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1/09/28 04:42:48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번외편. 김조순과 순조

실록에서 심환지를 쳐 봤습니다. 정조 때 278건, 순조 때 171건이 나옵니다. 순조 2년에 죽었는데도 이만큼 나오네요.
김종수를 쳐 봤습니다. 정조 때 514건이나 나옵니다.
채제공을 쳐 봤습니다. 670건이네요. 영조 때도 186건이 나옵니다.
홍국영을 쳐 봤습니다. 252건입니다.

김조순을 쳐 봤습니다. 정조 때 47건, 순조 때 167건입니다.

실록에서 나온다는 건 그만큼 한 게 많다는 뜻이고, 권력자라는 뜻일 겁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도 포함되겠지만, 그건 심환지 등도 마찬가지일 테니 넘어가죠.

김조순이 죽은 건 순조 32년. 그 후에 나오는 10건을 뺀다면, 32년동안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오른 건 157개입니다. 나눠봤습니다.

실록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건 1년에 4~5개 수준입니다.

1. 정조 때
안동 김씨의 유명한 인물이라 하면 역시 김상헌이 있겠고, 신임 사화로 유명한 김창집이 있겠죠. 이인좌의 난 때도 안동은 동조하지 않아 경상도에서 충성을 지킨 고장으로 유명했습니다. 애초에 안동이 어딥니까. 고려 태조 왕건 때부터 신임받던 고장입니다. 조선 때도 명문 가문으로 대접받았죠. 이들 중 서울에 모여 살던 이들을 장동 김씨라 부릅니다.

김달순 같은 벽파도 있었지만 안동 김씨의 대부분은 시파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엔 김조순이 있었습니다.

김조순. 정조 9년에 처음 과거에 급제합니다. 그 이후에 한 번 파직되기도 했지만 나름 순탄한 벼슬살이를 했죠. 하지만... 제대로 걸린 일이 있는데, 바로 패관 소설을 읽었다는 것입니다. 열하일기를 대표적인 패관 문학으로 찍은 정조는 이런 것들을 절대 보지 말라는 문체반정을 일으킵니다. 이 과정에서 김조순도 걸렸고, 김조순은 마침 청나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정조는 [압록강을 넘기 전에] 반성문을 받아 오라고 했습니다.

헌데 그 반성문이 참 잘 쓴 모양입니다. 정조는 오히려 그를 칭찬합니다. 천주교 박해에도 소극적이었던 정조입니다. 유교가 바로 서면 다들 돌아올 거라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김조순은 돌아왔다고 본 거구요.

정조 9년에 등장했음에도 그의 모습은 정말 찾기 힘듭니다. 나름 길었던 정조의 치세에 단 46건 -_-; 하지만... 정조는 존재감 없던 그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했죠.

"두번째 세번째 간택을 한다지만, 그것은 겉으로 갖추는 형식일 뿐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장인)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 (24년 2월 26일)

간택은 요식행위일 뿐, 정조는 처음부터 김조순을 마음에 둔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그를 우대했고, 죽기 전에도 자기가 있던 영춘현에 불러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비밀 얘기를 김조순은 기록해서 남겼는데, 이를 "영춘옥음기"라고 합니다. 여기서 정조는 순조를 정말 간곡하게 부탁했다고 하죠.

사실 정말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홍봉한의 위세를 생각하고, 정조가 외척에 대해 가졌던 혐오를 생각해 봅시다. 결국 정조 때는 외척이라 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홍국영이 대신 외척이 되려다 물러나야 했구요. 그랬던 정조였습니다. 이 일은 정조의 정치 철학 자체를 부정한 거였죠.

정조는 김조순이라면 그렇게 세력화 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조순의 행동은 그 이전의 외척들과는 전혀 달랐거든요. 그 이후를 봅시다.

