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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3/21 20:40:17
Name 나주임
Subject [스타1] “낭만시대, 마지막 승부” 2세트 - 스타일리스트의 종말 (수정됨)
2005년 10월 21일 So1배 스타리그 A조 테란 임요환 대 프로토스 박지호 경기

프롤로그 가장 훌륭했던 스타리그 에버 -2004-(https://pgrer.net/free2/30308)
1세트 815,.. "근성“
2세트 네오포르테... “해법”
3세트 라이드오브발키리 “무리수”
4세트 알포인트 “타이밍”
5세트 다시 815 “무아지경”



#2세트 네오포르테 … “다양한 해법, 달라진 개념.”
임요환 테란 1시  Vs. 박지호 프로토스 11시
박지호 승

김태형 “개념이 달라졌어요. 테란이 나오지 않으면 계속 흔들어주는 겁니다.”


초반부터 임요환의 우세가 점쳐진다. 박지호를 만나기 전까지 네오포르테에서 8승 1패를 거뒀다. 그 승리 중에선 박지호를 잡은 전적도 있다. 박지호는 온게임넷 기준으로 3승 3패. 초라하다. 그러나 꼭 이맵 뿐이랴. 어차피 이 자리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들여다볼 만한 기록이 없던 선수다. 이 중요한 무대에서 지나간 승부는 모두 덧없다고, 무효라고, 그저 지금의 승부만이 있을 뿐이라고, 박지호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임요환은 이번에도 정석을 밟는다. 원 팩토리 더블 커맨드. 상대가 앞마당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은 꼼꼼하게 봉쇄한다. 빠르게 배를 불리면서 한 방 병력을 도모한다. 모든 게 공식대로다. 엄재경은 이렇게 짚었다. “임요환의 한 방 병력 타이밍에 정말 막기 어려울 겁니다.”

테란은 이내 팩토리를 늘려나간다. 최연성의 그림자가 어린다. 임요환은 지금 결점 없는 올라운더의 길을 걷고 있다. 자신만의 최적화 공식을 따르면 자연스럽게 이기게 된다는 것. 그게 새로운 시대 테란의 논리다. 한때 정찰과 게릴라의 명수였던 황제는 지금 상대의 흥망에 무심해 보인다. 역사속 제국이 그러하듯 격차를 과시하며 내 것을 관리하는 데 집중할 뿐이다. 상대가 커질 조짐을 보일 때에 맞춰 응징하러 나갈 것이다.

박지호의 판단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그가 시작하자마자 본진에 투 게이트웨이를 지은 건 수비를 의식해서다. 그 무렵 테란은 초반부터 병력을 끌고 상대 앞마당에 방어선을 빠르게 그어 버리는 방식으로 프로토스를 질식시켰다. 초반을 어떻게든 넘겨야 한다는 게 그 시대 프로토스들의 강박이었다. 더구나 상대방은 임요환이다. 황제는 초반에 더 강한 선수였다.

박지호의 정찰대가 굳게 닫힌 상대의 문 앞에 당도한다. 이 단단한 벽이 가진 의미는 명백하다. 임요환은 지금 아늑하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몸집을 키우고 있다. 박지호 보다 한 발 앞서 나가고 있다. 박지호가 병력들을 이끌고 문을 두드리지만 공략은 쉽지 않다. 지금 이 문을 뚫는 판단을 하지 않으면 확장이 늦는 박지호에게 게임은 불리해진다. 공격의 고삐를 쥘 것인가. 시작부터 승부처가 펼쳐질 것인가. 전장의 공기가 팽팽해진다.

‘지금은 아니다’ 박지호가 내린 판단이다. 그는 병력을 무른다. 격차를 인정하고 임요환의 뒤를 멀찍이 따라가는 쪽을 택한다. 상대는 지금 얼마나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일까. 첫 확장이 빠른 쪽이 다음 확장도 먼저다. 게다가 지금처럼 각자가 확장을 똑같이 나눠가지는 방식이라면 한 발 빨랐던 임요환에 진출 타이밍이 나올 것이다. 그 타이밍은 언제일까. 해설위원들은 “프로토스가 두 번째 멀티 확장에 나설 때”라고 예상한다. 그때 격차가 가장 크게 벌어지므로.  

