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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9/10/08 10:39:43
Name happyend
Subject [일반] 슬픈 근대로의 초대
이제 세번째 역사토론 '근대'입니다.
근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너무 많고 내용도 많아서 발제를 포기했습니다.대신에 서문격으로 이시대에 대한 저의 생각을 써봤습니다.(인물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토론은 제 글에서 시작해도 되고,다른 분이 먼저 질문이나 의견을 올려주시면 이어가도록 하고요,필요하다면 제가 중간에 개입해서 불판을 정리하겠습니다.

그리고,지난번 이벤트 당첨자는 '제리와 톰'님(아이디:   jerygogo )입니다.
저나 timeless님을 비롯한 운영자분께  ‘성함, 전화번호, 주소, 책이름’이 적힌 쪽지를 전해주시면 됩니다.

이번 토론도 역시 이벤트가 함께 합니다^^
-제목은 슬픈근대라고 했지만 기쁘게 토론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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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은, 지금까지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세력에 대한 조선인들의 생각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조선에 들이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기 시작했고, 그것은 조선인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형성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연구가 다 진행되지 않아,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이런 동질감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한 때가 이때부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까닭은 ‘백의민족’이라는 조선의 복색의 특징이 바로 이때 이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증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우리나라 평민복의 색깔은 자유로웠는데, 외세와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자기동일화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 바로 구한말, 이때부터 스스로를 외세와 구분하기 위한 이미지로 ‘백색의복’에 대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시대를 바라보는 남다른 눈과 배포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그를 일컬어 ‘근대적 의미로서의 국가’를 이해한 최초의 정치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대원군은 국제정세를 돌파할 무기로 ‘국민적 단결력’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결과제란 것을 알았던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정치감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무기는 바로 조선인들의 ‘자기동일화과정’의 왜곡과 함께 우리 민족을 ‘슬픈근대’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꺼낸 칼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수많은 민중들을 실제로 단결시켜내는 정치적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역시나 정권의 인기는 ‘희생양’을 통해 민중들의 분노와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할 줄 알 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광기에 바탕을 둔 공포정치만큼 효율적인 정치적 수단이 또 있을까요?

(물론 저는 천주교의 조선 선교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우리나라는 유사이래 종교적 정치적 박해에 대해 말하자면, 전세계에서 가장 비폭력적인 나라였습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숫자를 생각해보거나 중국,일본의 경우에 정치적 종교적 박해과정을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경우는 두드러질 정도로 폭력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환국정치시절이나 4대사화시절의 사형자수도 손가락으로 꼽을 지경이며, 종교적 박해의 절정이던 조선 초기 불교사원들을 없애고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무당들을 추방-제주도로-했을 뿐이었습니다. 국가의 헌법적 질서(왕국의 체제)를 받아들인다면 종교는 어떤 의미로서는 자유롭기까지 했습니다. 비록 1930년대에 교황청이 동아시아 선교정책에 대한 스스로 반성하였다고는 하지만,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이 이 시대에 천주교와 함께 얽힌 매듭은 두고두고 풀어가야 할 숙제가 되었습니다. 왜 그 무거운 짐을 우리민족이 지게 되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베이징 함락과 대원군의 천주교박해는 일련의 굵은 연관관계를 만들어내며 우리나라 근대화과정을 규정짓는 주요변수가 되어버렸습니다.

병인박해에 프랑스인 선교사가 처형당한 것을 빌미로 프랑스 선박이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사태는 정말 묘하게 꼬였습니다. 해외에 사신단으로 다녀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나라도 무릎을 꿇은 프랑스 함대의 위용을 보아 강화를 통해 통상정책을 펼쳐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만 이런 통상론은 소위 ‘해방론’에 패배했습니다. 해방론이란 바닷가에 출몰한 외세에 맞서기 위해 자주국방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정책입니다.

(통상론과 해방론에 대한 이 의견은 일부의 의견임을 밝힙니다.개념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경우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구체적으로 쓸 수 있는 개념인지 확신이 없습니다만, 북학파 이래로 서울을 중심으로 통상론을 주장하는 일련의 흐름들이 언제나 존재해왔고, 이 흐름의 일부는 서울의 사치품 조달을 위한 목적에서, 일부는 상업발달을 통한 국가생산력을 높이자는 실학적 목적에서 주장되었습니다. 반면에 해방론은 양이선이 출몰하기 시작한,즉 제국주의자들의 구체적인 영토침략적 목적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래 중국의 아편전쟁의 패배가 가져온 아시아권 국가들의 공포에 대한 하나의 대응책으로 전형적으로는 일본의 유신을 이끌어낸 정책입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함대마저 조선군에 의해 패배하게 되자(병인양요) 민심은 더욱 들끓었고, 통상론은 설 자리를 잃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군과 그의 힘에 기댄 천주교에 대한 반감은 점점 커져갔고, 이런 군중심리를 이용한 대원군의 정치적 영향력은 커졌습니다. 조선은 다가오는 국제정세의 폭풍우에 맞서기 위해 국방력을 키워야 할 과제와 안으로 양반중심의 중세적 봉건질서에 묶인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이뤄야할 과제가 그의 손에 주어졌습니다.

