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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01/31 17:38:21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간 그들
1.

영화 <쌍화점>을 보았습니다. (스포일러 거의 없습니다....)조인성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만,아무래도 제 눈에는 유려한 볼거리들보다는 역사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지요.


가장 먼저 귀를 간지럽힌 말은 '연경'이었습니다. 연경은 '연나라의 수도'에서 나온 이름이니 일종의 별칭처럼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를 제패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패자 쿠빌라이칸은 그곳에 수도를 세우면서 그의 스케일에 걸맞게 이름을 바꿨습니다.
'대도'
그것이 북경의 이름입니다.
그런데도 원나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려사람들이 '연경'이라 부르고, 특히 그런 쿠빌라이의 후손들인 원나라 공주마저 '연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굉장히 저로선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고려시대 최고의 연회음식은 '국화전'이 아니라 '유밀과'라고 합니다.우리가 흔히 타래과라고도 부르는데요,밀가루를 반죽해서 얇게 민다음 기름에 튀겨놓은 바삭한 과자를 꿀이나 조청에 담갔다가 만드는 이 과자는 한때 금지령이 내릴정도였습니다.'사치'의 대명사로 지목되기도 했거든요.
집집마다 연등회나 팔관회를 비롯한 공식행사에서만 이 유밀과를 사용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몰래 만들어 비밀스런 연회를 즐겼는지는 모릅니다만 유밀과는 선비의 시대인 조선시대엔 사라지기도 합니다.
유밀과는 '차'와 가장 어울리는 음식이었나 봅니다.찻상에 다과로 올라왔던 전통이 고려말 대 귀족의 형성과 함께 연회음식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음식하면 무엇보다 '쌍화'가 고려시대 말 변화된 세상과 삶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쌍화점>이라고 여겨집니다.감독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쌍화'가 가진 민족적 의미를 영화속에 녹여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서울인 개경의 번화가는 광화문이었습니다. 광화문 앞 도로 양편으로는 가게들이 죽 늘어서 있었는데 매우 고급스러운 상점과 술집과 음식점과 차를 파는 다점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쌍화점’이 있었지요.

쌍화점은 만두가게입니다. 밀가루로 만든 얇은 껍질에 소를 싸서 만든 지금의 만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교자입니다. 고려의 만두는 밀가루를 발효시켜 소를 넣고 찐 중국식 만두입니다. 이 음식을 쌍화라고 합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으로 찐빵과 비슷한 음식입니다.

'쌍화'는 아시다시피 '고기만두'입니다.그게 뭐 대단하냐고 하시겠지만,고려인들에게 이 낯선 음식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기도 합니다.왜냐하면 고려는 불교국가로 살생을 금지해왔기 때문에 오래도록 채식을 즐겼습니다. 모자라는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두부를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참기름이나 참깨를 먹었습니다.

중국의 사신으로 왔다가 고려의 풍습을 적어 자기나라 황제에게 바친 <고려도경>이란 책에는 고려인들이 만든 고기요리에 대한 품평이 적혀있습니다.요리사들은 고기를 잡을 줄도 모르고 고기에선 냄새가 났다고 하니 외국사신을 대접하겠다는 마음은 갸륵할지 모르나 정작 그 사신은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고기요리를 보고 질겁을 한 셈입니다.

그러던 고려인들이 느닷없이 고기를 잘게 다져넣어 만드는,그래서 채식주의자가 보기에 잔인한 고기만두를 사기 위해 (개성의)남대문로에서 궁궐까지 길게 늘어선 상점거리를 따라 줄을 섰을까요?

2.

