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12/03/01 18:09:12
Name 눈시BBver.2
Subject [오늘] 3.1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합니다. 이미 황제 자리에서 내쫓겨 이태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그였습니다.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제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무섭게 퍼집니다. 망국의 군주라 하나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조선인은 없었습니다.

고종 독살설이 진짜인가 가짜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사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결혼이 코 앞인 상황에서 그를 죽여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요. 저로서도 확실히 결론을 내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다만 최근에 발견된 "구라토미 일기"가 무섭긴 하네요.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02/2009030200926.html



그림과 기사에 잘 나와 있으니 굳이 토를 달진 않겠습니다.

이에 따르면 합방 이후 9년이나 지나서야 그를 독살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고종은 지구 반대편의 한 회담에 조선의 독립을 걸고 있었고, 이는 다른 독립운동가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적대적인 교의와 목적에 몰두하고 있는 정부의 권력 아래에서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인민들은 이제부터 생명과 종교와 산업적·사회적 계발에 대해 침해당할 수 없는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외칩니다. (민족자결주의 자체는 소련의 레닌에게서 비롯된 거라고 합니다) 이는 식민 치하의 민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조선 역시 예외가 아니었죠. 세계대전 이후의 향방을 가를 파리 강회 회의, 고종은 여기에 어떻게든 참가해 조선, 대한제국의 독립을 주장하려 했고 그가 독살된 이유라고 합니다.

고종만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에 있던 조선인들은 여기에 호응해 조선의 독립을 요구합니다.

그 시작은 만주의 지린. 1919년 2월 1일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39인을 대표로 한 "대한 독립선언서"가 발표됩니다. 이게 음력으로 무오년 12월이라 하여 무오 독립선언서라 부릅니다.

"김교헌 · 김규식 · 김동삼 · 김약연 · 김좌진 · 김학만 · 류동렬 · 문창범 · 박성태 · 박용만 · 박은식 · 박찬익 · 손일민 · 신규식 · 신채호 · 안정근 · 안창호 · 여준 · 윤세복 · 이광 · 이대위 · 이동녕 · 이동휘 · 이범윤 · 이봉우 · 이상룡 · 이세영 · 이시영 · 이탁 · 이승만 · 이종탁 · 임방 · 정재관 · 조용은 · 조욱 · 최병학 · 한흥 · 허혁 · 황상규"

그 39명의 명단입니다.

이는 이후 3.1 운동의 독립선언서보다 상당히 과격한 게 특징입니다.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赤子]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起]하라 독립군! 제[齊]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網)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同體)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一家)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祇奉)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이에 호응해 2월 8일에는 일본 본토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됩니다. 이를 주도한 자는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광수, 그는 베이징에 있던 중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들었고, 일본으로 돌아와 최팔용 등의 동지를 모아 선언서를 만듭니다. 당시 대표 9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송계백 · 최팔용 · 전영택 · 서춘 · 김도연 · 백관수 · 윤창석 · 이종근 · 김상덕

이를 낭독한 이는 백관수, 그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 후 재일 유학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해산 명령을 내린 일본 경찰과의 몸 싸움 끝에 60명이 검거되고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죠. 그 후에도 조선인 학생들의 운동은 계속돼 2월 12일에는 50여명이 검거되는 등, 2월 한 달 동안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일본에서 독립 운동이 계속 됐습니다.

1. 본단은 일한합병이 오족의 자유의사에 출치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
2. 본단은 일본의회 및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야 대회의 결의로 오족의 운명을 결할 기회를 여하기를 요구함.
3. 본단은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를 오족에게 적용하기를 요구함. 우 목적을 전달하기 위하야 일본에 주재한 각국대사에게 본단의 의사를 각해정부에 전달하기를 요구하고 동시에 위원 3인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함. 우위원은 기히 파견된 오족의 위원과 일치행동을 취함.
4. 전제항의 요구가 실패될 시에는 일본에 대하야 영원히 혈전을 선함. 차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오족이 기책을 임치 아니함.