2.

평양감사로 부임한 박규수는 아침부터 혼란스러웠습니다. 대동강을 거슬러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때문이었지요.
박규수는 베이징 함락소식을 들었을 때 모두들 피난을 가자는 둥 허둥대는 사람들 틈에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었습니다.
“베이징 함락의 본질은 무역이오. 중국에는 서양사람들이 탐낼만한 물건이 많아 그런 것이지만 조선은 저들이 욕심낼만한 것이 없으니 괜찮을것이오.”
박규수의 말은 빠르게 한양의 지식인들을 안정시켰습니다. 박규수는 직접 중국에가서 상황을 살폈고, 그곳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정세에 대한 분석을 나름대호 해두었습니다.

(박규수의 이런점은 홍대용-박지원 이래 북학파의 공통된 특징이었습니다.중국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곳에서는 중국의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면서 정세와 학문적 변화를 살피고, 문물의 변화를 체크하는 이런 전통은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미국상선의 돌발행동은 여러 가지를 복잡한 생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작정했다는 듯이 대동강을 넘나들며 하안가에 배를 정박시키고 약탈까지 자행했습니다. 그들이 쏘아대는 총과 대포에 이미 민간인 다수가 희생되었고, 분노한 평양시민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돌을 날라 왔고, 칼과 활로 맞섰습니다.

박규수는 분노하여 날뛰던 평양시민들을 통제하는데 안간힘을 썼습니다. 미국상선은 완전무장상태,섣불리 나섰다가는 시민들의 목숨만 잃고, 까딱하다간 베이징함락때와 같은 빌미를 제공하여 평양을 장악당한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너럴셔먼호의 의미를 그는 누구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때마침 불어났던 대동강의 수위가 낮아져서 커다란 배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박규수는 참모들을 불러모아 공격을 지시했습니다. 비록 무기에서 앞설지 몰랐으나 박규수의 노련한 지휘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조선관리와 분노한 평양시민들의 위대한 희생 앞에는 속수무책,제너럴 셔먼호는 불타고,박규수는 이후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아마 이때 박규수는 나라의 힘을 기르는 것과 개국의 갈림길에서 대원군과 같은 의견을 갖게 되었을것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베이징함락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박규수에게 치명적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지요,서양문물에 대한.그가 그 유명한 동도서기론에 입각한 조선후기 ‘낙론’의 과학관을 더욱 더 공고히 하게 된 계기도 이 사건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1872년 다시 북경에 가게 된 박규수는 아차 싶었습니다. 북경은 세계질서의 집합체와 다름없었고, 더욱이 프랑스에서 돌아온 숭후의 형인 숭실을 만난 뒤로는 ‘개국’(개항이라는 개념보다는 개국이라는 개념이 더 올바르지 않나 생각됩니다.)이야말로 시대적 과제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는 대원군에게 이점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손발이 척척 맞았던 두사람은 여기서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되는데, 대원군은 국정의 개혁없는 개국을 반대했고, 박규수는 개국을 조금도 늦출 수 없다는 조바심을 드러냈습니다.

결국 박규수는 사임하고, 할아버지 박지원이 그러했듯이 백탑이 바라다보이는 곳에서 제자들을 규합, 개국의 필요성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그에겐 개국의 필요조건인 ‘국가’관이 대원군보다 나을바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국은 국가와 국가간의 조약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었고, 이것을 몰랐을 경우는 치명적으로 한쪽에 의한 한쪽의 일방적 수탈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화도조약을 배후조종(?)한 박규수는 그래서, 슬픈 근대의 길 위에서 미아가 되어버려야 했습니다. 북학파의 숭고한 뜻이었던 ‘백성의 삶을 충족시키기 위해 통상과 상업을 장려한다’는 슬로건도 그에 의해 폐기되어버렸단 오명과 함께....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모두 근대화의 물결속에서 비극의 주인공으로 조급증을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스승의 전철을 밟게 했습니다.

