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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2/24 15:53:45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신라 vs 백제 (9) 백제가 멸망한 후...


"외통수에 몰렸으면 장기판을 싸게 물려야제." - 계백

백제와 신라의 마지막 장기, 그건 신라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죠. 200년 후에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며 리벤지 매치를 해서 성공합니다만, 이번엔 북에서 내려온 고려에 의해서 새로운 판이 만들어집니다.

그 현장으로 가 보죠.

1.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예전 이 글에서 두 가지 가능성을 얘기했습니다. 계백이 왜 자기 처자식들까지 죽이고 나와야 될 정도의 절박한 상황이 됐을까 한 거였죠. 첫째는 그냥 대군은 당을 막고 계백의 결사대가 시간을 버는 것, 그런데 이렇게 보면 백제가 멸망할 정도의 위기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반면 원래 계획이 어떻든 신라 먼저 막을랬는데 당이 생각보다 빨리 진군해 온 것, 때문에 신라에 맞서야 될 병력도 다 당으로 가야 됐고, 계백의 결사대는 말 그대로 버려진 말, 이 상황이라면 이해가 간다는 거죠.

뭐 처자식을 죽였다는 것 자체가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도 큽니다. -_-a

이런 생각을 한 번 해 봅니다.

그 때까지 중국은 단 한 번도 백제를 친 적이 없습니다. 눈 앞에 있는 고구려도 급한데 백제에 신경 쓸 이유는 없었죠. 무왕도, 의자왕도 조공은 섭섭치 않게 한 모양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 결과를 아는 우리야 그렇구나 하지만 선뜻 이해는 가지 않죠. 신라가 아무리 아부를 잘 했다 해도 고구려를 놓고 13만 대군을 뺀다는 건요.

이것이 당대 백제인이 생각했던 거라면? 그러니까, 그들은 아예 당과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거라면 어떨까요? 이렇게 본다면 13만 대군이고 뭐고 당과 직접 싸운다는 것 자체가 큰 공포였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고구려를 멸망시킬 뻔 했던 당이었으니까요. 즉, 내부의 혼란, 귀족들의 배반, 당의 병력 이런 것 자체를 떠나서 당과의 전면전이라는 상황의 변화를 백제가 받아들이지 못 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당은 정말 철저히 준비해 왔습니다. 신라도 마찬가지였죠. 수나라에서부터 이미 백제나 고구려가 아닌 신라를 파트너로 택한 것으로 보이고, 신라도 거기에 잘 맞춰 줬습니다. 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 김춘추, 김법민(문무왕), 김인문이 전부 순차적으로 당나라로 갔고, 김인문은 결국 대군을 이끌고 돌아왔습니다. 신라가 끌어들였다 하지만 -_-; 당은 이 때 삼국을 모두 집어삼킬 생각으로 온 것이죠.

삼국시대에 단순 복속 수준이 아닌 나라 멸망을 전제로 한 전쟁은 몇 되지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이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을 때, 장수왕이 개로왕을 죽일 때, 장수왕이 포항 근처까지 밀어붙였다 막혔을 때 정도죠. 의자왕이 신라를 밀어붙이긴 했어도 신라 자체를 멸망시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당 연합군은 다른 것에 관심이 없었죠. 목표는 오로지 백제 멸망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여기에 대응할 만한 시간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으로 보면 성충, 흥수의 기벌포에서 막아야 된다고 하는 건 전쟁 때 이렇게 하라는 수준이 아니라 당과의 전쟁을 생각해야 된다 쪽이었고, 의자왕은 그 가능성 자체를 무시한 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신라군 5만이 과장된 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수를 믿는다면 신라는 전군을 끌고왔다시피했습니다. 백제의 경우 주력군의 수를 4만에서 6만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그와 비슷하거나 좀 덜 했겠죠. 평상시처럼 밀고 당기는 싸움이 아닌 아예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 그게 신라의 의지였습니다.

어쨌든,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당군이 8만이라는 주장도 있더군요. 13만은 신라군을 더한 총 병력, 혹은 흔히 하는 "호왈" 13만대군이라는 쪽으로요. 어쨌든 백제는 두 차례 요격합니다. 이 때 백제의 주력군이 소멸됐을 겁니다.


최근에 발견된 예식진의 묘는 그가 웅진성으로 도주한 의자왕을 배반하고 당에 넘기고 항복한 거라는 주장을 만들었습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죠.