점차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임요환은 여전히 자기 할 일만을 묵묵히 해내고 있다. 시간은 황제의 편이다. 신예에 불과한 프로토스는 맹수의 발자국을 뒤쫓으면서 숨을 죽인다.  어둠이 깔리면, 맹수의 시간이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길은 여전히 험하며, 닫혀 있다.

방법이라면 역시 뚫는 것이다. 박지호가 내민 카드는 속업 셔틀이다. 임요환의 앞마당 쪽으로 드라군 병력을 옮겨놓는다. 앞마당 언덕에 박지호의 게릴라가 진을 치고 북을 요란하게 울린다. 시선이 앞마당에 쏠린다. 탱크가 북소리가 나는 곳으로 이동한다. 코웃음도 나오지 않는 시시한 기습. 탱크의 포신이 앞마당 게릴라를 향해 불을 뿜는다.

그게 함정이었다는 사실이 이내 드러난다. 성동격서. 리버가 탄 셔틀은 따로 있다. 황제의 본진 쪽에 진짜 군세가 당도한다. 일꾼들이 쓰러지고, 마을이 불에 탄 것은 일순간이다. 그 노련한 황제가 빈틈을 보이다니, 박지호는 상대가 그리는 그림에서 벗어나서, 한없이 가벼운 행마로 적진을 휘젓는다. 첫 경기를 따낸 뒤 임하는 경기는 이 전체 판중에서 가장 부담없는 경기일 터였다. 그 무렵 긴장을 떨쳐낸 박지호는 무적이다.

박지호가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착수하는 테란식 최적화를 깨트리기 위해 내놓은 수는 ‘의외성’이다. 스타크래프트에도 신이 있다면, 아무리 견제와 강수와 모험수로 흔들어도 다 막아낼 터였다. 박지호는 현재 테란의 최적화가 신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최강의 존재가 나타날 순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약점은 있다. 다만, 외의성으로 상대방을 흔들기 위해선 판세를 빠르게 읽고, 흔들 곳을 정확히 짚어야 한다. 허장성세라도 주도권을 놓쳐선 안 된다. 그러려면 중압감에선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이 경기에선 그게 됐다.

당황한 황제가 병력을 앞으로 전진시킨다. 보다 빠르게 확장에 나서기 위해서다. 그러나 박지호는 벌어놓은 시간에 병력을 쌓아놓았다. 황제가 진출하자마자 무너진 둑에서 터져나오는 거센 물결이 쏟아져 내린다. 바로 프로토스 물량이다. 테란의 방어선이 순식간에 밀린다. 라인이 깨지자 그 다음부터는 속수무책이다. 박지호 특유의 비효율적인 전투였지만 이쯤 돼서는 아무래도 좋다.

승패는 이미 갈렸다. 그러나 황제는 승부 막판까지 경기를 붙잡고 있다.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뜻은 오직 황제만이 안다. 황제는 손을 마저 풀면서 반전의 단서를 치밀하게 수집하고 있었다. 게임을 마무리하려고 달려오다가 프로토스의 병력이 깨지고, 터지고, 불타 죽는다. 거기서 박지호의 조급증을 본다. 황제가 경기가 기울고도 한참 뒤에서야 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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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9일, 서울 강남구에 있는 블리자드코리아 사무실에서 초창기 배틀넷 최고 실력자였던 기욤 패트리를 만나서 예전 게임들을 하나하나 복기하면서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스타크래프트 관련 기록을 아카이빙하던 내겐 소중한 미팅이었다.

기욤 패트리가 자신의 아이디(Grrrr...)를 널리 알렸던 건 오리지널 때부터 초창기 최강자였던 질리어스(Zealias)와의 대결에서부터다. 둘의 대결에서 누가 이겼는지 묻자 회상에 젖던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맵별로 달랐어요. 섬맵이냐, 일반맵이냐에 따라서 달랐죠.”

프로토스 폭탄(Doom) 드랍의 창시자격으로 불리는 슈팅리버의 달인 질리어스는 섬맵의 최강자였고, 저그 물량 운영의 최고봉이었던 기욤은 일반 지상맵에서 더 많은 승리를 따냈다. 배틀넷 래더에서 섬맵의 활용도는 낮아졌고, 반대로 지상맵 비중이 높아지고 있었다. 패권은 자연스럽게 기욤의 것이었다. “히드라웨이브 전술을 제가 만들었죠.”