(박규수에 대한 평가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로 야박합니다. 특히 그가 진주민란의 해결과정에서 보여준 휴머니스트적 실학자로서의 면모나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보여준 놀라운 통제력,이후 개화파의 육성과정에서 나타난 조선 최후의 실학적 지식인의 고뇌따위는 아무도 평가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남한에서야 그럴법도 합니다. 왜냐하면 외세에 맞서싸운 사람들치고 인정받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일본식민지트라우마만큼 우린 서양트라우마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시대 역사를 싸그릴 야만이라거나, 쇄국정책은 망국정책이라거나 하는....-쇄국정책이라는 말도 폐기해야 할것이라 여겨집니다. 박규수-대원군 콤비라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이시대 국내외정책은 자주국방론에 입각한 국내개혁정책입니다.

반면에 외세에 싸우면 영웅되기 쉬운 북한에서도 박규수가 평가절하된 것은 바로 이 제너럴셔먼호사건을 김일성가계 우상화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이 사건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박규수가 아니라 김일성의 할아버지인 김응우라는 ‘날조’를 통해 왕건이 고려창업후 그랬듯이, 조선의 이성계가 그랬듯이 직계조상들의 신성화작업을 통해 봉건왕조의 정당성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찌보면 북한은 확실히 봉건왕조적 가치가 통했기 때문에 세습체계도 이루어진게 아닐까 싶습니다.)

3.

위정척사운동의 리더이며 화서학파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이항로에 대해 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역사의 지진아.’

그런데, 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단어가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마음을 자꾸 찌르는 것은 왜일까요?
아마, 그것은 이항로가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지진아’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꿈은 위대하고 또 숭고하였습니다. 그것은 성군이 다스리는 태평성대. 모두가 논두렁 두렁에서 부른 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태평천국을 꿈꾸었습니다.

이런 꿈은 조선 후기 일그러졌습니다. 백성들과 관리들의 관계는 먹여주고 아껴주는 관계가 아니라 한쪽의 일방적인 수탈의 구조. 관리를 제어하며 조선왕조를 500년이나 유지되도록 했던 향촌의 선비세계는 파괴되었습니다. 성리학자는 없고, 양반만 득시글대며 양반은 모든 의무에서 빠진 채 권리만 누렸습니다. 병역도 세금도 그들 몫이 아니었고, 농부는 양반과 관리들의 호구였습니다. 양반으로서의 그들의 지위를 유지시켜주는 것은 바로 성리학자들의 사원인 ‘서원’이었습니다. 이곳은 조세피난처였고, 관리를 꾸짖던 비판기능은 상실한 야합의 온상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집권하자마자 서원을 없애버렸습니다. 병의 원인을 정확하게 간파해낸 집도였던 것입니다. 물론, 대원군은 서원을 없앨 경우 인구의 50%에 육박한 양반세력의 반발을 예상못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대중적 지지를 기반으로 삼기 위해 선택한 정치적 수단이 ‘천주교박해’였으니까요.

서원철폐와 호포법 개정은 양반사회의 근본을 뒤흔들었습니다. 위정척사파들이 대원군과 결별한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습니다.

이항로는 청렴한 선비,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선비,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감시하는 선비라는 중세적 가치에 철두철미한 원칙주의자였습니다. 생산력이 낮았던 때에 농민들을 보호하지 않으면 공멸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만들어진 평등론일지언정 이것은 선비정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항로에게 슬프도록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탐욕으로 들끓고 있었고, 양반은 더 이상 아름다운 선비가 아니라 승냥이 이리보다 더 탐욕스런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밝혀줄 지식을 생산하기 때문에 권위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소의 특혜가 인정되었던 봉건시대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이항로에게 ‘지진아’라는 표현을 감히 써야 한다면, 바로 이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가 개국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망치고 있는게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4.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1860년부터 시작된 대략 100년간의 시대는 정말 숨가쁘게 돌아갑니다. 물론 현대가 더욱 그렇겠지만 현대보다 근대가 더 매력적인 것은 조금 더 보편화,객관화가 가능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시대에 대한 평가는 한 근대연구자의 말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거두어들이는 재화가 풍족하면 유능한 관리라 부르고 주머니가 텅 비면 무능한 관리라 일컫는 풍조가 팽배하였으며 염치를 아는 사람이 없으며 탐오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뇌물수수를 둘러싸고 고위직과 하위직이 서로 엉켜 있었고 중앙과 지방이 서로 비리로 연결되었다.사치는 재물을 소모하는 구멍이요 탐학은 백성을 해치는 독벌레였다. ”

격랑의 소용돌이와 같았던 국제질서보다, 개국을 둘러싼 여러 세력간의 수싸움보다 이런 상황이 조선을 파국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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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씨
09/10/08 11:11
수정 아이콘
드디어 슬픈 근대까지 왔네요 ^^; 기다렸습니다.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깊지 않아서 말하기 힘들지만, 이항로에 대한 이야기 만큼은 저와 생각이 같으신 것 같네요.
"개국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를 망치고 있는게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이 문장이 제일 와닿습니다.

