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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2/02 21:33:41 |
Name |
happyend |
Subject |
아버지와 아들 (下) |
7.
매년 11월 17일에는 사장자리 유성우가 장관을 이룹니다. 이것은 특별할 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날 밤 깨어있고 날씨가 맑고 그래서 밤에 나와 하늘을 본다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684년, 경주의 밤에 사자자리 유성우는 특별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일관(천문관리)은 호들갑을 떨었고, 왕은 이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이해의 사자자리 유성우는 삼국사기에 기록이 남게 되었습니다.
‘684년(신문왕 4년) 겨울 10월에 저물녘부터 날이 밝을 무렵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떨어졌다.’
왜, 이 유성우만이 특별했을까요? 이해에 유럽에선 흑사병이 유행했고, 이후부터 유성우는 죽음을 불러오는 불길한 징조라고 여겼다고 합니다만....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럽의 일이고,신라와는 무관합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전해에 신문왕은 안승을 경주로 불러들였습니다. 안승은 아시다시피 고구려부흥군에 의해 추대된 보덕국의 왕입니다. 안승은 신라에 망명하였고 보덕국은 신라의 양해아래 금마저(지금의 익산)에 이주하여 세운 나라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왕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저 허수아비왕실이었습니다. 하여간 신라 문무왕은 이런 포용력으로 고구려 부흥군을 포섭하여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681년 8월.문무왕이 죽은 지 한달도 못되어 경주에선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왕실을 지탱하던 절대무력 김유신이 죽고 문무왕마저 세상을 떠나자 진골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 반란의 무리에는 신문왕의 장인인 김흠돌도 있었습니다.
“믿을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구나.”
신문왕은 반역자의 이름가운데서 자신의 장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거운 숨을 토해냈습니다. 마음을 추스린 왕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 반란과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합니다. 당연히 김흠돌의 딸이자 오래도록 자신의 곁을 지켜오던 아내 김씨도 궁에서 추방합니다.
신문왕은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권력에의 의지. 그것이 바로 통일신라시대 경주의 모습이었습니다. 신문왕은 내재된 불안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거듭되었고 왕권강화라는 동아줄을 붙잡으며 잠에서 깨곤 했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가장 불온해 보이는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집단거주촌, 바로 보덕국이었습니다. 왕은 당장 보덕국왕 안승을 경주로 불러들여 고대광실 저택과 기름진 옥토를 주었습니다. 안승은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 마냥 기쁜 듯이 경주에 눌러앉아버렸습니다.
안승이 돌아오지 않자 보덕국 사람들, 다시말해 고구려유민들은 동요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신라를 도와 당나라를 물리치면 언제든지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여겼던 그들에게 귀향의 길은 택도 없어보였습니다. 한해두해...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들에게 귀향을 약속했던 문무왕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왕위에 오른 신문왕이 안승을 불렀을 때 일말의 기대감으로 술렁거렸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실망으로 변했지요. 안락한 귀족의 생활을 위해 보덕국인 따위는 관심도 없는 안승에 대한 배신감과 함게.
보덕국안에선 돌아오지 않는 안승을 둘러싸고 여러말이 오갔습니다. 모두 앞날에 대한 걱정에 휩싸였겠지요. 더 이상 신라는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과 귀향의 기대감이 사라져버린 데 대한 아쉬움이 가득했습니다. 그 팽배한 불만은 날아갈 듯이 경주의 신문왕의 귀에 들어갔겠지요.
때마침 사자자리 유성우가 나타났습니다. 신문왕은 그것을 매우 불길하게 여겼습니다. 아니 어쩌면 왕은 유성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실이 필요했으니까요.
한달 뒤.보덕국의 실력자인 대문은 모반을 일으켰습니다. 저간의 사정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안승의 귀환을 요구했다거나 보덕국의 안정을 요구했거나 어찌되었든 보덕국민들의 대표로서 협상안을 제시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대문은 보덕국민이 보는 자리에서 처형당합니다. 그것은 반란에 대한 신문왕의 의지가 반영된 조치였습니다. 티끌만큼의 반역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왕의 의지였습니다.