고종의 승하, 민족자결주의, 만주와 일본에서 벌어진 독립 선언,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 아무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처음 이를 계획한 쪽은 천도교였습니다. 하지만 천도교 단독으로 이를 하기는 무리였습니다. 윤치호 같이 기존의 대한제국 관리나 지식인들은 소극적이거나 회의적이었구요. 한용운이 시도했던 유림들과의 연대도 실패합니다. 천주교 역시 여기 참가하지 않습니다. 확신은 못 하겠지만 105인 사건을 밀고한 게 뮈텔 주교가 맞다면 천주교 측에서 이를 도울 생각도, 천주교에도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없었을 겁니다. 여기에 참가한 것은 개신교와 불교, 주도한 이는 천도교의 손병희(16인)와 개신교의 이승훈(15인), 불교의 한용운(2인)이었습니다. 이런 교섭에 힘쓴 것이 천도교의 최린이었죠.

이렇게 민족대표 33인, 여기에 그들이 잡혀간 후 계획을 짜고 시위를 주도할 15인까지 합쳐 흔히 48인을 민족대표로 꼽습니다. 다만 뒤의 15인은 한두명씩 바뀌기도 하고 49인으로 한 명 더 늘기도 합니다.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은 최남선, 2월 11일에 기초가 잡혔고 2월 20일부터 천도교의 이종일이 자신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를 시작합니다. 2월 27일까지 총 3만 5천여부가 나왔죠.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중 23인이 모여 최종 계획을 짭니다. 처음 목표는 탑골 공원이었지만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로 대표들은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기죠.

그렇게 3월 1일이 밝았습니다.



3월 1일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29인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축배를 듭니다. 그들이 계획한 것은 철저한 평화 시위, 힘이 아닌 자신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일제와 전 세계에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리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해서 이 사실을 알렸고, 일제 경찰 80명이 들이닥칩니다. 민족대표들은 한용운의 선창에 맞춰 만세를 세 번 외친 후 연행됩니다. 여기에 참가하지 않은 4인 역시 저녁에 자진 출두합니다.

한편 탑골 공원에는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습니다. 이틀 후인 3월 3일에 고종의 장례식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상경한 상태였고 이들은 곧 만세 운동에 참가합니다. 원래 3월 3일로 계획한 걸 이틀 앞당긴 것 역시 장례식에 차마 할 수는 없어서였죠.


학생 대표들은 민족 대표들의 행동에 항의하긴 했지만, 곧 독자적으로 나섭니다. 2시 30분,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여기에 학생들은 물론 일반 민중들과 고종의 장례식을 위해 상경한 이들까지 모두 합세해 수십만의 인파가 거리에 쏟아집니다.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 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에로 옮아 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 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태극기와 선언서가 서울 시내에 쏟아졌고, 군중은 두 갈래로 나누어 크게 외칩니다.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

그들은 둘로 나뉘어 한 쪽은 숭례문으로 나아갔고, 다른 한 갈래는 덕수궁 대한문, 현 시청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덕수궁으로 간 이들은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한 후 다시 만세를 부르며 나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며 규모는 더욱 커졌고, 서울 시내를 8개로 나누어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죠. 이 중 미국 영사관에 이르러 어느 학생이 "대한독립" 네 글자를 피로 써 높이 들고 인도하니 미국 영사도 문을 열어 환영했다고 합니다.

종로에 이른 시위대는 다시 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를 외칩니다. 일본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헌병과 기마부대를 보냈는데, 시위대는 이들과 끝까지 맞서다 저녁 6시에 자진 해산합니다. 이 날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들만 50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평양, 의주, 선천, 안주, 원산, 진남포 등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그 이후 전국으로 퍼집니다. 일제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기 시작해 3월 2일 서울에서만 1만여명이 체포됐고, 전국 곳곳에서 총칼이 동원된 진압이 시작됩니다. 이에 맞서 만세 운동도 평화적 시위에서 폭력적인 운동으로 변하게 되죠.


당시 서울에 있던 유관순은 귀향해 서울의 상황을 전합니다. 이 때 천안에서도 홍일선과 김교선을 중심으로 한 만세 운동이 계획돼 있었고, 유관순 역시 이들과 함께 4월 1일, 음력 3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벌입니다. 일제는 발포로 대응했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김구응 등 19명을 죽이고 많은 이들을 투옥합니다. 유관순 역시 투옥돼 1920년 9월 28일 18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사진은 종로입니다

3월 4일에는 평남 대동군에서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의 사천 시장까지 행진을 벌입니다. 일제 헌병들은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무차별 총격을 가했고, 이 날은 3.1 운동이 시작된 이후 가장 피해가 컸던 사건으로 남습니다.