4번 관련해서는 고종황제 이야기를 같이 해보고 싶은데요, 저도 역사 가르치시는 교수님한테 들은 것입니다만
고종황제의 생애를 다른 시각에서 평가하는 움직임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기억을 더듬어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고종황제는 자신의 황권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도 동의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만민공동회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중추원을 오늘날의 국회, 의회와 유사한 근대적 형태로 개편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다가 갑작스럽게 주요 지도자들을 잡아들이고, 조직을 와해시켜버린 사실에서도 볼 수 있었죠.
- 만민공동회 탄압과 관련한 구체적인 사실은 저도 책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가물가물하네요 ㅠ
그 외에도 고종의 친정 이후 정치적 행보(라는 말이 맞는지;;)를 보았을 때 많은 부분에서 위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사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최근 근대사 불판들 중 하나라고 들었기 때문에 다른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더 많은 자료 없이 글 쓰는 것에 대해서는 죄송합니다;; 찾아보고 더 추가해 보겠습니다.
swflying
09/10/08 11:12
수정 아이콘
한국인에게 근대란 참으로 민감한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무조건 삽질했다고 하기엔 애국심이 허용을 하지 않으며
잘한점을 부각시켜주고 싶어도 현실은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근대를 이야기하려면 일본의 서술역시 뗄레야 뗄수없기 때문에 더욱 자존심을 긁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으로인한 개국은 일본인들의 역사에 있어 최고의 자랑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절대로 잘했다고 말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역사학자들에게도 골치거리일 것 같습니다.
무조건 객관적으로 서술하면 매국노가 될 것 이기 때문에.

몇년전에 본 근현대교과서에선 가장 처음 부분에 근대사회의 태동이라 하여
서민들의 의식및 상공업의 발달은 이미 근대사회로의 진입을 예고하였으나.,
세도정치등으로 인한 정치판의 삽질로 근대사회로의 진입이 늦어졌다. 라고 서술되어있더군요.
흥선대원군 같은 경우엔 개혁정책등의 장점이 더욱 많이 부각되어있던것 같았습니다.
다만 그런 개혁정책들이 근대의 관점에서는 부족한 개혁이었다 정도의 단점 서술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의 근현대사 교과서가
예전의 교과서와 비교해볼 때 조금더 자주적, 민족적 관점에서 쓰여진 것 같더군요.
09/10/08 11:20
수정 아이콘
학교다닐때 역사 배우다가도 이부분만은 참 재미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암울했고 혼란스러웠던 시기니까요. 흥선대원군의 행동을 이해 할수 있습니다만 섬세한부분에서 부족했던거 같습니다.
Daywalker
09/10/08 11:26
수정 아이콘
어찌보면 조선 후기부터 일제시대까지 이어지는 근대의 최대 딜레마가 바로 말씀하신 국가관이었지않나 싶습니다.
나라의 힘을 키우자면 개국이 필요했지만 대원군이 생각한대로 국정의 개혁없이는 강대한 서양인들에게 질질 끌려다닐 것이 뻔했고, 그렇다고 그럴 능력이 될 때까지 문을 닫아놓고 있기엔 서양인들과 힘의 차이가 너무도 컸고..
게다가 대다수의 양반들은 성리학을 포기할 수 없었고, 이 상태에서 개혁을 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겠죠. 사실 뭐 이 당시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가 서양에 비해 약했지만, 어찌보면 그들의 최대 관심은 청나라에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저 곁가지이지만 청나라에 지리상으로 붙어 있다는게 불행이었고, 우리나라를 제외한 다른 동아시아국가는 결국 서양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을 밟게 됩니다. 일본의 경우는 섬나라라는 특성 때문인지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국가의 근간이 심하게 손상되지는 않았고, 동아시아 최강의 나라로 올라서게 되었지만요..

결과론적인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우리의 힘이 약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원인으로서 조선의 부패를 첫째로 드는 의견들에는 동감하지 못합니다. 저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저기서 자꾸 식민사학의 냄새가 풍겨서 말이지요.
청나라나 다른 동아시아 국가의 부패는 물론이고, 서양인들 내부에서도 부패와 수탈은 조선 이상으로 심했습니다. 성리학이 아무리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양반의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조선의 정치체계가 가진 모순에 의해 점차 양반이 많아지고 그러면서 국력이 쇠한것은 사실이나, 족보를 사 양반이 된 자들조차도 양반이 된 이후에는 양반행세를 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상놈은 족보를 사도 뼛속까지 상놈이라 다른 상놈들을 죽이기에 바빴다 라는 말은 그야말로 계급론, 신분론의 결정체이지요. 실제로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수탈은 물론이고 양반들 사이의 뇌물교환 역시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정말 예의 수준이었습니다. 뭐.. 그래도 뇌물이라면 뇌물 아니냐? 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말이죠.

