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국모, 궁의 안주인은 보통 자리가 아닙니다. 마음대로 사치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자리도 아니죠. 가장 중요한 건 다음 왕이 될 아이를 낳는 것이지만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시작일 뿐이죠.
연산군을 낳았을 때 자기 자신은 국모에 왕실의 안주인으로 거듭났고 집안 역시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마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나도 달랐죠.
일단 성종의 마음이 너무 빨리 떠나버렸습니다. 아이까지 낳아 줬으니 자기만 바라보겠다 생각했던 걸까요? 성종은 그러기는 개뿔 바로 다른 후궁들이랑 놀아버립니다. 시기를 보면 그녀의 산후조리 중일 때로 보이구요. 아니 산후조리 중이라 다른 여자를 찾은 거겠죠.
이는 남편에 대한 서운함도 줬겠지만, 자신의 위치에 대한 위협도 됐을 겁니다. 아마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을지도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만, 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왕자 이효신이죠. 성종 6년 5월에 태어난 지 5개월만에 죽는데 되짚어보면 공혜왕후가 한창 아프거나 죽었을 무렵(5년 4월)에 임신한 겁니다. -_-; 이 양반 자기가 왕이 되는 배경이 된 마누라가 오늘내일 하는 가운데서도 후궁이랑 놀고 있었던 거예요. 자신은 물론 대비들도 허구헌날 찾아가서 걱정하고 여기저기 완쾌를 비는 상황에서 말이죠. 윤씨는 그 당사자였구요. 여자의 최대의 적은 여자? 뭐 그런 거겠죠.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중전이 될 수 있었던 건 후궁 중 1순위였던 것, 왕의 아이를 낳았고 또 배고 있었던 것, 성종의 애정, 대비들의 신뢰 등이었죠. 그 외의 힘은 없었습니다. 공혜왕후에게는 그 유명한 한명회가 있었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는 정희왕후의 족친이었습니다. 이런 빵빵한 배경이 그녀에게는 없었죠. 외척의 힘이 없다는 건 크게 보면 정말 좋은 케이스입니다만, 그녀에게는 그렇게 다가오지 않았겠죠.
성종 8년 2월, 원자가 창진에 걸립니다. 진짜 천연두였을지 그냥 피부병 정도였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를 위해 절까지 세우려 했으니 보통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한달 후, 첫 번째 폐비 논의가 시작되죠. 그 때 소용(정3품) 정씨는 아이를 배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만.
이런 점으로 보면 그녀가 받은 스트레스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왕의 애정은 떠나갔고, 아들은 아픈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불여시 같은 것들(-_-)이 왕을 둘러싸고 있었죠.
하지만 투기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제후의 예를 써 아홉명까지의 후궁은 허용했고, 왕은 대가 끊기면 안 되니 최대한 씨를 많이 퍼뜨리는 게 의무였습니다. 그리고 문무의 다른 취미가 허용되지 않은 성종에게 밤일은 유일하게 허용된, 아니 권장된 게임(-_-)이었습니다. 거기다 성종은 스무살로 한창 씽씽할 나이였죠.
투기의 방법 역시 문제였죠. 일단 성종에 대한 태도도 문제였지만 독약을 숨기고 저주를 거는 건 꽤나 컸습니다. 그것도 나라의 안주인이자 조선 유교사회 여자의 대표여야 할 그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니까요. 그녀 혼자 저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어미 신씨까지 관여한, 그녀의 집안이 동원된 것이었죠.
성종의 총애를 입고 그녀를 비방했다는 엄씨와 정씨, 전 솔직히 이들이 공격하는 입장이었을지도 의문입니다. 같은 후궁이었다가 왕비가 되고 집안도 잘나가지 않아서 뒷탈을 걱정할 필요가 적었다는 점은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상대는 중전이고 원자가 막 태어나서 권력이 한창 강할 무렵이니까요. 연산군이 아팠다지만 그 둘이 아들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정씨가 이제 임신한 상태였구요. 이후에도 이들이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는 움직임 같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설령 그게 있었다 하더라도 윤씨의 행동이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단지 그 둘의 참소 때문에 성종과 대비들이 변했을까, 그게 가장 큰 의문이죠.
