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te |
2012/02/07 10:35:18 |
Name |
PoeticWolf |
Subject |
[모호한 소리] 이 따위로 자란 이유 |
* 시안님과 같이 송곳처럼 쓸 능력이 안 되어, 제목에서 스스로를 비아냥거렸습니다. 부디 시안님께서는 기분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저희 부모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적입니다. 실수가 많고, 약점도 많으시다는 것이죠. 부모 역시 인간이라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식 입장에서 깨닫기 전에 이런 약점을 접하면 혼란스러워지고 상처인 줄 모른 채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 중 하나가 뒤틀린 세계관입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입장에서 보니 외가집이나 친가집이나 다 가서는 안 될 곳이었습니다. 사촌들이 있고, 용돈이 있고, 또 어리기도 하니 엄마와 아빠를 따라 갈 수밖에 없는 곳이었는데도 외가집을 가면 아빠의 뚱한 얼굴과 동떨어진 위치가 혼란스러웠고, 친가집에 가면 며느리를 전혀 위하지 않는 가족들의 태도가 원망스러웠습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참으로 인간적인 엄마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싸우실 때도 서로 집안 얘기를 하고 계셨습니다. 자식들에게 대놓고 외가집이 좋냐, 친가집이 좋냐, 윽박을 지르진 않으셨지만 당연히 그런 큰 목소리가 나면 어린 자식 입장에선 닦달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왜 싸우는지 알 도리는 없고, 감히 낄 수도 없는 상태에서 언뜻 언뜻 들리는 단어들로만 정황을 판단하게 되는데, 제일 잘 알아듣는 말들이 그나마 ‘식구’들 이야기였으니 식구에 근거해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립을 지키기엔 너무 어렸던 때였으므로 좋은 편, 반대편을 정해야 했고, 좋아할 수도 없고, 싫어할 수도 없는 두 집안 사이에서 전 성장의 시기마다 엄마가 더 좋았거나 아빠가 더 좋았던 마음 추의 균형에 따라 갈팡질팡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가 더 약했기 때문에 전 점점 외가집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어쩌면 엄마나 아빠가 아닌 다른 제3자를 싫어하면서 이 싸움의 원인으로 돌리는 것이 어린 아이의 안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동생과의 관계가 제대로일 리가 없습니다. 동생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진데, 오빠가 외가집이 좋았다, 친가집이 좋았다, 자꾸 번복을 하니 덩달아 자기도 외가집 가기 싫어, 친가집 가기 싫어 칭얼대고, 그러다 말 안 듣는다고 꾸중을 듣고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였죠. 그런 일이 많아지면 오빠부터 해서 아빠나 엄마까지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편을 해도 혼나는 아이 입장에서는 당연했죠. 게다가 왜 어디가 더 좋은지 근거도 없었고, 그래서 설명을 통한 설득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는 저도 동생에게 간편한 윽박과 협박을 들이댔습니다. 그래서 동생은 사실 지금도 저희 가족 정서와 제일 동떨어진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래서 대화가 아직도 뚝뚝 끊길 때가 많습니다.
저 또한 부작용이 많았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 뭔가에 잘못을 씌워 원망하면서 감정을 푸는 것에 익숙해졌습니다. 다 커서야 흑백논리가 촌스런 것이란 걸 배웠지만, 꼬마가 그런 걸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대로 움직이는 나이였던 것이죠. 그래서 어쩌다 선물받은 손목시계에 그려진 청룡팀만이 정의였고, 그걸 아주 자연스럽게 동생에게 했듯이 주위 사람에게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동조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고, 나쁜 놈이 발생하면 자동으로 정의도 만들어지는 법이라 사람들에게 또 저 놈 나쁘다고 알리고, 같이 동조하면 우리 편 아니면 또 나쁜 놈이 하나 추가되는 현상이 반복되었습니다. 