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뇌세포'로 유명한 벨기에의 탐정 에르퀼 푸아로는 영국 런던으로 와달라는 사건 의뢰를 받고 터키 이스탄불에서 프랑스 칼레로 향하는 오리엔트 급행 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하지만 폭설로 인해 철로가 막힌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미국 출신의 부호 래채트가 열차 내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됩니다.
열차 진입이 막혀있는 탓에 밖으로 탈출한 승객도 외부에서 들어온 침입자도 없습니다. 열차안에 있던 사람은 피해자와 푸아로를 제외한 12명의 승객 뿐. 범인은 이 안에 있습니다.
의 시놉시스입니다.
크리스티 여사의 대표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열차 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추리 소설로, 최초로 클로즈드 서클을 활용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위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무인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그녀의 또다른 소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처럼 특정한 공간에서 내부인에 의한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을 '클로즈드 서클'이라 부릅니다.
다만, 영미권에서와 일본에서 사용되는 클로즈드 서클의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우선 영미권에서의 클로즈드 서클은 'Closed circle of suspects'로, 현장에 있는 한정된 숫자의 용의자들이 저마다의 범행 동기와 기회를 가지고 있으며, 외부인에 의한 범죄가 아닌 경우를 말합니다.
이는 사건의 진상이 독자가 예상할 수 없는 외부인에 의한 범죄가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한 일종의 약속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위 개념에 해당하는 작품의 예시를 들자면 작년에 개봉했던 라이언 존슨 감독의 영화 [나이브스 아웃]이 있습니다.
사건 발생 이후 출동한 탐정 브누아 블랑은 자유롭게 저택과 바깥을 오가며 수사를 진행하지만, 용의자는 저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작가 할런의 생일파티에 참여한 일가족과 고용인으로 한정되는 것이지요.
[나이브스 아웃](2019), 라이언 존슨 감독
반면 일본에서의 클로즈드 서클은 그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용의자의 수와 영역의 제한에 그쳤던 영미권과 달리 일본의 클로즈드 서클은 물리적인 고립 상황 역시 동반됩니다.
앞서 소개되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차와 무인도, 아야츠치 유키토의 소설 [십각관의 살인]에 등장하는 관처럼 공간의 이동이 제한되어있지요.
물리적 클로즈드 서클을 처음 만든 것이 애거서 크리스티였던 만큼 이는 영미권 소설에서도 많이 애용되었지만 그 유행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신선한 소재였지만 고립된 장소, 내부의 범인과 생존 경쟁, 최후의 추리와 결말이라는 클리셰가 정착된 탓에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클로즈드 서클은 특유의 긴장감을 유발하고 본격 추리의 환경을 완벽히 제공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장치였고, 일본에서 상대적으로 더 활발하게 창작되었습니다.
그덕에 [소년탐정 김전일]의 사신 김전일이 가는 곳마다 눈보라가 치고, 전화가 끊깁니다.
클로즈드 서클의 활용은 추리 게임에서도 이어집니다. 그 과정에서 작품의 개성을 위해 클로즈드 서클에도 다양한 배경과 설정을 부여하기 마련인데요.
탈출하기 위해선 직접 범인이 되어 타인을 죽여야만 하는 클로즈드 서클도,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탐정들만 모아놓은 클로즈드 서클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베리드 스타즈]의 클로즈드 서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베리드 스타즈], 2020년 7월 30일 출시, 가격: 54,800원(PS4, 닌텐도 스위치) / 39,800원(PS VIta)
[베리드 스타즈]와 클로즈드 서클 - 밀실보다 무서운 현실
베리드 스타즈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수일배의 첫 미스터리 어드벤처 [검은방 시리즈]를 잠깐 언급하고자 합니다.
4년에 걸쳐 완성된 EA 코리아의 검은방 4부작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었습니다.
법에 의해 처벌받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 죄인들을 밀실에 감금하는 전형적인 물리적 클로즈드 서클 양식을 따르고 있었죠.
그렇다면 검은방 시리즈로부터 10년이 지난 현재, 방을 나서고 도시를 지났던 그가 클로즈드 서클을 다시 들고 무대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일배(진승호) PD가 4시 33분에서 라인게임즈로 이직한 이후 개발한 베리드 스타즈는 일반인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베리드 스타즈'의 본선 생방송 도중 무대가 무너지는 사고로 인해 갇혀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주인공 한도윤을 포함한 다섯 명의 출연자와 일부 스텝진은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구조대를 기다려야 합니다.
무너진 건물로 인해 출구가 막혀버린 상황 자체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과 같지만, 베리드 스타즈의 무대는 여타 작품과는 확연한 차이점이 두드러집니다.
