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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2/02/07 17:26:18 |
Name |
happyend |
File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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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
안녕, 내사랑 |
1.
구석기시대부터 시간순서대로 가장 많은 유적을 갖고 있는 마을. 삼국시대 내내 이곳의 지배자가 한반도의 지배자였던 곳. 이곳을 차지하면 한강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 한반도의 중심. 그래서 중원이라 불렸던 곳. 그 곳에는 단양이 있습니다.
550년 무렵. 이곳에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청년은 꿈이 있었습니다. 활쏘기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힘을 길러 언젠가 출세하리라는 꿈. 변방의 청년은 그렇게 먼 훗날의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백산맥을 넘어 물밀 듯이 넘어온 신라군은 순식간에 그곳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한달 두달이면 끝나리라고 여기던 신라의 지배는 생각보다 훨씬 길어졌습니다. 게다가 그곳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집니다. 이렇게 비석을 세우는 것이 일종의 훈령이자 신문이자 광고판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단양적성비입니다.
내용은 단순했지만 그것은 그곳 사람들을 뒤흔들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고구려땅이던 그곳을 신라가 점령할 때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적나라한 포상내용과 앞으로 협력한 사람들에게 그만한 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단양사람들이 이런 비석을 본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백제땅이었던 중원을 점령한 고구려의 장수왕은 충주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웁니다. 그것은 자신의 제후국이나 다름없는 신라의 눌지왕이 백제 비유왕과 손을 잡은 이른바 나제동맹을 성립시켰기 때문이었지요. 장수왕은 친히 충주까지 내려와 눌지왕을 불러 뜨거운 술을 나눠 마시며 형제의 나라라고 치켜세웁니다.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 번도 신라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신하의 나라 신라는 단숨에 형제의 나라로 격상하게 됩니다. 장수왕은 이렇게 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맞추고 싶었던 것이고, 중원고구려비는 그 일대가 고구려땅이란 표지판과 같았습니다.이것이 433년의 일입니다.
이후 중원은 고구려땅이었습니다. 단양사람들은 백여년간 고구려인으로서 자신을 위치지워왔고, 그곳의 촉망받는 젊은이였던 청년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뒤바뀐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왕을 만나 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이끌고 내려와 신라군을 내몰 생각이었습니다. 단양사람들은 그 청년에게 꿈을 실었고, 청년은 두 어깨에 그 꿈을 짊어지고 평양으로 떠납니다. 고향을 떠나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온달이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은 그곳 출신의 청년이 고향을 되찾으려는 염원을 담은 이름이었습니다. 온달은 그가 사는 단양의 옛 이름, 그러니까 온달이 살고 있을 당시의 이름인 을아단에서 나왔습니다. 온달은 왕을 만날 수 있을까요?
2.
그동안 고구려는 언제나 한번 뺏겼던 지역은 기어코 다시 되찾으며 치욕은 되갚아주고 영토를 넓혀 마침내 동아시아의 강자의 자리에 올라, 중국 남조,북조,고구려의 삼각균형을 이뤄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균형이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견인하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랬던 고구려에게 충격과 공포가 찾아올 줄이야.... 이 모든 일은 양원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양원왕은 545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태자로 12년을 살았으니 특별할 것도 없어보일지 모르지만 이 왕좌자리는 무시무시한 피바람 끝에 얻어낸 것이었습니다. 무려 2000명의 정적을 죽이고 오른 권좌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정적의 규모도 컸던 탓도 있고, 그 뿌리가 깊었던 것이지요. 장수왕의 천도가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가장 합당한 분석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국사 미스터리 중 하나가 장수왕의 천도라고 합니다. 신채호 같은 민족주의자는 이것을 두고 밖으로 세계로 뻗어갈 길을 포기한 어리석은 짓이라고 개탄해 마지 않기도 했고요. 제 생각엔 중국의 남조와 북조, 둘 다 공조하고 겨냥할 수 있는 절대입지조건인 평양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 나라는 어느 나라든 삐끗하면 멸망할 수 있었으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의 도움 없이는 정복할 수 없는 완벽한 힘의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여간, 모든 천도는 국력의 절정기에만 이루어지듯이, 장수왕은 밀어붙여 성공합니다. 그러나 국내성을 기반으로 해온 오래된 전통 귀족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벼르고 벼르다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양원왕의 아버지인 안원왕이 죽은 직후였던 것이지요. 양원왕은 이 반란을 철저히 짓밟고 왕위에 오릅니다.
