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11/16 11:47:21
Name bongfka
Subject [일반] 나의 보드게임 제작 일지 ①
우리가 즐기는 게임들은 아시다시피 다 누군가에 의해 개발된 창작물입니다.
하지만 '보드게임 작가'라는 직업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사실 보드게임 자체도 우리나라에서 꽤 마이너한 시장인데 하물며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라니, 알려져 있는 게 더 이상하겠죠.

10여 년 전, 대학교를 휴학하고 이제는 추억의 이름이 된 MSL의 조연출로 일 할만큼 스덕이었던 저는, 양대 방송사가 문을 닫을 무렵 즈음부터는 보드게임 덕후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덕질의 끝판왕은 창작이라고 했던가요.
2017년부터는 보드게임 작가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이끌려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운 좋게 제가 개발에 참여한 보드게임들이 세상에 몇몇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게임은 자본 및 경험의 부족으로 만들지 못했었죠.
그러다 보드게임 작가로 활동한지 7년차가 되는 올해, 드디어 제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게임인 '축구 전술 보드게임'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간 업계에서 쌓은 경험과 이제는 정말 나다운 걸 해보고 싶다는 의지가 만나 이뤄낸 결과였죠.

기본적으로 이곳에 계신 분들은 지적 호기심이 많은 분들이고, 게임 및 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들이기에 그 제작 과정을 공유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약 2년에 걸쳐 틈틈이 기록한 제작기를 모아서 두 세 편 분량으로 연재해보고자 합니다.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글인지라 반말체로 작성된 점 양해 부탁드리며, 아무쪼록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축구 보드게임 제작기 ① 킥오프

축구 테마의 보드게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2020년 12월 쯤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평소 축구 게임(위닝, FM 등)을 좋아했고, 축구 경기 보는 것도 좋아했는데 
문득 '왜 보드게임 중엔 축구 게임이 없지?'하고 생각했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여러 보드게임 커뮤니티에서 '축구'를 키워드로 검색해봤다.
생각보다는 많은 축구 보드게임들이 있었지만 뭔가 조금씩 아쉬웠다.  
단순한 '알까기' 형태의 게임이거나, '축구 구단 운영'을 담아내느라 지나치게 복잡했다.

IJwjtYQ.jpg
'축구 보드게임'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장면 


축구 경기를 보다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때가 있다.

'저 선수는 빠르니까 측면에 배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지금쯤 수비수를 빼고 공격수를 투입해서 승부를 봐야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는 직업이 바로 축구 감독이고, 축구 감독을 체험하는 게임 중 최고봉으로는 '풋볼 매니저'라는 PC게임이 존재한다.
나도 한때 풋볼 매니저를 즐겨했지만, 진입장벽이 높고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다.

비교적 쉽게 즐길 수 있는 축구 게임으로는 '위닝 일레븐'이나 '피파' 시리즈가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소위 '피지컬'이 너무 중요해서 손놀림이 날렵하고 반응 속도가 빠르지 않으면 제대로 즐기기 어렵다.

나는 위닝과 풋볼 매니저 그 중간 어디쯤 되는 축구 게임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것도 보드게임이라는 형태로.

감독으로서 상대방과 전술 대결을 펼치는 느낌의 축구 게임이지만 너무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유치하지도 않았으면 했다.
내가 찾아본 바로는 아직 그런 포지션의 게임은 없었다.
 
양 팀이 똑같이 11명의 선수를 활용해 공방전을 펼치는 축구라는 스포츠는 사실 장기나 체스와도 많이 닮아있다.

어떤 말(선수)을 어떤 포지션에 둘 것인가,
어떤 말(선수)을 공격적으로 혹은 수비적으로 쓸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한수한수 쌓여서 승부를 만들어 간다.

실제로 자료 서치를 하다가 축구와 체스의 공통점을 다룬 외국 서적도 발견했다.
 
01FG1G0.jpg

체스도 보드게임의 일종이고, 체스와 축구가 이렇게 공통점이 많다면 축구를 충분히 전략 보드게임화 시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게임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이런 고민을 하게 하고 싶었다.

'선발 라인업에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를 각각 몇 명씩 배치하지?'
이를 통해,

-> 공격수가 많다면 골을 넣을 확률은 높아지지만 수비나 중원이 약해질 수 있다.
-> 미드필더를 늘리면 경기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안정적으로 운영을 할 수 있다.
등등의 다양한 선택지가 생기는 것이다.

경기 중에도,
'수비가 조금 불안하지만 지금 과감하게 공격을 시도하자'
'일단 수비적으로 운영하다가 기회를 봐서 강력한 공격 한방을 노리자'
와 같은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축구 게임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그림이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그래도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설레고 도전의식이 생겼다.

일단 각종 축구관련 자료, 서적, 전술 영상 등을 살펴보며 인사이트를 얻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보드게임에 녹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XTjpgHn.jpg

어느 정도 아이데이션을 거치면서 슬슬 게임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쯤 됐을 때는 구상을 멈추고 어설프게나마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직접 테스트해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어차피 머리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 잘 돌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직접 플레이 테스트를 해보며 문제점을 체감하고, 수정해나가는 과정이 훨씬 더 건설적이다.

