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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25 23:25:17
Name 드라고나
Subject [일반]  허재가 허재
유머게시판에 허재 영상이 있길래, 생각난 김에 다른 데 올렸던 내용을 좀 수정해서 대강 올립니다. 평어체로 쓰여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허재는 용산고 재학 시절부터 차세대 특급 가드라며 티비 뉴스에서 인터뷰를 할 정도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연세대와 고려대의 큰 스카우트 경쟁이 있었으나 중앙대에 입학했다. 이 과정에서 스카우트 비용 같은 거 없이 중앙대 농구부의 대부 정봉섭과 허재의 아버지인 허준 사이에 상당한 교감이 있었고, 아버지의 의사로 허재가 중앙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쨌든 저쨌든 허재의 중앙대 입학은 허재에게나 한국 농구 전체에나 이후 큰 전환이 된다.

허재는 연세대나 고려대보다 상대적으로 느슨한 팀 분위기 속에서 온갖 테크닉을 익히고 만들어내고 익혀 나갔다. 중앙대 농구부는 허재가 입학할 무렵 저학년은 팀 연습 끝난 후 개인연습을 하고 고학년이 뒷정리를 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허재는 여유 시간만큼 독하게 자기 단련에 돌입, 이렇게 쌓아올린 것들은 농구대잔치에서 터져 나오게 된다. 당시 갓 출범한 농구대잔치에 처음 참가한 허재는 1학년으로서 팀의 포인트가드를 맡아 경기당 39분 30초를 뛰면서 평균 24득점 8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고 신인상, 어시스트상, 인기상을 모조리 휩쓸었다.

1985년 농구대잔치에선 성인 선수들로 이루어진 실업팀들을 제치고 김유택, 한기범과 함께 중앙대 농구팀을 농구대잔치 최종 결승전까지 이끌었지만, 당시의 허재보다 더 괴물이었던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 앞에 중앙대는 결승에서 현대에게 격파 당했다. (이 결승은 이충희의 가공할 득점포가 최고 승리 원인이긴 해도 현대 선수들의 폭력을 동반한 수비와 신경전, 그런 폭력을 묵인한 편파 판정이 상당한 물의를 빚은 경기이기도 하다. 당시 중앙대 측이 너무한 판정에 항의하며 아예 코트를 떠나고 몰수패를 당하기까지 했으니.)

1986년부터는 강동희가 입학하면서 함께 활약, 다시 한번 중앙대 농구부를 농구대잔치 최종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또 한 번 이충희와 현대에게 물을 먹으며 우승에는 실패했다.

대학 4학년 때는 한기범도 김유택도 졸업하고 없는 팀 상황에서 센터로 활약, 대학농구 대회에서 단국대를 상대로 전반에만 팀 전체 득점인 54점, 최종적으로 75점을 넣는 기록을 올렸다. 한데 4학년 시즌에는 중앙대가 선수들의 부상으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며 농구대잔치 출장을 거부했기에 농구대잔치에서의 활약은 없다.


실업팀들은 계약금으로 몇 억 식을 불러대며 허재를 자신들의 팀으로 스카우트하려 했으나, 허재는 정봉섭 감독의 영향 하에 대학 선배인 김유택과 한기범이 있던 기아자동차에 입단했다. 당시 기아는 이미 연세대와 중앙대의 특급 선수들을 스카우트해 유재학 정덕화 한기범 김유택이란 막강한 선수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여기에 허재가 합류하면서 화룡점정이 되었고, 그해 농구대잔치에서 기아는 첫 패권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다. 허재 역시 그렇지 않아도 높던 인기가 폭발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 중 한명이 된다.

1989년, 1990년, 1991년 기아자동차와 허재의 무적시대는 계속되었다. 1990년에 굴지의 가드 유재학이 은퇴로 팀을 떠났으나 강동희가 빈자리를 더욱 잘 메우면서 이른바 허동택 트리오를 결성, 기아는 더욱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매너리즘에 빠진 채 안티 팬들의 폭발 끌기 좋은 모습들을 계속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연세대 고려대, 현대 기아라는 전통적인 농구 구도에 갑툭튀한 존재라며 허재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거기다 허재의 개인기를 이용한 공격에 대해 ‘저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면서 반감을 표출하는 해설이 있을 정도로 허재의 농구 스타일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런 시각들이야 몇몇 사람들의 꽉 막힌 시선 정도로 볼 수 있는데, 허재의 진짜 문제는 저런 시선을 받는 게 아니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1990년 무렵부터 허재는 XX은행 등의 이름들을 가진 금융권에 속한 약팀들을 상대로 전날 먹은 술이 덜 깬 건지 뭔지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경기에 임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면서 골수 농구 팬들의 반감을 이끌어냈고, 그러다가 허재가 있는 팀이 지면 차라리 속이 시원할 텐데, 흐리멍텅하게 놀다가 경기 막판에야 술 깼는지 정신 차려서 경기에서 승리하고 상대팀은 울분의 눈물을 삼키며 코트에서 물러나는 양상이 벌어졌고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은 더욱 열이 오르게 되었다.

