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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기간동안 일시적으로 사용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017/05/13 00:37:10 |
Name |
snobbism |
Subject |
[일반] 19대 대통령 선거 투표사무원 후기 |
- 선게 닫히기 전에 쓰는 '선거' 후기입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글이 두서도 없을 것 같고, 그냥 재미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크크
- 한달 반 쯤 전에,
아는 선배가 대통령선거날에 일할 사람이 부족한 데 혹시 일해줄 수 있냐, 돈은 뭐 섭섭하지 않게 나온다. 고 해서
네? 하고 덥석 한다고 했습니다.
사실 1순위가 돈이었구요. (급전이 필요했습니다.)
2순위는, 뭐 모든 선거가 다 그렇지만 이번 대선은 특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보니,
그 현장에서 내가 일을 했다!는 자기만족도 될 것 같고 나중에 이야깃거리도 될 것 같고...
그리고 투표소에 오는 여러 유권자들의 인간 군상이 궁금했습니다 크크크
- 일한 시간은 05:00부터 08:30까지였습니다. 투표시간은 06:00부터 08:00인데 앞 뒤로 준비/정리하는 시간까지 포함된 시간이었죠.
잠들면 제시간에 못 갈 것 같아서 LOL 몇 판 하며 밤 샌 다음
새벽에 투표소 가니까 이미 전날에 선관위에서 필요한 자재, 기표소, 투표 동선 등을 다 세팅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투표 개시 전까지 오늘 할 일, 준수하여야 할 사항 등을 교육받고
공정하게 선거 사무를 보겠다는 선서도 했습니다. 선서하니까 확 실감이 나더라구요.
- 제가 맡은 일은 '투표사무원' 이었구요.
유권자가 들어오면
ⓛ 신분증과 투표번호를 확인한다.
② 신분증을 보면서 빠르게 실제 얼굴과 신분증에 있는 얼굴을 대조해서 동일인인지 확인한다.
③ 투표자명부에서 해당 투표번호 부분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신분증의 생년월일 이름과 대조해서 동일인인지 확인한다.
④ 이름 옆에 서명을 받는다.
⑤ 다음 단계인 투표용지 수령하는 곳으로 안내한다.
의 일을 했습니다.
두 명이서 하는데, 저는 예쁜 여자 공무원 분과 같이 일했습니다. 심심할 때 이야기도 나누고 어색하지는 않았어요 크크
보통 신분증-동일인 확인 절차를 한 명이서 하면, 서명 받는건 다른 한 명이서 하는 식으로 나눠서 했습니다.
다들 투표해 보셨으니 아실 거에요.
- 하루 동안 2000명이 제 앞에서 지나갔습니다.
이건 농담입니다만, 사람이 너무 몰릴 때는 투표율 낮아져라.. 라고 두어번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폰으로 투표율 확인하면서 사람이 몇 명 올것인지 가늠하고 그랬죠.
- 5:30부터 투표를 하기 위해 대기하는 분이 15분 정도 있었습니다.
6:00부터 13:00까지는 거의 사람이 끊임없이 몰려왔구요.
특히 어르신들께서 아침에 정말 많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13:00부터 17:00까지는 소강상태였습니다.
젊은 분들은 아침보다 오후에 더 많이 오셨구요.
17:00부터 18:00까지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나게 많이 몰리다가 그 뒤로는 또 소강상태.
종료시간 즈음해서는 다른 투표사무원이 투표소 밖에 더 오는 분이 있는지 없는지 계속 확인했는데요.
제가 있던 동네는 종료시간 임박해서 오는 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0 땡! 하자마자 바로 문을 잠그고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사무원과 참관인들이 자재 정리를 하는 동안 투표 관장하시는 분께서
투표자 명부와 투표함을 봉인처리하시고 선관위에서 온 차에 싣고 나서
모든 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 오후에 소강상태일 때는 다른 투표사무원께 양해를 구하고 건물 다른 사무실에 들어가서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40분쯤 자고 나오면 다른 분이 또 40분 자고 나오는 식으로...
새벽부터 나와서 계속 못 움직이고 있다 보니 다리에 쥐도 나고 다들 피곤해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비가 와서 날씨가 생각보다 엄청 추웠는데,
유권자분들 들어오시라고 문을 열어놓은 상태로 고정하고 있다 보니 엄청나게 추웠습니다. 진짜.
- 애로사항은 두 가지였습니다.
가장 큰 애로사항은, 신분증 사진과 얼굴이 너무 차이가 나는 경우..ㅜ였습니다.
① 20대 중반 여자분. 신분증사진은 100% 모든 공정을 끝마친 풀메이크업이었는데
그날은 아침에 자다 깨서 부은 얼굴 + 쌩얼 + 추리닝 이 상태로 오셨더라구요.
그런데 진짜 피부색부터 모든 게 실물과 사진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한 5초간 세 번은 본 것 같아요. 눈 계속 마주치니까 서로 민망했는데 내색은 못하는;;;
세 번째 보니까 콧날이라던지 입술 모양?에서 비로소 동일인이구나 싶어서 서명을 받았습니다.
② 20대 중~후반 남성분이었습니다.
10여 년 전 고등학교때 만든 민증을 그대로 들고 오셨는데
고등학교때 사진은 학생컷에 완전 모범생 스타일인데 지금은 수염 기르고 아프로 머리에다가 살도 완전 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응? 응? 응? 이러면서 세 번을 봤는데
본인도 민망했던지 웃으면서 본인 맞습니다 크크 이러고 운전면허증인가 추가로 꺼내셔서 그거 보고 통과시켜드렸습니다.
③ 80대 어르신 몇몇 분.
어르신 가운데는, 중병을 겪으셨던 모양인지 몇년 전 사진과 다르게 엄청나게 살이 빠진 분들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이 분들도 한눈에 동일인인지 파악하기 좀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분! 명! 히! 이름 세 글자를 정자체로 또박또박 써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간지나는 필체로 싸인을 하고 지나가버리시는 분들.
한 다섯 분 정도 있으셨던 것 같은데 좀 살짝 번거로웠습니다.
- 기분좋았던 건,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학생 자녀분들을 데리고 오는 부부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점입니다.
인증샷 찍으시거나 자녀분들 손등에 도장 찍어가는 걸 보면 학교 선생님이 투표소 갔다오라는 숙제를 내준 것 같기도 했고요.
그렇지만
"너네 투표소 구경시키려고 데려왔어 너네도 크면 투표하고 그렇게 될꺼야 일하시는 분들께 인사 잘하고 조용히 둘러봐야해 알았지?"
이러면서 자녀들 데려오는 부부 분들이 많았어요. 보면서 기분도 좋아지고 훈훈해졌습니다.
-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번 대선 투표소에서 일하면서 그 말이 실감났습니다.
저는 몇몇 나이많은 어르신께서 혹시나 자신의 정치성향을 강조하시면서 트러블도 생기고 그러는 건 아닐까 하고 좀 걱정했었는데,
투표라는 방법이 온건하게, 각자의 바람을 전달하고 반영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느껴지더라구요.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이 한 표씩 행사하여 민의가 수렴된다는 점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라서 그동안 실감을 못했었는데
15시간 동안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 기표소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피부에 확 와닿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좀 회의를 느꼈는데, 뭐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싶기도 했구요.
(그래도 아직까지 좋은 것인가...라고도 말은 못하겠네요 허허)
- 지루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꽤 재미있고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다들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은 해볼 만한 경험인 것 같아요.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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