저그 실력자에서 프로토스를 기반으로 한 랜덤 유저로 전향한 그는 1999년 블리자드가 당시 최강자를 가리기 위해 개최한 최고 권위 대회인 블리자드월드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서 당대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는 한국으로 건너와 2000하나로통신배 투니버스 스타리그서도 우승하면서 국내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1년까지 기욤은 시대의 지배자였다.

기욤은 자기 시대를 끝낸 건 임요환이라고 기억했다. 임요환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고. 연습량과 전략, 손 빠르기 등 모든 면에서 다른 괴물의 출현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그 형은 남달랐어요. 제가 은퇴할 때가지 절대 넘어서지 못했어요. 전 뭐 별로 연습 안하고 이기는 게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나 어제 별로 연습 안했는데 이겼어’ 이렇게 말하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일부러 연습을 안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도 좀 연습 좀 할 걸 하고 후회하죠. 요환이 형은 엄청나게 연습했거든요……. 다른 느낌이었죠.”
  
기욤이 기억하듯 임요환은 한 시대의 경계를 뛰어넘어 도달한 새 시대의 상징이었다. 그는 게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몰두가 필요한 기예로 다뤄다. 기욤 등 1세대와는 다른 접근이었다. 1세대는 각자 자신이 고안한 특정한 전술이 얼마나 유효한지 검증하는 것에 몰두했다. 누군가가 교과서를 만들어내면, 다들 그 교과서를 따르는 획일성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서의 유일한 과제는 교과서의 개념을 누가 더 충실하게 실현하고, 재현하느냐였다. 저그 같으면 당시의 주도적 경향인 히드라웨이브를 누가 가장 잘 쓰느냐로 실력이 판가름났다.

그러나 임요환을 중심으로 한 바로 다음 세대는 이를 보다 유연한 스타일이라는 개념으로 확장했다. 그런 점에서 임요환은 스타판 최초의 스타일리스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타일리스트.

프로게이머에게 있어서 스타일이란 게임 운영에 있어 다른 선수와는 차별화되는 고유의 패턴과 전략의 선호를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점에서 프로게이머도 개성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여러 선택 가능성의 범주에서 자신만의 취향에 따라 전략적인 선택을 하고 유닛을 활용한다. 그점에서 스타일이 없는 프로게이머는 없다. 그러나 스타일리스트로 불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스타일리스트에게는 선수 고유의 스타일 외에도 추가의 단서가 붙는다. 스타일리스트는 게임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플레이에 담아낸다. 정해진 패턴을 누가 가장 잘 수행하느냐를 넘어서 경기 속에서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와 방향에 따라 수없이 패턴을 창조하는 이들이다. 경기 속에서 특정한 경향성을 또렷하게 드러내면서도 수많은 변수에 대응하며 스타일이 가진 유효성을 스스로 입증해내는 이들이다.

물론 그 스타일이 홀로 갇힌 놀이에 그쳐선 안 된다. 리그 전체 역사에도 남을 만한 결과까지도 만들어내며 그 성과로 스스로 우뚝해져야만 한다. 그런 이들에게만 스타일리스트라는 칭호가 붙는다.  

임요환이 그랬다. 소수 유닛 컨트롤 비중을 높였고, 견제와 난전이라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통해 게임의 양상을 바꿔놓았다. 그는 게임을 혼을 실어야 하는 기예로 다뤘다. 그는 한 번에 진출해서 밀고 나가는 초창기 교과서적인 전술에서 탈피했다. 그가 대신 드러낸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이었다.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익을 보는 전투를 했다. 작은 이익들이 모여서 게임의 큰 향배를 갈랐다. 임요환 이래로 시스템이 규정한 상성을 벗어난 전술과 컨트롤이 중요시 여겨지기 시작했다. 예컨대 마린의 천적인 럴커를 컨트롤으로 때려잡기 시작하면서 게임의 양상이 달라졌다. 새로운 스타일리스트의 등장으로 전투는 시스템이 부여한 상성 공식과 수식을 넘어섰다. 스타일리스트의 존재 덕분에 스타크래프트 리그는 저마다의 특징과 개성까지도 담아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게임 리그의 의미도 한층 달라졌다.