그래서 하고 싶은말이 무엇이냐? 그럼 뭐가 문제였냐?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조선 몰락의 첫째 원인은 '탐욕이 부족해서였다.' 입니다. 청은 이미 자신들의 세상에서는 최강이었고, 서양은 끊임없이 지지고 볶고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내부의 자원만으로는 타국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외국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손실도 있었지만 어쨌든 막대한 재화를 얻을 수 있었고 기술의 발전도 눈부시게 이루어 냅니다. 일본은 청이나 조선에 비해 소외된 국가였지만, 끊임없이 대륙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무엇이든 받아들여야 했죠. 일본만이 최신기술과 대륙에 대한 탐욕을 가슴속에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조선은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절제와 염치가 최고의 미덕이었던 사회입니다. 외부로 눈을 돌리기 보다는 어떻게하면 안을 더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을까가 주요 관심사였구요. 힘은 외국에 비해 약해서 어찌보면 외국에 당하는게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정치와 사상은 탑클래스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선이 사라진 것은.. 역사는 가치를 따지지 않기 때문이겠죠.
swordfish
09/10/08 12:50
수정 아이콘
뭐 제 생각에는 조상들이 어떻게 했어도 근대의 질곡을 벗어 나긴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예로 반박하실 수는 있겠지만, 일본은 진짜 극도의 예외일 뿐입니다.
특히 일본의 문호 개방시기는 절묘할 정도로 운이 좋은 편이기도 하고요.

만약 통산을 하자고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서양에 혹해서 수 많은 빚을 지고 망한 이집트 꼴이 안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특히 조선 같이 농업도 근대화가 덜되었고, 공업이나 상업 역시 그리 발달하지 못한 나라에서
는 더 그러할 겁니다.

제국의 시대에는 우리 나라 보다 활기 차고 유능한 군주 밑에 있었던 나라도 거의 다 식민화 되었습니다. 즉 제
생각은 서양이라는 거대한 파도에는 당시 비 서구권 국가들은 무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있습니다. 개똥이랑 자영이가 대빵이 아니었으면 좀더 낫지 않았겠냐는 생각 말이죠.
사실좀괜찮은
09/10/08 13:16
수정 아이콘
음... 조선의 전반적인 적응력 쇠퇴는 계층분화, 신분질서 몰락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실상 어떤 사회적 흐름이나 현상이 나타났을 때는 그 흐름을 억제하기보다는 그 다음 단계를 대비해야 하기 마련인데, 모든 국가적 - 사회적 질서가 우왕좌왕하는 시기에서 그 부작용이 강화되는 것을 오랜 시간 방치(혹은 억제하는 데에만 주력)했던 것이 한 원인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종종 근세부터 근대에 이르는 기간의 몇 세기에서 현대적 사유재산이나 임금노동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맹아를 발견했다 - 라는 연구나 강의가 있고, 다들 많이 들어보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오히려 이런 근거들은 '조선도 자본주의적 국가가 될 공산이 있었으므로 식민사관은 무리이다'가 아니라 당시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국가를 지탱할 만한 어떤 질서의 전반적인 약화, 실종 상태를 증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Daywalker
09/10/0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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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좀괜찮은밑힌자님// 해묵은 이론이긴 합니다만, 아시다시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봉건제 내부의 모순으로 인한 갈등이 극대화되는 시점에서 새로운 시도 내지는 혁명이 이루어진다고 하잖아요. 조선 후기 역시 그러한 모순이 점차 크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래서 자본주의 맹아론도 이 시각에서 이해할만은 한 이론이라 봅니다. 말씀하셨듯이 질서의 전반적인 약화 및 실종 상태가 그러한 모순의 형태였겠죠. 연결되는 이야기라 봅니다.
물론 동양의 정치치계는 저런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힘든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요. :)
루크레티아
09/10/0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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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연구가 많이 필요한 근대사가 왔네요.