저쪽에 나쁜 놈이 쌓이지만, 그만큼 좋은 놈도 내 편에 생겨 벽이 두꺼워지니 저쪽 나쁜 놈과는 그냥 다른 세상에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사람 싫어하는 거 너무 편했고, 그래서 내 친구였던 녀석이 하루 아침에 나쁜 놈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전 지금도 별로 친구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제일 우선 임무는 ‘나쁜 놈 가려내기’가 되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와, 맛있겠다!’란 생각이 들기 전에 이상하게 생긴 음식들을 눈으로 모두 훑고 젓가락의 동선을 정해야 안심이 되었고, 좋은 반찬이 나왔을 때 동생이 너무 양심 없이 그것만 집중 공략하면 화를 버럭 냈습니다. 살다보면 식구라도 안 맞는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동생도 일단 저랑, 위에 쓴 성장 과정으로 인해, 잘 맞지 않았으므로 적대시하게 되었고, 집에 하나밖에 없는 컴퓨터를 저 혼자 쓰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독후감 숙제를 해도 어느 책에나 ‘나쁜 놈은 죽는다. 난 착하게 살아야겠다.’라고만 결론을 낼 줄 알았기 때문에, 권선징악이 주제가 아닌 책이 과제로 주어지면 전 아무런 느낌이나 교훈을 이끌어낼 수 없었습니다. 독서란 경험이 ‘흥부와 놀부’를 벗어나면 그냥 활자 스캐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학교 공부를 할 때도,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좋아하는 과목은 100점을 받았고 싫어하는 과목은 컨닝을 했습니다. 전교권 안에 들다가도 어느 날은 눈에 띄지도 않는 성적을 받는 패턴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굉장히 난감해했습니다. 매를 들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고, 상담도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패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평생 옷 못 입는 남자 꼬리표가 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를 따라 외가집과 친가집 사이의 균형을 잃었더니,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균형이 없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가정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남북처럼 분단된 부모님에, 외딴 독립국 같은 동생은 말만 가족이었지 전혀 물기 없는 모래 알갱이들이었습니다. 늘 바깥에서 맴돌게 되었고, 장남이지만 식구들 돌볼 마음도 들지 않았습니다. 언급했다시피 사람에게 관심을 뚝 끊어버리는 게 저한텐 제일 쉬웠거든요. 그게 그렇게 가족에게도 적용이 되었습니다.
게임 규제를 놓고, 여야에 따라 온 나라가 지독하게 갈리는 통에 정치 성향이 같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조차 나눌 수 없는 정치사회의 현실을 놓고, 따돌림을 받는 아이들과 따돌림을 하는 아이들로 갈린 교실을 놓고 “지금 사회 곳곳에서 분단의 상처가 곪아터지고 있다.”고 했던 사회학자 한 분과의 인터뷰가 떠올랐습니다. 저희 가족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대한민국이나 북조선이나 ‘저 녀석은 나쁜 놈’이라는 비방의 정서 위에 세워졌고, 그러다보니 그 자식들이 당연히 그걸 배우면서 이상하게 자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고 이해하기보다 편을 갈라 내 편을 확보하는 걸 먼저 배웠고, 그게 익숙하니 정치며 경제며 문화에까지 편 가르기가 기본 정서가 되었습니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반대편 놈의 절명이 나의 생명이 된다는 잔인한 철학이 경쟁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제 동생처럼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활관을 키워왔고, 누군가는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컴퓨터를 스스로의 정당성에 입각해 독차지 했습니다. 겨우 식탁의 반찬 한 가지일 뿐인데 잘난 ‘평등’을 내세워 동생을 밥상에서 쫓아내는 오빠도 있고, 그런 사람이 자기가 싫어하는 분야에서는 편법을 쓰기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오명의 꼬리표가 새 옷의 그것처럼 덕지덕지 계속 붙습니다. 부도덕 혹은 무도덕은 어느 새 사회 전체의 레이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부패인식지수는 3년 연속 하락했습니다.
