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적었듯 친일파 관련 글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군 문제만 다뤄놨는데도 이거 장난 아니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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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사건으로 공산당이 금지되고 이후 좌파 세력이 남조선로동당으로 합쳐지는 동안, 좌우합작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는 동안 우파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우파 사이의 이해관계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김규식은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을 추진하며 중도 우파를 집결시켰습니다. 애초에 같은 임정 동지였건만 김구 주변에서도 김규식을 지지하며 넘어간 이들이 많았죠. 여운형, 김구, 이승만에게 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제일 저평가 받는 정치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납북된 게 제일 크겠죠.
이건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이 보기에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조차도 반동 파시스트 정권으로 몰" 상황이었던 것이죠. -_-; 덕분에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좌파의 힘은 여운형에게, 우파의 힘은 김규식에게 몰립니다.
미군정이 이승만의 극우파에 실망한 것도 크지만, 기본적으로 한국 내나 세계적으로나 통일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긴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운형과 김규식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이승만 등 극우를 배제시키는 것도 가능한 동시에 박헌영의 극좌를 배제하는 것 역시 가능했죠. 여운형도 그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미국의 지원은 그에게 힘이 됐고, 박헌영은 확실히 잘라야 될 상태였죠.
이런 상황을 본 이승만은 미국으로 떠납니다. 그는 미국에 있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이용해 단독정부론을 홍보했고, 돌아와서는 미 국무부와 단독정부 수립을 합의했다고 선전합니다.
해를 넘어 47년 3월, 운은 그에게 있었다는 게 드러나죠.
한편, 한민당에서는 장덕수가 미소공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합니다.
사면초가가 돼 버린 김구, 그는 이승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죠.
이런 좌우합작 운동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면서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성립됩니다. 다음 미소공위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의장은 김규식으로 기본적으로 좌우합작 세력을 중심으로 했고, 관선, 민선의원 각 45명씩으로 좌우합작에서 추천한 이와 고액납세자와 지주에서 투표로 뽑는 45명씩이었습니다. 한민당이 들어가기 참 좋은 상황이었죠. -_-; 미군정은 자본가가 중심이 된 한민당을 버릴 수 없었고, 재선거가 실시될 정도였습니다. 한민당은 재선거를 거부했고, 여운형 등은 피선을 거부하는 등 맞섰고, 여기에 불참합니다.
그 동안 여운형은 계속 싸우고 있었습니다. 동생 여운홍은 아예 사회민주당을 창당하며 맨 위에 여운형의 자리를 비워놓았고, 여운형은 고민 끝에 12월 정계에서 은퇴를 선언하며 물러납니다. 안 그래도 탄압받고 있는 좌파의 분열을 공식화할 순 없는 상태였으니까요.
어찌됐든 이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어느 정도의 활동을 했지만, 좌우합작과 미소공위가 물건너가면서 역시 유명무실화 됩니다.
해를 지나 미소공위의 재개 움직임에 김구는 반탁운동을 다시 시작합니다. 그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부정하며 우익 조직들을 통합, 국민의회를 창설하죠. 여기에 그는 이를 과도정부 수립으로 보며 반탁 시위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런 가운데 4월 이승만이 입국합니다. 그는 어마어마한 무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46년 후반으로 들면서 중국의 사정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패배를 반복했고, 결국 대만으로 밀려버리죠. 루즈벨트 시절부터 계속된 일단 서로 맘엔 안 들지만 같이 싸운 동지였던 소련, 공산주의의 확산을 공식적으로 막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47년 3월에 있었던 트루먼 독트린은 이걸 공식적으로 알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이를 자기의 공이라 주장합니다.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국가에 대한 무차별적인 지원, 냉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이를 무기로 반공을 표방하는 단독정부를 강하게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5월 22일에 시작된 2차 미소공위가 그 타겟이었죠.
하지만 이 때까지는 미군정 역시 미소공위를 더 중히 여기고 있었습니다. 한민당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과 좌우합작에 한 다리씩을 걸치며 미소공위를 지지하고 있었구요. 이런 위기감에 이승만과 김구는 다시 반탁 시위를 주장합니다.
이들의 주도에 의해 일어난 6.23 반탁 시위, 하지만 예전과 달리 그들에 대한 눈길은 싸늘했습니다. 이 때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반탁 시위가 독립의 길이다라고 한 의견은 26%에 불과했고, 반탁 시위에도 수천명이 참가하는데 그쳤습니다.
