아래로 윗 형이 한 분 있었지만, 사랑과는 별개로 당시에는 본처와 첩에 대한 호적적인 문화가 강했기에 아버지는 장남의 위치에 있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때때로 학교에서는 부자집 아들이라며 가죽가방에 돌맹이를 채워넣는 놈들이 있기도 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가죽가방을 멜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수도인 서울로 올라가서 '크게'성공할 거라고 모든 사업을 정리해 떠나셨다. 마치 정주영이와 이병철이의 역사처럼, 할아버지는 변혁과 혼란의 전후 한국에서 크게 될 거라고 믿으셨나보다. 만약 정말 잘 되셨더라면, 나는 할아버지를 여전히 '큰 사람'이라고 불렀겠지만 안타깝게도 할아버지는 '쫄딱'망해버렸다.
할머니는 현명하신 분이었고, 작은 할머니 또한 그러셨다. 두 분은 실패한 집안에서 생활을 위해 갈등없이 지내려 노력하셨다. 서로의 배에서 나온 형제들은 나이차이가 듬성듬성 있었지만, 어려워진 집에 적응하기위해 형,누이들이 동생들을 챙기려 애썼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 집안은 할머니가 두 분이시고 형제자매가 갈림에도 불구하고 한 가족보다 끈끈히 갈등없이 지내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입을 덜고 돈이라도 몇 푼 부치려 당시 삼사관학교에 입교하였고, 작은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졸업이후에 농사일을 도우러 다니며 일년내내 보리밥이라도 한 줌씩 동생들 입에 넣어주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작은아버지께서는 그 때의 고생때문이신지 여전히 잡곡밥을 싫어하신다. 할머니와 작은할머니께서는 갈수록 홧병과 술주정에 시달리시면서도 기울어진 집안을 어떻게든 유지해보려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고 한다. 특히 할머니께서는 아직 야무지지 못하고 곱기만 했던 작은할머니를 데리고 참 고생을 많이 했다며 때때로 집안의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하셨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던 빈곤도 하나 둘 모두 분가를 하고, 할머니께서 환갑이 지나실 무렵에는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걱정없는 집안이 되었다. 할머니께서는 14세때부터 지금까지 고생밖에 모르셨다. 가족들은 모두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어려운 그 긴 노동의 여정을 위로하며 할머니를 너도나도 모시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동생들의 생활을 책임지셨던 작은아버지께서, 고향땅에서 모시는게 좋지 않겠냐며 할머니를 모시기로 결정하셨고 그 때부터 우리는 매 해 두세번씩 할머니를 찾아뵙고는 하였다. 할머니께서는 그 동네에 같이 사는 몇몇 작은집들의 손주들을 환갑이 넘는 나이에 키워주시기도 하셨다. 심심한 것보다는 그게 낫다며 좋아하셨다. 그러나 그 애들도 아기에서 어린이로 넘어가며 점점 할머니의 손을 벗어날 때 마다, 할머니께서는 쓸쓸해 하셨다고 한다.
환갑이 지나 칠순을 앞둔 할머니께서는 그 즈음에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셨다. 친구들이 하나 둘 돌아가시고, 유치원에 다니는 손주들이 찾아오는 날이 줄어들면서 점점 고독한 날들이 느셨다고 한다. 게다가 작은어머니와 아버지께서도 한창 사회생활을 하실 나이였기에 더더욱 낮에는 쓸쓸히 홀로 넓은 집 안 소일거리를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쉬고 계시라고 말씀을 드려도, 아무도 없는 조용한 집에 우두커니 있는 것이 싫다고 하셨다. 한 번은 그렇게 텃밭 소일거리를 하시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시는 바람에 뇌출혈이 생겨 큰 수술을 칠순이 넘으셔서 겪으셔야했다. 의사들이 모두 안된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할머니께서는 대한민국땅의 현대사를 몸소 헤쳐나오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시듯, 중환자실과 치매 모두를 극복하고 정정해지셨다.
그 뒤로 벌써 8년이 지났다. 할머니께서는 뇌출혈 이후 건강해지셨지만 더욱 거동이 불편해지셔서 지팡이를 짚고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고작이셨다. 가족들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경제사정때문에 낮에 할머니께서 혼자 계시거나, 청소하러 오시는 아주머니 정도밖에 이야기 할 대상이 없으셨다. 외로움이 부쩍 느시는 바람에, 가족들은 자주 전화라도 드렸지만 imf이후의 한국 가정들의 상황은 자기 앞 가림하기도 너무나 힘들었었다. 그래서 언제든 할머니께서는 우리의 안부전화와 방문을 많이 기다리셨다고 한다. 마당이 있는 집 안 대문을 창문 틀을 꽉 붙잡고 누가 오지나 않을까 오후에도 몇 번씩 힘든 몸을 이끌고 서 계셨다고 한다. 주황색 가로등이 켜지고, 그나마 중학교를 다니는 작은 사촌동생이 들어오늘걸 보시고서야 저녁을 드셨다. 저녁을 드신이후에는 같은 채널의 연속극을 보시며 무선 전화를 손에 쥐고있으셨다고 한다. 행여라도 전화가 오지 않을까 기다리시며..그렇게 커다란 테레비 스피커의 시끄러운 말들과, 울릴 줄 모르는 전화기 두 가지를 갖고 늦은 밤까지 앉아계시다 잠드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 번도 할머니께서는 싫은 내색없이 고생한다며 가족들을 독려하셨다. 쓸쓸함이 더해가는 눈망울을 우리는 그래서 조금 더 모른체 해도 된다고 생각했나보다.