거기다 허재는 심심하면 음주사고를 일으키고 일으켜 경찰 신세를 지며 언론에 실렸다. 음주운전으로 면허정지, 거기서 또 음주로 면허취소, 그런데 좀 있다가 또 음주 등등의 사건을 일으키며 신문 스포츠면이 아니라 사회면의 주요 인사가 될 지경이었다. 거기다 항명 파동으로 기아자동차의 감독이던 방열을 팀에서 떠나게 만들었으며 - 허재가 정말 항명을 주동했는가 하는 문제는 이견이 있다. 실제로 항명파동이 직접적으로 불거진 코리안리그 대회 당시에는 허재는 아예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 때문. 하지만 방열 당시 감독은 허재를 주동자로 보고 있다. - 1993년에는 훈련에 임하는 자세와 사생활이 불량하다며 국가대표에서 제외되는 일까지 생기며 더더욱 안티 팬들이 증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시기 허재는 그야말로 “저 개잡놈이 우리나라에서 최고인 농구 선수에요."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

허재는 당시 자신이 연고대 출신이 아니라 중앙대 출신이라 이런 꼴을 당한다고 항변도 했는데, 당시 이런 저런 편파판정 문제 등을 보자면 허재가 연고대 출신이 아니라 불이익을 당했다고 볼 면도 있긴 하나, 술 먹고 사고 치기를 반복한 끝에 징계 먹은 건 중앙대 출신이니 뭐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죽하면 대학 시절 은사인 정봉섭조차 이 시절 허재의 징계에는 동의했을 정도니.

하지만 최전성기였던 시절은 허재에게 슬슬 위기가 다가오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아자동차 팀 내에서 연세대 출신과 중앙대 출신간에 갈등이 생겨나면서 기아는 제대로 된 선수 수급을 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기아자동차의 창단 멤버들이 은퇴해 나가자 전력 보충이 안 되어 허재를 비롯한 베스트 멤버 이외엔 믿을 만한 선수가 없어졌고, 결국 주전 멤버들에게 지나친 체력 부담이 가해졌다. 거기다 김유택이나 한기범은 부상 속에 1990년을 기점으로 크게 내리막길을 쳤고, 허재 역시 1991년 무렵 무릎 부상을 당하며 운동능력을 어느 정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선수 관리가 부실하던 실업 농구 시대만 해도 한국 나이로 30은 은퇴의 갈림길로 인식되었고, 허재는 그때 기준으로 슬슬 노장 축에 드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은 1993년 농구대잔치 시기에 폭발, 허재와 기아자동차는 팀 동료이던 강정수가 감독을 맡은 학교 후배 중앙대에게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는 굴욕을 겪고 만다.

이렇게 위기 상황이 오자 허재는 정신을 좀 차리기 시작했고, 결혼을 통해 정신적인 안정을 얻은 것도 허재가 자신의 농구를 추스르는 데 한 몫을 했다. 결국 허재는 1994년 농구대잔치에서 당시 사기에 준하는 주전 라인을 꾸린 고려대를 꺾고 농구대잔치 결승에 진출, 서장훈에게 테러를 가한 덕에 결승에 올라와 김현준이 최후의 불꽃을 태우던 삼성을 상대하게 되었다. 김유택 강동희가 돌아가며 삼성을 두들긴 후 허재의 원맨쇼로 결승을 마무리하며 허재는 여전히 자신의 능력이 대단함을 입증했다.

1995년 농구대잔치는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나는가라고 농구팬들이 생각했던 시즌이었다. 고려대는 신기성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전희철이라는 올스타 라인업을 만들어 농구대잔치 정규시즌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상무는 이상민을 필두로 문경은 조성원 등 대거 입대한 스타 선수들로 역대 최고 수준의 멤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영만이 새로이 합류했지만 기아자동차의 멤버들은 부상과 체력저하에 시달리며 몇 번이나 패배를 겪으며 겨우 겨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플레이오프에서 기아가 살아남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위기가 오자 허재는 정신을 좀 제대로 차렸다. 김유택의 주도로 팀 전원이 머리를 짧게 깎으며 정신을 다잡은 상황에서 허재는 플레이오프 8강에서 SBS를 상대로 50점을 몰아넣으며 자신의 위력을 재차 보여주기 시작했다.
4강에선 정규시즌 전승을 거둔 고려대를 1차전에서 완파한 후 체력을 아끼기 위해 2차전을 의도적으로 내준 후 3차전에서 다시 한번 완파하며 호랑이라는 고려대를 귀여운 고양이로 만들고 만다.  
결승 상대는 이상민이 이끄는 상무. 한국 농구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달성한 당시 이상민이라면 허재를 능가할 거라는 말도 있었지만, 허재를 막을 선수는 없었다. 기아자동차는 다시 한번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두었다.