몰릴대로 몰린 이들은 소련측 대표에 대한 테러까지 가합니다. 덕분에 미소공위의 분위기는 또 흐려졌죠.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긴 했습니다. 당시 미소공위에 참가하기로 한 당이 각기 인원을 밝혔는데, 남한 5200만명과 북한 1300만명이었습니다. (...) 얼마나 난장판이었는지 말 해 주죠.
여운형은 이런 극우에 맞서 다시 정계로 나옵니다. "근로인민당", 단 2개월 남은 그의 마지막 도전이었습니다.
"지정학상으로도 남방세력이자, 해양세력인 민주주의의 맹주인 미국, 북방세력이자, 대륙세력인 사령탑 소련이 접합하고 있다. 때문에 자주국가건설과 유지 발전은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좌우협력에서만 가능하다"
"해방된 오늘,지주와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들 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을 들어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됩니다."
그의 존재는 좌나 우나 참 짜증났을 겁니다. 그냥 자본주의 국가를 원하자니 그는 사회주의자였고, 반미를 내세우자니 그는 친미적인 태도를 쭉 보였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는 반드시 재거해야 될 너무나도 크고 위험한 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의 마지막 불꽃은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미 국무성은 여운형을 당시 해방이후 조선에서 인기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 - 리처드 로빈슨
"몽양은 개인적으로 소련보다 미국에 더 가까웠지만, 이들 양국에 대해 절대 중립이었으며, 그가 갖고 있던 유일한 목적은 미국, 소련 양국으로 하여금 가급적 빨리 한국으로부터 물러나게 하는 일이었다" - 윌리엄 랭던
여운형은 1929년 중국에 있을 때부터 2차례의 테러를 당했고, 광복 후에는 2년 동안 10차례의 테러를 당했습니다. 박헌영이 인민공화국을 만들 때도 그는 테러를 당해 집에 있으면서 자기의 이름을 빌리는 걸 허용해야 했고, 그 후에도 계속 습격을 당했습니다. 누군지 모를 괴한들에게 납치당했다가 틈을 타 절벽에서 떨어져 살아남기도 했죠.
1947년 3월 17일, 그가 외출해 있는 동안 그의 집에서 폭탄이 터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경찰은 그에게 서울을 떠나라고 했고 가족을 지방으로 보내긴 했지만 그는 끝내 남았습니다. 미군정에서 경호원을 붙여 주려 하자 거부하기도 했죠.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대중과 함께 살아온 내가 어찌 대중으로부터 스스로 격리되겠는가?"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은 미국에 있는 독립운동가 김용중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보냅니다. 거기에는 자기가 미군정에 얼마나 협조하려 했는지, 하지만 그들이 한민당 등 극우세력에만 유리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짧고 간결하게 적었죠.
그의 편지 마지막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와 나의 보조자들은 군정청의 성실성과 선의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에 부닥칠 때가 많소. 북의 소련인들이 극좌분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곳 미국인들은 또 극우분자를 두둔하오. 좌파면 누구나, 아니 극우가 아닌 사람들은 누구나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고 그 활동에 방해를 당하고 있소."
"나는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없소. 나는 아직도 미군정하에서 국립경찰로 채용된 친일파 손아귀에서 고통받고 있소이다. 이 몇 줄의 짧은 글이 김선생에게 얼마간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오. 할 말은 더 많지만, 오늘은 긴요치 않은 장광설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
마치 무언가를 예견한 듯한 편지. 그는 그 날 체육장관으로서 IOC 축하기념 한영 친선축구경기에 가려 했습니다. 그 때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정장관직을 받아들이려 했고, 어쨌든 경기 참관을 위해 옷을 갈아 입으러 차를 타고 집으러 갔습니다.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처, 갑자기 트럭 1대가 그의 앞을 막아섭니다. 그의 차를 향해 2발의 총탄이 발사됩니다. 오후 1시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인민장(건국 후 국장으로 바뀌죠)으로 치러졌고, 해방 후 최대 인파가 모여 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흰 옷을 입어 그를 추모했고, 서울시내가 하얗게 뒤덮였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있던 고경흠의 말에 의하면 그의 유언은 "조국, 조선"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확실히 정치인이었습니다. 수려한 외모와 화려한 언변,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일본 관리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도 친일의 길로 빠지지 않았고, 미국과 대립하면서도 협조했으며, 일제도 미군정도 소군정도 그를 무시하지 못 했습니다. 박헌영을 몰아내는 걸 미국에 요구한 것만 봐도 그가 단지 순수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_-; 그는 미군에 협조하면서도 자신의 원한 좌우합작을 거스르려 하자 참가하지 않는 걸로 맞섰습니다. 그러면서도 미군정은 그를 무시할 수 없었죠.