축구 전략 보드게임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 제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길고 어려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축구 보드게임 제작기 ② 아이디어 빌드업 上

축구는 22명이 동시에 뛰는 스포츠다.
22명의 유기적인 움직임과 개성이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내는 실시간 승부의 향방을 어떻게 '보드게임'이라는 틀 안에서 표현할 수 있을까.

일단 첫 번째 원칙을 하나 세웠다.

"축구라는 피지컬적인 장르를 피지컬적으로 모사하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면, 어차피 축구를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연하게도) 직접 축구를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이 축구경기 직관이고, 그도 어려우면 리얼한 축구 비디오 게임을 즐긴다.
이런 더 좋은 옵션들이 있는데 굳이 보드게임을 통해 현실 축구의 '피지컬적인 생동감'을 구현하려 노력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구를 피지컬적으로 모사한 대표적인 예시는 손가락 등으로 축구공을 튕겨 알까기 하듯 슈팅을 하는 류의 게임들일 것이다.  
이는 분명 피지컬적으로 축구와 가장 유사한 형태의 보드게임이다.
하지만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고, 심장이 터지는 듯한 흥분을 주는 진짜 축구와 비교했을 때는 어차피 상대가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축구와 '피지컬적으로 비슷한' 무언가를 구현하려 애쓰기보다는 차라리 보드게임만이 줄 수 있는 '정적인 재미'가 살아있는, 결이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단 축구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 그 중에서도 승부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를 추려봤다.

1) 선수의 능력 2) 감독의 전술

이 두 가지가 가장 핵심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저 두 가지 요소를 '게임 구성물'로 만들고, 플레이어로 하여금 그 구성물들을 조합해 플레이할 수 있도록 규칙을 정하는 것이었다.

먼저 '선수의 능력'을 게임 구성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역시 카드의 형태가 가장 적합해 보였다.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등의 선수카드가 존재하고, 각 선수별 능력치가 부여되는 형태는 여느 비디오 게임 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데이터 폼이다. 고민해야 될 것은 어떤 항목의 능력치를 몇 종류나, 어떤 척도로 표현할 것이냐였다.
종류가 너무 많으면 복잡할 수 있어서 일단 간단하게 설정해보기로 했다.

공격 / 드리블 / 패스 / 수비

하지만 선수가 단순히 '능력 수치'로만 표현되면 개성이 없고 밋밋할 것 같았다.
선수별 '특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들도 몇 가지 설정해서 카드에 넣어줬다.

OORxye2.jpg
최초의 선수 카드 프로토타입

이렇게 프로토타입을 만들 때는 사실 미적인 측면의 디자인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저 카드들은 수정될 수밖에 없다는 게 너무 명확하기 때문이다.
(디자인적으로는 물론, 수치, 밸런스, 내용적으로 모두 다)

하지만 프로토타입을 만들다보면, 어느 샌가 욕심이 생겨서 디자인에 공을 들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너무 많은 시간을 들이면 곤란하지만 나름 그 과정 자체도 재미가 있고, 본의 아니게 포토샵 실력도 많이 늘게 됐다.

초상권 때문에 실제 게임에 사용하지는 못하겠지만, 테스트하는 동안이라도 몰입감을 높이고 싶어서 실제 선수들 이미지도 넣어봤다.
능력치의 종류도 늘어났고, 포지션도 그래픽으로 표현했다.

Gv8Bjc8.jpg
 처음보다 조금 더 업그레이드 된 선수 카드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선수 카드들을 가지고 플레이어가 뭘 하느냐였다.
아까 이야기했던 축구의 두 번째 핵심 요소 '감독의 전술'을 게임으로 구현할 차례였다.

다음 편에 계속...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비카리오
23/11/16 11:52
수정 아이콘
와 재밌습니다. 저는 상상으로만 했던걸 직접보니 멋지네요. 다음편 기다립니다!
코리엠
23/11/16 11:59
수정 아이콘
우와 진짜 멋지네요.
바둑아위험해
23/11/16 12:03
수정 아이콘
엄청납니다.
저도 몇 개 아이디어 작품이 있어 제안서를 만들어 보드게임 회사에 문 두드려 봤지만 쉽지 않았는데 멋있어요.