2. 정순왕후 수렴 청정기
정순왕후는 남인들은 신나게 숙청했지만, 정작 가장 위험한 김조순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정조의 뜻을 따라 건드리지 않은 것인지, 이미 힘이 커져서 건드리지 못 한 것인지는 의문이죠. 이 때 김조순의 태도도 트집 잡기 힘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미 연소한 서생으로 훈신이나 척신이 양쪽에 의거할 만한 데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장신에 새로 제수한 작질을 속히 삭제시켜 주소서"
"신은 죽는 것이 마땅한데도 죽지 않았고 떠나야 마땅한데도 떠나지 않았으므로, 부끄러워서 움츠리고 근심하며 두려워하여 가슴속에 품은 심정을 나타내지 못한 지가 지금 1년이 되었는데"
"아! 신은 곧 어리석은 하나의 쓸모 없는 선비인데"

-_-;
장용영의 대장으로 앉혀도 안 된대요. 형조 판서도 싫대요. 이조 판서도 싫다고 합니다.

이 때 김조순의 모습은 철저히 몸을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핑계도 참 재밌는데, 이런 일에 척신이 앉는 게 맞지만 나는 그럴 자격이 못 된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임금의 장인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순왕후는 그를 나라의 장인, 국구로 대우했습니다. 권유가 김조순을 공격하려 했다가 심환지, 정순왕후 양 쪽 다 받아들이지 않은 적도 있죠.

그러다가 심환지도 정순왕후도 죽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김조순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벽파가 다 쫓겨났습니다. 그 때도 김조순의 이름 석 자를 볼 수 없습니다.

어쨌든 반대파가 다 없어졌습니다. 이제 김조순의 시대죠.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3. 순조 때
"오직 생각건대, 이제부터 이후로 벼슬살이를 사양하고 인사를 멀리 끊어버린 채 교야 사이에 자취를 놓고 임천 아래서 심정을 펴, 죽을 때까지 스스로 조용히 지내며 이 세상과 서로 잊어버려야 할 뿐입니다."
"신과 같은 자는 그 행적을 가지고 보면 조정의 혹과 같은 존재이며 그 벼슬을 가지고 보면 은택을 밀어주심에 남음이 있으므로, 위와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좌우로 떳떳함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빨리 교체하고 해임시키도록 허락하소서"
"한가로이 해를 보내게 허락하여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
어쩌라구요. -_-;
저 중에는 그냥 괜찮은 사람을 추천하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한 말이 그런 건 현명한 사람이 해야지 나 같은 사람은 조정의 혹과 같아서 안 된다, 이런 말을 했죠. 이쯤 되면 짜증나는 수준입니다.

그가 한 걸로 돼 있는 유일한 게 바로 정조의 능을 옮긴 겁니다. 그는 정조의 능 자리가 좋지 않으니 옮기자고 했고, 정말 물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하죠. 그걸 주도한 공으로 순조는 상을 내리는데, 이것까지 거부합니다. -_-; 심지어는 아내가 죽자 순조가 세자를 보내서 조문했는데 그것도 예에 맞지 않다고 거절했죠.

그러다 죽어요. 네, 그걸로 끝이예요. -_-;

이런 모습을 보면 벼슬을 거부하는,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형적인 유학자의 모습이요 지금까지의 외척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런 모습도 보이죠.

"서손의 벼슬길을 막는 것은 역대와 만국에 없었던 일일 뿐만 아니라, 건국 초기에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중략) 어리석고 천한 신의 소견으로는 그들의 벼슬길을 터주는 것이 실로 천리를 밝히고 인륜을 바루며 훌륭한 인재를 다 쓰는 도리에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신이 이번 관서에 내려가 이미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으니, 다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자 등의 문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관서로 휴가 갔다가 자기가 본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얘기했죠. 이렇게 보면 오히려 명신의 모습입니다.

그랬던 그가, 세도정치의 시작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자... 평가해 볼까요. 정말 내용이 적네요 (...)

4. 그에 대한 평가
"애통하고 애통하다. 이것이 웬일인가? 기억하건대, 지난 경신년에 영고(정조)께서 소자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비도(도가 아닌 것)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라고 하셨는데, 어제의 일과 같아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어제 한번 상면하고서 갑자기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으니, 비통한 생각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그의 죽음에 대한 순조의 말입니다. 이외에 그의 졸기를 보죠.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 없이 맡겼었다."

그가 받은 시호는 충문공, 문신으로서 최고의 시호였습니다. 거기다 영의정에 추증되죠. 살아 있을 때는 판서 위로는 임명되지도 않았고, 임명돼도 언제나 거부했던 그였습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그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고 있지만 자손들이 탐욕스럽다고 했죠.

