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4/06/14 06:27:33
Name 계층방정
Link #1 https://brunch.co.kr/@wgmagazine/29
Subject [일반] 왕비(妃), 배(配)달, 비(肥)만의 공통점은? - 妃, 配, 肥 이야기

지난 글, 半(반 반)에서 파생된 글자들의 마무리를 맡은 글자는 胖(살찔 반)이었다. 중국어로 비만을 비반(肥胖)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비(肥)의 자원은 무엇일까?

얼핏 보면 고기 육(肉)이 뜻을 나타내고 꼬리 파(巴)가 뜻을 나타내는 형성자 같으나, 肥의 옛 모양을 보면 이는 착각임을 알 수 있다.

666ae8951389d.png?imgSeq=26461

왼쪽부터 비(肥)의 금문, 소전. 출처: 小學堂

肥의 오른쪽 부분이 巴가 아니다. 이건 병부 절(卩)이다. 그러므로 肥는 肉과 卩이 합한 글자다. 卩은 병부라는 뜻도 있지만 꿇어 엎드린 사람을 그린 글자기도 하다. 시라카와 시즈카는 꿇어 엎드린 사람의 허벅지를 가리키는 데에서 肥가 살찌다는 뜻이 나왔다고 해석했다. 이대로라면 肥는 형성자가 아니라 회의자다.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肥가 들어가는 요렇게 생긴 한자가 있다.

666ae9d2e11c4.png?imgSeq=26462

위에는 肥, 아래에는 女(여자 녀)가 들어가 있는 이 한자는 妃(왕비 비)의 다른 형태다. 자기 기(己) 대신 肥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이 부분이 소리를 나타내는 부분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혹시 妃에서 己도 肥처럼 卩이 잘못 쓰인 것이 아닐까?

이에는 두 가지 대립하는 의견이 있다. 이는 妃의 갑골문으로 보는 글자에 두 가지 다른 형태가 있기 때문이다.

666aeb69ccfab.gif?imgSeq=26463 

왕비 비의 갑골문 1. 출처: 甲骨文硏究网

5983-1242618783.jpg

왕비 비의 갑골문 2. 출처: 漢語多功能字庫

갑골문 1은 子(아들 자)+女로 볼 수도 있고 巳(뱀 사)+女로 볼 수도 있는데, 子+女면 好(좋을 호)고 巳+女가 妃에 해당한다. 巳는 뱀 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태아의 형태다.

갑골문 2는 女+卩로, 肥(살찔 비)의 옛 형태와 같이 卩이 들어간다. 이 의견대로라면 卩이 肥와 妃에서 비슷한 구성 요소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의견에 힘을 더 실을 수 있는 이유는 妃와 음과 뜻이 비슷한 配(나눌/짝 배)가 있기 때문이다. 配의 갑골문과 금문은 아래와 같다.

666aedb32f143.png?imgSeq=26464

왼쪽부터 나눌 배(配)의 갑골문과 금문. 출처: 小學堂

配의 갑골문은 술항아리를 뜻하는 酉(닭 유)+卩의 형태이나, 금문에서 卩이 己로 와전되어 지금의 자형이 되었다. 따라서 妃 역시 女+卩이었다가 지금의 女+己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妃, 肥, 配의 옛 형태를 검토해 본 결과 세 글자 모두 예전에는 女+卩, 肉+卩, 酉+卩로 썼었다. 그리고 음도 비, 비, 배로 비슷하며, 이 세 글자의 상고음도 마찬가지로 비슷하다. 卩의 한자 음이 옛날에는 사실 비나 배였던 것은 아닐까?

《시경·동문지선》에서는 밤 률(栗)·집 실(室)·곧 즉(卽)을 같은 라임으로 썼고 곧 즉은 병부 절(卩)이 소리인 한자다. 그러므로 卩의 소리는 률·실과 같이 지금의 -l, 고중세 중국어로는 -t에 해당한다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다. 한자 중에는 가끔 한 형태가 두 개의 다른 음을 가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卩의 음이 절이라고 비나 배가 꼭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사정이 있기 때문에 卩에 다른 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일설에는 配나 肥 등에 들어가는 卩은 妃의 간략형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는 포지도(布之道)의 《광운형성고》(廣韻形聲考)에서는 옛 卩에는 PƏI라는 독음이 있다고 하기도 했다. '配、妃为什么是「己」声?'라는 블로그 글에서는 卩이 服(복종할 복)의 일부분으로서 服에서 소리를 가져와 배, 비 등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중국의 문자학자 추 시구이는 妃는 무릎 꿇은 남자(卩)와 여자(女)가 같이 앉아 짝을 나타내는 것이고 여기에서 왕비라는 뜻이 파생되었다고 해석했다.

아직까지는 수수께끼 같은 점이 있기는 하나, 妃, 肥, 配 그리고 圮(무너질 비) 네 글자는 卩이 와전된 글자(己, 巴)를 공유하고 소리가 비·배로 비슷하기 때문에 卩이 '비'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형성자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配는 술항아리에서 사람이 술을 '나눈다'라 할 수 있고, 肥는 살이 서로 짝지어 붙어 '살찌다'라고 해볼 수도 있겠다.

이제 卩에서 파생되며 '비'나 '배' 음을 공유하는 한자들을 정리해 보자.

