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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7/10 20:12:39
Name 눈시BB
File #1 병자호란_2.JPG (164.3 KB), Download : 58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13. 근왕군





군졸들이 정예롭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좋은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효종

1. 강원도 근왕군 - 검단산 전투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강원 감사 조정호였습니다. 그는 17일 근왕 명령이 내려지자 바로 원주 목사 이중길, 원주 영장 권정길과 함께 7000명을 이끌고 24일에 양근(양평)까지 진출하죠. 이 중 선봉 원정길은 1000명을 이끌고 남한산성 남방 1km지점 검단산까지 진출합니다. 이 때 성으로 들어가기 힘들어 횃불로 알렸다고 합니다.
다음 날, 청군은 병력 2000을 뽑아 그들을 포위 공격합니다. 좌, 우에서 오는 협공에 강원도군은 총포와 시석으로 대항, 막아냅니다. 하지만 청군은 큰 피해를 입고도 1000명을 새로 증원받아 다시 공격하죠. 여기에 밀린 강원도군은 9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권정길 휘하 수십 명만 겨우 탈출했다고 합니다. 사기가 떨어진 강원도군은 도망자가 속출했고, 조정호는 단독으로 공격하기 힘들다고 결정, 가평에 집결한 함경 감사 민성휘와 합류하기 위해 이동합니다. 이 때 함경도군은 미원으로 가서 김자점, 심기원과 합류했는데, 강원도군도 여기에 합류했습니다.

원주 목사 이중길은 이 때 조정에 자신만만하게 장계를 보낸 모양인데, 조정은 그를 믿고 가자했다가 강원도군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성 후 다시 벼슬을 깎아 버립니다. -_-; 뭘까요 이건.

2. 충청도 근왕군 - 험천현 전투
충청 감사 정세규는 18일에 근왕 명령을 듣고 7000여 명의 병력을 규합, 충청 병사 이의배를 선봉으로 삼아 25일에 공주를 출발, 천안-수원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가게 합니다. 이들은 1월 2일 남한산성 남방 40리 지점 험천현에 당도, 연락을 도모하죠. 청은 좌익군 3군 7000여명을 이동시켜 차단하죠. 이 때 정세규는 성 내에 물자가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며 닭 3 마리를 보내 꼭 성 안으로 보내라고 했는데 이의배는 "성이 위급하긴 한데 나도 어쩔 수 없다"면서 그 닭인지는 몰라도 잡아서 술 마셨다고 합니다 -_-;

청군은 헌천현 서쪽 1km지점에 더 높은 고지를 점령한 후 근왕군을 공격합니다. 충청 병사 이의배는 단신으로 진영을 이탈 -_-; 하지만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이 동요 없이 부대를 지휘해 10여 차례나 펼쳐진 공방전을 막아냅니다. 하지만 탄약과 화살도 막아 냈고 근왕군의 피해도 커서 수원 방면으로 병력을 물리게 되죠. 김홍익, 이경징, 이상재 등 수령들이 다수 전사한 걸 보면 피해가 상당했던 모양입니다. 정세규 역시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려 했는데 주변 군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합니다. 이후 다시 진군하려 했지만 종사관 박서가 만류해서 공주로 들어가 병력을 증강시킨 후 재진격하기로 결심합니다. 10일에 공주에 도착하는데, 정세규조차도 중상을 입을 정도면 피해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는 군사 지식을 하나도 모르는 문관이었다고 합니다. 그냥 깡다구로 밀어붙였지만 결국 실패한 것으로 보이네요. 나만갑은 "신하 중에는 정세규밖에 없다"면서 그를 극찬했습니다. 정세규가 검단산까지 진군했다는 기록도 보이는데, 패전하고도 더 밀고 갔다가 안 된다 싶어 돌아간 건지는 모르겠네요.

한편 충청도군을 격파한 양굴리는 이어 올라오는 전라도군을 향해 진군합니다.

3. 함경도 근왕군 - 전투 없음
함경 감사 민성휘는 12월 22일에 명령을 듣고 27일에 7000여 명의 근왕군을 이끌고 북병사 서우신과 함께 양근 방면으로 진군합니다. 심기원은 장계에서 이 수를 2만 3천이라고 했죠. 그들은 시작부터 싸웁니다. 서우신은 곧바로 남한산성으로 쳐들어 가자고 했고, 민성휘는 수가 적으니 도원수와 합류하자고 했죠. 이걸 보면 2만 3천은 아닌 듯 합니다.