세 명의 대비, 여기에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아랫사람들에게 너무도 엄격해 폭빈으로 불렸던 이였습니다. 조선왕조 중 가장 어려웠을 시월드입니다 (...) 열심히 해도 힘들 판에 이걸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아요. 대비들은 들은 얘기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보고 겪었던 얘기들을 꺼내며 윤씨를 폐하려 했죠. 윤씨는 검소하게 생활하고 현숙한 모습을 보여 이들의 마음을 샀지만 얼마 가지도 않아 실망을 안긴 겁니다. 정희왕후가 말한 "애초에 사람을 잘못 봤다"는 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큽니다.
"이년이 감히 내 아들을..."
특히 인수대비가 강조되는데, 야사에서는 부부싸움 중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손톱으로 긁어 그 이후 완전 빡쳤다고 전하고 있죠. 성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박시백 화백은 그녀에 대해 샴페인을 터뜨려도 너무 빨리 터뜨렸다고 평가합니다. 저도 여기 동감합니다. 단지 유교 사회의 왕비로 지켜야 되는 걸 못 했다는 그런 문제를 떠나서 궁 내의 정치 싸움에서도 그녀가 밀린 거예요. 왕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그의 마음을 붙들어놓아야 했고, 대비들을 어떻게든 자기편으로 잡아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했죠.
그녀가 아비를 일찍 여의고 집안이 가난했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이것이 궁중과 맞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고, 그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후궁 시절 이미 현숙한 여자 코스프레로 중전의 위치에 오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런 파워게임에 떠밀려 온 경우라면 온전히 피해자로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이상 패인을 논할 수밖에 없죠.
이후 그녀가 가진 힘의 가장 큰 원천이 될 것은 아들 연산군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산은 아직 너무 어린애였습니다. 그가 잘 클수록, 세자로 확실히 책봉될수록, 대비들이 늙어 죽어갈수록 그녀의 힘은 더 커질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죠. 수십년동안 숨 죽이고 기다리기는 너무나도 힘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단 몇 년이라도, 성종은 아니라도 대비들의 마음을 얻었어야 했습니다. 그게 안 됐죠.
차라리 보통 양반집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냥 후궁으로 남았다면 이런 결과까지 가진 않았겠죠. 야망이 있었든 그냥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었든 조선 사회는, 궁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왕과 대비들은 그걸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었구요. 그녀가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될 정도의 배경도 없었습니다. 있다면 단 하나 왕이 될 자식 뿐. 그게 좀 컸을 뿐, 그것도 무시하고 그녀를 쫓아내려 한다면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드시 4주 후에 뵙게 해야 하네"
신하들(?)은 이런 무너져가는 가족을 달래려 노력했지만, 결국 막지 못 했죠.
2년 후, 성종 10년에 폐비 논의가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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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사이가 좀 좋아지긴 한 건지 (정확한 때는 몰라도) 아들이 하나 더 태어납니다. 얘도 얼마 안 가 죽는 모양입니다만 -_-; 폐비될 때까지 죽진 않은 것 같습니다. 윤씨가 아프니까 신경써 준 기사도 있구요. 반면 윤씨가 세 대비에게 문안인사 드리는 걸 아랫것들에게 맡겼다는 기사와 그녀의 오빠 윤구가 토지에 관한 문제를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했다가 성종에게 욕 먹은 일이 있었죠.
그러다 성종 10년 6월 1일, 그녀의 생일날이 왔습니다. 이 날은 하례(축하 잔치-.-)를 하지 않았죠. 왕실이 검소함을 보인다든가 재해가 있다든가 누가 아프다든가 할 때 많이 하는 거고 성종도 여러 차례 자기 생일도 안 챙기긴 했습니다. 하지만 윤씨의 생일을 1차 폐출 논의가 있던 8년과 지금 두 차례 안 챙겼던 걸 보면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10년 6월 1일 이 날은 말이죠.
이 날 저녁, 성종은 야대(야간 공부 -_-;) 후 갑자기 승지를 불렀다가 중지합니다. 대신 정승들을 내일 이른 아침에 바로 입궐하라고 명령했죠. 해가 막 뜰 무렵 정승들이 들어왔고, 성종은 말을 쏟아냅니다.