왕인 안승도 떠나버리고, 자신들이 믿던 장군 대문도 처형당하자 고구려유민들의 불안감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진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진압되었고, 주민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명맥만 유지되어오던 고구려왕실은 완전히 멸망하였습니다. 왕은 곧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눠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실질적인 통일왕국의 지배자의 권리를 행사합니다.
8.
986년, 아버지의 다비식이 끝난 뒤 설총앞에는 궁궐에서 보내온 화려한 사리함과 유골함이 놓여졌습니다. 신문왕은 자신의 고모부이자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원효에 대한 지극한 예를 다하고자 했습니다.
설총은 아버지와의 이별이 못내 아쉬워 유골함을 만지작거렸습니다. 신라 최고의 장인이 솜씨를 발휘해서 만든 유골함애는 인화문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습니다. 한땀 한땀 손으로 정성껏 꾹꾹 찍어 누른 무늬와 그 겉을 자르르 흐르는 윤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신라의 토기는 석기라고 부릅니다. 신라는 한반도 4국 중에서는 가장 늦게 철기제조기술을 손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생존의 위기를 느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철기제조기술의 비법중에 핵심이랄 수 있는 섭씨 1200도의 온도를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신라는 석탄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가졌고, 그 가치를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기술은 토기를 굽는데 활용되었습니다. 이 온도에서는 흙속에 있는 금속성분이 녹아나옵니다. 알루미나, 실리카나와 같은 성분이 흘러나와 표면을 감싼 이 토기를 석기(炻器, stoneware)라고 부릅니다.
신문왕 시대에는 토기에 특별한 문양이 새겨집니다. 이 토기가 이른바 도장무늬토기라고 불리는 ‘인화문토기’입니다. 도장을 꾹꾹 눌러 만든 인화문토기는 보급형토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양의 양식성이 규격화되었기 때문에 만들기 쉽습니다. 거기에다 석기였으니 아름다움이 이전 어떤 토기를 능가했습니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토기는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높은 온도에서 구운 토기는 생활형 토기가 아니라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양식형토기는 소수특권층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인화문토기는 발굴지역의 분포부터가 특징적입니다. 신문왕대에 다섯 개의 지역거점도시인 5소경을 만들고 관리를 파견하거나 그곳의 지배적 역할을 하던 성주들에게 관직을 내림과 동시에 이 인화문토기가 보급됩니다. 만들기 쉬운 인화문을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그만큼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며 소수특권층이 자신의 기득권을 고집하지 않았던 시대, 다시 말해 포용력의 시대를 상징합니다.
이런 인화문의 시대는 700년 후에 세종대왕시대에 다시 나타납니다. 수도 없이 만들어진 분청사기 가운데 왕실납품용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분청사기가 도장무늬를 꾹꾹 눌러 새겨 만든 인화문분청사기입니다. 세종은 비싼 백자나 청화백자가 아니라 조선팔도 어디서건 쉽고 빠르게 만들어 쓰고 있던 분청사기에 인화문을 입혀서 규격화하여 사옹원에 납품하도록 합니다. 이 분청사기는 한양에 밀집한 관청의 공식 그릇이었습니다. 서민의 그릇이었던 분청사기가 왕실도자기가 되었던 것이니 그야말로 도자기업계로선 혁명중의 혁명인 것이지요.
역시나 이때 왕실도자기에 인화문을 새기도록 한 것은 쉽고 빠르게 그러나 품격있게 많은 도자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한 배려였습니다. 일단 청화백자는 수입품이었고, 백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령토라는 특수한 흙을 채취해야 하는데, 그것을 징발하려면 무수한 노동력이 생활을 포기하고 달려들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분청사기를 만드는 흙은 우리나라처럼 화강암산으로 뒤덮인 나라엔 지천이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두 시대, 인화문이 만들어졌던 신라 신문왕의 시대와 조선 세종의 시대에 나타나는 공통점에 주목하기도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문민화의 시대....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로 이때 자국의 언어를 표현할 문자체계가 탄생합니다. 이런 시대적 소명의식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요? 설총은 아버지를 담은 유골함의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설총은 유골을 그대로 분황사로 가져왔습니다.
9.