2만 3천이 맞다면 정말 엄청난 수고, 다른 곳도 아닌 함경도 근왕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김자점, 심기원이 있는 미원에 도착한 후 움직이지 않습니다. 서우신은 민성휘가 말을 듣지 않자 계속 상부에 얘기했지만,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편 민성휘도 원수에게 계속 진군할 것을 주장하지만 듣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후 민성휘는 김자점과 계속 함께 있었는데도 처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평안 감사에 제수된 걸 보면 신중론자였을 뿐 진격할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닌 모양이네요. 이들은 전쟁 때에는 아무런 활약을 못 하지만 돌아갈 때는 약탈하는 몽고병을 쳐서 전과를 거둡니다. 특히 서우신은 마구 공격하다가 패하는데, 이 때문에 벌을 받습니다. -_-;

당시 미원에는 김자점, 심기원의 패잔병과 강원도, 함경도 근왕군이 합쳐 17000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평안도 근왕군이 근처에 있었고 정황들을 보면 이만이 넘었을 수도 있겠네요. 중요한 건 정예였던 중앙군과 함경도군의 비율이 엄청나게 높았다는 겁니다. 조정에서 애타게 기다린 것도 그들이었죠. 하지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4. 평안도 근왕병 - 금화 전투
평안 감사 홍명구는 적이 오자 계획대로 2000여 병력을 이끌고 평양성 북쪽 70리 지점의 자모산성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적이 그냥 지나치자 급히 출성합니다. 이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적병을 막지 못 하고 그대로 지나치게 하여 장차 군부가 계신 왕성이 짓밟히게 되었으니, 이 곳을 지켜서 무엇하겠는가!"

한편 안주에서는 유림이 공성계를 펼쳤다가 적이 지나가자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홍명구는 그와 신경원을 불렀습니다만, 신경원은 철옹산성에서 대치하다가 패했기에 참가하지 못 하죠. 홍명구와 유림은 병력을 합쳐 5000을 이끌고 18일에 평양을 출발하는데... 1월 26일에야 강원도 금화에 도착합니다.

연구가 안 된 탓인지 모르겠는데 그들이 한 달 동안 대체 뭘 할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12월 26일에 도착이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말이죠. 거기다 전투가 벌어진 곳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금화(김화)였고, 청군이 제법 멀리까지 요격해 온 겁니다. 이전에 함경도군이 별 전투 없이 무사히 진군했던 곳이죠. 일단 다른 사료를 확인해 볼 수 없으니 추측을 하자면...

- 당시 청군은 철원, 연쳔, 포천 등에 포진해서 근왕군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들과 소규모 전투를 치르거나 전투 없이 계속 약점을 노리다가 그제서야 진격한 것이라는 거죠. 그들이 출발한 날 자체가 늦었을 수도 있구요. 그들의 진군로는 계속 청군이 지나가던 곳이었고, 후에는 청군이 남한산성과의 통로를 차단합니다. 즉, 그들과 싸우다가 늦었고 청군이 귀찮아서 쓸어버리려고 일부러 금화까지 진군했다는 것입니다.
- 김자점과 신경원이 근처에 있었으니 지휘체계 상으로 그들은 김자점과 합류해야 됐었고, 김자점이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그 때까지 대치하고 있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단독으로 행동했을 가능성도 있죠.
- 둘은 계속 대립했습니다. 홍명구 위주로 된 기록에는 일관적으로 유림이 미적거렸다고 기록돼 있죠. 이후 전투에서 잘 싸운 유림입니다만, 이 때 정말 미적거렸을 수도 있습니다. 유림은 공을 세우게 하기 싫어서 임경업도 합류하지 못 하게 했다고 합니다. 어느 쪽이 사실일지는 더 공부해 봐야 알겠네요.
- 그 외에 적지에 있던 병력이니 다른 근왕군에 비해 보급 물자는 확실히 부족했을테니 그걸 확보하다가 늦었을 수도 있겠네요.

의문은 뒤로 하고 일단 계속 나가보죠.
평안 감사 홍명구와 병사 유림은 계속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진군 과정에서 유림이 머뭇거렸다고 합니다. 금화에 도착하자 홍명구는 평지에 진을 치고 포수를 1선, 궁병을 2선, 창검병을 3선에 배치하자고 했지만, 유림은 참겅병을 1선, 궁병을 2선, 포수를 3선으로 하고 험지에 진을 치자고 주장했습니다. 둘은 계속 싸우다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눠 각기 평지와 고지에 진을 치기로 하죠. 홍명구가 있던 곳은 탑동이었고, 유림이 있던 곳은 399미터의 고지 백동이었습니다.