1996년 허재는 음주운전으로 면허가 취소된 상태에서 또 다시 무면허 음주 운전을 저질러 체포 후 포승줄에 묶이는 꼴을 겪었다. 이 일로 아마추어 선수자격을 정지당했으며 국가대표자격 영구 박탈을 당했고, KBL 출범 전 자신이 최후로 출전할 수 있었던 농구대잔치에 출전하지 못했다. (국가대표 영구제명이 몇 년 후 풀리면서 허재는 199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른다.)


1997 프로 원년, 허재는 프로 원년에 포인트가드부터 스몰포워드 역할까지 해내고 외국인 선수를 상대로도 개인기로 농락하는 모습까지 보이며 활약했다. 하지만 팀 내에서 허재는 더 이상 예전같은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기아의 감독인 최인선의 입장에서 봤을 때 가드로서 패스를 해줄 선수로는 강동희가 있었고 주요 득점원으로는 김영만이 있었고 인사이드 득점원으로는 외국인 선수들이 있었다. 즉 실업 시절처럼 허재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허재는 자신의 비중이 줄어드는 데 반발했으나, 최인선은 프로농구 원년 챔피언결정전 최종전에서 허재를 전혀 기용하지 않고도 팀을 승리로 이끌어 내며 허재가 팀 내에서 잉여물임을 증명해냈고, 최종전에서 관중들은 허재를 연호했으나 허재는 단 1초도 코트 위에 서지 못했다.

97-98 시즌, 허재는 기아자동차를 떠나기로 맘먹고 그 이전에 자신의 힘으로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 명예롭게 떠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챔피언 결정전 상대인 이상민과 맥도웰이 버틴 현대는 사람들이 드디어 기아의 시대가 끝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강했고, 기아는 외국인 선수 저스틴 피닉스의 태업으로 인해 인사이드에서 절대 열세에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허재는 플레이오프에서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까지 당했다. 기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허재 스스로가 이 이상 최악의 상황은 없었다고 말할 정도의 결승전에서, 허재는 자신이 왜 농구 대통령이란 소리까지 들었는지를 증명했다. 인사이드에서 절대 우세에 있는 현대가 허재 단 한 사람에게 휘둘리며 패배를 거듭했고, 손에 깁스를 하고 눈덩이가 찢어져도 코트에서 달리고 득점하는 허재를 보고 허재에 대해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말을 잃을 정도였다. 하지만 7차전에 이르면서 허재가 자신의 모든 걸 짜내는 데도 한계가 왔고, 결국 허재는 팀을 우승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 MVP는 우승팀의 선수가 아니라 허재였다.

시즌 후 허재는 정인교와 트레이드되어 나래 블루버드로 팀을 옮겼고, 팀을 플레이오프로 이끌면서 활약을 펼쳤다. 누가 막아도 상대가 어느 팀이라도 허재 단 한명의 힘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지만, 이미 허재는 시즌 내내 그런 활약을 펼칠 수는 없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패배가 쌓여가면서도 허재는 다시 한 번 우승을 맛보겠다며 코트 위에서 버텨 나갔고, 코트 위 최고의 노장이 되어가면서도 자기 관리 속에 활약을 하고 자신이 부족해진 걸 인정하며 팀의 요구에 허재는 자신을 맞추어 갔다.

그러던 끝에 마침내 김주성이 드래프트로 입단하고 데이비드 잭슨이 팀에 합류했고, 허재는 공격기술이 부족한 김주성에게 포인트가드로서 최고의 패스를 공급하고 데이비드 잭슨을 어르고 달래며 팀을 승리로 이끌어갔다. 김승현과 마커스 힉스가 있는 전 시즌의 우승팀 오리온스를 상대로 허재는 코트 위에서 갈비뼈가 부러져 가며 투혼을 불살랐고, 결국엔 KBL 우승을 맛보았다. (이 우승은 오리온스 입장에선 계시기 작동 오류로 승리를 도둑맞은 천추의 한이 남는 경기이기도 하다.)

2003-2004 시즌이 끝난 후 은퇴했다. 은퇴식까지 크게 치루며 축복을 받은 명예로운 은퇴였지만, 은퇴는 팀이 허재도 모르게 발표했고 허재는 결국 그것에 따랐다는 말이 있다.



허재는 대학생 때부터 국가대표로 발탁, 강동희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 국가대표 포인트가드를 맡았다. 포인트가드를 맡는 한편 상황에 따라 파워 포워드까지 맡아야 하기도 했으며, 장신인 팀을 상대로도 위력적인 돌파를 잘 선보였다. 이충희와 함께 88 올림픽 당시 유럽의 강호들을 상대로도 활약한 건 당시 활약이 동영상으로 돌면서 나름 농구팬들 사이에 알려진 편.