개인적으로 흥선 대원군은 조선 정치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정치인이었다고 봅니다.
스스로의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린 현명함은 개인의 현명함이며 그런 인물들이 없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후에도 과단성을 발휘한 서원의 철폐와 호포제 실시 등은 그의 뛰어난 정치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이런 점은 임오군란 이후의 재집권기에도 잘 나타납니다.) 그의 불행이자 역사적으로 비판받는 소위 말하는 '쇄국정책'은 어찌보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기 보다는 당시에 조선 왕조를 최대한 멀쩡한 상태로 연명시키기 위해 실시했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한참 제국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있었고 본문에서 언급하신 셔먼호 같은 배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상황에서는(물론 깽판치고 댓가를 치른 것은 셔먼호 뿐이었지만 나머지 이양선들은 수시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설사 흥선 대원군의 치하에서 개국을 한다고 했더라도 절대로 평등한 조약이 이루어 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확실히 이런 면에서 본다면 일본은 천운을 타고난 나라입니다. 나라가 기울어 갈 때마다 국제적인 적절한 사건들이 빵빵 터져주니 말이죠.)
윤성민
09/10/09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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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글입니다 ^^ 조선 후기 수탈이 심햇다고 하는 분과 다른 나라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양반이었다고 말하시는 분이 계시는군요. 두 이야기가 중복될 수 있기는 합니다만 자세하게는 알 수가 없네요.
홍선대원군의 세계 정세를 보는 시각은 어떠했을까 궁금합니다. 쇄국이 서양의 무력 앞에서 언제까지고 우리를 지킬 수 있다고 봤을지, 대원군의 시각이 궁금합니다.
루크레티아
09/10/09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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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쓰다말고 일이 생겨서 미처 못썼군요.

박규수는 그냥 '조급증 환자'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대로 진주 민란의 안핵사로 파견되어 내린 처방이나 평양 감사로서 셔먼호의 깽판을 내버려두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는 개국이라는 것을 너무 급하게 추진하려 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청나라의 패배와 그 많은 물량의 압도적인 서양 문물에 이미 기가 죽어 있었을지도 모르죠. 어찌보면 그는 개국을 실행하고 나라를 직접 이끌어 가기에는 그의 조부였던 연암보다는 그릇이 작았는지도 모릅니다. 국가 간의 정세를 읽기 보다는 그저 문물과 문명에만 집착하는 꼴이 되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그가 대원군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그의 제자들이었던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조선 정계에 데뷔할 수 있었다면 조선 역시도 갑신정변과 같은 불행한 권력투쟁을 겪지 않고도 나름의 개화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봄직 합니다.(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분명 유능한 인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약점이었던 약한 세력 기반과 명성황후를 위시한 민씨 일족들의 부패함은 갑신정변이라는 시대 상황적으로 최악의 권력 투쟁을 불러왔고 갑신정변의 실패는 조선의 국운을 결정적으로 기울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조선은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위정척사의 이념은 그저 양반들의 최후의 기득권 사수 몸부림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의 상소에는 하나같이 국가를 위하여 개국을 하면 안된다고 쓰여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하게 서양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갈수록 흔들리는 자신들, 즉 양반들의 권위가 위태로운 마당에 다른 또 하나의 강력한 변수를 두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서원을 철폐하고 호포를 내게 한 대원군이 실각했을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다시금 그들의 권위가 돌아올 것만 같은 착각의 늪에 빠진 것이죠. 하지만 민씨 정권은 그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서 대원군과는 다른 노선의 칼을 빼들고 그 빼어든 칼이 자신들의 부실하게나마 남은 입지에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듯 싶으니 들고 일어난 것이 위정척사입니다. 그나마 우리나라의 역사이고 지금 경상도 양반들의 후예가 대접받는 세상이기에 위정척사가 역사에서 대접받고 있지만 이건 밥그릇 챙기기 그 이상의 것으로 보긴 힘들 것 같습니다.