원나라,즉 몽골족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중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들라하면 음식문화를 들 수 있습니다. 차와 각종 과일,야채를 이용한 과자류를 즐기던 고려인들에게 술과 고기문화를 가져온 것은 몽골의 영향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술을 즐겼습니다.곡식을 방치하면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는 ‘효모’가 서양에선 빵과 술을 만들었다면 동양에선 ‘곡주’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술은 하늘과 교감하는 장치라 여겨서 대표적인 부족의 제사음식이었습니다. 술먹고 알딸딸한 상태를 통해 신과의 ‘교접’의 즐거움을 느낀것은 그리스에도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듯이 우리나라도 삼한사회,영고,동맹 등의 모든 제천행사는 ‘술의 행사’였습니다.
(가끔 원시문명을 다루는 해외다큐를 보면,그들에게도 축제는 술과 ‘약물’을 통해 신의 영역으로 올라갔다 내려오는 행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인도에서는 이 ‘술’대신에 독특한 ‘버섯’을 사용했는데,아무래도 술은 덥고 습한 나라에서 즐기기엔 부담스러운 까닭인지도 모르겠네요.그래서 이런 곳의 풍습은 술보다는 약초류를 통한 ‘접신’행사가 많아보입니다.)

그런 술은 부족의 힘의 상징에서 차츰 귀족의 상징으로 변했고,힘의 시대인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술’이야 말로 ‘정복자’의 권위와 우월함을 보증해주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사태가 바뀐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남북국시대 말기입니다.이때는 중국도 우리나라도 ‘선종’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호족과 선승들은 빠르게 ‘차문화’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당나라에서 그러했듯이 중앙정부가 교리중심의 불교가 가지는 억압적이고 의식중심적인 불교에 대해 ‘참선’을 통한 자기수양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적 인격의 독립을 시도합니다. 이런 새로운 조류를 뒷받침하기 위해 ‘차와 찻잔’의 수입이 급속하게 번져나가게 됩니다.

토기는 술을 담아두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만 차를 담을 수 없는 그릇이었지요. 차를 즐기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단 한방울의 불순물에도 맛이 변하고, 조금의 미세한 온도차에도 맛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행위자체가 매우 신중한 맛과의 승부이기도 합니다.이런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담는 그릇으로 숨구멍이 너무 많아 온도변화에 민감하고,불순물을 저장했다 다시 뱉어내는 토기는 적합하지 않았지요.

차의 노르스름한 빛을 담아내는 찻잔을 위해 토기가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진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토기가 삼국시대 귀족의 힘의 상징이라면 자기는 후삼국시대 호족들의 고귀한 정신적 가치를 담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일부에선 견훤이 중국 월주자기를 수입상으로 막대한 부를 누렸고,후백제를 세우는 토대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찻잔 속에서 자신들의 시대적 가치를 찾아낸 사람들에 의해 고려시대가 막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적 생활에 심취하고, 그에 따라 살생을 금하는 채식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채식을 버린 것은 원나라 간섭기부터였습니다. 그들은 삼별초의 토벌전쟁과 일본정벌전쟁준비를 위해 장기간 고려에 머물면서 수많은 식습관들을 이식했는데,뭐니뭐니해도 최고는 역시 술과 고기입니다.

우리민족은 비로소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요,이때 처음으로 소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원나라 수군이 장기간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었던 마산에선 그들이 깊숙한 곳에 우물을 만들었는데 이물로 만든 간장은 특별히 맛이 좋아 몽고간장이란 이름을 얻기도 했다고 합니다. 특히 배를 만들 줄 몰랐던 원나라사람들은 고려인들을 시켜 배를 만들었는데 고려인들이 일부러 조금 허술하게 만드는 바람에 ‘가미가제’가 불어오자 몽땅 침몰해버렸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만두를 만들어먹게 되었습니다.

한민족의 음식문화가 바뀌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모든 문화중에서도 가장 지역성이 강한 것이 음식문화이고,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음식문화만큼은 토착문화가 비교적 오래도록 잘 보존되는 편인데도 만두가 인기음식이 된 것은 아무래도 ‘부원배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듯 합니다.

3.

그런데 고기를 잘게 다져서 소를 만드는 만두가게가 개경에서 잘나가는 음식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쌍화점>은 고려가요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가축을 도살하지 못해 외국 사신이 혀를 끌끌 찼던 나라가 몽골에 항복한 문서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만두가게에 사람들이 넘쳐나게 된 데에는 충렬왕의 힘이 컸습니다.

충렬왕은 고려시대 임금 가운데 충자로 시작하는 첫 번째 임금입니다. 충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에서 보듯이 나라에 충성한 사람에게 주는 시호입니다.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준 왕호입니다.