이 끔찍한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는 고구려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오래도록 계속된 잔인한 복수극을 이끈 대가로 양원왕이 얻은 것은 차디찬 눈초리. 그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길은 오로지 찬란한 옛 영광을 재현하는 것뿐이라고 여겼습니다. 그의 비극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양원왕이 힘자랑을 할만한 나라는 북쪽에는 없었습니다. 괜히 말려들어 전쟁이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남쪽 신라를 건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소백산맥 북쪽의 지배권을 얻는 대신 신라와의 평화를 선택한 중원고구려비의 위용이 남아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만만한 백제.백제는 장수왕에게 무참히 깨진 뒤 한강을 잃고 공주를 거쳐 부여까지 밀려내려간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양원왕의 오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6세기 한반도의 지도를 완전히 바꿔버린 대격돌은 시작되었습니다.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살해당하고 난 뒤 한강을 잃고 도망치듯 내려간 백제는 공주에 옹색한 살림을 폈습니다만, 귀족들은 이때다 싶게 달려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왕을 살해했습니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삼근왕-동성왕까지 연거푸 죽어나간 뒤 왕위에 오른 이가 무령왕입니다.
무령왕은 눈과 눈썹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너그러운 얼굴을 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멋진 외모를 가진 그에게 붙은 이름은 무령왕. 진짜 가치는 탁월한 군사능력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름 그대로 군사로서 나라를 편안하게 한 임금이었습니다. 그가 아수라장이었던 나라를 정돈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0년. 백제는 외교무대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고 옛명성을 되찾게 됩니다.
이렇게 안정된 나라를 물려받은 것이 무령왕의 아들인 성왕입니다. 성왕은 앉으나 서나 자나깨나 북벌만을 꿈꾸던 임금입니다. 그가 사비로 천도하면서 지은 나라이름은 남부여.과거 북쪽에 있었던 부여는 북부여이고 자신의 나라는 남부여이므로 고구려는 말하자면 사생아와 다름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백제와 고구려에 얽힌 감정싸움의 역사는 여기선 생략하겠습니다) 정통성싸움에서 이겨 지도에서 고구려를 지워버리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 그런만큼 대비도 철저하고 준비도 철저했습니다.
게다가 성왕은 외교술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는 가야,일본을 제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가 ‘聖王’이었던 것은 후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그것도 동아시아에서 통용되던 이름이었습니다. 살아서는 성인이요 죽어서는 부처가 될 사람이란 의미였습니다. 그만큼 그가 존경받은 이유는 가야,일본은 물론 백제인들에게도 처음으로 의술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백제의 관직을 정비하면서 22관부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채약사라는 의료관리가 소속된 약부가 만들어집니다. 이렇게 나라차원의 시술을 베풀었고,이웃나라에 전해주었으니 섬나라 일본은 그야말로 성인의 왕림,부처의 강림이라고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신라도 이 틈바구니에서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나제동맹에 응해왔습니다. 그것은 고구려를 적으로 하는 것보다 백제를 적으로 하는 것이 훨씬 위험했기 때문이었지요.
이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성왕과 붙은 양원왕. 그의 군사력은 이미 반쪽이엇습니다.2000명을 죽인 칼에 피도 마르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결과는 패배. 고구려는 충격에 빠졌고, 백제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진정한 주인공은 신라였습니다. 백제가 고구려의 성 하나를 탈취하면서 서로의 전력이 집중된 틈을 타 소백산맥너머 고구려의 성 두 개를 뺏어가버립니다. 그것이 550년의 일. 온달의 고향 단양도 이때 신라에게 넘어갑니다.
3.