평양 기생들의 만세 운동. 기생이라 하긴 그랬는지 여학생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남 창원에는 3월 28일, 4월 3일 두 차례 운동을 벌입니다. 규모가 컸던 연합시위 중 하나로 인근 지역에서도 참가한 상태였죠. 3천여 명의 시위대가 일제 헌병과 충돌해 5명이 죽고 11명이 다쳤다고 합니다.

3월 6일, 곽산에서는 개신교를 중심으로 수천명이 만세 운동을 벌여 박지협이 주동 혐의로 죽었고, 투옥된 100여명 중 50여명이 고문으로 죽습니다. 이 때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수천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인 피해 상황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못 하겠군요.

평남 사천에서는 3월 3일 만세 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발포로 73명이 죽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대구에서는 총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이 중 113명이 죽고 87명이 다칩니다. 운동을 주도한 김용해는 칼에 맨손으로 맞서다 중상을 입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아버지와 함께 투옥됐다가 몇 일 후 사망합니다.


수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기생조합의 김향화

이렇게 일제의 진압과 만세 운동이 과격하게 된 상황에서 미친 일이 일어납니다. 일제의 강경한 진압에 흥분한 시위대는 인근의 일본인 주택, 학교에 불을 질렀고, 계속되는 진압에도 만세 운동은 계속됐죠. 이런 가운데서 4월 5일,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이 경기도 화성시 향납읍(당시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로 향합니다.

그들은 15세 이상의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당에 모이게 한 후 그 이유를 "강경진압을 사과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죠. 일본인의 집을 불태운 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정미업자 사사키는 일본군에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알려줬고, 끔찍한 학살이 벌어집니다. 일본군은 교회에 불을 질렀죠. 22명이 안에서 죽었고, 3명이 탈출하다 2명이 죽었으며, 일본군은 고수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도 죽입니다. 인근 수촌리에서도 일본군은 주민들을 마구 죽이고 42호의 집 중 38호를 불태웠죠.

이후 이 일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캐나다 의료 선교사 스코필드(석호필)에 의해 크게 알려지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영국인이라는 것을 이용(당시는 영일동맹 상태였죠)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고문당하는 이들(유관순을 비롯)을 도우려 애썼죠.



끝이 없군요. 위키백과 등에 있는 것만 옮겨도 이렇게 많습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전국에는 1214회의 만세 운동이 벌어졌고, 참가 인원은 106만(조선총독부 집계)에서 202만(박은식)에 이릅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때 사망자 553명, 체포 12000명으로 잡고 있으며, 박은식의 경우 사망자 7500명, 부상자 15961명, 피체포자 46948명으로 잡고 있습니다.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고 이 중간 어디쯤이겠죠.

흔히 3.1 운동이 평화적인 운동이라고만 알려졌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일제 역시 처음에는 진압보다는 해산에 치중했지만,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컸고 전국적으로 퍼짐에 따라 무차별 총격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맞고만 있을 순 없죠. 너무 평화적인 것에만 집중해서 폭력적으로 바뀌었다고 부끄러워 하거나 깔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로 자진 출두하는 등 너무 평화적으로만 계획한 것이 한계는 있을지언정 그것 자체를 무작정 깔 수도 없구요. 평화적인 것을 그저 순진하다고 하면, 간디는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분명 3.1 운동의 한계는 큽니다. 민족자결주의는 어디까지나 독일 등 패배한 제국들을 해체하기 위해 나온 것, 김규식과 장덕수 등이 파리로 가서 조선의 독립을 알리려 했지만 제대로 참가도 못 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너무 순진했던 것은 맞아요.

그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폭력 시위를 막기 위해 자진 출두한다는 게 장하긴 했지만, 그럼으로써 일반 민중들은 스스로 운동을 주도해야 했습니다. 민족의 대표를 자처한 이들이 그들을 주도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무리 평화적인 시위라도 계획을 짜고 실행할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요. 3.1 운동에 참가하지 않은 윤치호는 이에 대해 학생들을 앞 세우고 자신들은 발을 뒤로 뻈다며 비난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초기에 시위가 폭력적으로 번지지 않은 것이 대단합니다.

이런 한계들이 있다 하더라도 3.1 운동을 폄하할 순 없습니다. 특히 민중의 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정말 크죠. 천도교 등 종교계에서 주도하긴 했지만 서울에서 이를 주도한 것은 학생이었고, 전국에서도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참가합니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지식인들은 민중을 그저 계몽해야 될 무지렁이 백성으로만 생각했었지만, 이 운동을 통해 그들 역시 함께 싸워야 할 동반자로 바뀝니다.