((((((((((((간단연표)))))))))))))))))))))
681년 문무왕 서거와 김흠돌의 반란,
682년 국학설치
683년 안승 경주이주
684년 보덕국반란과 해체
685년 9주5소경설치
686년 원효 사망
687년 관료전(관료제도의 꽃은 역시 돈!)지급, 오묘제(시조+4대조:즉 성한왕을 시조로 함.)실시
689년 녹읍혁파, 달구벌천도(왕권강화와 귀족견제엔 역시 천도...그러나...)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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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은 귀족들의 반란 이후 극도로 예민했습니다. 진골귀족들을 멀리하고 측근만을 가까이했습니다. 상대등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게 되었고, 왕의 비서실장격인 중시만을 신용했습니다. 귀족들의 반란을 일으킬 마지막 근거가 될 녹읍도 폐지해버립니다. 이미 김흠돌의 반란과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하던 신문왕의 얼음장같은 판단력과 힘을 본 귀족들은 반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왕은 한발 더 나아가고 싶었습니다. 진골귀족이라는 치명적 약점, 그 약점을 벗어나 절대권력의 길에 접어들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유교적 통치였습니다.
(유교적 합리주의는 왕에게 참 좋은 점이 ‘천지인’세가지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만 무서워하면 되었고, 하늘만 제편으로 하면 되었습니다. 다시말해 지옥이 없었습니다. 유학을 숭상했던 동아시아에서 반란이 수도 없이 일어나고 숙청이 밥먹듯 벌어진 까닭은 어쩌면 이것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옥불을 겁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반대로 정치세계에서 그토록 피바람을 일으킨 그들이 인간으로 돌아와서는 왜 그토록 철저한 종교인이 되는지도 설명이 되고요.)
유교적 통치원리에 따르면 왕의 자격은 혈통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마음을 얻은자가 왕이 되는 것이었지요. 신문왕은 자신의 시조로 성한왕을 내세웠고, 이것은 마치 조선을 건국한 성리학사대부세력이 기자조선에서 나라의 뿌리를 찾으려는 것과 같았습니다. 성한왕은 유교적 성인을 표방한 인물이었습니다.김알지의 후손은 많았지만 유교적 덕목을 갖춘 시조는 성한왕 하나 뿐이다라고, 신문왕은 주장합니다.
이렇게 혈통을 정돈함과 동시에 국립학교인 국학을 세우고 전국의 지배망인 9주5소경까지 만들었으니 명실상부 법흥왕도 진흥왕도 이루지 못한 중앙집권국가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게 됩니다.
하지만 전국을 자신의 손에 넣어 속속들이 지배하겠다는 그의 중앙집권적 제왕의 꿈은 곧 벽에 부딪쳤습니다. 신라는 소통불가능한 사회 불통의 지옥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갖기 원했던 우수한 유교적 덕목을 갖춘 국립학교 출신의 관료가 만든 문서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문교육을 받은 사람이 조선시대 초 만해도 몇만명도 안되었으니 신라에는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천명?백명?아니면 몇십명?
처음으로 지금의 읍단위에 해당하는 현단위까지(전부는 아니고, 주요지역에만) 관리를 파견한 왕이었던 신문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모든 현단위에 관리를 파견했던 조선시대 세종과 같은 문제에 직면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글을 이해해야 백성들을 통제하거나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을 하라고 설득할텐데 말이죠.사또가 모든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임금의 명령을 친절하게 설명해야 한다면, 내백성이라 어찌 말할것인가?라고 한석규가 절규했듯이.
(물론 신문왕은 세종보다 한가지 더 많은 과제를 해치웠긴 합니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했던 일들,숙청이라거나 혈통의 우상화라거나...)
세종은 이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한글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문왕은 어떻게 이 어려움을 돌파하려 했을까요?
10.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부터 설총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궁궐에서 같이 지내던 사촌들은 모두 귀족이었고 밖에 나와 길을 걸어도 모두가 귀족이었습니다. 그 틈에 6두품인 자신이 낄 자리는 없어보였습니다.
누구보다 고귀한 신라 공주의 아들이었으나 장군도 고관도 될 수 없는 하찮은 6두품. 설총은 그런 자신을 버린 채 저잣거리 무지렁이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귀족들의 비아냥이나 얻어듣는 아버지가 너무 너무 미웠습니다. 미움과 열등감속에서 아이는 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불교가 아니라 유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봤습니다. 아무나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 품격 있는 경지인 한문문화 속에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무지렁이들도 자신을 마뜩찮아 하는 경주 귀족들도 맛보지 못한 정신적 희열. 그 경지에 설총만이 다다랐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런 그에게 신문왕의 등장은 신분해방의 길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문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6두품. 멍청한 귀족을 깔아뭉갤 구실만 찾던 신문왕에겐 가장 이상적인 인물상이었으니까요.