그를 기점으로 승부를 규정하는 것은 유닛 상성 등 시스템적 요소나 이미 기존에 정해진 빌드오더의 수행(상대의 반응이나 대처와 상관없이 초식의 이행을 최우선으로 두는)이 아니라, 선수의 판단과 선택으로 무게추가 옮겨졌다. 그 무수한 변수와 상황 속에서 판단의 경향성을 살피는 것이 관람의 묘미가 된다.  

게임 역사에서 큰 축인 엄재경 캐스터와 짧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스타리그가 인기를 끌게 된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무한도전처럼 마치 리얼버라이어티를 보는 재미랄까. 강한 캐릭터성을 가진 선수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그런 매력이 있죠.”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은 임요환이 본격적으로 열어젖힌 것이다. 그 이래로 스스로 창조해낸 패턴과 스타일로 승부를 결정짓는 선수의 매력이 부각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색을 가진 선수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스타일리스트로 부른다. 기억할 만한 이들이 적지 않다.

임요환 다음으론 이윤열이 떠오른다. 대저그전 소수 유닛을 이용한 견제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면서도, 기막힌 확장 타이밍과 물량으로 상대를 압도했다. 경기력의 핵심이 물량이라는 점을 일깨웠고 이는 이후 최연성에게 이어지면서 테란이 최강 종족으로 군림하는 서사를 써내려갔다.

저그 최초의 스타일리스트는 홍진호가 아닐까. 그 이전에도 봉준구라든가 강도경, 장진남 같은 저그를 잘 쓰는 선수가 있었다. 다만 이들은 저그 종족의 기본적인 확장 위주의 플레이를 통해 명성을 얻은 반면 홍진호는 쉼없는 공격을 통해 승부의 주도권을 쥐고 가는 쪽이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명확히 보여주며 스타가 됐고 또한 그 스타일이 확실한 승률을 보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일리스트라 부를 만 하다.

박성준이 이러한 스타일을 발전시켜 홍진호 선수가 극복하지 못한 기민한 테란의 운영을 봉쇄하면서 저그 최초의 우승까지 이끌어 낸다. 박성준과 홍진호 사이에 있는 박경락도 놓칠 수 없는 스타일리스트다. 삼지안이라는 별명답게 이리저리 드랍 병력을 내려놓으며 정신없이 몰아치는 전술로 상대를 넉다운시켰다. 온게임넷에서 세 번이나 연속으로 리그 4강안에 든 강자였다. 특별한 변주 없이도 자신의 색을 고수했고, 갈래드랍 스타일이 얼마나 강한지를 다른 선수들에게 납득시켰다. 저그의 후반 운영 방식을 새롭게 정립한 조용호도 스타일리스트다.

초창기 프로토스는 임성춘의 한방 스타일과 김동수의 하드코어 질럿러시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정석도 빼놓을 수 없다. 프로토스라는 종족이 소수 유닛의 효율을 통해 상대 종족을 꺾는다는 기존 개념에서 물량을 통해 상대를 제압한다는 식으로 프로토스의 페러다임 전환을 이끌어냈고 또 물량전의 유효함을 성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이미 타종족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던 프로토스는 저그, 테란과의 전투에서 만큼은 다시 우위에 서게 되었고 타종족에게는 발전을 강요하는 긴장감을 부여하게 됐다. 이러한 경향은 박지호와 오영종이 보다 진화시켰다.

다만 둘의 길은 달라서 박지호가 아비터를 재발견하는 방식으로 물량 중심의 힘싸움을 극단까지 밀어붙였다면, 오영종은 사신토스로 대표되는 찌르기와 캐리어 운영 등을 합하는 방향을 향했다. 오영종은 사신토스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다크템플러를 활용한 경기는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초창기 별명인 질럿 공장장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사신까지 활용할 줄 아는 올라운더를 지향했다는 해석이 더 바람직하다는 게 내 견해다. 오영종이 우승자임을 생각하면, 그의 올라운더 지향은 틀림없이 옳다.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게 박지호 쪽은 좀 더 고집스럽게 지상군 힘싸움 중심의 스타일리스트 영역에 남아 있었다.  