정말 칭찬일색. 지금이야 나라가 바뀌어서 그렇지 조선왕조가 그대로였다면 이 평가가 바뀌기나 했을지 궁금합니다. 이 정도의 대우를 받은 사람이 조선사에 얼마나 있을까요?

하지만... 이제 그 이면을 보죠.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을 총괄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을 보호하고 군덕을 성취하며, 정의를 굳게 지키고 선류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 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역시 그의 졸기에 있는 내용입니다. 벼슬을 사양하기만 했던 그가 모든 일을 다 맡아 했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홍경래의 난 때도 그들이 명분으로 삼은 건 김조순과 반남 박씨 박종경이 국정을 주무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한 일은 무엇일까요?

5. 안동 김씨
김이영, 김이교, 김이재, 김희순, 김이양... 순조 때 벽파를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이들입니다. 이들이 들은 말이 벽파의 역모였고, 이들의 상소를 통해 벽파가 물러난 것이죠. 이들은 모두 안동 김씨입니다. 이들의 구심점이 바로 김조순이었죠.

홍경래가 김조순의 세도를 명분으로 들고 일어난 것, 졸기에 적혀 있는, 모든 일을 총괄했다는 내용, 안동 김씨가 주축이 된 벽파 공격.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하죠. 김조순은 직접 하지 않고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했다는 것입니다. 위키백과 보니까 아예 섭정을 했다고 돼 있네요. 이건 아니구요. -_-;

그 이후에도 안동 김씨의 득세는 계속됩니다. 쭈욱~ 하지만 김씨만 나선 건 아니었습니다. 순조의 외조부 반남 박씨도 건재했고, 효명세자의 장인 집안 풍양 조씨도 있었죠. 하지만 이들의 싸움은 김조순 대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손을 잡은 거라고 봐야겠죠. 이들은 모두 외척, 이제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김조순이 겉으로는 모든 걸 사양하는 동안, 조정에서는 그의 사람들이 가득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죠. 아니 대원군조차도 그들을 아예 내쫓지 못 했습니다. 어쨌든 그들이 실력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6. 순조
이런 점에서 생각해 봐야 될 것이 순조입니다. 흔히 김씨의 세도가 너무 강해져서 그가 기를 펴지 못 했다고 하고 있죠. 문제는... 그가 이것을 이길 생각이 있었느냐입니다.

벽파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순조가 보여 준 모습은 확실히 한 나라의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김성길의 상소에 대처하는 모습 역시 나쁘지 않았죠. 안동 김씨에 끌려가기만 했다면 김성길이고 그 배후인 김일주고 다 죽였을 것입니다. 반면 안동 김씨에 맞설 생각이 있었다면 그걸 공론화 시켰겠죠.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조용히 묻어 두었죠.

그가 성깔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왕실에 관련된 것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밀어붙인 적이 많았습니다. 이인의 자식들까지 죽이라는 말에 그는 전에 없이 화 내면서 반대했습니다. 결국 그의 생각을 관철시켰죠.

김조순은 정조가 순조의 후견인으로 둔 사람이긴 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손을 못 댄다면, 다른 안동 김씨들은 어땠을까요? 그들의 위세가 정조 때의 홍씨보다 덜 했을까요? 하다가 그 스트레스로 죽을 순 있었겠죠. 하지만 그는 시도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비교할 수밖에 없는 그의 아버지, 정조를 보면요.

오히려 그는 정치에서 손을 떼려는 모습만 보여줍니다. 10년 이후부터 병에 골골거리던 그는 27년에 마침내 열아홉 살 효명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명합니다. (홍인한으로 인한 학습효과였는지 이 때 신하들은 거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효명세자는 일을 잘 했고, 순조는 기뻐하며 몸조리를 했죠. 영조 때와는 달리 그는 정말 세자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정치에서 손을 완전히 뗐죠. 그런데...