그들이 각기 목책을 구축한 28일 아침, 청군은 금화로 진출해 돌격해 왔습니다. 유림은 급히 홍명구에게 고지로 올라와 진을 합치자고 하지만 홍명구는 거절합니다.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기로 마음을 굳혔다. 능히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살 길이 열릴 것이요, 또 죽더라도 그 이름은 죽지 않고 후세에 길이 남을 것이다."

청군은 당연히 평지에 있는 홍명구 군을 공격했고, 중간에 병력을 배치해 유림군을 차단했습니다. 1000명의 기병이 주위를 돌며 계속 활을 쏴 댔고, 그 사이에 3000의 보병이 돌격해 왔죠. 조선군은 3, 4차례 막아냈습니다. 조선군이 목책에 의지해 총을 쏴 대자 청군은 건초와 나무 더미를 수레에 실어 밀어붙이고 화공을 가 했죠. 목책이 제거되자 적은 돌격해 왔고, 홍명구는 유림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유림은 듣지 않았죠. 결국 홍명구와 순안 현감 허로는 후퇴하지 않고 맞서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한편 청군은 이어 유림군을 공격하기 위해 산을 올라오는데 휘하 병력들이 동요하자 유림은 이렇게 독려했습니다.
"병사 유림이 여기에 있다. 제군들은 동요하지 말고 침착하라. 적은 이미 종일의 싸움에 지쳐 있고, 우리는 험한 고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이 싸움은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다. 한 사람도 물러서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

청군이 접근하자 조선군은 바위들을 굴렸고, 적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1선의 참겅병들이 돌격,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이어 적이 공격해오자 궁병과 포수들이 교대로 사격을 하는데 유림은 "화살과 탄약이 부족하니 낭비하지 말라. 적병이 전방 십보 이내에 접근하기 전에는 사격하지 말고, 내가 신호의 깃발을 흔들 때에 일제시 사격을 하라"고 하며 통제를 엄격하게 했죠.
사실상 이런 모습이 다른 전투들과는 다른 결과를 냈을 것입니다.

평안도군은 3차례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갔습니다. 이 때 유림은 군악을 울려 전승가를 부르게 했는데, 덕분에 사기도 올라갔죠. 군가의 힘입니다 -_-a 이어 유림은 일부 병력을 전진 배치하고 매복하게 합니다. 해질 무렵에 청군이 네 번째 공격을 가하는데 복병이 일시에 일어나 공격하자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고 유림군이 돌격해오자 결국 후퇴합니다.

하지만 평안도군의 화살, 탄약도 거의 동이 났고, 시간도 늦은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할 틈이 없었습니다. 그는 망가진 조총의 화승의 길이를 조절해서 시간차를 두고 자동으로 쏴 지게 해서 적을 교란시킨 후 이동을 재개합니다. 밤새 계속 총 쏘는 소리가 들리자 청군은 여전히 고지에 조선군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음날 가 보고 속은 걸 알게 되었죠. 이 때 이미 조선군은 낭천까지 이동한 상황이었습니다.

+) 조총이 연발은 안 되겠지만 혼자 쏘게 할 수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게 밤새도록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유림은 30일에 진군을 개시해서 2월 3일 가평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 때는 이미 늦었죠. 그래도 병자호란 때 볼 수 있는 통쾌한 조선군의 승리 중 하나입니다.

5. 전라도 근왕군 - 광교산 전투
전라 감사 이시방(-_-;)은 20일에 근왕 명령을 받고 6000명의 근왕군을 소집합니다. 29일에는 전라 병사 김준용과 함께 진군을 개시하죠. 이 때 화엄사의 스님 벽암, 각성도 각기 1000명씩 승병을 이끌고 합류합니다. (유서 깊은 이름인 항마군을 자칭합니다) 이렇게 전라도군의 병력은 8000여 명에 달하죠.
1월 1일 직산에 도착한 이시방은 장계를 띄운 후 김준용에게 병력 2000을 주어 보냅니다.

1월 4일, 병사 김준용은 남한산성 남쪽 100리 지점의 광교산에 진출합니다. 그는 주요 군수 물자를 진영 중앙에 비축해 장기 항전 태세를 갖추죠. 이 때 충청도 병력을 격파한 양굴리는 2000명으로 남한산성 사이를 차단하고 5000명으로 공격합니다. 1월 5일이었습니다.
김준용은 1선에 포수, 2, 3선에 각기 궁병과 창검병을 배치하고 적이 오면 집중 사격하고 퇴각할 때 배후를 타격, 크게 전과를 올립니다. 다음 날, 양굴리는 호준포를 앞세워 공격하지만 전라도군은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싸웁니다. 저녁 무렵에 청군의 일부가 후방에 있던 광양 현감 최택의 방어를 뚫고 돌파구를 확보하지만 김준용이 급히 돌격해 난전을 벌입니다. 이 때 청군의 대장 양굴리가 총을 맞고 전사하고 조선군은 총공격해서 청군을 쫓아냅니다. 이것이 광교산 전투입니다. 양굴리는 청 태종의 매부로 누르하치 때부터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명장이었습니다. 그가 여기서 죽은 거죠.