설총은 설레였습니다. 그가 찾아낸 유교적 합리주의는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했습니다. 칼보다 필력과 논리가 무기였습니다. 위아래도 없이 아무나 시비가 붙기 일쑤고 아무데나 잠들고 아무렇게나 입고 먹기 위해 태어난 짐승같이 보이는 저잣거리 무지렁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품격을 가르쳐줌으로써 아버지에게 한수 가르쳐줄 작정이었습니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힘은 마음이 아니라 격식이라고 말이죠. 신문왕이 그를 불렀을 때, 그는 곧 그런 세상이 오리라 믿었습니다.
그것은 그만의 순진한 꿈이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태어나 말을 배우자마자 눈만 뜨면 한문을 읽고, 유교경전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들을 차례차례 읽어 동몽선습을 떼고,소학을 읽고 대학과 중용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만 수십년입니다. 그 모든 경전에 붙은 참고서만 수십권이 출판되어 있고, 다시 그 경전을 어릴적 입문서부터 중학년 고학년 교과서로 분류하여 단계별로 읽게 만든 가장 완벽한 유교교육시스템을 갖춘 조선시대에 와서야 겨우 한문으로 말이 통하는 소수의 인력풀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소수가 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진자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내긴 합니다.)
하물며 신라사회에서야....설총이 꿈꾸는 사회는 택도 없었습니다.
자신만만하던 설총, 임금에게 입바른소리도 마음껏 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와 덕목과 실력을 갖추고 있던 설총을 좌절시킨 것은 자신보다 더 훌륭한 학자도 무시무시한 장수도 아닌 무지렁 백성들이었습니다. 자기가 본 이상사회, 그 수려한 경지를 신라인들과 함께 만들려던 생각이 무너진 것입니다.
‘아!’
짧은 탄식이 입밖으로 터져나왔습니다. 신문왕이 원하는 것은 진골귀족 앞에서 한자실력을 뽐냄으로써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려는 것으로 여겨지자 설총은 그런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련없이 궁을 나선 자신의 모습이 알천다리아래 비쳤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아버지 원효와 닮았습니다.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나왔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걸었을 저잣거리, 고갯마루에서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궁궐에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느낌이 가슴을 차고 올라왔습니다. 자기 앞에선 늘 말수가 적었던 아버지는 무지렁 백성들앞에선 쉴새없이 웃고 떠들었던 까닭도 알 것 같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끝도 없이 재잘대고 있었습니다. 말은 다툼을 조정하기도 하고 사랑을 맹세하기도 하고 다짐을 새겨놓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았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들과 함께 있으면 말이 통했던 것일까,아니면 이들이 아버지와 통했던 것일까?
설총은 장터 가운데 한참을 서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11.
신라인들은 누구보다 많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삼국 중에서 유일하게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고구려나 백제는 전문적인 고급 한문교육을 받은 사람이 있었고, 그들은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그들이 기록을 남긴 문서는 목간이나 죽간이었고, 그것이 불행하게도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못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불에 타거나 하여 훼손되어버린 까닭입니다.
학교가 없었던 신라에선 경주는 물론이고 하물며 시골에서 글을 아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몇 개의 실용한자를 아는 사람이 고작이었지요. 그들을 위해 중앙정부에서 문서를 보낸다 한들 읽을 사람도 없었으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시골마을이라고 해도 다툼은 없을 수 없는 법입니다. 분쟁에 대한 판결, 포상, 명령, 법률, 세금내역 등은 문서로 만들어서 누구나 보고 알아야 했습니다. 신라인들이 선택한 방법이 기가막힌데요, 바로 돌에다 새기는 겁니다. 1989년 밭갈던 농부가 신고하여 세상에 알려져 곧바로 국보로까지 지정된 ‘영일 냉수리비’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영일지역에서 재산권분쟁이 벌어지자 신라귀족들이 우르르 내려와 회의를 열고 판결이 내려지면 그 결과를 돌에 새겨 넣은 것입니다.