웅진성은 고구려의 공격을 피해 임시 수도로 삼은, 방어에 정말 용이한 성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의자왕이 후방으로 피하면서 지방군을 끌어모아 시간을 끌며 방어하려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만약 예식진의 배신이 없었다면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게 의자왕의 계획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백제 내부의 혼란이 초반의 패배 자체에는 별 관련이 없을 거라 얘기했지만, 장기전으로 갈 경우 그 혼란은 치명적이죠. 예식진의 배반이 그 혼란의 근거로 쓰일 수도 있고, 나당연합군의 의지를 보고 도저히 저항할 수 없을 거라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의자왕을 잡지 못 한 것은 나당연합군에게도 치명적이었을 겁니다. 그 때문에 신라가 날짜 늦었다고 다 죽인다느니 협박했겠죠. 협박이라기보단 짜증 혹은 책임 덮어씌우기에 가까웠겠습니다만.

660년 7월 18일,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공식적으로 멸망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죠.

2. 백제는 죽지 않았다

"전우처리 문제, 거 죄다 소정방이가 알아서 거시기한다네? 계백아. 니가 거그 황산벌에서 하루이틀만 더 거시기해불믄 나가 소정방이랑 쇼부를 한 번 쳐보겄는디, 알아묵었재이?"


"협상은 없다. 약속과 명령만 있을 뿐이다."

의자왕은 (신라는 무시하고) 소정방에게 사신을 보내고, 자기가 직접 나서서 군사를 물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여수전쟁 편에서 썼듯, 의자왕도 이 때 입조를 거부하고 항복할테니 군사를 물려달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은 거부했죠.

한국 역사에서 국가의 멸망이라는 개념은 이 "입조"로 잡아야 될 겁니다. 당은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을 끌고 가면서 백제의 영토를 그대로 다스립니다. 다만 명칭은 웅진도독이 됐죠. 이를 소백제라 하고, 보장왕 역시 멸망 후 그대로 고구려를 맡으며 소고구려라 칭하지만, 이들을 더 이상 백제의 역사에 편입하거나 우리 나라라고 하진 않죠. 어차피 명목상 중국의 제후국으로 자처하던 시절, 진정한 의미의 국가 항복은 이 "입조"일 겁니다. 뒤에 역사에도 계~속 요구한 것이 입조하였죠.

웅진 도독을 맡은 자는 왕문도, 하지만 시작부터 거센 반항에 부닥칩니다.

그 주인공은 복신, 왕족인 듯 한데 일본서기에는 귀실복신이라 적고 있습니다. "귀신의 감화"를 받았다고 해서 고쳤다는데, 어쨌든 부여씨의 일파인 셈이죠. 삼국사기에는 무왕의 조카라 하며, 무왕 28년에 구당서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관위는 2위 달솔, 꽤나 높았어요. 당에서 무왕에게 처음 "신라랑 사이좋게 지내라"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사신이 바로 복신입니다. -_-; 아마 만감이 교차했겠죠.

당은 당대로 주력 병력을 다시 회군시키고, 신라는 웅진 도독이 설치된 것에 대해 어버버 버리고 있을 때, 그는 주류성에서  승려 도침과 함께 일어납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성을 구마노리성이라 하고 있는데, 이 때 복신이 이끌던 백제군이 몽둥이만 가지고도 신라 병사들을 제압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하나 지방의 백제군은 그 편제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 가 있던 부여풍을 급히 청하는 모습 등... 이 때문에 백제 멸망의 시점을 부흥군이 완전히 몰락한 시점으로 보기도 합니다. 저도 이게 꽤 설득력 높다고 생각하구요. 백제 전 영토가 나당에 떨어진 상황에서 반란이 일어난 게 아니라 사비랑 웅진성 정도만 점령된 상태였으니까요. 어쨌든 이 지역을 웅진 도독으로 묶긴 했으니 나당 연합군이 이들에게 백제가 망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무장 해제하려 했을 때 이들이 들고 일어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거병합니다. 이 때 열흘 만에 3만이나 모였다는 것, 단순히 반란군이 아니라 백제의 남은 역량이 모두 합쳐진 거라고 봐야겠죠. 주류성은 충남 서천부터 전북 정읍까지 꽤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다만 금강 근처의 어디라는 것은 어느 정도 합의된 것 같고요. 반면 임존성은 충남 예산군으로 비정되죠. 충남부터 전북까지 -_-; 확실히 전남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모양이고, 나당연합군 점령지역의 코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를 보면 의자왕이 좀 제대로 도망갔다면, 혹은 예식진이 배반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해지죠.

8월 26일, 신라는 임존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합니다. 당군은 급히 의자왕 등을 끌고 귀국하려 했죠. 남은 당군은 1만 명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백제 부흥군의 역공이 시작됩니다.