온달이 도착한 평양성은 냉기가 돌았습니다. 단지 단양출신 촌놈이 고위도 지방에 도착했기 때문에 느끼는 온도차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단단히 벼르는 듯한 모습으로 왕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결코 호의적인 눈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충성심에 하루하루 자신을 단련하며 소년시절을 보낸 온달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온달은 가슴속으로 싸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나라 고구려의 군사들은 곳곳에서 터지고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보였습니다. 양원왕은 정적을 다 죽이고도 모자라 경비를 겹겹이 에워싸고 들어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온달은 왕을 만나기는커녕 평양성안으로 들어가기도 쉽지 않았고 그렇게 해를 넘겼습니다.
해가 바뀌었으나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날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 버텼지만 궁으로 들어갈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더 무시무시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고구려가 한강상류10개의 성을 신라에게 넘겨버린 것입니다. 전쟁을 서둘러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나제동맹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선 신라를 회유하는 길밖에 없다고 여긴 까닭입니다. 왕실은 먼 북방에서 돌궐이 침입했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고구려는 한순간에 종이호랑이로 변해버렸음을 모두가 깨닫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이로서 고구려는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뺏겼습니다. 돌궐은 아직 그렇게 강력한 침입자가 아니었는데도 고구려는 휘둘렸습니다. 불과 몇십년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연거푸 일어났습니다. 영광의 상징이던 중원고구려비는 이제 적진영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아울러 온달의 꿈은 더 멀어져버렸습니다.
오도가도 못하게된 온달은 맥이 탁 풀렸습니다. 고구려의 왕을 만나 군사를 이끌고 가기만 하면 되리라던 생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고구려가 신라를 칠 의지도 없었고, 능력도 안 돼 보였습니다. 멀리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단양의 친구들과 헤어진 누이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면 그곳은 신라의 땅. 그는 신라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왕은 만날 수도 없고 만나도 의미가 없었어요. 가슴에 불을 안고 있는 야망의 사나이 온달에겐 견딜 수 없는 나날들이었습니다. 온달은 그 이름에서도 그리고 그가 단양지역에 남긴 자취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곳의 평민이 아니었지요. 어머니 역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고향을 잃은 슬픔과 그 땅을 되찾을 의지가 없는 조국 고구려에 대한 분노는 어머니의 눈을 멀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그를 바보라고 불렀습니다.바보 온달.그저 허허 웃기만 하고 욕심도 없는 거렁뱅이 온달. 야망도 슬픔도 분노도 가슴깊이 봉인해버린 채 어머니를 돌보는 의무감 하나로 버텨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실향민인 그에게 집인들 땅인들 일자리인들 있을리 없었으니 생활은 참혹했습니다. 하지만 웃고 또 웃었습니다. 그 웃음으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때는 뒷산에 올라가 뛰고 또 뛰며 몸을 단련했습니다.
그렇게 한해 두해 ....세월이 흘렀습니다.
4.
양원왕의 정치도박은 철저하게 패배했습니다. 그 대가 또한 처참했습니다. 귀족들은 왕실의 권력을 빼앗아버렸고 대대로를 탄생시켰습니다. 대대로는 귀족들이 3년마다 투표를 통해 뽑은 귀족 대표였으니 겉으로는 대대로가 왕을 도와 나라를 이끌어가는 신하였지만 귀족들이 등을 돌리면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양원왕에겐 사태를 되돌릴 힘이 없었습니다.
(신라에서 귀족이 대등이고, 대표가 상대등이듯이 고구려도 귀족은 대로, 그 대표는 대대로입니다. 둘 다 큰 형님, 혹은 가장 큰 장로란 뜻입니다.)
이렇게 불안한 가운데 평원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주몽의 사당이 있는 졸본행을 선택합니니다. 유례없이 요란하고 긴 행렬을 이끌고 시조묘에 제사를 올리고 돌아오는 동안 발걸음은 한없이 느렸습니다. 머무르는 곳의 성주들과 귀족들의 대접을 받으며 그곳의 세금을 감해주고 죄수를 풀어주며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통했습니다. 적극적인 화해의 손길을 귀족들은 모른 체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북방의 정세는 다시 격동의 시대. 고구려는 뭉쳐야 했거든요. 고구려의 귀족으로서의 특권을 누리려면 전쟁때는 아낌없이 뭉치는 것도 능력이었습니다.