좌우 대립이 극해지던 시기, 통일정부가 세워진다 한들 그가 제대로 힘을 쓸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거기다 미소, 1세계와 2세계의 최전선에 있던 것이 한국이었으니까요. 그가 내세운 사회주의는 자본가나 공산주의자나 뜨뜻미지근하게 여겼을 뿐이고, 그 영향력과 "박쥐" 행동에 좌우 어느 쪽이든 그를 죽이려 했고, 마침내 성공합니다. 여운형은 우선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의 정부를 세우려 했습니다. 좌우 모두 포용하려 했지만, 그 당시는 그럴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암살 배후로는 박헌영부터 김일성(은 좀 아닌 듯 -_-;), 김구의 백의사, 이승만까지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배경을 생각하면 좌보다는 우로 봐야 되겠죠.
그가 죽은 후 이승만은 그의 이름을 최대한 없애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잊혀진 건 생각보다 짧습니다. 박정희도 전두환도 처음에는 그의 추모를 계속했고, 그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반공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에 가서야 그만뒀죠. 하지만 좌파이기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참여정부 때에 가서야 가능했고, 그나마 2등이 됐다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1등으로 올렸죠.
좌우 양쪽에서 공격받았던 그, 하지만 그렇기에 좌우 양쪽에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해방 후의 정치인일 겁니다. 현대 정치인 중에 이와 비견될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뭐 친미친일친중친러친북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정도의 돼야 가능하겠죠. -_-;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합니다만...
뭐... 어찌됐든...
그의 암살로 좌우합작도, 통일정부의 꿈도, 미소공위의 진행도 끝 납니다. 이후 남한의 좌파는 모든 구심점을 잃게 되고, 이승만은 극우로 나라를 끌고 가며, 김일성은 6.25를 일으킴으로써 이를 정당화 시켜줍니다.
제가 지금까지 쓴 그의 이야기에서도 미화가 제법 있기는 할 겁니다. 하지만, 해방 후 인지도와 지향점 면에서 긴장 풀고 따라갈 수 있는 빛은 그 외에 얼마 되지 않을 겁니다.
가운데 있는 건 좌우합작을 위해 미국에서 급히 투입된 서재필입니다.
이제 남은 건 중도우파 김규식, 그는 마지막까지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옛 동지가 돌아오죠.
미소공위 기간 동안 조소앙을 비롯한 한독당의 일부는 중도파와의 합작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구는 이승만과의 연대에 매달리며, 또 한독당의 좌경화를 우려하며 이를 거부합니다.
가장 큰 적수가 사라진 세상,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배경도 좋았습니다. 미소공위는 결렬됐고, 소련측 대표단은 완전 철수했으며, 미국은 이 문제를 UN에 상정합니다. UN에서는 자신들의 참관 아래 총선거를 제안했지만 소련은 거부했고, 이승만은 이 흐름을 탄 것이었죠. 47년 말에 이르면 김구도 이에 본격적으로 호응하게 됩니다.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북한의 선거를 실시하지 못할지라도......방해가 제거 되는대로 북한이 참가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 의연히 총선거의 방식으로서 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 그것은 남한이 단독정부와 같이 보일 것이나, 국제관계상으로 보아 통일정부일 것이요 단독정부는 아닐 것이다" (12월 2일)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문제가 걸렸습니다.
좌파가 사라져 가면서 남한의 정국은 극우와 중도 우파로 나뉩니다. 어쨌든 명분으로서는 통일정부를 내세우는 중도 우파에 밀릴 수밖에 없었죠. 이승만과 김구, 한민당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해 뭉쳤고, 이는 합당 시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장덕수는 한민당과 김구의 한독당과의 합당에 반대합니다. 극우인 한민당의 정치부장이었지만 그는 미소공위에 협력했고, 소련에 대한 태도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이였습니다. 이는 특히 미국을 몰아내는 수준까지 주장하고 임정 정통을 계속 밀어붙인 김구와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죠. 둘은 5월부터 쭉 싸워 왔습니다.