금화 전투와 함께 2대 승첩으로 불리는 광교산 전투입니다.

하지만 김준용은 탄약과 군량 부족으로 수원으로 퇴각합니다. 문제는... 뒤따라 오고 있던 이시방이 김준용 부대의 후퇴를 패전으로 오인하고 공주 방면으로 철수했다는 거죠. -_-; 이 때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

결국 그들 역시 적과 대치하기만 하다가 전쟁이 끝납니다.

6. 총정리
뭐 이쯤 되면 할 말이 없죠. -_-;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건 "지휘권 다툼"입니다. 애초에 감사, 병사, 체찰사, 방어사, 조방장 이딴 식으로 군권을 잘게 조각내 온 상황에서 예견된 것이고, 임진왜란 때도 문제가 된 거였죠. 전투를 모르는 문관과 무관은 갈등하고, 강경파와 신중파는 갈등합니다. 둘 중에 우위를 가진 사람은 문관이었죠. 전라, 충청 군은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도 협력하지 않고 따로 갔고, 전라도군은 이겨놓고 선봉과 본군의 연락까지 끊겨 버렸습니다. =_= 평안도군은 도원수의 황해도+경기도+강원도+함경도+중앙군이 바로 근처에 있었는데 5000 병력으로 단독으로 가야 했고, 자기들끼리도 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의 훈련도 역시 문제였습니다. 농민 출신인 속오군의 전투력은 크게 기대하기 힘들었습니다. 반면 적은 정예였습니다. 특히 탄약 및 화약 통제가 제대로 됐을지 의문입니다. 유림이 이긴 것은 그게 크죠.

애초에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습니다. 방어전도 아니고 한양까지 가야 되는 상황에서 급히 올라가야 했죠. 거기에 조총이 주력이 된 상황에서는 물자도 크게 늘어날 수밖에 없죠. 그런 상황에서 지휘권 혼란 + 훈련 부족 + 물자 부족. 이기는 게 이상하죠.

결정적으로 이들 모두를 지휘해야 했던 김자점과 심기원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조정도 심기원을 원수로 올려야겠는데 김자점은 갈 순 없어서 그는 그대로 서로(혹은 양서) 도원수로, 심기원은 제도(혹은 하사도) 도원수로 해서 지휘권을 양분시켜 놨습니다. 그래놓고 김자점은 스스로의 군을 움직이지도, 자기 때문에 온 함경도군과 강워도군을 움직이지도 않았고, 평안도군은 단독으로 움직였습니다. 심기원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군이 각개격파 당하도록 뭘 하고 있었을까요? 거기다 그들 휘하에는 중앙군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동원령, 토산 전투에서 그나마 맹활약했던 중앙군은 이후 싸워보지도 못 했습니다.

근왕에 동원된 병력은 초기의 패잔병 4000 외에도 평안도군 5000, 함경도군 7000, 강원도군 7000, 전라도군 8000, 충청도군 7000입니다. 서북에 고립된 임경업의 병력과 강화도의 병력, 남한산성의 병력을 빼고도 4만이죠. 경상도의 병력도 일단 뺄게요. 속오군 수 (10만 가까이 됩니다)를 생각하면 모두 동원된 건 아니지만 몇 일만에 저 정도 병력이 모였다는 건 조선의 시스템도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패한다면 모를까 모아서 한 번 붙어 볼 수 있는 병력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력이 남한산성 및 강화도에 몰려 있어서 그 방면으로 전개된 청군 역시 많아야 일만 정도였죠. 이것만으로도 남한산성의 포위를 느슨하게 하고 청 태종이 전쟁을 빨리 끝내야 된다는 압박을 주었겠지만, 제각기 달려들었기에 이 수준의 병력으로도 각개격파가 가능했던 겁니다.