한데 포인트가드를 맡았으면서 다른 팀원의 공격보다 자신의 공격을 우선시해 팀을 패배하게 한 일도 있다고 비판도 받으며, 이충희가 인터뷰에서 중국과의 경기 도중 자신에게 공격 기회가 왔는데 허재가 그걸 무시하고 자기 공격을 하다 실패했고 결국 중국에게 졌다며 허재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강동희가 국가대표가 된 이후론 슈팅가드 자리에서 뛰었다.

아시아선수권에서 중국한테는 이겼는데 필리핀에게 패배하며 우승을 놓친 일도 있고, 아시아선수권 결승전에서 중국을 상대로 맹활약하다 중국 선수 후웨이동의 에이스 킬러 짓에 나가떨어지고 결국 한국팀이 패배한 일도 있고, 아시아선수권 준우승인데 MVP를 받은 일도 있고,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그래도 중국을 따라가게 팀을 이끌다 5반칙 퇴장당하고 결국 대표팀이 패배한 일도 있고 등등, 여러 모로 에이스다운 활약을 했고 중국에게 승리한 일도 몇 번 있지만 아시아선수권 우승이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거나 한 일은 없다. 이런 점에서 결국 허재는 한계 있는 선수라며 비판받기도 한다. 허재가 없던 1997년 대표팀이 아시아선수권 우승을 차지한 일도 있고 하니. 하지만 중국팀이 에이스 킬러 짓을 불사할 정도로 활약했다는 건 마냥 허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세계대회에선 괜찮은 모습을 보인 편. 1990년에 이집트를 상대로 62점을 올린 건 세계선수권의 단일 경기 득점 기록 중 1위이고, 1994년 세계대회에서도 19점대의 득점에 스틸 1위를 차지하는 한편 돌파 이후 빼주는 패스로 서장훈의 중거리슛이나 문경은의 3점슛 기회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세계대회에서 허재는 대단한 활약을 보인 경기도 있지만 못난 모습도 보였다. 1990년 세계 선수권에서 허재는 팀의 주 득점원임에도 미국 상대로 단 9점에 그치며 희대의 참패의 원흉 증 한 명이 되거나 그리스 상대로 단 4득점에 그치거나 캐나다 상대로 단 2득점을 기록하거나 등등 말아먹은 경기도 여럿 있으며. 그래서 그냥 몇몇 기록만 가지고 허재가 세계구급 선수라고 주장하는 건 지나치게 허재를 띄우는 게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허재 이후, 국제 대회에서 정영삼의 반짝 활약 외엔 허재만큼 위력적인 돌파로 팀의 숨통을 틔워준 선수가 없다.



허재는 역대 한국농구 선수 중 최고의 테크니션이다.

기본기에 충실한 드리블부터 페이크 동작을 섞은 화려한 드리블까지, 비하인드 백 드리블이나 유로스텝이라고도 하는 지그재그 드리블에 순간적인 스핀 무브에 크로스오버까지 온갖 드리블 기술을 능숙하게 썼으며, 왼손잡이임에도 오른손잡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오른손을 잘 썼고, 양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좌우 어디로도 돌파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돌파한 후 양손을 사용해 어느 방향으로든 레이업을 올려 넣었으며, 높은 점프 후 체공 시간을 이용한 더블 클러치는 비슷한 수준의 선수가 그 뒤로도 찾기 힘들다.
드리블과 스피드를 살려 볼을 잡자마자 순간 단독 속공으로 치고나가면 두 세명의 수비수가 있어도 상대 팀은 파울이 아니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패스의 경우 돌파 능력과 연계해 수비수를 모은 후 밖으로 빼주는 패스부터 해서, 인사이드로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엔트리 패스, 감각적인 노룩패스, 속공 상황에서 빠르게 앞으로 찔러주는 패스까지 각종 패스도 훌륭했다. 특히 운동능력과 농구 센스가 좋은 동료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때 거기 딱 맞춰서 빈 공간에 빠르게 넣어주는 패스가 일품. 이런 패스와 드리블 능력 때문에 슈팅가드로서가 아니라 포인트가드로서의 허재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허재가 나이를 먹어가며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서 허재의 이러한 패스 능력은 더욱 빛을 발했고,  티지삼보에서 뛸 때는 은퇴 직전까지도 당시 팀 내 선수 중 가장 패스 잘 하는 사람은 허재였다.

한편 운동 능력을 살려 위로 확 솟구치는 듯이 쏘는 점프슛부터 턴어라운드 페이더웨이, 풀업 점퍼 등 각종 슛에서도 출중했다. (물론 슛 정확도로 치면 이충희같은 괴수보다는 밀린다.)