세자가 죽었습니다. 역시 암살설이 돌고 있습니다만... 이 때 순조의 슬퍼하는 모습입니다.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상제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장차 우리 나라를 두드려서 망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덕스럽지 못하여 신명에게 죄를 얻어 혹독한 처벌이 먼저 윤사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장차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의지하고 어디에 호소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곡을 하려고 하면 소리가 먼저 목이 메니, 천하와 고금에 혹시라도 국가를 소유하고서 나의 정경과 같은 자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보기만 해도 슬픈 말이죠. 이 이후 순조는 다시 친정을 하게 되지만... 역시 별 다른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 옮겨 보죠.

"군신 상하가 이미 어지러워진 심신을 수습하여 내 몸을 조섭하고 보호하며 어린 세손을 보도하고 양육하며 소민을 따르게 하여 보호하는 것으로 해를 보내면서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렵게 여겨야 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6, 7개월 동안 조정에서 다른 것을 꾀한 것은 없고, 날마다 시끄럽게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한 것은 다른 사람을 탄핵하거나 다른 사람을 죽이도록 하는 논의가 아니고는 한 가지도 들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정말 어떠한 시기였는가?"

왜 싸움질만 하냐는 거죠.

이후에도 슬픈 일은 계속됩니다. 세자가 죽은 2년 후에 공주 두 명이 죽습니다. 이 때 그의 마음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겁니다. 이 년 후에 그도 결국 눈을 감습니다.

즉위 초에는 나름 부지런하긴 했습니다. 벽파를 축출할 때의 모습이 그렇고, 백성들의 민생을 살피는 것도 그리 게을리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목표가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결정은 비변사에서 내려졌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안 그래도 커져 버린 비변사, 이제 거의 모든 결정은 비변사가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변사를 지배한 것은 안동 김씨와 반남 박씨 등 외척들이었죠.

정조를 견제했던 홍씨 가문과, 정조가 오히려 순조를 부탁했던 김조순은 확실히 다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태종 때의 공식 숙청을 생각해 봅시다. 그런 걸 총괄해야 하는 건 결국 순조였습니다. 하지만, 위의 외침에서 볼 수 있듯 순조는 정치에 염증을 느꼈고, 오히려 김조순에게 이 모든 것을 일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외척들은 이미 조정을 지배했습니다.

순조는 억울할 겁니다. 어쨌든 김조순은 믿을 만 했고, 그는 효명세자든 김조순이든 믿을 만한 신하에게 정치를 맡겼습니다.
김조순도 억울할 겁니다. 그는 딱히 다른 이들과 싸우지도 않았고, 유교적인 미덕을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자기 편 등용하는 거야 옛날부터 있던 거였잖아요? 홍경래의 난이야 있었지만 역모가 없었던 때가 얼마나 있었겠어요.

하지만... 이들이 죽은 이후 조선은 확실히 망조를 보이게 됩니다. 결국 이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로 봐야 될 겁니다.

7. 당파와 외척
조선이 건국할 때부터 대간들은 참 유별났습니다.
세조로 인해 훈구파가 만들어졌을 때, 당시야 어쩔 수 없었지만 성종 대에 이르면 사림들이 대거 진출해 신나게 왕과 대신들을 깠습니다. 이들은 명종 때까지도 숱하게 사화를 겪었지만 계속 일어났죠.
동인이 집권했을 때 외척이었다 하지만 심의겸의 편이 있었고, 중립을 지키던 율곡 이이가 있었습니다.
동인서인이 계속 집권을 반복하는 동안에도 선조는 어느 한 쪽을 확실히 죽이진 않았죠.
광해군 때는 대북 집권이 계속됐고 인조 때는 서인 천하가 됐지만 남인은 마이너라 해도 여전했습니다.
효종, 현종을 거쳐 서인이 집권했을 때, 윤선도를 대표로 남인들은 여전히 서인들을 견제했죠.
어차피 적이 없어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려서 싸웁니다.
마지막으로 정조 때는 시파와 벽파가 허구헌 날 싸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세도 정치 때와 이 때를 비교해서 큰 차이는 없습니다. 집권층은 신나게 비리를 저질렀죠. 부를 축적하고 자기 편만 추천하고 반대편은 씨를 없애버릴 정도로 증오하는... 하지만 한 가지 가장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때까지의 다툼의 중심은 언제나 당파, 당의 생각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도 정치 때는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믿는 건 가문, 뭉치는 것도 가문이었죠. 학식과 실력, 스승을 중심으로 모였던 당과는 달리 이제는 큰 가문의 대문 앞에서 기웃거려야 했습니다. 이들을 비판해야 할 대간들 역시 그들 가문에서 나왔고, 결국 이런 비판과 견제가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김조순이 죽은 후, 남은 건 가문들끼리의 세력 다툼 뿐입니다.

