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te |
2012/09/30 03:46:11 |
Name |
박진호 |
Subject |
남한강 조약돌과 세 켤레의 신발 |
소싯적 신촌 바닥을 헤매며 공부도하고 게임도하고 연애도하고 살 무렵이었다.
물론 피지알도 했었다.
신촌의 창천 교회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면 작은 주차장이 있고 거기서 다시 꺾어지는 골목에는 싸구려 안주를 파는 술집이 여럿 있다. 그 골목의 끝자락에는 지금은 사라져 없어진 남한강 조약돌이라는 삼겹살 집이 있었다.
부모님 용돈으로 하루하루를 때워 나가는 학생에게 싼 값에 싼 값보다는 조금 맛있는, 우리가 주구장창 목 놓아 외치는 '가성비' 가 좋은 고깃집이었다. 다수의 인원이 가서 자리잡기에 적절한 크기의 방바닥이 있어 동아리 회식을 할 때 자주 찾는 곳이었다.
냉동 삼겹살은 3500원, 생삼겹은 7000원이었는데 단체 손님이 몰려 생삼겹이 떨어지고 나면 냉동삼겹을 생삼겹이라고 우기며 팔아 웬만하면 냉동 삼겹을 먹는 것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생삼겹도 그냥 냉동삼겹을 녹여서 파는 게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잘 달궈진 후라이판에 고기를 올리고 마늘을 던져 넣고는 마늘이 구워지며 풍기는 진한 향기를 맡으며, 이제나 저제나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당근에 초장을 찍어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지금보다 2도 정도 높았던 참이슬의 도수는 나와 내친구들을 많이도 취하게 하고 많이도 싸우게 하고 많이도 토하게 하였다. 남한강 조약돌 앞 전봇대에는 손님들이 게워 놓았던 소주고기피자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날 왜 거기서 고기를 먹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구랑 먹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림막 없는 방위에는 단체 손님들이 고기를 먹고 있었고 방으로 올라가는 바닥에는 손님의 두배가 되는 신발들이 정신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의 일행은 서너명 정도였고 단체 손님 맞은편 테이블에서 열심히 고기를 먹고 있었다.
술에 취해 고기에 취해 된장에 밥 한 공기까지 비우고 가게를 나가려는데, 이런 내 신발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삼겹살을 구우며 신선놀음을 하던 사이 단체 손님들은 모두 빠져 나갔고 내 신발도 그 틈바구니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당황하며 주인장님에게 신발이 사라진 것 같다고 얘기를 하고 가게 슬리퍼를 신고 이리저리 구석구석 신발을 찾아 보았다. 주인장님도 당황하며 나와 같이 신발을 찾았고 불행 중 다행이도 내 신발이 아닌, 다른 신발 한 켤레를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나의 신발을 신고간 사람이 남겨 둔 발자취일 것이라.
당시 내가 잃어버린 신발은 유행은 조금 지났으나 나름 잘나가던 닥터 마틴이라는 스니커즈였다. 할인권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있어서 친구들과 명동 롯데 백화점에 우르르 몰려가 같이 샀던 신발이었다. 그리고 그 신발대신 가게에 남겨져 있던 신발은 매우 볼품없는 까만 운동화 한 켤레.
주인장님은 매우 좋은 분이셨다. 내가 신발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자 주인장님은 가게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며 선뜻 10만원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어차피 헐은 신발이라 새로 사야한다며 괜찮다고 하였지만 신발을 잃어버리고도 크게 소란을 피거나 주인장님에게 따지지 않는 모습이 너무도 고맙다며 신발값을 나에게 주었다. 게다가 나중에 고기를 먹으러 오면 무료로 주겠다고 까지 하였다.
나는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10만원과 무료고기 시식 구두약속권까지 얻고 거기다 나의 신발을 신고 간 사람이 놓고 간 까만 운동화를 신고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백화점에 가서 괜찮은 구두 한 켤레를 샀다. 두꺼비도 아니고 헌 신을 주니 새 신을 받다니, 아 신이 아니라 집인가 그건. 새로 산 구두를 신고 신발가게를 나설 때 백화점 예쁜 점원 누나가 나를 붙잡으며 사은품을 가져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10만원 이상 구매고객에게 신발가게에서 주는 사은품은 역시나 신발이었으니 여자들이 신고 다니는 굽 있는 나무재질에 슬리퍼였다. 나는 또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사은품까지 손에 들고 룰루랄라 기숙사로 돌아왔다.
남한강에는 산신령이 사나 보다. 남한강에 신발을 던지니 헌 운동화 한 켤레와, 새 구두 한 켤레와 여자용 슬리퍼가 튀어나오다니. 나 같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학점이 안 나오는 학생에게는 이렇게 복이 오는구나.
며칠 뒤 나는 동아리 후배 두 명에게 생색을 내며 남한강 조약돌에서 삼겹살을 그 것도 생삼겹을 공짜로 쏘고 멋진 선배가 되면서 이 이야기는 마무리 짓게 된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뭔가 찜찜함을 느끼는 이가 있다면 진정 피지알꾼들 일지라.
세 개의 신발 중 헌 운동화는 쓰레기 통으로, 새 구두는 내가 신고 다녔는데 남은 여자 슬리퍼는 어디로 갔을까.
내가 신고 다녔을까?
아쉽게도 크로스 드레서가 아니기에. 남은 여자 슬리퍼는 처분을 해야 했고, 그 슬리퍼는 당시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에게로 갔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연인들 사이에서 신발을 선물하면 안된다고.
솔직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우리 피지알꾼들은 그런 미신 따위는 절대 믿지 않는다. 차라리 혈액형 별 성격을 믿으라면 믿지.
그래도 웬만하면 신발은 선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바로 얼마 안 있어 여친에게 차인 뒤 울며불며 남한강조약돌에서 소주를 먹었으니까.
-여전히 나의 글을 좋아해주길 바라며..
* 信主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2-10-22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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