강민은 전성기 때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술로 유명했지만, 스타일리스트로서 그를 조명한다면 역시 수비형 토스의 전략적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프로토스 최초 병기인 프로브의 전술 가치를 극대화한 박용욱도 많은 팬이 따르는 스타일리스트였다. 결국 이 모든 걸 종합하면 김택용이 될 터다.

200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선 더 이상 임요환이 드랍십을 쓰던 시절의 그런 파격은 사라지고 더 이상 스타일리스트라 불릴 만한 선수도 없이 전형적인 운영을 고수하는 고만고만한 실력자들이 비슷한 경기를 만들어 내게 됐다. 평준화의 시대가 다가왔다. 그것은 누적 게임수가 늘어나면서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 최적화의 궁극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런 관점에선 게임의 진화일 것이다.

개인적으론 스타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 이러한 것들이 어느 시점에서 흐려졌다는 점에 몹시도 저릿한 감상을 느꼈다. 단순한 승부를 넘어서 자기 스타일의 유효성, 그리고 이는 누구보다 자신이 자신임을 고집스럽게 웅변해나가는 것은 어떤 기예나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이리라. 고작 게임 하나에? 아무렴. 그 승부사들은 필사의 승부 앞에서 비장감을 느끼곤 했으니까. 분명 그런 마음은 보는 사람에게도 스며든다.  

고수들에게 승부란 승패 이상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스타일리스트 시대의 게이머들은 상대와의 대결 속에서 스스로도 저마다의 스타일의 유효성을 검증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특정한 경향성이 어느 극단까지 흘러가는지 지켜보곤 했다.

그들조차도 자신의 스타일이 어떻게 맞수에 맞춰서 고양돼 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자시 자신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자신다움을 드러내는 어떤 긴 흐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혼신을 다했다. 스타일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그것의 설득이라는 측면에서 게임이란 승부를 넘어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자존심이자 자부심을 지켜내려는 싸움으로도 보였다. 어떤 면에선 그것은 자신을 응시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자신만이 가진 고집스러운 경향성. 그것이 승부라는 형태를 가지고 어디론가로 끝없이 흘어간다.  

그래서다. 각자가 서로에게 최선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적절한 맞수는 이 시대에 특히 더 중요했다.  그래야만 자신의 스타일이 극단까지 치달아 갈 테니까. 승부 속에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그점에서 스타일리스트의 경기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승패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임요환과 홍진호의 경기를 기대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요환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최적화라는 시대의 키워드를 받아들였다. (맞다. 또 한 번 벙커링 이야기다.)

여러모로 바둑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알파고 이래 바둑 또한 달라졌다고 한다. 바둑기사들은 이제 알파고라면 어떻게 두었을까를 고민한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도달점을 염두에 둔다. 상대를 압도하기 보다는, 실수를 하지 않는 기풍이다. 미세한 우위라도 한 번 차지한 뒤에는, 격차를 더 크게 벌이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역전을 내주지 않는 운영을 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수행, 악수도 정수도 될 수 있는 모험수 보다는 가파른 수보다 작은 실리를 챙기는 정수만을 그저 묵묵히 수행해낸다.

이는 달리 말해 최적화를 우선순위에 둔다는 말이다. 스타크래프트는 그 자체가 컴퓨팅이자 시스템적인 것일 뿐 아니라 바둑보다 더 빠르게 누적 경기수가 늘어났으므로, 알파고가 바둑에서 이끈 최적화라는 경향이 더 빠르게 적용된 것이리라.

스타크래프트에도 신이 있다면, 아마 알파고의 기풍과도 운영이 비슷하지 않을까. 견제에 휘둘리지 않는 데 집중하고, 실수없이 자신이 계획한 타임라인에 따라 차근차근 배를 불리며, 우위가 정해진 뒤에는 지체없이 나가서 라인을 긋는 것. 나 역시 이영호식 운영이 신과 가장 가까운 방식이라는 점에 이의는 없다. 이영호식 최적화는 이미 표준이 됐다. 정답은 존재하며, 다만 이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로 게이머의 수준이 갈린다.