圮(무너질 비) - 퇴비(頹圮) 등, 어문회 특급

妃(왕비 비) - 비빈(妃嬪), 왕비(王妃) 등, 어문회 준3급

肥(살찔 비) - 비만(肥滿), 퇴비(堆肥) 등, 어문회 준3급

配(나눌/짝 배) - 배달(配達), 교배(交配) 등, 어문회 준4급

그리고 肥에서 파생된 글자도 있다. 급수 외 한자지만 국어사전에 당당히 올라가 있다.

淝(물이름 비): 동비하(東淝河 - 옛 이름 비수), 비수 싸움(淝水-) - 급수 외

666b5f29c1971.png?imgSeq=26465卩(병부 절/비?)에서 파생된 한자들.

요약

妃(왕비 비)·肥(살찔 비)·配(나눌/짝 배)·圮(무너질 비)에 들어가는 己나 巴는 실은 卩(병부 절)이었다.

따라서 卩에는 '비'나 '배' 음이 있었거나, 그런 한자의 생략형으로 쓰였을 수 있다.

卩에서 圮(무너질 비)·妃(왕비 비)·肥(살찔 비)·配(나눌/짝 배)가, 肥에서 淝(물이름 비)가 파생되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MurghMakhani
24/06/14 09:32
수정 아이콘
제목을 배달비 만원으로 읽어버린 걸 보니 전 지금 배가 고픈 게 분명합니다. 아침을 거르면 이게 쉽지 않더라구요

아무쪼록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흐흐
계층방정
24/06/15 06:17
수정 아이콘
아침에 배가 많이 고프셨군요!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4/06/14 09:38
수정 아이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배우고 갑니다.
계층방정
24/06/15 06:18
수정 아이콘
항상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4/06/14 19:52
수정 아이콘
오 왕비 비의 다른형태 굉장히 신기하게 생겼네요 크크 잘 봤습니다
계층방정
24/06/15 06:18
수정 아이콘
그렇죠? 저도 우연히 알게 된 글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절충절충
24/06/16 12:36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도 기다리겠습니다.
계층방정
24/06/17 12:4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다음 글도 재미있게 쓸게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1725 [일반] 대충 우리집 딸기 자랑하는글 [28] 김아무개8687 24/06/19 8687 22
101724 [일반] 맥주쏟고 가게 망하게 하겠다고 행패부린 공무원 근황 [39] Leeka13951 24/06/19 13951 0
101723 [정치] 공무원은 다른 사람의 정보를 무단열람해도 죄가 아닙니다 [26] VictoryFood12048 24/06/18 12048 0
101722 [정치] 6/19 12사단 훈련병, 시민 추모분향소 운영 + 어머님 편지 공개 [53] 일신10210 24/06/18 10210 0
101721 [일반] TSMC 3nm 스냅드래곤 8 4세대 25%~30% 인상 전망, 갤럭시 S25 울트라 가격 상승 가능 [29] SAS Tony Parker 9805 24/06/18 9805 2
101720 [일반] 박세리 기자회견 : 골프가 내 꿈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다른 사람 꿈이였다 [49] Leeka15976 24/06/18 15976 23
101719 [일반] 己(몸 기)에서 파생된 한자들 - 벼리, 일어남, 기록 등 [12] 계층방정6707 24/06/18 6707 9
101718 [일반] 2024년 방콕 중심지 지도 업데이트 [30] 쿠릭12975 24/06/18 12975 44
101717 [일반] [역사] 예나 지금이나 같은 킥보드 문제 / 전동 킥보드의 역사 [17] Fig.18344 24/06/17 8344 12
101716 [일반] 사이코패스 엄인숙 [18] 핑크솔져12332 24/06/17 12332 0
101715 [일반] "임용도 안 된 게'…기간제 교사 물에 담그고 넘어뜨린 남학생 [90] Leeka15274 24/06/17 15274 16
101714 [일반] [단독] 연돈볼카츠 점주들 “백종원은 마이너스의 손”…공정위 신고 [128] Leeka18288 24/06/17 18288 6
101713 [정치] 선진국엔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가 없다는 한경협 : 선동과 날조로 당당히 승부하자 [41] 사람되고싶다10851 24/06/17 10851 1
101712 [정치] '월성원전 감사 방해' 산업부 전 공무원들 무죄 확정 [96] 베라히12890 24/06/17 12890 0
101711 [일반] <포트레이트 인 재즈> 읽고 잡담. [3] aDayInTheLife6979 24/06/16 6979 4
101710 [일반] 장롱면허 레이 운전 분투기(3시간) [82] 사람되고싶다10779 24/06/16 10779 15
101709 [정치] 특이점이 와버린 선방위 [18] CV11522 24/06/16 11522 0
101708 [일반] 요즘 심상치 않은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사고들 [48] SAS Tony Parker 14253 24/06/16 14253 3
101707 [일반] [팝송] 두아 리파 새 앨범 "Radical Optimism" [14] 김치찌개8577 24/06/16 8577 1
101706 [일반] 대한민국은 우생학의 실험실인가? '인적 자본'의 허구성 [73] 고무닦이14569 24/06/15 14569 26
101705 [일반] [서평]《기억의 뇌과학》 - 기억하고 잊는 인간에게 건네는 뇌의 따스한 소개 [4] 계층방정7110 24/06/15 7110 4
101704 [일반] <인사이드 아웃 2> - 다채로운 '나'를 완성하는 과정.(약스포) [38] aDayInTheLife8681 24/06/15 8681 11
101703 [일반] 자작소설) [씨육수]1 [4] 프뤼륑뤼륑6649 24/06/15 6649 9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