이름에서 확 풍기듯 충렬왕은 몽골풍을 우리나라에 퍼뜨리는데 앞장섰습니다. 원나라에서 원한 것도 아닌데도 변발과 호복이라는 몽골식 복장을 하고 몽골 군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그러니 권문세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백성들의 통곡소리가 멈추지 않았지만 개경의 번화가에는 가게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궁궐에서도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쌍화점>은 충렬왕을 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1279년에 오잠이란 사람의 지휘아래 팔도에서 모아온 기생들을 남자로 변장시켜 지금의 뮤지컬과 비슷한 연극을 하게 했는데 그 때 불러진 노래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찻잔이 아니라 술잔이, 그리고 찻잔도 녹차를 마시는 찻잔이 아니라 보울이 더 깊은 찻잔을 사용하게 됩니다. 만두와 함께 마시는 음료수는 녹차가 아니라 쌍화탕이었던 것이지요.

아마 쌍화점에 쌍화를 사러 온 사람들은 ‘권력과 탐욕’을 누려도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절대권력자 부원배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녀자들을 ‘공녀’로 보내는 일에도 아무런 양심적 가책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나라 간섭기는 고려를 참으로 비이성적인 상태로 몰고간 정신적 공황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 중심의 휴머니스트들인 ‘성리학자’들은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과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을 등치시켰습니다. 선구적인 인물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선생인데요,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평가절하,라기보단 평가자체를 받지 못한 인물이 이분이라고 생각됩니다.그는 원나라에서 선비들을 설득 공녀제도를 공식적으로 철회시키는 일을 합니다.인간답지 못한 제도에 대한 선비들의 공론을 이끌어낸 놀라운 로비력이었지요.

그의 후예이자 아들인 이색이 공민왕과 손을 잡고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는데 총력을 기울인 방식도 ‘인간다움의 회복’과 궤를 같이합니다. 이곡의 제자인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고요.

‘쌍화점’은 그런 의미에서 ‘비이성적인 것을 강요하던 왜곡된 시간’의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와는 또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듯 합니다.

4.

물론 영화 <쌍화점>이 그런 시공간속에서 왜곡된 인간의 이성들을 소재로 삼았을지라도 역사물은 아닙니다. 단지 감독 유하의 판타지일 뿐이겠죠. 그리고 조인성의 지독하게 치명적인 ‘눈빛’을 남긴 작품으로 저에겐 기억될 것이고요.

다만 아쉽다면 그 임금이 ‘공민왕’이 아니라 ‘충혜왕’이었으면 어땠을까...생각이 듭니다. 그랬다면 더 멋지게 ‘쌍화점’의 왜곡된 시공간을 들여다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9년.....우리는 정말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쌍화점’이라는 프리즘으로 낱낱이 해부해 볼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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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날개
09/01/31 18:02
수정 아이콘
인간다움의 회복..이라는 말이 무척이나 와닿습니다.
조금 다른 이유..로~
09/01/31 19:38
수정 아이콘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보러 가고 싶은 영화긴 한데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는군요. 노는 주제에-_- 왜 시간이 안 나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_-) 글은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여러모로 흥미롭군요.^^
이루까라
09/01/31 22:33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쌍화점 보고 나서 도대체 쌍화가 뭔지 참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을 명쾌하게 해결해주시네요..^^

여튼.. 영화본지 벌써 한달이 지났지만, 주진모가 느끼하게 부르는 "쌍화점에 쌍화사러 들어갔더니...."라는 멜로디는 아직도 귀에 아른거리고 있습니다..
온누리
09/02/01 11:12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어디 모임이나 사람들 모인 자리에서 써 먹을 수 있는 좋은 지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우디 사라비
09/02/01 14:24
수정 아이콘
허허허... 재미 있네요
09/02/02 01:40
수정 아이콘
멋진 글이군요!

추천 한방 누르고 갑니다!
peoples elbow
09/02/02 08:55
수정 아이콘
제목만 보고 읽다가 중간에 작성자 확인했습니다..

시간되시면 미인도도 좀......^^
플레이아데스
09/06/10 23:39
수정 아이콘
뒤늦게나마 좋은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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