"궁곤(궁중)의 일을 여러 경들에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이 매우 중대하므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승지들만으로는 얘기할 수 없는 큰 일이다, 생각 없이 갑자기 이러는 게 아니다, 부득이해서 그런 거다... 이렇게 말을 시작했죠.
"지금 중궁의 일은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간에는 시첩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예전에 중궁의 실덕이 심히 커서 일찍이 이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경들이 모두 다 불가하다고 말하였고, 나도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혹은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어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내가 집안을 못 다스린 건 맞는데 이런 여자에게 중임을 맡길 수 있겠는가? 후궁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이러는 거라면 천지와 조종이 모두 꾸짖을 거다, 옛날 광무제와 송 인종이 왕후를 폐할 때는 사소한 거였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 중전의 실덕(덕을 잃은 것)은 한 가지가 아니고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뒷날 후회해도 소용 없다.
그러면서 그는 칠거지악을 언급하죠. 자식은 있으니 해당사항 없었고, "말이 많으면 버린다" "순종하지 않으면 버린다" "질투를 하면 버린다"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폐출 얘기를 꺼내죠.
정창손과 한명회, 윤필상 등 대신들은 지금까지 들어온 게 있었던 건지, 말릴 수 없다는 걸 예측한 건지 동의합니다. 다만 한명회가 원자가 있는데 어쩌겠냐고 소극적인 반론을 꺼내죠. 반면 승지들은 제법 강하게 별궁으로 보낼 순 있어도 서인으로 강등하는 건 안 된다고 하죠. 깎더라도 빈으로 강등하자고 했구요. 대신들 역시 소극적이긴 했어도 사저로 보내는 건 반대했습니다. 이에 대한 성종의 반응은 너무도 차가웠습니다.
"어찌 별전을 새로 건립하겠는가? 정승들은 나가도록 하라.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단코 고칠 수가 없다"
그래도 제발 다시 생각하라는 말에 화를 내며 이렇게 말 합니다.
"경들이 물러나지 아니하면 내가 마땅히 안으로 들어가겠다"
성종은 얘기 다 끝났다며 밖으로 나가라 했고, 정승들은 나갔지만 홍귀달을 비롯한 승지 네 명은 계속 남다가 한참 있다가 나갑니다. 그리고 그 직후 윤씨는 다시 오지 못 할 길을 떠납니다. 왕비가 타는 가마 연이 아닌 소교(작은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간 것입니다.
승지들은 정말 아니다 싶어 다시 성종을 찾았고, 교서를 반포하고 대왕대비께 아뢰는 등의 절차가 있어야 된다며 시간이라도 끌려고 합니다. 최소한 별궁으로 보내는 것으로 합의보려 한 거겠죠. 하지만 성종은 이들을 옥에 가둡니다. 이런 건이 그의 시대에 얼마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하루만에 복직시켜 주긴 합니다만.
이걸로 끝은 아니었죠. 사간원과 사헌부가 몰려왔고, 홍문관에서도 와서 반대했고, 6조의 판서 참판들이 모두 와서 반대했고, 종친들도 와서 반대합니다. 하지만 성종은 모두 물리칩니다. 이어 이우보에게 종묘에 고할 글을 지으라 했지만 싫다 하여 옥에 가두었구요. 바로바로 교서를 지어 반포했고 종묘에도 알립니다.
단 하루만의 일이었습니다. 다음 날에도 대신과 대간들의 반대가 계속됐고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에 모두 옥에 가둬버립니다. 그런 성종의 분노가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건 6월 5일이었습니다. 여기서도 대신, 대간들이 단체로 몰려와 반대했고, 성종은 준비했던 말을 꺼냅니다. 꽤 길었죠.
"경들은 모두 다 나에게 대사를 가볍게 조처했다고 한다. 그러나 폐비를 내가 어찌 쉽게 했겠는가?"
그가 꺼낸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대비(아마 인수대비?)께서도 '내가 일찍이 화가 주상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하루도 안심을 못 해 가슴앓이가 생겼는데 이제 좀 나은 것 같다'고 하셨다."