Daywalker님// 말씀하신 '탐욕의 부족론'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멸망에 있어서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국력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었던 국가의 시스템과 그로 인한 국력의 약화입니다. 말씀하신대로 부정부패는 어느 나라든지 다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별로 그 부정부패를 극복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달랐다는 것이 국가의 흥망을 결정지었던 가장 큰 요인입니다. 서양의 경우에는 이미 산업혁명이 진행되었고 우수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으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곧 내부의 권력 투쟁이나 부패에 몰입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득이 될만한 '꺼리'들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영국,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국가 내부의 부정부패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충분히 무시해도 될 만큼의 국가적 이득을 식민지에서 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정부패를 극복하는 차이를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옆의 청나라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에도 바쿠후나 청나라의 만주왕조 역시 부정부패에 찌들어서 국력을 약화시키는 주범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이 바쿠후 세력들을 일소하게 되고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여 강대국이 됩니다.(물론 신정부의 인사들도 부패에 찌든 자들은 많았지만 고질적인 바쿠후의 부패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고, 부패한 자들보다 유능한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이들이 불만 세력마저 진압하고 국외로 진출하게 됨으로써 일본은 서양과 같은 위치에 올라서게 됩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이런 부정부패를 개혁하기는 커녕 더욱 사치와 부패, 향락에 찌들어서 왕조의 멸망을 가속화시키죠.
일본을 서양에, 청나라를 조선에 대입하여 생각한다면 부정부패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하는 나라와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한 나라의 차이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조선 후기의 수탈은 민씨 정권이 한 삽질 하나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민씨 정권은 세자의 복을 빈다는 명목 하에 금강산 봉우리마다 돈 천 냥과 쌀 한 섬, 베 한 필과 쇠머리 하나씩을 바쳤다고 합니다. 국가가 이 정도로 돈을 써댔고 이것은 모두 백성들로부터 거둔 세금에서 나갔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수탈이 심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자신들의 정권 유지와 탐욕스러운 부의 확충에 정신이 없었던 중앙 정부이니 지방의 관리 통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고,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부터 매관매직은 이미 관습화 된 상황이었으니 결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조선의 수탈이 양반이었다고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Daywalker
09/10/0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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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님// 말씀하신 것처럼 '국력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었던 국가의 시스템과 그로 인한 국력의 약화'라는 부분은 제 이전 리플에서도 이미 전제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걸 부정할 이유는 없겠죠. 또한 서양의 물질문명이 동양의 그것보다 앞서 있었다는 것도 이론의 여지가 없겠구요.
하지만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에는 꽤 결과론적인 이야기라는 겁니다.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국가는 쇠퇴의 길을 걷고 어떤 국가는 성장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였고, 어떤 주변 상황이 있었으냐를 밝혀야 하는데, 아시겠지만 대부분은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국가들이 앞서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에 능동적일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일본처럼 스스로 소외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들이라는거죠. 청나라는 이미 그들 세계에서 최강이었고, 조선은 나름대로 2인자의 위치라고 생각하며, 청은 건들릴 엄두조차 안나는 초강대국인 상황에서 변혁을 꿈꾸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것이고 역시나 그런 나라들은 열강과 일본에 모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양이 산업혁명으로 이룬 성과를 통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 이전부터 유럽은 세계 곳곳으로 새로운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 진출하려 노력했고, 그 노력에 속도를 붙여준 것이 산업혁명의 결과물들이었죠. 산업혁명은 분명 19세기 유럽 경제의 틀 자체를 바꾸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물결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만, 그렇다고 그것으로부터 제국주의가 나타난 것은 아니란 말이죠. 영국은 그 이전에도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고,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국가적 이득을 식민지에서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그 식민지 개쳑만으로도 그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의 재화가 조금이라도 노동자 계급, 하층민들에게 돌아갔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수탈이 어디가 더 심했냐를 굳이 따지는 건 어차피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고 보는 눈이 달라서 누가 옳다 그르다를 얘기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만 읽어보아도 그 당시 프롤레타리아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책에서 나온 내용인지는 좀 헷갈리는데, 노동자 계급의 평균 수명이 채 20세가 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자원수탈만이 아니라 인적수탈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죠. 그런데 왜 이런 나라들이 세계를 누비며 힘을 행사할 수 있었는가는 말씀하신대로 그만큼의 힘과 재화가 있었기 때문이며, 그 힘과 재화를 획득할 수 있었던 근본에는 그들의 태도가 우리나라와는 180도 달랐기 때문이라고 저는 보는 것이죠.
루크레티아
09/10/0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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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walker님// 일본은 그다지 능동적인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청나라와 조선, 일본의 3국은 모두 폐쇄적인 국가였습니다. 일본이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교역을 맺고 있었다고 하지만 네덜란드 국왕이 개국을 종용하는 서신을 보내자 단호하게 거절한 국가가 일본입니다. 이런 일본의 개국은 단지 타의에 의한 강제적인 개국일 뿐이었습니다. 미국의 무력에 굴복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고 어쩔 수 없이 문호를 개방한 것입니다. 또한 일본이 서양의 문물을 결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는 당시 쇄국을 외치며 바쿠후 정부와 싸우던 조슈, 사쓰마 지방의 세력들이 영국, 네덜란드 등의 서양 세력들에게 완패함으로써 자신들의 결정적인 한계를 깨달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바쿠후와의 정권 투쟁에서 승리한 신정부 세력은 기탄없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무력에 굴복한 이후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한 예는 청나라와 조선에 모두 있습니다. 청의 양무, 변법 운동이나 조선의 영선사 파견 등이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나라가 똑같은 노력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혼자만이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만이 유일하게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로 개혁을 이루어냈기 때문입니다.