우리 어르신들, 모자라게 자라서 저런 방법만 생각이 나는 겁니다. 갈라선 부모님 밑에서 자란 저나, 철저하게 갈라진 나라 안에서 자란 그분들이나 매한가지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흥부와 놀부가 아니면 독후감을 쓸 수 없도록 모자라게 성장을 유도 당했고, 그래서 독후감 끝에 '나쁘게 살면 벌을 받는다.'고 뻔한 마침표만 얼른 찍어 숙제를 '끝낼' 줄만 압니다. 흥부가 놀부의 뺨을 맞는 수치를 당하고, 무능한 가장이라는 자격지심에 물들어 산 인고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온순한 성격이 더 바보같이 착해져서 떨어진 제비 고기를 미련하게 고쳐서 살려 보낼 수 있었다는 상상은 하지 못합니다. 분명 그 중간에 시쳇말로 '꼭지가 돌'거나 자살 충동을 느낄만한 시기가 있었을 텐데, 그 어려운 시기를 넘긴 한 가장의 가난함을 초월한 넉넉한 마음은 전혀 짐작하지 않습니다. 누구 편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정의란 게 있어 될 놈은 가난해 쪽박을 차도 결국은 되고, 안 될 놈은 재산을 다 가져가도 안 됩니다. 그래서 모두 나중에 성공하는 흥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는 눈을 가린 듯 장님입니다. 그래서 벌이란 것 또한 의외로 늦게 온다는 세상 원리를 모릅니다. 놀부가 받는 벌이 제비 다리 부러트렸기 때문인 줄로만 압니다. 적어도 제비가 가져온 박에 섞여 있던 도깨비 한 마리 정도는 동생의 재산을 모두 가져간 행위에 대한 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떠날 겁니다. 세월은 어떤 누구에게나 가장 크고 가장 느린 '감당해야 할 몫'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엄마 아빠가 자식 눈에 띄지 않게 마음을 숨기셨으면 지금 저희 가족의 모양새는 조금 달라져 있지 않을까 상상하곤 합니다. 본인들이 무척이나 괴롭고 힘드셨겠지만, 부모님들이 가슴 아픈 눈물을 자식 몰래 혈기가 다 닳을 때까지 흘리셨다면, 지금쯤 화목했을지 모르는 '늦장 기적'을 일구셨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상상만 합니다. 그때 그 눈물이 있었다면 지금의 모래 알갱이 같은 가족의 상태가 진흙처럼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가정일 뿐입니다. 일단 지금 저와 동생에게 주어진 건 갈라선 가족과 앞으로 생겼거나 벌써 새로 생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젠 나이 든 엄마 아빠와 그런 잘잘못을 가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은 화목은 젊은 저희들 몫입니다. 오히려 엄마와 아빠의 그런 약한 점 때문에 적어도 자식들 앞에서 서로의 가족 이야기는 하지 않으리라, 뼛속 깊이까지 체득했습니다. 되도록이면 싸우는 모습도 보이지 않아, 아이들이 갈라서는 걸 제일 먼저 배우지 않도록 하는 것도 예비 엄마 아빠의 다짐입니다.
이제 아이들이 들이 닥칠 겁니다. 얼른 지금 어르신들이 하는 것 중에 배울 건 배우고 버릴 건 버려야 합니다. 앞에도 말했지만 어르신들은 떠날 겁니다. 남게 되는 건 우리와 우리 아이들입니다. 어르신들이 민주주의를 뒤로 돌려놓는다고 해도, 아니면 게임으로 정말 사람이 포악해진다는 게 정설로 뒤늦게 밝혀진다 해도 그 몫을 짊어지고 갈 건 우리들이고, 우리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이 머물 땅을 잘 일궈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아이들이 머물 탄탄한 땅이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보다 더 잘 자란 분들에겐 더 넓은 시야와 경작 농지가 주어졌을 테지요. 어떤 곳에서 어떤 땅을 일구든, 내가 키운 나무의 열매를 꼭 내가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무 심을 땅처럼 퍼내고 퍼내면, 바닥에 이삭 한 줌 남길 마음 씀씀이로 경작을 해 버릇하면, 그 아이들이 설마 지네들 부모에게, 버리는 과일이라도 한 입 안 주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땅을 다져 놓으면, 지금 우리가 어른들 보듯 그렇게 우습게 보겠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기적이란 게 사실은 오랜 시간 끝에 생긴다는 것과, 지금 그 기적이란 게 어떤 형태일지 모르지만 이미 어디선가 시작되고 있다는 걸 아는 것이 우리가 그렇게 싫어하는 '기득권층'이 되지 않는 길 중 하나가 아닐까, 소심하게 생각합니다.
전 그래서 제 농사의 일환으로 결혼 생활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여기 저기 자주 포스팅합니다. 다만 몇 명과와도 그 즐거움을 나누고, 그걸 통해 즐거운 결혼 생활을 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아이들이 한 명이라도 더 화목한 가정 안에서 자랄 수 있다면, 그것이 저에겐 가장 큰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눈물로 모래를 뭉칠 수 없다면 땀이나 피라는 물기를 사용해 모래 알갱이를 진흙으로 바꿀 수 있는데, 저한테는 그 세 가지가 다 있기 때문입니다. 진부하지만, 이 따위로 자란 이유가 애써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09 09:51)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