솔직히 -_-; 다 달려들어도 이겼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속오군은 결국 농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해 보지도 않은 건 웃길 따름이죠. 애초에 충분히 전쟁 위협이 있었던 상황에서 이 정도 대비도 안 했다는 건 변명일 뿐이죠.
작전 목표가 남한산성으로 국한되었던 것도 큰 이유입니다. 강화도로 무사히 갔다면 함락되지 않는 한 장수들은 어느 정도 자율권이 있었을 것입니다. 적의 진격로상에 있던 병력은 굳이 경기도로 가기보다는 후방의 병력이나 수송대에 신경 쓸 수 있었을 것이고, 혹은 청 태종이 조선군 주력을 격파하려고 하다가 임진왜란처럼 대첩이 일어났을 수도 있죠. 하지만 남한산성이라는 성 하나에 고립됐기에 적 격파보다 구원에 더 신경 써야 했고, 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임진왜란 때도 한 달도 안 돼서 급히 진격한 용인에서는 어이 없는 패주를 당했고, 권율은 한 타 막고 조금씩 조금씩 전진했었죠. 그럴 여유가 병자호란 때는 없었습니다.

병자호란 때도 의병은 있었습니다. 예조판서 조익은 경기도 남양에서 500을 모아서 강화도로 가서 순국합니다. 부제학 전식은 경상도에서 200명을 모아 경상도군과 합류하죠. 전라도에서도 옥과 현감 이흥발, 대동찰방 이기발 등 전현직 관리들이 작게는 수십부터 많게는 백명까지 거병했고, 합쳐서 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근왕군을 모집하던 호소사 정홍명을 총대장으로 해서 1월 20일에 출발하고 2월 2일에는 과천까지 진군하지만 출성을 막기에는 늦었습니다.

애초에 시간 부족과 남한산성 구원이라는 제한된 목표, 지휘권의 혼란 및 수뇌부의 소극적인 자세, 속오군의 한계와 장수들의 기량 부족이 병자호란 패배의 원인입니다. 한 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었습니다. -_-

아직 하나 남았죠?

다음 편에서는 쌍령 전투와 강화도 함락을 다루겠습니다.
기뻐하세요. M의 최고봉이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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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0 20:18
수정 아이콘
나라가 망하려면 이정도는 돼야지!

하는거 같네요
11/07/10 20:48
수정 아이콘
임진왜란을 능가하는 각개격파의 진수를 보여주네요-_-;;
11/07/10 20:57
수정 아이콘
진짜 양웬리와 라인하르트가 신랄히 비웃을 것 같은 각개 전투네요;;;;;;;;

기계수 꼭 한대씩만 보내는 닥터헬도 아니고 -_- 이쪽지방애들 와서 깨지고, 그다음 저쪽애들 와서 깨지고....
하야로비
11/07/10 20:58
수정 아이콘
전 어릴때 당연히 청나라=중국=13억이라 생각해서 이건 뭐 처음부터 상대도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당시 인구가 청나라의 주축 만주족 <<< 조선인 걸 보고 얼마나 허탈했던지...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쉽게 이길 수 있는 건 절대 아니겠지만
적어도 조선이 제대로 방비만 했었더라면 병자호란처럼 어처구니없게 털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다음편은 알렉산드로스도 감탄했다는(...응?) 쌍령전투군요. 기대됩니다!
무리수마자용
11/07/10 21:13
수정 아이콘
쌍!령!전!투!
강!화!도!함!락!

오늘글은 상대도 되지않을 블록버스터급 스케일이 장엄하게 조선땅에서 펼쳐지는군요. 이쯤되니까 눈시BB님이 625전쟁사를 연재해도 웃으며 읽을수 있을 내공이 되었습니다.
물여우
11/07/10 21:18
수정 아이콘
다음 글이 심상치 않습니다.
맨 첫 줄이 전체의 요약이군요. ㅠ-ㅠ
구국강철대오
11/07/10 21:20
수정 아이콘
아악 #$%#%^$%^&#&#%^&$#%^@##$%#$%@$

쌍! 령! 전! 투!


사격통제가 되지 않는건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만큼 냉병기에서 화병기로의 전환점에서 경험부족이랄까요. 임란을 몇년 했는데!!!!
Je ne sais quoi
11/07/11 09:00
수정 아이콘
참 신기한게.. 맨날 이런 식인데도 안 망한 것도 용합니다 -_-;;
11/07/11 10:47
수정 아이콘
임진왜란에 명량해전의 위엄이 있다면 병장호란때는 쌍령전투가 있다! -_-;
저도 이렇게 끈질기게 안망하고 버틴게 신기합니다-_-;;
정말로... 끈질기게 지켜온 아침의 나라~ 옛날 옛적 조상들은 큰나라(?) 세웠지!
스바루
11/07/11 11:55
수정 아이콘
쌍령전투 쌍령전투 하길래.. 먼가 해서 네이버에 검색해 봤는데............

할 말이 없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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