"조선 독립 운동은 위대하고 성실하고 비장하며 명료하고 정확한 생각을 갖추고 있다. 민의를 사용하고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참으로 세계 혁명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찬미, 애상, 흥분, 희망, 참괴 등의 여러 가지 감상을 갖는다. 조선 민족의 활동의 영광스러움에 비추어 우리 중국 민족의 위미(기운이 없음)하고 부진함의 치욕이 더욱 두드러진다. 조선인에 비하여 우리들은 참으로 참괴함을 금할 수 없다."
- [조선 독립운동지 감상] 진독수

다수의 민중이 주도한 운동, 이는 중국에도 알려져 5.4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에도 알려졌다고 합니다. 인도의 경우 확실치는 않지만, 중국의 경우는 위에서 보듯 의심할 필요가 없죠.

일본이 승전국이고, 열강들이 조선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기에 당시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 했지만 그것 역시 3.1 운동의 의의를 깎을 것은 못 됩니다. 이 운동은 "조선인들 전체가 일제에 반발하고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는 사건이 됐으니까요.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것이 없었다면 2차 대전 후 "한국은 당연히 독립해야 된다"는 생각이 가능했을지 의문입니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독립해야 된다고는 생각했겠지만요. 일제도 더 이상 무단통치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문화통치가 시작됩니다. 조선의 발전과 치안 확보를 위해 "조선의 동의를 얻어 합병한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게 전세계에 알려졌으니까요.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만 식민지의 요구에 의해, 그것도 멀고 힘 있는 식민지가 아닌 코 앞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 했던 식민지의 요구에 의해 통치가 완화된 케이스는 그리 없습니다.

이후 독립운동의 방향도 달라집니다. 평화적인 시위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제의 강력한 탄압에 의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됐고, 이후에는 해외의 독립운동이 주가 됩니다. 4월 11일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9월 1일에는 한성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회의와 통합되죠. 방식 역시 외교가 아닌 무장 투쟁으로 변하구요.

이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은 후에 큰 활약을 보이지 못 합니다. 옥사한 분도 여러 분 있고, 출옥 후에도 일제의 감시 하에 있었으며, 변절한 이들도 있으니까요. 인터넷에는 이들 중 한용운 외에 모두 변절했다는 어이 없는 카더라도 있는데 (카더라 수준이 아니라 왠만한 책에도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33인 중 변절한 이는 3인 뿐이며, 15명까지 쳐서 48인 중 변절한 이도 여기에 최남선을 더 해 4명 뿐입니다. 여기에 2.8 독립 선언을 주도한 이광수도 있지만, 당시의 민족 대표의 전체 수를 생각하면 일부일 뿐이죠. 그나마 이 중 최린은 자기의 친일 행각을 반성하고 죽여 달라고 했던 이였습니다.

3.1 운동. 분명 순진했다는 생각도 드는 한계가 큰 운동이지만 그 의의를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시작이나 다름 없고, 현대 한국은 이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국경일들이 빠지는 동안에도 3.1절은 절대 빠지지 않는 이유죠. 단지 독립운동 한 번 했던 날이 아닙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많은 피해가 있었지만 그래도 낭만적인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뚜렷했고,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참가했으니까요. 이후에는 독립운동이든 어느 쪽이든 서로 대립하고 싸우고, 대체 어느 쪽이 잘 했다고 해야 될 지 모르는 사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마음껏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는 운동인 겁니다.

앞으로 이렇게 우리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근현대사의 여러 사건들을 그 날에 다루려 합니다. 이른바 [오늘] 시리즈죠. 당장 3월에 3.15 부정선거가 있을 것이고, 4월로 가면 4.3 사건과 4.19 혁명이 있겠죠. 전문적으로 다루지 못 하더라도 최소한 펌글이라도 써 보려 합니다. 잊으면 안 될 날이 더 있다면 추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자스-로렌 지방에 있는 오라두르쉬르글란이라는 마을에는 독일군의 학살 사건이 있었고, 지금은 사적지로 폐허로 남겨 두고 있습니다. 이 입구에는 이런 푯말이 있죠.