역대 가드 포지션의 선수들 중 최고의 포스트업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포스트업 기술이 웬만한 센터보다도 나을 정도. 은퇴 직전에 이르러서도 포스트업으로 손쉽게 득점을 해내기도 했다. 은퇴 직전 즈음 되면 계속 포스트업을 할 체력이 없는 게 문제였지만.

거기다 공을 가진 상태에서의 공격만이 아니라 공이 없는 상태에서의 움직임도 탁월했고, 항상 호흡을 맞춰 온 강동희와 김유택이 찔러 주는 패스를 받아 백도어 플레이를 해내거나 같은 팀의 스크린을 이용해 빠져나온 후 슛을 넣는 전형적인 슈터 플레이에도 능했다.

일대일 수비와 상대 패스의 맥을 읽고 중간에 끊어내는 스틸에도 능했고, 특히 스틸은 역대 최고 급.

이런 기술들을 떠받친 게 허재의 신체. 188이란 키는 2000년대 기준으로도 슈팅가드로서 작다 할 수가 없는데 허재가 대학 다니던 무렵만 해도 180대 후반의 인사이더가 흔했다. 즉 허재의 대학 시절로 치면 허재는 센터를 봐도 되는 키였던 셈.
허재 이전에도 신동찬이란 190대 포인트가드가 한국에 있었고 허재 이후에도 일단 은희석이나 기타 몇몇 선수 등 포인트가드에서 슈팅가드에 걸쳐 허재 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없었던 건 아니나, 허재는 비슷한 덩치의 선수들을 압도하는 스피드와 점프력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원래 탄탄했던 몸에 계속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더 붙여서 힘까지 좋았다. 그런데도 유연성까지 갖추고 있었다.

운동능력만 치면 허재 이상의 선수들이 있고 키만 치면 허재급의 키를 가진 선수가 여럿 있는데, 키와 운동능력과 힘의 조화로는 허재가 성인 농구계에 등장한지 20년이 넘었음에도 이후 허재급이라 할 만한 선수가 거의 없다. 그런 하드웨어에 최고의 기술이 겸비되었으니 저런 활약을 했던 것.

거기다 위기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정신력이 몸과 기술을 이끌었다. 권투선수 생활을 한 아버지에게 어릴 적부터 스파르타식 단련을 받은 탓에 마치 헝그리 복서같은 정신력과 독기가 길러졌고, 이것이 허재가 선수 생활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헤쳐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90년대 초의 나태함 이전에는 연습벌레로도 유명했다. 양손 드리블을 제대로 하겠다고 한쪽 손을 묶어놓고 연습을 하는 기행에 가까운 연습도 했고, 각종 드리블 기술들도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라 NBA 쪽 비디오를 보며 자신만의 연습으로 만들어 나갔고, 그외 여러 기술들도 누군가의 가르침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 익혀나간 게 많다. 그야말로 천재란 별명에 걸맞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상대 팀들이 허재를 막기 위해 폭력을 불사하는 거친 수비를 한 일이 많고 그 때문에 코트 위 폭력 사건에 휘말린 일이 많다. 한데 때린 일은 거의 없고 맞기만 많이 맞은 편.

허재가 얽힌 폭력 사건으로 유명한 게 1990년 기아와 현대의 농구대잔치 결승전에서 벌어진 허재와 임달식 사건. 허재를 마크하던 임달식이 스크린을 걸면서 허재에게 팔꿈치 공격을 가했고, 심판이 그냥 넘어가 버리자 이거에 맞은 허재가 임달식에게 머리를 들이대며 소리를 질렀으며, 그러자 임달식이 냅다 주먹을 허재에게 휘두른 것. 그런데 허재는 일단 맞기만 했는데 심판이 동시 퇴장을 선언했고, 이 때문에 허재가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자 현대의 센터인 김성욱이 냅다 달려와 허재에게 주먹을 휘두르면서 코트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었던 게 당시 사건이다. 허재 입장에선 억울하게도 허재는 맞았는데 원인 제공자라며 6개월 선수 자격 정지를 당했고, 임달식은 1년 자격 정지를 받아 직후 은퇴를 했다.
1991년에는 당시 현대의 선수이던 김광에게 경기 중 얼굴을 얻어맞아 전치 3주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선 아예 김광을 형사상 고소하기도 했으며, 김광은 구속처리 되었다. (한데 이렇게 고소까지 했던 김광을 허재는 코치로 받아들여 2011시즌까지도 KCC이지스에서 함께하고 있다. )

코트 위 폭력 사건으로는 맞은 일이 많지만 허재의 성격이 좋은 말로 화끈하고 나쁜 말로 욱 하는 성격이란 말은 나름 유명한 편. 선배라 해서 가리지 않고 성질을 내며 들이댄 일도 많다. 그래도 결혼 후 아내까지 부끄러워지니 성질을 죽이기 시작했다고 방송에서 말한 일이 있고, 감독이 된 이후로는 성질을 정말 많이 죽였다고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술 관련해서 사고를 친 일이 꽤나 많다. 선수 생활 부분에서 언급했듯 90년대 초에는 술 관련 사고로 꽤나 언론을 탔고,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해서도 음주 사고로 선수생활 6개월 정지라는 징계를 당했다. (1996년 일의 경우 언론의 과장이 있었고 과한 음주도 없었다고도 하지만, 그래도 숙소를 빠져나가 술 마셨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으니.)