그는 합당할 경우 한민당을 임정에 갖다 바치는 게 될 것이라 여겼습니다.
12월 2일, 그는 제기동 자택에서 암살당합니다.
미군정과 이승만 모두 범인을 김구의 백의사라 생각했고, 그는 이 문제로 법정까지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한민당의 김성수, 허정은 이승만과 김구와의 연대를 계속 주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이후, 한민당과 김구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넙니다. 그리고 이승만은 김구와의 연대를 완전히 끊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오랜 동지, 임정 주석과 부주석 사이였던 김규식에게로 갑니다. 남북 모두 단독정부 수립이 구체화되던 그 때, 그들은 남북 협상을 추진하죠.
그는 이승만에 협력해 2인자 자리를 어떻게든 지키려 했고, 초기엔 이승만보다 더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의 백의사는 좌든 우든 그의 정적을 죽이는 데 동원됐다는 의혹이 강하며, 이승만과 틀어진 후에야 김규식에게로 간 점 등에서 실망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만약 그가 여운형과 손을 잡았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 한국에서 그보다 강력한, 그것도 좌우합작인 세력이 있었을까요? 하지만 그 둘은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임정의 주석과 건준을 세운 여운형은 명분에서 너무나도 차이났으니까요. 애초에 그들이 말하던 "조국"은 여운형에게는 조선, 김구에게는 한국이었습니다.
사실 둘의 생각이 컸던 것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독립군이 몰락한 건 일제의 토벌 외에도 자유시 참변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 때 반공이 뼈 속까지 각인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공산당 계열은 임정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고 그는 외롭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공산당은 기본적으로 민족보다 계급을 중요시했고, 2차대전 이후로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처절하게 당한 쪽에서 그걸 알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여기에 그 자신의 패권주의적인 성향을 더 하면 그가 공산주의와 손 잡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죠.
반면 여운형은 국내에서 어떻게든 버티던 독립운동가로 상대가 공산주의자든 자본주의자든 같이 싸우는 동지였습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일한다면 주의는 상관 없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반공우파인 임시정부와 좌우합작인 건준의 차이였을 겁니다. 그것 외에도 이유는 많았겠지만요.
이래저래 그 동안 많이 까 왔지만, 이것이 그가 진정 가야 될 노선이었습니다. 임정이 어디 남한만의 정부였습니까. 그의 소원은 통일이었고, 너무 적대했을 뿐 외세가 물러나야 된다는 건 여운형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습니다. 이승만과의 연대가 완전히 끝난 지금, 어쩌면 그는 이전보다 더 홀가분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뭐... 너무 늦었지만요.
젊은 날의 김규식
"3천만 자매 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 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
김구라는 강력한 지지자를 얻은 김규식, 그들은 마지막 돌파구를 찾습니다. 한국의 White Tiger, 김구는 늦은 만큼 그 누구보다 강력하게 분단이라는 닥쳐오는 현실에 맞서 싸웁니다. 그리고 그걸 외쳤기에 그의 죽음도 여운형처럼 너무 빨리 다가왔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06-15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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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샷은 처음보는데 김구선생님 키가 크시군요.
이승만 대통령도 그 시대 사람치고는 나름 키가 크고 늘씬해서 서양인들 사이에서도 꿀릴 거 없는 풍채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 사진 보니 김구 선생님이 머리 반 개는 더 있는 느낌인데요. 얼굴만 봐서는 작은 거인 류의 이미지였는데;;;;
건국되고 나면 더 하죠 ㅠ.ㅠ.... 그나마 저 때는 "통일 외쳤던 사람이 그래도 옳았다"라고 할 수 있는데...
남북으로 확실히 분단되고 난 상태에서는 이승만도 좋게 봐 줄 거리가 있습니다 -_-;
진짜 그 후부터는 그냥 선악이 아니라 "대체 어디까지가 옳고 어디까지가 그른 거냐"의 싸움이죠
남한의 정통성을 흔히 임시정부 정통성을 삼고 북한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정통성으로 삼는데
정작 남한에서는 김구가 암살 당하면서 임정을 계승하지 못하였고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숙청당하면서 건준세력들이 사라졌죠
각 정부에서 내세우는 정통성은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할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