율곡 이이는 상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들 청백리로 남기 위해서 세금을 최대한 낮게 거두려고 한다구요. 유교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던 조선, 아무리 긁어모으려 해도 상대가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한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별 거 아닌 거에도 문제삼는데 진짜 문제를 일으키면 어떻게 될까요. 세도정치 때는 이게 없었습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크게 잘못은 없습니다. 순조도, 김조순도, 그 이후의 안동 김씨들도 문제 일으킨 놈들은 일으켰지만 괜찮은 사람은 괜찮은대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의미가 없죠. 중요한 건 세도 정치 자체거든요. 나름 기대를 받고, 지금도 많은 아쉬움을 일으키는 효명세자. 그는 비변사를 견제하고 안동 김씨를 견제하며 왕권을 키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다를 게 없어요. 그가 안동 김씨의 대항마로 키우려 했던 이들 역시 풍양 조씨입니다. 똑같은 외척이예요.

이후 대원군을 거쳐 민씨 세도 정치기까지, 조선은 확실히 망조를 보입니다. 이 때부터는 그냥 살아 있기만 했다고 봐도 될 겁니다. 정말 묘하게도 외적으로 가장 큰 위기에 처한 시기와, 내적으로 가장 크게 무너진 시기가 일치합니다. 천명일까요?


8. 김조순
세도 정치의 원흉이라는 김조순. 일단 그 면면으로만 보면 그가 크게 잘못한 것은 없고, 오히려 명신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하지만... 시대는 그가 남긴 걸 치유해 줄 수 없었습니다.

명종 때 외척들이 날뛰긴 했지만 그 대항마인 사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때는 대항마가 없었죠. 농민 봉기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서학이 들어오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지만 세력화 되지 못 했고, 그렇게 힘든 세월을 겪고도 조선은 어떻게든 견뎌냈습니다. -_-; 근대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이 밥 많이 먹는 걸 기록했었죠. 아예 들고 일어나 나라를 바꿔야 될 정도의 힘도, 그럴 필요성도 그리 느끼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나마 대원군이 이들을 견제하겠다 해서 시체가 풍화된 지 오래된 북인들을 다시 끌어올립니다. 뭐, 그 때는 늦었죠.
전근대일 때도 그런데, 그 때는 근대로 전환하는 시기였습니다. 교체기답게 새로운 사상에 물들은 이들도, 기존의 사상을 어떻게든 지키려 하는 이들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모든 게 늦었습니다. 개화파들은 친일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고 위정척사파들은 이 상황을 타개할 어떠한 방법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이전에, 조선 내부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김조순을 그 원인으로 꼽을 수밖에 없죠. 그리고 순조에게도 방임의 죄를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그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현실주의. 순조는 시파의 지지를 분명히 했고, 정조의 뜻을 잇는다는 것도 확실히 했습니다. 김조순은 그럴 순조를 돕기 위해 선택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조의 가장 큰 바램이 무엇이었을까요? 사도세자 추숭이었죠. 벽파 몰락 후, 그런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한 건 오직 현상 유지 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갈 생각도, 의지도 없었던 거죠. 그러는 동안 세상은 계속 바뀌어 갔습니다.

오히려 김조순의 처세술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전의 외척들처럼 마구 비리를 저지르고 상대편을 없애 갔다면 그에 대한 대항마가 어디서든 생겼겠죠.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는 제법 안정적으로 나라를 이끌어 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조선은 회생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문들간의 다툼, 세도 정치의 문제점은 김조순이 죽은 후에야 나타납니다. 이미 모든 게 늦었던 거죠. 김조순이 살아 있었을 때, 세도 정치가 제대로 형성되기 전이었다면 혹 모르겠지만... 김조순이 너무 잘났던 게 오히려 문제였죠.