이러한 사고들 때문에 2000년대 이후처럼 인터넷이 많이 발달한 시대였으면 서장훈 이상의 안티팬을 만들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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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나투
11/09/25 23:34
수정 아이콘
정독했습니다.

농대 마지막 몇년과 프로출범후 몇년간 허재를 보긴했지만 어렸을때라서 크게 기억에 남은건 없었는데 너무 정리를 잘해주셔서 머리에 쏙쏙 들어오네요.
허재에 대해서는 정말 대단한 선수라는 말밖에 안나오네요(여러의미로...)

용병이 주름잡는 현재의 프로농구에서는 두번 다시 허재같은 선수는 만날수 없겠죠?
Darwin4078
11/09/25 23:3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농구대잔치 당시 이충희선수의 현대를 응원하던 입장에서
허재가 이끄는 기아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허재가 좀 안좋을 때는 강동희가 긴 팔로 쓰윽 스틸하고 3점슛..-_-
한기범, 김유택은 그냥 꾸준했죠.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가장 도미넌트했던 선수는 역시 허재였습니다.
11/09/25 23:38
수정 아이콘
허재가 술먹고 경기해도 될 정도의 실력격차는 좀 문제였죠.
허재라면 젊은 시절에 NBA 진출했다면 어느 정도의 활약은 했을 거라고 봅니다.
적어도 일본의 모 선수보다야 훨씬 잘했겠죠.
RealityBites
11/09/25 23:41
수정 아이콘
허재 강동희 한기범 김유택 김영만 기아 5인방은 정말 진리였는데....그때가 그립네요.

전 개인적으로 그 중에서도 강동희를 제일 좋아했습니다. 절묘한 어시스트...항상 기대 이상을 해주던 강동희...
마바라
11/09/25 23:44
수정 아이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단숨에 읽었네요~ 재미있었습니다~
진리는망내
11/09/25 23:45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정리 잘하셨네요.
전 어릴때 문경은 우지원 좋아했었는데..
허느님맙소사
11/09/25 23:45
수정 아이콘
당시 프로농구 보는 걸 좋아했던 초등학교 대우 + 우지원 팬이었는데 이런 글 보니 추억이 새록새록 반갑네요.
홍성훈
11/09/25 23:47
수정 아이콘
허재가 한참 에이스였던 시절..
전 다른팀 팬이기도 하고...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허재라는 선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저 위에 있는 영상 현대..대 기아 의 챔피언 결정전..
저 경기 이후 허재라는 사람의 팬이 되었습니다..
또 나올수 있을까요..저만큼이나 리그를 지배한...에이스.
11/09/25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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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대통령이란 별명이 참 잘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현대와 기아의 결승전은 KBL 초기흥행에 절대적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어릴 적엔 '선배'들에 의해 무지하게 맞으면서 경기를 했었죠. 이때는 '팀'보다는 '연배'가 우선인 시기라.... 거의 일방적으로 린치를 당했는데 같이 파울을 주니까 거의 울먹이면서 항의하던 모습도 있을 정도로 허재에 대한 견제가 심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NBA는 외국인 선수가 굉장히 적었는데(지금과 비교해보면 없다고 봐도 될만큼) 가끔 허재는 NBA에서 통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농구를 너무 잘 알고, 기술이 너무 좋았으니까요.
11/09/25 23:51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허동택 트리오중에 강동희 선수를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키는 좀 작아도 탄력있는 모습과 긴팔에서 뻗어오는 스틸능력이 참 멋져보이더라구요.
매콤한맛
11/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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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는 용병때문에 망했죠. 혹자는 더좋은 용병을 데려와야한다고 하지만 용병과 국내선수들의 수준차이가 너무크고
그러면서 리그전체가 용병위주의 게임으로 바뀌었고 결국 용병에 의존한 리그에서 국내선수에이스의 등장은 불가능해져버렸습니다.
용병이 존재하는한 앞으로 허재와같은 국내선수 리그에이스는 나오지 않을겁니다.
그리고 용병이 주도하는 리그를 볼바에야 그냥 NBA를 보고 말죠.
목캔디
11/09/26 00:01
수정 아이콘
아.... 94,95, 96 시즌의 농구를 참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나네요.
중학생 때였는데.. 그때 연,고대를 상대로 고군분투하던 허동택 트리오가 생각나네요.
그때 정말 농구를 좋아했었는데.. 언제부터 농구에 대한 관심이 싹 사라졌는지 모르겠네요.
덕분에 좋은 글 읽고 추억에 젖어 있다 갑니다.
드라고나
11/09/26 00:05
수정 아이콘
허재의 NBA 진출 가능성이라, 허재라면 모른다 싶기도 하지만, 본문에도 적었다시피 세계 선수권에서 미국 대학 선발팀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할 당시 단 9득점만 기록한 일이 있다 보니 뭐라 딱 말은 못 하겠습니다. 그 경기에서 한국이 67대 146으로 졌는데 그나마 활약해준 선수는 20점 넣은 강동희와 16점 넣은 김현준이더군요.
김치찌개
11/09/2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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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그 당시 기아자동차는 정말 무적이었는데 말이죠