"지난 정유년(8년)에 몰래 독약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이게 내게 먹인 건지 어찌 아는가? 반신불수로 만들거나 무자(無子)로 만드는 것 같이 사람을 해하는 방법을 적은 책이 그 때 발견돼 지금도 대비께서 가지고 있다. 엄씨와 정씨가 짜고 윤씨를 죽이려고 했다는 걸 거짓으로 쓴 것도 기억나지?"
+) 무자로 만든다는 게 성종을 향한 것 같진 않지만요. -_-a 그 책에 여자를 불임하게 만드는 게 적혀 있었으니 성종이 아닌 후궁들을 향한 거라 여겼겠죠.
"항상 나를 볼 때 얼굴 붉혔고, 혹은 나의 발자취를 '취하여 버리고자 한다'고 말했다. 한낱 나무꾼의 아내라도 지아비에게 저항하지 못 하는데 왕비가 임금에게 이러면 되겠는가? 또 '주상이 나의 뺨을 떄리니 두 아들 데리고 집에 갈랜다'는 내용의 거짓된 편지를 집에 보낸 것도 찾았다. 이 때 윤씨는 '거제나 요동이나 강계에 보내도 벌을 달게 받겠으며 무랑수불 앞에서 연비(불교에서 팔을 불로 지져 맹세하는 거)하여 맹세하겠다'고 했는데 이것도 다 구라였다."
"아침에 조회를 받는 날에는 비가 나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는데 조회 받고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일어났다. 이게 말이 되는가? 또 궁중에서 대신들의 집안일을 말하길 좋아했으니 내가 어찌 믿겠는가?"
+) 이건 좀 억지 -_-; 근데 신하들 집안일 말하는 건 문제 있죠.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설마 변이 있겠느냐만은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난을 만들어낼 거다. 경들 중 오래 살아서 이를 볼 자가 분명히 있을 게다!"
이렇게 성종은 말을 맺습니다. 그러자 정창손 등은 별궁에 안치하는 건 윤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원자와 대군을 위한 것이라고 하죠. 성종은 이렇게 말 합니다.
"비록 백 가지로 그대들이 말하더라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대비가 쓴 언문 교지를 보여줍니다. 대비들의 뜻 역시 마찬가지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죠. 거기서 나온 건 이렇습니다.
"왕비를 폐하는 교서에는 대체(적인 것)만을 말하고 그 연유를 다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대간들이 다투는 것인데, 주상의 본뜻이 어찌 우연함이겠는가? 부득이한 것이다. 만약 우연한 일이었다면 우리들이 그(윤씨)를 구하지 않았겠는가?
"중궁은 예전부터 주상의 명령을 거의 따르지 않았고, 내가 수렴청정하는 걸 보고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어하며 옛날 권력을 잡은 후비들의 일을 좋아했다."
"주상이 혹 아플 때는 꽃 핀 들에서 놀다가 지 몸이 아프면 기도하기를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 보여주기를 원하는 일이 있어서다'고 했다. 평소의 말이 늘 이와 같으니 우리들은 항상 두려워했다.
"만약 주상이 아플 때 독을 넣을까 두려워 방비하면서 그녀가 지나가는 길에는 음식을 두지 않도록 금했다. 왕비를 국모라 하나 원래는 평민일 뿐, 나라에서 높은 분은 임금 아니고 누구겠는가? 그런데도 늘 경멸하고 안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없게 했고 예전에 죄를 지었음에도 오히려 깽판을 치니, 지금 와서 난들 어찌하겠는가? 자식이 없어도 봐주고 싶었을 건데 원자도 있는데 생각 안 해 봤을까? 주상이 워낙 착해서 맨날 편 들어주고 꾸짖었는데도 들을 생각 안 했고, 우리도 심심하면 가르쳤는데도 고칠 가망이 안 보였는데?"
"평소에 종들이 죄를 지으면 '지금은 너를 죄 줄 수 없어도 나중에 반드시 가족을 멸할 것이다'고 했으니 이런 마음으로 원자를 가르칠 수 있을까? 이런 자를 원자와 떨어뜨려놔야 원자를 보전하고 기를 수 있을 게다."