부럽습니다 :D
23/11/16 12:22
수정 아이콘
맞아요. 보드게임 회사(특히 우리나라)는 시장 규모가 작은 만큼 확실한 수익이 보장되지 않을 것 같은 아이템이면 거의 출판해주지 않더라구요. 축구 게임도 같은 이유로 거절당했었고 그래서 직접 제작을 하게 됐다는..
Asterios
23/11/16 12:12
수정 아이콘
아마 지금 제가 펀딩 들어간 게임인 것 같은데, 피지알러이신 줄은 몰랐네요 흐흐흐
기대 많이 하고 있습니다. 보드게임 페스타에서도 꼭 해보고 싶네요!
23/11/16 12:20
수정 아이콘
앗 반갑습니다! 여기엔 홍보글 쓰긴 좀 그래서 제작기를 남겨보려고 합니다. 페스타때 오시게 되면 인사주세요~
23/11/16 13:16
수정 아이콘
안그래도 이번 주에 페스타 가보려고 하는데 가면 뵐 수 있겠네요!
이민들레
23/11/16 14:11
수정 아이콘
와우 응원합니다!!!
똥꼬쪼으기
23/11/16 14:20
수정 아이콘
후기 기다리겠습니다.
펀딩하고 있는 게임도 궁금하네요. 어디서 펀딩하는지요?
23/11/16 15:51
수정 아이콘
https://www.tumblbug.com/magicnumber11

제가 대신...크크

게임도 제작기도 흥미진진.
알카즈네
23/11/16 14:32
수정 아이콘
보드라이프에서 해당 게임 펀딩 페이지를 봤었는데 작가 분이 여기 계셨었군요.
23/11/16 15:01
수정 아이콘
저도 저희 반에서 하는 용도로 보드게임을 하나 만들었는데 어떤 식으로 제작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네요
PARANDAL
23/11/16 18:11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보드게임을 오래 좋아했어서 언젠가 제작도 해보고 싶었는데.. 다음글 기다리겠습니다!
이러다가는다죽어
23/11/16 18:20
수정 아이콘
피쟐엔 참 별 사람들이 다있어요...(긍정적으로)
23/11/17 01:56
수정 아이콘
헐 저도 이번주 토요일 세텍 가려고 했는데 혹시 어느 부스 찾아가야 될까요?
23/11/17 10:32
수정 아이콘
넵 3 전시관에 작가존을 찾아오시면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0269 [일반] 엄마 아파? 밴드 붙여 [18] 사랑해 Ji10602 23/11/16 10602 166
100267 [일반] 나의 보드게임 제작 일지 ① [16] bongfka9058 23/11/16 9058 11
100266 [일반] 프리우스 5세대 출시일, 가격발표 [49] 겨울삼각형11876 23/11/16 11876 3
100265 [일반] 남자 아이가 빗속에 울고 있었다 [20] 칭찬합시다.11170 23/11/15 11170 64
100264 [일반] 뉴욕타임스 11. 6. 일자 기사 번역(전쟁으로 파괴된 군인들) [12] 오후2시9280 23/11/15 9280 8
100263 [일반] [역사] 덴푸라의 시작은 로마?! / 튀김의 역사 [19] Fig.110658 23/11/15 10658 28
100261 [일반] 프로젝트 헤일메리: 하드 SF와 과학적 핍진성의 밸런스 게임 [34] cheme11994 23/11/14 11994 26
100259 [일반] 행복은 유전인가 [21] realwealth10647 23/11/14 10647 9
100258 [일반] 멍멍이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시츄) [52] 빵pro점쟁이10443 23/11/14 10443 54
100252 [일반] 요즘에는 포경수술을 정말 안하나봅니다. [108] 설탕가루인형형16647 23/11/13 16647 3
100249 [일반] 24년에 나오는 애니 던전밥은 트리거 역대 1,2번째 노려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42] 그때가언제라도9012 23/11/13 9012 2
100248 [일반] 1350명 앞에서 원톱 센터 맡고 노래하기 [24] SAS Tony Parker 13067 23/11/13 13067 5
100247 [일반]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까?_6.도덕성이 경쟁력인가 [7] realwealth9297 23/11/12 9297 4
100245 [일반] 술 먹고나서 쓰는 잡설 [25] 푸끆이9340 23/11/12 9340 14
100244 [일반] '최후의 질문' 다시 생각하기 [35] cheme11927 23/11/12 11927 37
100242 [일반] [팝송] 댄 앤 셰이 새 앨범 "Bigger Houses" [1] 김치찌개5746 23/11/12 5746 1
100241 [일반] 우주해적 코브라 마츠자키 시게루의 노래들 [7] 라쇼8523 23/11/11 8523 5
100240 [일반] 마블 영화의 인기가 시들어가고 있다 <더 마블스> [68] rclay15580 23/11/11 15580 9
100239 [일반] 서울영동교회 소식 외..모아보는 개신교 소식 [11] SAS Tony Parker 11169 23/11/10 11169 1
100238 [일반] [독서에세이] 과학기술로 신이 될 사람 (下편): 마리의 춤 [2] 두괴즐6977 23/11/10 6977 5
100237 [일반] [독서에세이] 과학기술로 신이 될 사람 (上편): 「로라」 [2] 두괴즐6420 23/11/10 6420 4
100236 [일반] 삭센다 1년 사용 후기 [49] 카미트리아17617 23/11/10 17617 13
100235 [일반] [주식] 요즘 아는 사람끼리는 핫한 기업 [73] 김유라16832 23/11/10 1683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