허재,강동희,김유택,한기범..+_+

농구대잔치때가 정말 재밌었던거 같아요

농구 대통령 허재!!
아나이스
11/09/26 00:08
수정 아이콘
제가 당시 어릴때라서(90년생) 허재의 농구대잔치 시절을 제대로 보진 못했습니다만
그래도 6살때부터 자주 보면서 아무것도 모르던 그 때도 참 저 선수 잘한다 생각 많이 들었는데...

전 이 글 보니 그저께 봤던 충걱과 공포의 중국전이 떠오르네요
이런 선수가 있었으면... 귀화선수로 데려온 문난사는 말 그대로 충격과 공포의 3점슛 난사에
하승진 하는 거 보니 이 선수는 OS가 윈98인거 같고
그나마 그 부상에도 한국팀 득점의 반을 꽂아넣은 양동근이 그나마 보이던 최악의 경기였는데
(중국이 정말 못해줘서 이길수도 있었던 경기인데...)

경기력이 최악이었는데도 PGR에 그 흔한 질타글도 없는걸 보니 농구 관심이 정말 많이 줄었구나 싶어서 안타까웠네요
엄마,아빠 사랑해요
11/09/26 00:11
수정 아이콘
와~ 챔피언 결정전 저기에 제가 있습니다..하하

대전엔 야구팀인 한화이글스, 축구팀인 대전시티즌, 농구팀인 대전현대
90년대말, 2000년대초가 아마 대전에 있던 이 3개의 스포츠 구단의 전성기가 아니였나 싶습니다.
이상민,추승균,맥도웰,조성원,재키존슨 크크 너무 좋아했죠...
대전시티즌도 김은중, 이관우, 최은성 크크 정말 좋아했고
99년도에 한화우승할때 야구장 가서 열심히 응원했던 기억도 나네요 크크

근데..지금 생각하면 슬프네요.
잠잘까
11/09/26 00:15
수정 아이콘
당시에 고대,연대를 좋아하지 않고 기아를 좋아했던 이유는 불스의 피펜,조던,로드맨 이 강동희,허재,(김유택 or 한기범) 이 연상 되어서 더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물론 굉장히 어린나이라 주먹구구식으로 매치 시켰지만요. 하하...)

저 같은 사람 많지 않았나요? 크크. 제 친구들은 거의 그렇더군요.
11/09/26 00:20
수정 아이콘
오리온스가 우승을 도둑맞았던 시즌, 아직도 기억나네요. 정말 KBL에 정이 뚝 떨어지는 시합이었는데

농구대잔치때는 중앙대를 제일 좋아했었네요. 허당센터(조동기...물론 허당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하나 세워놓고 김승기-홍사붕-김영만-양경민이 미친듯이 3점 날려대는...
위원장
11/09/26 00:21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요즘 이런 글 저런 글들 보면 화룡점정을 화룡정점으로 자꾸 쓰던데...
이런 글에서는 정확하게 화룡점정으로 쓰는게 좋을 거 같아요.

그나저나 한기범, 김영만 선수가 같이 뛴 적이 있었나요? 흠... 기억은 없는데...
11/09/26 00:34
수정 아이콘
이런 글 정말 좋아합니다. 요즘 pgr에서 보기 드믄 글 ㅠㅠ 잘 봤습니다.
릴리러쉬^^
11/09/26 00:35
수정 아이콘
허동택 시절에는 제대로 못봤지만 허동만 시절에는 정말 농구 좋아했었죠.
스포츠에 그렇게 열광했던 마지막 시절이었던거 같습니다.
아 현대와의 그 결승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11/09/26 00:36
수정 아이콘
어디서 본 내용이다 했더니 엔하위키에 있는 글이네요.
직접 작성하신 항목인가봐요. 잘 읽었습니다.