"작년에는 주상을 '용렬한 무리'라고까지 했고 그 자취도 아울러 깎고자 해서 주상이 저렇게 나선 것이다. 원자가 가련하긴 하나 주상의 근심과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고 우리들의 마음도 놓이는 일이다."
"우리가 중궁의 불의한 일을 보면 늘 간곡히 타일렀지만 듣지 않았고, 그런 일을 할 때 우리 앞에서는 주상 핑계를 대고 주상이 뭐라 하면 우리 핑계를 댔다. 그 거짓된 짓을 행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음... 뭐 이 정도입니다. 마무리로 성종 8년의 일을 다시 꺼내긴 합니다만 생략 -_-a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죠. 하나는 역시 궁 내에 그녀의 편이 없었다는 것, 일거수일투족이 왕과 대비들에게 안 좋은 쪽으로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찍힌 상태에서 이미지가 좋아질 수가 없었죠.
남은 하나는 그 성종과 대비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 했다는 것이죠.
어쩌겠어요, 그 시대에 쌓아온 힘도 지켜줄 배경도 없는 그녀가 성종은 물론 대비들과 대결할 수 있었겠습니까? 방법은 다들 늙어죽고 아들이 왕이 되기까지 숨죽여 있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죠. 오히려 아들이 왕이 되면 복수하겠다는 식의 말들을 하고 정치에 은근히 간섭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습니다. 그녀의 힘은 원자 하나 뿐이었지만 그 힘을 너무 과신한 것이죠. 아직 너무도 어린애일 뿐이었는데 말이죠. 원자를 위해 화해하려 한 것일 뿐, 원자도 무시하고 내쫓으려 한다면 막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게 밀어붙였구요.
6월 1일과 2일 사이, 이 때 무슨 일이 터졌을 겁니다. 아마 성종이 대신들을 부르자마자 말 한, 궁녀와 놀고 있는데 윤씨가 쳐들어 온 그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부싸움을 한 건지 그대로 돌아간 건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게 됐겠죠. 성종이 이걸 노리고 있었을지 이렇게 된 김에 밀어붙이자였을진 모르겠습니다만.
이쯤되면 유교 논리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녀가 맘에 들고 안 들고에서 적용될진 몰라도 그녀가 폐출되는 부분에서는 그냥 쫓아내고 싶었던 것 뿐이죠. 고부갈등은 이걸 도운 것일 뿐, 기본적으로 부부의 갈등이었던 것었죠. 그리고 그 시대에 힘은 그녀에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서투른 야망은 있었을지 몰라도 그 힘을 흘려내고 아들이 왕이 되기까지 버틸 수 있는 능력이 없었죠. 오히려 성종의 화를 돋궜을 뿐.
인수대비는 떠나는 그녀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뭐 기본적으로야 '감히 우리 아들을' 이랬겠습니다만, 혹시 '인생은 실전이야 이년아' 하고 있었진 않았을까요? 인수대비는 왕비가 될 뻔하다 실패한 후 오랜 기다림과 운으로 그 자리에 올랐습니다. 아직 정희왕후가 죽지 않을 때니 그녀는 아직도 숨 죽이고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몇 년도 제대로 못 기다린 며느리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다음 편에서 장희빈이나 문정왕후 등과 비교해 보죠.
성종은 그녀를 내쫓은 후 외부와의 접근을 단절하게 합니다. 어머니와 같이 사는 건 허용하되 다른 가족들과도 접촉하지 못 하게 했죠. 그녀의 오빠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그 지방의 수령은 그걸 감시하게 했고 감시하지 못 할 경우 벌 주겠다 했습니다. 그의 분노가 이 정도였죠. 그리고 다음 해에 바로 정현왕후 윤씨를 중전으로 맞아들이면서 절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하지만 그녀를 쫓아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원자가 크고 있었습니다. 왕실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이건 큰 부담이었습니다. 특히 세자 책봉이 가까워 오면서 그녀의 존재가 더욱 커져 갔죠.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성종은 그 중 한 가지를 택했죠. 궁 내에서야 그녀의 가장 큰 힘이 된 게 아들이었지만, 이제 그 아들은 그녀의 목숨에 가장 큰 위협이 되게 됐습니다.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게시판으로 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2-05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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