평가만 본다면 조선시대 어느 명신들과도 같이 설 만한 김조순. 그가 정말 아무런 사심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세도정치의 원흉으로 평가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

자 다시 본편으로 ( - -);;
뭐 조선이 한창 때다 하더라도 근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은 듭니다. 하지만 일본을 욕 하기 전에 조선은 충분히 막장이었고, 그 책임은 당연히 그 때의 집권층에 물어야 되죠. 억울하다 억울하다 하지만, 그 때 왕실이 한 것은 왕실을 지키는 것, 그것도 일본의 힘을 빌려 지키려 한 것 밖에 없어 보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Je ne sais quoi
11/09/28 04:52
수정 아이콘
김조순의 정체(?)는 지금까지 책에서 읽었던 것과는 다르군요!! 놀라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도 정치의 원흉(?)인 것은 맞는게 더 놀랍네요. 역시 인간 개인은 믿으면 안 됩니다. 집단은 크기에 상관없이 체계가 중요하네요.
Nothing on you
11/09/28 08:29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의 선조로서.. 그리고 여러 자료들을 보유한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이 분(김조순)은 서예에도 남다른 재능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안동 김씨 일가의 일기 같은 것도 소유하고 있는데
꽤 많은 분이 청렴결백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결과적으로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했지요..
구국강철대오
11/09/28 09:50
수정 아이콘
단순한 편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가정을 세우면.

막말기에 막부가 유능했다면?
11/09/28 10:00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발전은 어떠한 부족함이나 불만에 의한 반대급부의 성장으로 인해 생겨난다 생각하는데,
조선 후기엔 그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거 같네요.
특히나 시스템의 붕괴. 이게 정말 무섭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정조 이후의 조선사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2273 [일반] 라그나로크 - (1) 예언 [15] 눈시BB5069 11/10/12 5069 0
32262 [일반] 북유럽 신화 - 등장 신과 거인 [30] 눈시BB9382 11/10/11 9382 0
32257 [일반] 북유럽 신화 - 창세와 대략적인 설명 [47] 눈시BB8497 11/10/11 8497 1
32241 [일반] 글을 써 보아요. [24] 눈시BB5793 11/10/10 5793 5
32223 [일반] [신화] 그리스 신화에도 엔딩은 있다(!?) [27] 눈시BB14435 11/10/09 14435 2
32206 [일반] 고려의 마지막 명장 - 예고편 [28] 눈시BB7761 11/10/08 7761 2
32184 [일반] 한국의 종특, 교육열에 대해 [51] 눈시BB11952 11/10/08 11952 2
32154 [일반] [속편?] 멈춰 버린 전통 [42] 눈시BB11694 11/10/06 11694 6
32134 [일반] 와패니즈, 서양 속의 일본 [추가] [100] 눈시BB14609 11/10/05 14609 9
32111 [일반] [야구?]By the Rivers of Babylon~ [13] 눈시BB5151 11/10/04 5151 0
32064 [일반] 그 때 그 날 - (완) 어심을 읽어라 [10] 눈시BB7244 11/10/01 7244 1
32060 [일반] 그 때 그 날 - 임오화변 [27] 눈시BB6353 11/10/01 6353 4
32057 [일반] 그 때 그 날 - 번외편. 폐세자와 죄인의아들 [7] 눈시BB6344 11/10/01 6344 1
32038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완) 정조 [26] 눈시BB5270 11/09/30 5270 4
32037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완) 나경언의 고변 [5] 눈시BB5722 11/09/30 5722 0
32023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5) 세손의 적 [8] 눈시BB4614 11/09/29 4614 1
32021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5) 궁 밖으로 [6] 눈시BB5591 11/09/29 5591 1
31992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번외편. 김조순과 순조 [10] 눈시BB4826 11/09/28 4826 2
31991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번외편. 경종과 영조 [6] 눈시BB5631 11/09/28 5631 1
31973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4)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10] 눈시BB5736 11/09/27 5736 1
31950 [일반] 그 때 그 날 - 과거 (4) 아버지 아버지 [15] 눈시BB4830 11/09/26 4830 4
31928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3) 영남만인소 [12] 눈시BB5491 11/09/24 5491 1
31871 [일반] 그 때 그 날 살짝 외전 - 그란도 시즌 [38] 눈시BB6673 11/09/22 6673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