어렸을 때 기아차 응원하면서 보던 기억이 나네요. 흐흐흐
Je ne sais quoi
11/09/26 00:56
수정 아이콘
우리나라 농구에 많은 스타가 있지만 허재와 같은 지배력을 보였던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단언합니다(아.. 물론 팬심 좀 섞어서). 이충희의 슛은 정말 엄청났지만, 슛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허재에 밀리고, 서장훈의 독보적인 키와 운동능력(물론 국내에서 -_-)도 농구대잔치 시절 삼성의 린치로 인해 목부상을 당한 이후로 사실상 사라졌죠. 저는 그런 면에서 서장훈이 참 아깝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더러운 환경이 아니었다면 서장훈은 좀 더 날아올랐을 선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허재는 더 대단한게 90년대보다 더 더럽고 치사한 꼴이 많았던 80년대를 이겨내고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정말 지금 KBL에 허재 반만큼만 하는 스타가 있다면 농구 인기가 이 모양은 아니었을겁니다.
마바라
11/09/26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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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구보니까.. 이충희씨에 대해서도 궁금하네요.. 과연 얼마나 엄청난 선수였는지..
ArcanumToss
11/09/26 01:27
수정 아이콘
일단 에게로~
11/09/26 01:3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제가 유게에 올렸던 영상도 남기겠습니다..

https://pgrer.net/zboard4/zboard.php?id=humor&page=2&sn1=&divpage=17&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6279
절름발이이리
11/09/26 01:41
수정 아이콘
농구대잔치 시절 정말 응원했었는데 말이죠.
네오크로우
11/09/26 01:59
수정 아이콘
97-98시즌 현대 기아 결승전은 진짜 멋졌죠.. 이상민이 덩크한 경기는 꼭 졌던... 흐하하하....

총 두 차례 이상민이 노마크 투핸드 덩크슛을 해서 분위기 확 살렸는데 이상하게 그 경기는 졌죠... ㅠ.ㅠ;;;
태바리
11/09/26 02:02
수정 아이콘
제가 특이한 성격이라 최고, 최대, 최상 등 1인자들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유일하게 응원했던 1인자가 허재입니다.
이유는 잘해도 너무 잘해서...
97-98 결정전때는 응원하는 입장에서 봐도 부상 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질려버릴 정도로 잘했던 기억이 나네요.
11/09/26 06:45
수정 아이콘
허재 감독이 전태풍 선수에게 "내가 젊었을땐 넌 상대도 안돼." 라고 얘기했던게 생각나네요.
유연성 탄력 시야 슛감각 드리블 어느하나 빠질게 없고 다만 키가 좀더 컸으면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nba가서 족적은 남겼을거라 생각합니다.
Dornfelder
11/09/26 09:20
수정 아이콘
허재 감독이 선수 시절에 요즘의 선수들처럼 체계적인 트레이닝과 자기 관기가 되었다면 얼마나 더 대단한 선수가 되었을지 궁금해 집니다.
개평3냥
11/09/26 09:29
수정 아이콘
85년 현대와의 농구대잔치 결승전은 당시 현대팬이었던
내가 이후 현대라면 아예 쳐다도 안보게된 경기였죠
팬이었던 내가 이건 경기가 아니다 이건 그냥 개판이다라고
분노할정도로 ..
특히 인상에 남는게 단독찬스에서 파울로 슛을 막으니 득달같이
달려와 파울을 한 중앙대선수를 사실상 집단린치를 가하던 현대선수들은 정말
그러면서 자기들은 김유택과 허재에게 아예 대놓고 발길질을 하고 다리가 부러지건
말건 걸어넘어뜨려 속공찬스를 무산시키게 하고 그런데도 파울을 불지않고
나몰라라 하던 심판까지
경기후반 중앙대선수들은 더이상 경기를 하는건 아무 의미가 없다 이건
경기가 아니다 하고 중앙에 일렬로 서 그냥 경기를 포기하고 그런 선수들을
비열하게 조롱하던 현대선수들과 당시 방열감독의 모습은 내가 왜이런팀을
좋아했나(뭐 솔직히 이충희선수 때문이었지만)하고 후회까지 들게 했던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아주 안좋은 시합이었습니다.
방열감독과 허재 선수와의 사이가 안좋을수 밖에 없는게
당시 저시합에서 허재 다리가 부러지게 해라 라고 했다죠 방열감독이
실재 허재는 저시합에서 발에걸려 넘어지고 고통에 몇번이고 고트를 굴렀습니다.
시합끝나고 다음날 모든 신문들이 현대의 우승도 우승이지만 그 더티한 플레이와
심판의 농간에 대해 자성과 징벌이 있어야 한다고 할정도로
Noam Chomsky
11/09/26 11:21
수정 아이콘
무슨 위키에 있는 글 컨트롤 C+V 한 줄 알았네요. 덜덜.
제가 응원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인정하는 선수이긴 합니다. 그 시절이 그립긴 하네요. 좋은 글 감사해요.
王天君
11/09/26 14:35
수정 아이콘
무릎팍 도사 뺨치는 글이네요. 한 개인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그것도 객관적으로 쓸 수가 있다니.
허재감독의 선수 시절에는 어머니의 광적인 응원 덕분에 멋도 모르면서 속공속공을 외쳐댔지요 하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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