근현대사의 사건들은 왜곡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어떤 것은 왜곡됐다가 바로잡혔고, 바로잡혔다고 하는데 다른 쪽으로 왜곡되기도 하죠. 정치적인 입장이 끼어드는 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아마 같은 사건을 두고도 입장이 갈리는 경우도 많을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확실한 게 있습니다. 이 날, 그리고 앞으로 다룰 날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있게 해 준 그 분들, 고통 받고 상처 입고 고문 당하며 죽어가면서도 대한 독립을 외쳤던 그 분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다면 그 한계를 잊지 말아야 하고,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을 잊지 말아야 하죠.

그럼 다음 [오늘]에서 뵙겠습니다.

추가
3.1 운동에 대한 이완용의 대처
http://orumi.egloos.com/4680292

민족대표 48인의 후일담에 대해서는 여기로
http://orumi.egloos.com/2243623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3-08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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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ive
12/03/01 18:12
수정 아이콘
뉴라이트처럼 식민지 근대화를 정당화시키는걸보면 참 화나죠;;
화학공학도
12/03/01 18:23
수정 아이콘
오늘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날입니다.
늦은 오후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추모합니다.
12/03/01 18:29
수정 아이콘
'오늘'시리즈 참 좋네요. 날이 날이니 만큼 더 잘 읽히네요. 태극기 걸어본 적이 언제인가 기억안나 창고에서 찾다가 보니 없어 트위터에 표기하고 말았는데 조만간 하나 사둬야겠습니다. [m]
9th_Avenue
12/03/01 18:37
수정 아이콘
민족대표의 자진출두를 다른 의미에서 생각하면 일제 입장에서는 참 난감했을겁니다. 주모자급들을 잡았기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시위가 일어날 것인지...누구를 막아야 시위가 확산이 안될것인지 판단이 애매할 수도 있죠

당시 조선사회가 독립을 열망하고 있던 흐름이였고, 고종의 죽음은 왕을 모시던 백성에게 큰 충격이어서 굉장히 불안불안한 상황이었을테니까요. 미약한 움직임도 전국을 아우를 수 있는 불씨라고 판단했다면 충분히 효과적인 움직임이라고 추측해봅니다

한계라는 단어가 싫어 반대의 가능성이 있지 않나하는 개인적 억측이었습니다 ^^;; [m]
12/03/01 18:49
수정 아이콘
한계가 있었고 방법에 있어서 어처구니 없는 순진함도 있었고 삼일 독립선언서 발표한 33인의 후에 행적에
분노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것은 그래도 일제 감점기에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는거겠지요
도올 김용옥선생 같은 분은 진정한 의미에 독립은 아니고 남의 힘에 의해서 해방을 맞았다고 뼈아픈 정의를 내리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시도하고 행동한 조상님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보냅니다
12/03/01 18:58
수정 아이콘
눈시님 언제나 좋은글 감사합니다.

추게로!
12/03/01 19:0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참..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영원한초보
12/03/01 19:40
수정 아이콘
유게에서 애국가 이야기 나오면서 애국심을 꼭 가질 필요없고 오히려 경계해야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는데요.
pgr분들은 애국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네오크로우
12/03/01 21:01
수정 아이콘
애국심이라는 것이 그동안의 교육 탓인지 나라를 잃었을 때 피를 흘려가며 나라를 되찾으려는 마음? 이런 정도에 집중돼 있고
혹은 지난 정권들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내세우는 반공=애국심 이라든지 편향된 시각들이 많아서 애국, 애국심 이런 단어에
묘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애국심이 따로 있나요. 우리들을 대신해서 일선에서 나라를 운전(?)하는 정치인들 잘못했을 때 따끔하게 지적하고 쓴소리
해주는 것도 애국이고 우리의 아이들 올바른 인성과 가치관을 갖도록 돌봐주는 것도 애국이고 딱히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12/03/01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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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살다보니 오늘이 3.1절인 것도 오후에나 알았네요.

좋은 글 보고 갑니다.
PoeticWolf
12/03/0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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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글, 비비님이 쓰셔야 합니다.
낭만토스
12/03/01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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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밑에 링크에 이완용 글

돋네요

과연 친일파 원톱 답네요 -_-
12/03/02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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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훈남 눈시님이당
[오늘] 시리즈 앞으로도 부탁드려요.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던 제 무지가 부끄러워지네요. 앞으로도 부끄럽게 해주세요
빠이야
그리고 6.29. 5.18.이 재미(?)있을것 같습니다.
어디서 얼핏 주워듣기로 6.29.가 머리벗겨진 처죽일 어떤분의 계획된 작품이라던데... 그냥 음모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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