보안 유지를 위해 출연자들의 휴대폰을 반납했지만 방송 협찬을 위해 출연자에게 지급된 스마트 워치를 통해 외부와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전화는 버벅거리지만 인터넷은 잘 터지는 덕분에 무대 속 출연자들은 스마트 워치를 통해 게임 속 가상 SNS인 페이터 서비스를 통해 무대 밖의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스마트 워치를 통해 페이터에서 글을 보는 것도, 쓰는 것도 가능합니다
외부와의 차단은 기존의 클로즈드 서클 작품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습니다. 바깥으로부터의 구조를 막는 것과 더불어 남아있는 사람들의 고립감과 불안을 가중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쓰여진 1900년대 초중반만 하더라도 미디어의 발전은 미약했습니다. 가장 잘나가는 대중매체는 신문이었고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은 1936년에 시작되었으며, 스마트폰은 커녕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지요.
섬에 초대장을 받고 간 사람들의 지인들은 이들이 잠시 여행을 떠났다고 여겼을 뿐, 차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내부의 비명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파묻히는 것, 그것이 클로즈드 서클이 지닌 공포였습니다.
외진 곳에서의 벌어지는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드라마판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2015)
하지만 오늘날 대 SNS 시대에 더 이상 단절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먹는 것, 입는 것, 가는 곳 모든 것이 전국에 공유됩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소식 없음' 까지 또다른 소식이 되는 시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020년 게임(작중 배경은 2018년)인 베리드 스타즈는 이점을 외면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감하게 안고 들어갑니다. 구조대는 6시간만 기다리면 일행들을 구하러 진입하고, 그들의 상황은 SNS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매몰된 생존자들은 별 문제 없이 전국민의 응원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그러나 SNS는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자들의 마음을 더욱 흔들어놓고, 고립감을 강화하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베리드 스타즈에 출연하는 멤버들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방송이 만들어낸 캐릭터를 부여받았습니다.
개중에는 사실과는 다르게 왜곡된 캐릭터를 참는 사람도, 본연의 모습을 숨기고 새롭게 부여받은 캐릭터로 살고자 하는 사람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액정을 통해 이들의 모습을 보는 외부인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화면 너머로 보이는 그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러나 페이터를 위시한 SNS 공간에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저들끼리 끝없이 떠돌며 확대되고 재생산됩니다. 단편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재조립된 정보를 믿는(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에 있건, 어떻게 되었건 공격을 멈추지 않습니다.
베리드 스타즈의 서스펜스는 내부의 상황을 외부가 몰라준다는 것이 아닌, 외부에서 공공연하게 재확산시키는 불확실한 정보에서 발생합니다.
등장인물간의 갈등은 소통하라고 만들어놓은 페이터에서 발생하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진솔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내면의 이야기를 듣는 것입니다.
방송에서 거침 없는 발언을 일삼았던 오인하는 '싸가지'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녀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요?
여기에 서바이벌 오디션이라는 특수한 환경 역시 등장인물들을 더욱 압박합니다. 기존의 클로즈드 서클 작품에서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은 감금의 공포가 컸던 만큼 살아남았다는 안도를 느낍니다.
하지만 현실은 사건 종결 이후 책을 덮으면 끝나는 소설책이 아닙니다. 붕괴 사고에 휘말린 사람들은 일부 스태프를 제외하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출연자들입니다.
살아남으면 살아남을 수록 성공할 확률은 커지고, Top 5에서 그쳐버린다면 대중의 관심은 끊겨버릴 수도 있습니다.
생존 경쟁은 클로즈드 서클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클로즈드 서클이 소설과 게임 속에서나 일어나는 비현실적 설정이라면,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경쟁하는 우리의 모습은 픽션이 아닙니다.
공교롭게도 베리드 스타즈의 본선 투표는 계속 진행중이었고, 이 때문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투표를 독려하는 참가자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일단 살아남은' 이상 진정으로 걱정되는 것은 나간 이후의 일이니까요. 여러모로 밀실보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The show must go on
베리드 스타즈는 SNS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소재와 함께 기존 클로즈드 서클의 클리셰를 비틀며 변화한 사회와 어울리는 형태의 클로즈드 서클을 만들어냈습니다.
특히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까운 SNS 묘사에는 수일배 PD가 <회색도시2> 이후 4시 33분에서 퇴사하면서 겪었던 경험이 녹아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퇴사 소식이 SNS상에 퍼져나가고 그 주제를 두고 대립하는 다양한 의견들을 보며 굉장한 스릴(?)을 느꼈다고 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대를 읽어내는 이야기꾼 수일배의 차기작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인데요.
호평받은 스토리에 힘입어 불모지에 가까운 콘솔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한 베리드 스타즈는 현재 2020 대한민국 게임대상 본상 후보작에 등재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