산업혁명은 제국주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물론 말씀하신대로 산업혁명 이전에 이미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은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식민지는 단지 '우리나라에 없는 물건을 가져오는 곳' 이거나 '다른 나라에 질 수는 없으니 우리도 영토를 확보하자.' 라는 취지로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생산량이 이전과 비교해서 어마어마해짐으로써 그런 생산량을 뒷받침 해야하는 원료와 상품시장의 확보가 절실해졌습니다. 그래서 소위 열강들이 세계 곳곳을 침략하고 본격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본격적인 제국주의 체제가 시작된 것이고요.

능동적인 국가가 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너무 운이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원나라 이후로 중국은 분열되지 않고 계속 하나로 통일된 강대국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무엇 하나 건드릴만한 구석이 없었죠. 만약 중국이 계속 분열된 채로 싸우고 있었다면 우리나라도 나름대로 역동적인 역사가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럽은 항상 이런 역동성이 유지되는 곳이었기에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도태되었고 살아남은 국가가 강대국이 된 것이고요. 말씀하신대로 조선이 능동적이지 않아서 쇠망한 것은 맞습니다만, 그것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고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비참한 삶과 국가의 부패는 그다지 연관성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본가가 착취를 한 것이고 조선의 백성들은 국가에서 직접 착취를 했으니 비교대상 자체가 다르죠. 자본가들은 그나마 국가에서 세금이라도 걷어갔고 그것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강하는 등의 정책을 썼습니다. 한 마디로 일반 민중을 착취하긴 했지만 그들은 그 착취의 댓가를 국가의 정책에 썼습니다. 조선은 착취의 댓가가 모두 탐관오리의 주머니 속이나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전혀 쓸모 없는 곳에 쓰였죠.
Daywalker
09/10/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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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님// 급하게 나가야 해서 간단하게만 달겠습니다.
일본이 능동적이었다는 것은 청과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그랬다는 것입니다. 제가 좀 이상하게 썼군요. 말씀대로 일본 역시 타의에 의해 개국된 경험이 있으나 일본만이 유일하게 외국의 간섭을 받지 않을 채 개혁이 가능했고, 물론 청이나 조선이 능동적으로 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안한 것은 아니나, 일본은 좀 더 자주적으로 개혁을 이룰 수 있는 환경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산업혁명은 제국주의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 그렇게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식민지 지배와 그에 대한 수탈이 심화된 시점으로서는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없는 물건을 가져오는 곳이거나 다른나라에 질수는 없으니 영토를 확보하자 라는 개념이 제국주의와 동떨어져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물건을 가져오거나 다른나라에 질 수 없다는 말은 산업혁명 이후의 원료와 상품시장의 확보와 그리 다른 목적은 아닙니다. 동등한 교역을 원했다면 굳이 식민지를 건설하지 않았겠죠. 윗 리플에서 애초에 쓰시기를 산업혁명으로 인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말씀하셨는데 전 그에 대해 오류가 있지 않나 지적했던 것입니다. 시대를 딱딱 잘라서 이야기하자면 산업혁명부터 제국시대라 할 수는 있겠지만, 제국은 그 이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운이 없었다는 말에는 동감합니다. 계속 썼지만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항상 상대적인 것이겠습니다만,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덜 능동적이었던 거겠죠.

그리고 수탈에 대해서. 저는 굳이 산업혁명 시기의 수탈을 이야기한 이유는 조선 후반보다 상공업에서 앞서 있던 영국과 유럽조차도 엄청나게 처참했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 이전이야 뭐,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산업혁명과 조선은 체제가 다르니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 하겠습니다만, 이런식의 비교는 가능합니다. 조선은 고을의 수령이 백성들로부터 공물을 거두어 들입니다. 백성의 생산량이 100, 수령이 착복하는 것이 45, 나라에 올리는 것이 45라고 칩시다. 백성은 10을 가지겠죠. 그런데 나라에서 공물의 양을 50으로 올려라. 이러면 수령은 자신이 가지는 양 45는 그대로 두고 더욱 수탈을 하여 95를 빼앗아 갑니다. 그러면 백성은 5밖에 안남겠죠. 영국의 경우 국가와 자본가의 관계 역시 비슷합니다. 자본가가 내는 세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재화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에서 나오지 결코 자본가가 조금 손해를 봐서 나라에 돈을 더 내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에서는 나름 그것을 나라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쓴다고 했겠지만, 그게 하층민들이 얼마나 고생을 해서 모은 것인지는 상상하지 못합니다. 민씨 일가가 금강산 봉우리마다 제물을 올린 것은, 나름 국가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세력 확장을 위해 군비를 증강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일반 민중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전 좀 멀리 떠났다가 일요일에나 와서, 당분간 토론은 힘들겠네요. 토론 즐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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