즉, 한없이 정수에 가까운 운영을 향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최적화며 이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답을 주장했던 스타일리스트의 종말을 뜻한다. 관람 방식도 달라졌다. 스타일리스트의 시대엔 누군가가 어떤 새로운 해석을 들고 나왔느냐, 이는 얼마나 독창적이며 개성적인 것이냐, 얼마나 효과적이냐 등등을 살폈다. 최적화의 시대엔 누가 신이 그린 악보를 얼마나 완벽하게 쳐내느냐에 감상 포인트를 둔다. 예전엔 새로움에 전율했다면, 이제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실수를 하지 않을 때 감탄하게 됐다.  

그 지점에서 2005~2006년의 게임리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온게임넷, 엠비씨게임 스타리그들은 독특한 느낌이 있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서 스타일리스트들의 분전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땐 테란이 페이크더블, 즉 FD(Fake Double) 전략에 프로토스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는데, 가뜩이나 저그한테는 단 한 번 우위를 차지하지도 못하면서 언더독으로 몰린 프로토스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상당했다. 최적화에 대한 이해가 착착 쌓이던 테란과 저그에 비해 프로토스는 공식에 대한 정립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커세어 다수와 리버를 운용하는 수비형 토스라는 공식이 등장했으나, 이는 저그의 확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탁월한 감각으로 전투에서 실익을 낼 수 있는 강민 등 특정선수의 스타일로 굳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스타일리스트의 시대의 감성을 가장 마지막까지 보존하고 있었던 것도 프로토스였다.

온게임넷 스타리그도 그렇지만 2005~2006년 엠비씨게임 스타리그는 숫제 스타일리스트 강민과 저그식 최적화를 상징하는 마재윤과의 대결을 ‘성전’으로 부르면서 리그의 주요 테마로 잡을 정도였다. 프로토스를 주인공의 자리에 놓는 전쟁이었다.  

그러므로 스타일리스트가 올라운더를 넘어설 수 있느냐는 이 무렵 주요 스타리그 대회의 핵심 주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스타일리스트들은 전투에선 오히려 상대보다도 나았고, 몇몇 플레이들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올라운더를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최연성과 마재윤 등 올라운더들은 개별 전투에서 패할지언정 운영에선 끝내 승리했다. 큰 통에 물을 채워나가듯 스멀스멀 상대를 질식시켜 나갔다.

많은 이들이 스타일리스트의 침체를 바라보며 이들의 부활을 염원했다. 역설적이게도 So1스타리그에서 임요환에 대해 쏟아졌던 성원과 응원도 그 같은 맥락이었다. 상술했듯 임요환의 3연속 벙커링은 스타일리스트 시대의 종언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전 시대와의 단절과 이후로의 경향성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스타판 제1사건으로 불려야 한다는 게 내 견해다. 그럼에도 동시에 임요환은 여전히 이전 낭만 시대를 상징하는 위치에 놓여있었다. 그점이 역설적이다. 스타일리스트의 시대가 돌아오길 바라는 팬들은 임요환을 응원했다.

나는 그점에서 그를 뜻하는 황제라는 칭호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당시로선 혁명적인 스타일리스트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기계적인 착수에 집착했던 기존 공식을 깨버린 덕분에 황제는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혁명 정신을 부정하고 완벽하고도 기계적인 착수를 하는 무결점의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황제가 가는 길 앞에서 농성하는 이는 혁명적인 스타일리스트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예였다.

그는 황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무기를 꺼내들었다. 쏟아지는 물량이었다. 당초 저그유저였던 박지호는 김동수와 박정석에게서 영감을 받아 프로토스로 전향했다. 임요환의 라이벌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또 그 둘의 발전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돌이키건대 둘의 승부는 불가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무렵 그 시대에 스타일리스트 박지호는 어떤 생각으로 게임을 한 것일까. 프로토스의 강함을 증명하고,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꿈꿨던 것일까. 아니면 한 줄로 뛰어가는 질럿 스타일, 즉 스피릿을 통해서 관중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까. 자신의 스타일을 하나의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견지해나갔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엔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던 것도 틀림없다. 왜 거기에 몰두한 것일까.

“그저 제 게임을 한 거죠. 이렇게 하면 질 거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냥 한 거예요.”

박지호는 담담히 말했다. 2019년 4월 13일 그의 집 근처인 대전역 앞에서였다. 자신의 느낌에 의존해서 플레이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그것이 스타일의 본질을 담담히 암시한다. 스타일은 그 자신이다. 마치 호흡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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