난 할머니의 인생을 너무나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한다. 삼만하고도 일천, 그리고도 칠백일이 넘는 여정을 걸어오신 할머니의 삶에 대해 어렴풋이밖에 모른다. 지난주 돌아왔던 할머니의 생신에, 나는 근무때문에 내려갈 수가 없다고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아쉬움보다는 너희 부모님도 힘들고 고생인데 뭣하러 내려오냐며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다.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히 그러실 수도 있는 말이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그렇게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분이, 내려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분이 왜 갑자기 그러시는걸까 했다. 가슴속 한 켠에 약간 불안감이 생겨 부모님께 꼭 내려가보셔야 한다고 했다. 약간 할머니께서 평소와 다르시다고 넌지시 말했지만, 할머니를 뵙고 온 부모님께서는 예전보다 더 건강해지셨다며 기뻐하셨다. 차 트렁크에는, 명절때보다도 더 많은 할머니께서 직접 손 본 채소들과 쌀, 잡곡, 고춧가루 등이 가득했다. 김장하라며 부득불 다 챙겨주셨다고 한다. 할머니 생신전에 시험이 끝난 임용을 준비하는 누나와, 수능을 본 사촌 동생도 전부 할머니께서 너무 좋아지셨다며 기뻐했다. 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게 바로 이틀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어제, 할머니께서 쓰러지셨다.
뇌출혈에 의한 의식불명, 지역병원에서는 손 쓸도리가 없다는 말에 대학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들을 수 있는 대답은 수술해서 성공하더라도 식물인간으로밖에 남으실 수 없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였다. 올해나이 여든 하시고도 일곱. 평생 고생과, 고독 두 가지를 가장 곁에 두셨던 할머니께서는 시험을 본 손주들의 이야기와, 생신을 축하드리러 모인 친척들에게 가장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시고는 뒷 모습을 힘차게 배웅해 주신뒤에 쓰러지신것이다.
할머니께서는 중환자실에 있다고 한다. 회생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를 내가 중학교 1학년때도 의사들은 똑같이 말했다. 오늘 아침에는 검은 양복과 와이셔츠를 꺼내놓고 출근했다. 근무지에 할머니께서 위독하셔서 언제 자리를 비울지 모른다고 하자, 나이 드신 분의 죽음이라고 아주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에 울컥하고 속이 뒤집혔다.
병원측에선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무슨 표정으로 어떻게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지 모르겠다. 상상도 하기 어려울 만큼 긴 삶의 여정을 그저 가족을 위해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에,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부조리를 견디며 살아오신 할머니의 삶에 무슨 표정을 가지고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한다는 말인가. 나보다야 먼저 떠나실 수 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건만, 여전히 어떤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겨울에 휴가를 내서 꼭 내려갈테니 건강히 진지 잘 잡수시고 계시라는 말에, 어이! 알겠네 큰손주! 라며 힘차게 말씀하시며 애써 서운함을 숨기신 할머니셨다. 조금 더 있다 보기로 하셨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마지막까지 아쉬운 말씀 한 마디 없이 누워계시는 것에 가슴이 꽉 조여지는 듯 답답했다. 할머니께 마지막으로 드린 전화가 바빠서 찾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전화였다는게 사무친다. 사람 노릇 하면서 살자고 하는 짓이건만, 할머니께서 유독 일년에 몇 번 찾아뵙지도 못하는 내게 주신 정을 조금도 돌려드지 못했는데 몇 달을 못 참고 누우셨다.
삼만일이 넘는 긴 여정이었다. 난 그 여정이 대체 어떤 여정이었는가 잘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단 몇 달, 몇 주만이라도 좋으니 조곤조곤히 할머니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적이 한번만 더 일어났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없게 된다는 사실은 아직 너무 어색하다. 긴 여정에 며칠만 더 힘을 내셨으면 좋겠다. 아직 할머니에게 듣고싶은 말이, 할머니께 해드리고싶은 것이 너무 많다. 이 긴 삶의 끝자락이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 신이 있다면, 힘겹기만 했던 할머니의 여정을 조금만 더 이어지게 해줬으면 좋겠다. 끝이 내게는 너무 어색하고, 어렵다. 난 아직, 할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16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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