무거운 돌에다 내용을 적어서 세워놓았으니 문서처럼 잃어버리거나 소실될 염려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의 문서는 고스란히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영일 냉수리비를 비롯하여 친구끼리 맹세를 적은 것, 피서지에 있었던 일, 대대적 공사에 대한 보고서, 새로 정복한 곳에 행차한 왕의 보여준 은혜로운 일들을 적은 순수비까지....
이렇게 돌에 새긴 문서내용은 또한 한문능력이 뛰어나지 못한 지방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보니 그들이 알 수 있게 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왕이 훌륭한 정책을 펼친다해도 지방민들이 전혀 못 알아듣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탄생한 것이 보급형 생활한자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신라식 문자인 향찰. 신라가 삼국,심지어 가야보다도 국력이 뒤쳐졌고, 문명화의 길에도 늦어졌지만 대단한 중앙집중력을 보인 것도 중앙과 지방이 소통이 가능한 문자체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삼국통일의 한 요소라고까지 격찬하기도 합니다.
향찰이란 말에 이미 포함되어있지만, 이 문자체계의 뛰어난 점은 향가라는 문학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세계를 자신들의 문자체계로 표현한 것이지요. 단지 한자는 외피일 뿐이었습니다.
신라가 통일전쟁중에 신속하게 보급품을 모으고 전달하는 모습은 특징적이기까지 한데요, 삼국 중에 가장 중앙집권력이 약하고 전통사회가 강한데도 말이지요. 여기엔 체계적인 한문교육 없이도 글자암기력 정도의 능력만으로 문자생활이 가능했던 군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통일이후 이런 향찰만으로는 소통을 이끌어 내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나라마다 세세한 단어의 경우에는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산은 고유어로 뫼입니다만 옛고구려에서 ‘달’이라 불렀고 신라에서는 ‘모리’라고 했습니다. 바다도 고구려는 ‘나미’이고 신라는 ‘바ᄃᆞᆯ’이었습니다. 이정도 차이라면 언어순서만 같아 제주도방언을 들었을 때와 같이 낯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령,황현희가 나오는 무선통신(?) CF에서 다른 말은 다 알아들었겠지만 제주도 해녀분이 얘기한
“무사 영 햄신고게?”
의 뜻을 알아들은 육지분들은 거의 없다고 여겨집니다. 제주도에 살면서 서울의 문화생활을 거의 할 필요없고 학교도 다닌 적이 없는 시골 분들은 서울말은 알아듣지만 표현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백제와 고구려 지역 사람들은 향찰을 이해 못했습니다. 말그대로 소통불가. 한문은 너무 어렵고, 향찰은 단어가 달랐던 것이죠. TV라도 있었다면 적어도 경주어를 이해라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나라가 완전히 다른 언어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차이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차이정도로 좁혀지고 있었습니다. 삼국간 외교는 통역없이 이뤄졌고, 가령, 고구려어를 썼다는 발해에서 쓰는 말이 신라인들이 쓰는 말과는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발해의 사신이 방문했을 때 일본에서는 통역인으로 신라유학생을 썼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신라를 오랜기간 점령하던 내정간섭기가 있었고, 백제에는 고구려 출신 유민들이 거듭거듭 유입되면서 중앙정계를 장악했습니다. 분쟁지역의 지배자는 삼국이 번갈아 바뀌기도 하면서 언어간 차이는 좁혀졌습니다. 특히 문명을 타고 들어온 단어는 먼저 이름붙인 곳이 장땡인 관계로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 차이는 더 좁혀졌습니다.
12.
여행에서 돌아온 설총은 아버지의 유골에 물을 부어 개어 주물러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차츰 모양을 드러낸 유골분가루. 그것은 원효의 얼굴이었습니다. 설총은 그 조상을 분황사에 안치했습니다.
평생 등만 보아왔고, 그래서 원망만 했습니다만 이제 그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아버지가 등만 보인 것은 아들이 아버지가 보는 곳을 같이 바라봐 주길 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아들은 자기를 아버지가 봐주길 원했습니다.
