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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3/07 15:38:30
Name 두괴즐
Link #1 https://tobe.aladin.co.kr/n/322175
Subject [일반] [에세이] 아빠의 잃어버린 손가락 (사이보그가 되다)
[독서 에세이] 사이보그 아닌 아빠 (『사이보그가 되다』)
-차이와 더불어 함께 살아갈 기술


<1> 아빠의 잃어버린 손가락

그날은 오전 수업만 있는 1990년대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곧 여름방학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함께 하교하던 친구는 자기 집에 아무도 없다며 우리집에 놀러가도 되냐고 물었다. 물론 좋다고 했다.

친구와 함께 가게에 들러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가정집으로 들어갔다. 가자마자 물었다.

“너희 아빠 손이 왜 그래?”

우리 아빠는 오른손 손가락이 발가락 같다. 도토리를 빻는 기계가 먹어버렸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랬구나 했고, 또 신기하다고도 했다. 나는 매일 봤기에 잘 몰랐고 부모님이 사정을 딱히 말해주시지도 않았기에 더 몰랐다.

아빠의 잃어버린 손가락은 이따금씩 규율의 계기가 됐다.

내가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때, 받아쓰기를 엉망으로 하고 왔을 때 혹은 동생을 챙기지 않고 놀러갔을 때와 같은 상황에서다. 엄마는 학생으로서, 맏이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말씀하셨고, 자신들의 수고를 모르냐고 물으셨다. 모를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매번 다짐했다.

하지만 그 격한 다짐은 놀랍게도 유통기한이 있었고, 그 마저도 길지 못했다. 실수와 위반은 반복됐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에는 없어진 손가락이 등장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손가락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지만, 아빠의 손은 내게 나침반이 되었다.


<2> 사이보그 아빠

한 날은 옆집 가게 아저씨네와 함께 볼링을 치러갔다. 아빠는 오른손잡이지만, 남은 손가락이 얼마 없기에 왼손으로 쳐야했다. 그리 못하신 건 아니지만, 가끔 도랑(거터)에 빠졌다. 이를 본 스트라이크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너네 아빠가 너네 먹여 살리겠다고 손도 해먹고 저래 일했다. 보니까 앞으로는 기술이 좋아져서 로보트 손인가도 할 수 있게 된다던데, 너네가 해줘야 한다, 알겠지?”

그때부터 생각했었나, 사이보그 아빠를.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아저씨도 그리 진지하게 말씀하신 건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그럼에도 불효가 땔감이 됐다. 다짐은 늘 배신과 붙어 다녔고, 십 대의 뇌는 값싼 도파민의 유혹에 취약했다. 사이보그 아빠는 그렇게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아저씨의 예언은 적중해서 하반신 불구였던 소년이 로봇의 힘으로 2014년 브라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시축을 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한 공학자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사이보그가 되려는 도전 길에 올랐다. 이제 과학기술은 장애인을 구원할 천국 열쇠가 됐다. 그러니 우리 아빠의 잃어버린 손가락도 다시 자라나서 장애의 삶에서 벗어나리라.


<3> 내 손이 어때서?

‘친구야, 우리 아빠도 이제 정상인이 될 거야.’
‘아저씨, 아빠가 오른손으로 볼링 게임을 하면 스트라이크를 많이 칠거예요.’

그런 생각으로 살던 어느 날이었다. 아빠의 친구가 아빠에게 물었다. “이제 손 고칠 수 있지 않나? 계속 그렇게 살 거야?” 아빠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가 다시 물었다. “아니, 그 오른손 말이야.” 그제야 아빠는 대답하셨다.

“응? 내 손이 어때서?”

아버지의 손가락이 도토리 기계에게 먹힌 것은 아버지 나이 서른이 되어 갈 즈음이었다. 이제 아버지는 칠순 잔치를 앞두고 있다. 그러니 발가락 된 손가락과 함께 산 세월이 더 길다. 아버지는 지금 손이 자신의 손이며, 이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상한 건 무엇일까.

나는 부끄러웠다.

친구가 말하는 아빠의 손이 부끄러웠고, 아빠의 손을 보면서도 불효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은 부러움의 이웃이므로 나는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는 뭐 어때 할 뿐이다.

사이보그가 되는 일은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까지 했지만 자식 농사는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의 벌이는 아빠가 사이보그가 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하다. 그 사정 때문에 아버지는 사이보그가 되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


<4> 사이보그라는 구원

사이보그가 되어야 하는 사람, 되고픈 사람이 있다.

피터 스콧-모건은 루게릭병 진단을 받아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그는 절망하기도 했지만, AI 사이보그가 되기로 결심하고 불치병의 한계에 도전했다. 피터는 자신의 투쟁이 인류 번영의 계기가 되기를 염원하며 2019년 사이보그 피터로 변신했지만, 1년 후 결국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목숨을 건 거대한 실험은 깊은 감동을 줬고, 과학기술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피터 스콧-모건, 『나는 사이보그가 되기로 했다』, 김영사, 2022) 하지만 누구나 사이보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사이보그가 되라고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5> 무엇이 기적인가?

변호사 김원영은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그는 어린 시절 여름성경학교에 서 만난 예수님을 통해 기적을 꿈꿨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은 “일어나 걸어라”라고 말씀하셨고 앉은뱅이는 그 즉시 일어나 걷는다. 할렐루야!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셨다. 그래서 우리 곁에 없다. 그래서인지 김원영은 이제 달리 생각한다. 예수님이 “일어나 걸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걷지 않아도 좋으니 (네 방식대로) 당당히 일어나라”라고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9)

지금은 예수님 대신 과학기술이 기적을 대신하려 한다. 그러나 신의 기적과 인간의 기술은 질적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든 즉각 해결한다. 죽은 이조차도 간단하게 부활시키는 것이 신의 능력이다. 하지만 과학은 공수표를 남발할 때가 있다.

청각 장애 작가 김초엽은 과학이 제시하는 완벽한 치료라는 비전이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을 끝없이 유예하는 함정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건 SF 속 이미지가 아니라 문자통역 같은 기술이라고 말한다.

“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한 보청기나 청력 치료제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과 그런 소통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내 삶을 실제로 개선했다.”(앞의 책, 35)


<6> 사이보그 아닌 아빠와 함께

기적의 약속은 정상을 기준으로 비정상을 구분한다. 즉 ‘지금 너는 비정상이지만, 첨단 기술이 너를 정상으로 만들어 주리라’ 예언한다. 물론 과학기술은 필요하며, 새로운 의학이 인류의 안녕과 복지를 증대한다. 다만 하나의 노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이와 더불어 함께 살아갈 문화와 기술은 당장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더 발전할수록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믿는 이들이 아빠의 손을 보며 사이보그가 되길 권할 것이다. 그런 선량한 마음은 비정상을 표적 삼아 자족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가 필요하다. 사이보그 아닌 아빠에게 필요한 건 기술보다 다른 마음이다. ‘내 손이 어때서?’를 긍정하는 마음 덕분에 가능한 지평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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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
25/03/07 20:2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두괴즐
25/03/07 23:30
수정 아이콘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如是我聞
25/03/08 09:1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괴즐
25/03/08 13:56
수정 아이콘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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