나라 안이 안정되자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바탕으로 혼란에 빠진 중국과의 관계도 대처해나갔습니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의 끝 통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며 막바지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전쟁의 최후승자는 수나라였습니다. 평원왕은 그 혼란에 말려들어가지 않고 전쟁을 피하며 국력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평원왕에겐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차차 자리를 잡아가자 그 꿈은 더 간절해졌습니다. 왕실의 명예회복. 한강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 무렵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이 깨져 서로 으르렁 거리고 있었습니다. 이때가 기회라고 여겼지만 귀족들은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침략자를 물리치는 일이라면 무엇인들 두렵겠습니까만 남쪽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였다가 북쪽의 공격을 받으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습니다."
귀족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북쪽의 상황은 늘 심상치 않았습니다.
한강유역을 되찾아 아버지의 치욕을 갚고, 과거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평원왕의 꿈이 거의 물거품이 되려는 찰나였습니다. 바람처럼 바보온달의 소식이 전해져 온 것은 이때입니다.
집잃은 달팽이마냥 초라한 삶을 살고 있던 온달. 바보 온달. 그 이름에서 왕은 무언가를 느꼈던 것일까요?아니면 바보 온달이 틈만 나면 군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 옛 고구려의 땅을 되찾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요? 사람들은 바보가 하는 바보스런 말이라고 다들 웃어넘겼지만 오로지 한사람 평원왕만이 그 소리를 흘려듣지 못한 것일까요?
그렇지만 그 꿈을 꾸는 이가 바보라고 놀림 받는 온달이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더 무참해졌습니다.
“끙”
평원왕은 머리를 감싸쥐며 주저앉았습니다. 하긴,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이미 한강을 잃은지 십수년. 사람들은 그곳을 잃은 수치심은 기억하지만 다시 찾겠다는 의지를 잊기엔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만에하나 평원왕이 군사를 이끌고 한강으로 향했다가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뒤에 꽂을 것입니다. 양원왕의 피바람은 깊은 트라우마였고, 귀족들은 한강을 되찾는 일에 군사를 보태줄 맘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평원왕의 딸, 평강은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요? 아버지의속내를 읽어낸 듯 나섰습니다.
“제가 온달을 만나보겠습니다.”
평원왕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평강은 제법 단호했습니다.
“제정신이라면 아무도 한강을 빼앗자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정말 바보일수도 있지만 다른 묘안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잖아요?”
평원왕은 딸의 말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운명은 그런 것이겠죠. 평강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서 온달을 보러가고 맙니다.
5.
평강은 고구려의 공주입니다. 그것은 조선시대 공주와는 개념이 다릅니다. 고구려의 공주는 어지간한 무예는 배웠고, 그 무예의 경지도 볼 눈도 있었습니다. 온달을 본 공주는 오랫동안 단련해 단단한 몸을 가진 젊은이가 바보같은 웃음속에 숨겨놓은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렇게 여러 날을 지켜보고 난 뒤 확신이 선 공주는 아버지 평원왕에게 온달을 만나볼 것을 권합니다.
평원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어쩌면 당연했지요. 그렇게 저렇게 떠벌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게 저잣거리. 그들은 삼국시대에도 달나라여행을 스무번도 더했을 뻥쟁이들이었으니까요.
심지 굳은 아이 평강은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귀족집안과 혼인시켜 가문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아버지의 요청을 거부한 것이니까요. 확실히 조선시대 공주와는 개념이 다른 듯합니다. 그렇지만 부녀지간은 어느시대나 똑같나봅니다. 노련한 평원왕도 딸과의 다툼에선 완고한 꼰대일뿐.
이 이후의 상황은 삼국사기가 전하는 바와 같습니다.넵!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가 아니라 철저한 합리주의자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 실렸습니다. 이야기가 절대 은유만이 아니란 것이죠. 하지만....삼국시대의 사람들은 절대로 진실을 사실그대로의 방식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삼국사기에 전하는 온달이야기 속에는 숨은 진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전설과 설화의 차이점이 이것인데요, 설화는 사실을 재료로 진실을 전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설화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평강공주의 정치적 야망이 아닐까요?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정략적이고 훨씬 더 야망이 컸던 듯합니다. 단지 귀족의 안주인으로 사는 것보다 온달의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한 것이니까요. 적어도 온달은 왕실에겐 승부수가 될 것이란 걸 평강은 안 것입니다. 한강유역 회복의 꿈. 그것은 왕실의 염원이었습니다. 이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건다면 그것이야말로 승부사다운 길이 아닌가요?