설총은 즉각 새로운 문자체계 즉 표준어를 만드는데 돌입합니다. 문명은 문자를 타고 흐릅니다. 신라인들은 어찌되었든 이 문명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신라인들이 듣도보도 못한 단어, 그것이 새로운 문명의 단어였던 것이지요. 그것을 그는 신라인의 언어로 표현해내고자했습니다. 저잣거리 무지렁백성들도 글은 이해못했지만 말은 이해했습니다.
문자는 국가 통합의 힘이자 문화통합의 전제입니다. 중국에는 수많은 민족이 서로 다른 말을 쓰지만 한문은 이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해서 중국문화를 하나로 결속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양에서도 로마의 문화가 서유럽 전체에 파급되었는데 그 중심에 라틴어가 있었습니다.
이시대 동아시아문화는 한자문화였고 이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도구로 일본은 가나문자를 신라는 이두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문명은 이두에 실려 신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설총은 이두로 중국유교경전을 번역했습니다. 설총의 번역본은 실용한자정도의 실력이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읽으면 해석을 다시 할 필요없는 우리말이기도 했습니다.
이두가 나오자 가장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난 곳은 역시나 국립대학인 국학이었습니다. 그곳의 교과서는 곧 설총의 번역본으로 바뀌었습니다. 국학에 다니지 않더라도 공부할 마음만 먹으면 설총의 교과서로 충분하게 되었습니다. 고급문명은 대중화되었습니다.
불교계 또한 크게 기뻐했습니다. 어려운 불경을 우리말로 쉽게 풀어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아도 충분히 높은 수준의 불경연구가 가능해졌고, 어지간한 승려들은 다 불경을 읽을 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두의 결정적 역할은 관리들의 문서에서였습니다. 나라는 더 커졌고, 기록하고 보고하고 명령을 내려야 할 일이 태산같았습니다. 죄를 묻고 벌을 주고 세금을 걷고 도로를 만들고 성을 쌓는 일들은 모두 문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통일신라가 지향한 중국식제도를 따라 만든 중앙집권제도였으니까요. 문자생활이 가능한 관리는 폭발적으로 필요했었고, 그것을 이두가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오죽하면 이두일까요.이두는 이런 관리들의 실용문자란 뜻입니다. 무열왕이 그토록 원했던 중국식 중앙집권제도는 이두로 인해 가능해지게 된 것이니 딸을 파계한 승려 원효에게 시집보내어서 얻고자 했던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이두가 우리나라 언어생활에 미친 영향은 신라어를 표준어로 하여 언어가 통합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언어학자는 만일에 설총에게 집현전과 신세경(^^)만 있었다면 한글에 버금가는 문자체계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가나처럼요. 따지고보면, 이때 설총에게 신세경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요?
하여간 이때 만든 설총의 경전번역본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이후 학자들의 대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라 3대 문장가는 강수,최치원,설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고려시대 유학자들은 강수는 사당에 배향하지 않습니다. 외교분야에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학문적으로는 별거 없다 해서였습니다. 반면에 최치원은 그 제자들 다수가 고려시대 귀족이 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 때문에 사당에 배향되었습니다. 역시 학계는 인맥이 최고입니다^^
그런데 학문적으로는 강수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업적도 뚜렷하지 못한 설총은 사당에 배향됩니다. 그 까닭이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설총의 번역본이 교재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마 저작권이 있었다면 설총은 인세수입이 짭짤했을 듯합니다.(...)
이두의 영향력은 한동안 거듭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 한글이 만들어질 때 이두가 있는데 굳이 한글이 필요하냐는 반대론자들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관리들은 대대로 익혀온 문서작성방식인 이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한글이 공식적인 언어로 선택될 때까지도 이두가 여전히 문서작성을 위한 문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두는 결국 지배계급의 문화로도 일반민중의 문화로도 의미가 없는 실용문자일 뿐이었습니다. 이두는 갑오경장까지 쓰였으나 이두로 된 문학작품은 없습니다. 문화가 되지 못한 문자는 소멸되는 것이 당연한 법이지요. 그리고 표준어라는 미명하에 한자어를 무차별적으로 보급하는 바람에 우리말을 전부 한자식으로 바꿔버려 순우리말을 사라지게 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설총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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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깁니다..끙....
게다가 어렵고 고리타분한 역사....^^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08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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