하여간 평강이 궁에서 내쳐졌다고 하는데요, 그렇다고 하기엔 말도 안될만큼, 어마어마한 재산을 들고 나옵니다. 당장 온달은 ‘집도 사고 밭도 사고 노비도 사고 소와 말과 (심지어) 그릇까지 다 사들여서’ 완벽한 살림을 갖춥니다. 말하자면 단번에 먹고살만한 처지가 된거죠. 평원왕의 도움 없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 이후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집니다. 온달은 평강의 재산에 힘입어 아무 걱정없이 훈련에 몰두합니다. 가슴속에 봉인되었던 분노,슬픔,격정이 한순간에 풀려나온 그에게 왕실 고유의 트레이닝법을 알고 있는 평강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이 더해지자 온달을 당할자가 없었습니다. 3월 3일에 열리는 고구려전통의 사냥대회에서 전국각지의 쟁쟁한 실력자들을 꺾고 온달은 당당히 그랑프리를 먹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평원왕은 그를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아니면, 평민신분인 그를 등용했을 때 벌어질 귀족들의 반발을 우려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왕과 귀족사인엔 여전히 팽팽한 힘의 균형을 잘 맞춰오고 있었으니까요. 조금의 흠도 허투루 내비쳤다간 역풍이 날아옵니다.
온달은 관직도 없는 백의종군상태에서 전쟁에 출전합니다. 그리고 전쟁영웅이 되어 돌아옵니다. 이 수많은 관문을 통과한 이후에야 비로소 그는 왕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은 왕이 아니라 귀족의 인정을 받는 절차였을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마침내 꿈을 이루게 된 온달. 가슴이 부풀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평원왕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무려 40년을 기다린 꿈이 아니던가요. 온달은 당장 자신의 처남이기도 한 영양왕을 찾아가 설득합니다.
"만일 한강을 되찾는다면 귀족들도 우러러볼 것이고, 중국 수나라도 얕보지 않을 것입니다."
막 왕위에 오른 영양왕으로선 귀가 솔깃했습니다. 어떻든 한강유역은 왕실의 아킬레스건이었으니까요. 온달이 그걸 해결해준다면 더 바랄것이 없었습니다. 만일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온달의 책임일 뿐.그는 어찌되었든 전통귀족도 아니고 왕실의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온달은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의 출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향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한강을 건너지도 못한 채 아차산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고향 땅을 되찾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을 아내 평강공주에게 남기고 떠난 온달의 시신은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아차산성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을 잃은 유랑민으로서 왕의 사위가 되어 마침내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올 때까지 수십년이었습니다.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 얼마나 원통했겠습니까.
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정해졌으니, 아아! 돌아갑시다."
공주의 눈물방울이 관위로 떨어지자 그제야 관이 움직였습니다. 한강유역을 되찾아오려던 고구려의 꿈도 그렇게 끝났습니다. 어쩌면 그 소식을 들은 단양사람들도 슬퍼했을 것입니다. 비록 신라의 치하로 들어간지 수십년. 이제는 자신들이 고구려인이었다는 것도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다가온 온달의 죽음. 그제야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마음의 빚을 벗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안녕, 내사랑.
온달은 그렇게 고향과 이별했고, 고향사람들은 그렇게 온달과 이별했습니다.
6.덧붙여
온달산성은 온달과 전혀 무관한 시대인 훨씬 후대에 신라인들에 의해, 아니 신라인이 된 단양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온달이 최후를 맞이한 590년에 단양은 신라의 치하. 그곳 온달산성은 만들어지지도 않았고 단양까지 내려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단양에 있는 온달유적지는 온달이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최후를 마친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온달을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 그토록 한강 주변사람들과 단양사람들은 온달을 못잊어 했을까요? 위 이야기는 그 이유를 역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2-10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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