3. 백제 부흥의 깃발
9월 1일, 복신은 사미승 각종을 일본에 파견합니다. 일본은 이들이 도착한 후에야 백제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겁니다. 거기에 일본에 가 있떤 부여풍(혹은 부여풍장)을 보내달라 요청하죠. 한편 3일 소정방은 의자왕과 기타 왕족, 대신, 백성 등 총 1만 2천 명을 데리고 떠났고, 사비성에서는 유수 유인원(-_-;)이 1만군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때까지는 그들도 별 걱정하지 않았겠죠.

이 때 흑치상지는 백제의 성 200여성을 탈환했다고 합니다. 소정방과도 여러 차례 붙어서 이겼다고 하죠. 다만 이 탈환한 200여성은 직접 전투로 했다기보다는 백제의 지배권을 잃은 곳에서 다시 백제의 깃발이 올라갔다고 봐야 될 것 같아요. 이들은 금강을 경계로 나당연합군과 대치했고, 그 이남으로는 백제가 확실히 다시 살아난 거죠.

이런 흐름 속에 사비성 탈환 작전이 시작됩니다. 9월 23일부터 시작된 작전은 계속돼서 탈환은 실패했지만 대신 외성을 허물로 군량을 탈취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어 사방에 요새를 쌓고 수송로를 봉쇄, 고립시킵니다. 포위가 계속되던 중, 신라는 무열왕이 직접 김법민을 이끌고 사비성을 구원합니다. 한 달여간의 치열한 공방 속에 겨우 사비성의 포위는 풀리죠.

하지만 백제 부흥군의 위세는 그리 꺾이지 않았습니다. 겨우 사비성에 오는 걸 막아냈을 뿐이었으니까요. 복신은 일본의 지원과 부여풍이 반드시 와야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당나라군 포로 100명을 왜에 보냅니다. 자기들이 잘 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겠죠. 해를 넘기면서 당군의 공격도 있었지만 부흥군은 쉽게 막아냈고, 결국 유인궤에게 병력을 보내 웅진도독부를 지원합니다. 유인궤는 복신을 어떻게 구슬려 볼랬지만 실패합니다. 이 때 복신은 이렇게 말 했다 합니다.

"당이 신라와 서약하여, 백제인은 노소 가리지 않고 다 죽인 다음 우리 나라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했다는데, 가만히 앉아 죽음을 받음은 싸우다 죽느니만 못하기에, 모여서 스스로 굳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어 복신은 웅진강에 목책을 세우고 나당 연합군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김흠순 등이 이끄는 나당 연합군의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임존성으로 퇴각합니다. 하지만 신라군도 군량이 떨어져 퇴각했죠.

그 후에도 백제 부흥군과 신라군과의 일진일퇴는 계속됩니다. 하지만 신라군도 기어이 버티지 못 하고 물러났고, 여러 성이 다시 백제에 가담했으며, 이에 부흥군은 사비성의 포위를 재개합니다. 당군도 신라군도 제대로 버티지 못 했죠. 이 때 복신은 "언제쯤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마땅히 사람을 시켜 전송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당군을 야유했다 합니다.

신라의 상황도 안 좋아져서 6월에는 무열왕 김춘추가 죽습니다. =_=;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가운데 문무왕 김법민이 왕위에 오릅니다. 당은 고구려 2차 침공을 시작했고, 그런 가운데 웅진 도독은 말라죽고 있었죠. 당은 고구려 공격과 웅진 지원을 동시에 명했습니다. -_-;

한편 8월에는 마침내 부여풍이 도착합니다. 왜에서는 5천 군사로 그를 호위해 주었죠.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부터 해서 그를 백제의 32대 왕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니 이쯤되면 백제 부흥군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백제군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죠. 문제는... 역시 내분이었습니다. 이미 복신은 도침을 죽이면서 뭔가 거대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긴 자기가 백제 부흥군을 이끌다시피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제 막 왕이 된, 태자도 아니었던 부여풍에게는 큰 위협이 됐겠죠.

혹은 복신 위주로 뭉치긴 했지만 복신을 싫어했던 무리들이 부여풍을 중심으로 모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부여풍이 그를 죽일까 하는 것에 망설였다고 하니까요. 어쨌든 백제 부흥의 중심은 그였으니까요.

이 결정은 치명적이었습니다. 혹은 그 자체가 백제 부흥군의 한계였을 수도 있겠네요. 복신이 살아 있을 때부터 나당연합군의 반격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유인궤는 마침내 신라군과의 소통로를 열었고, 손인사가 이끄는 수군 7천명도 도착했습니다. 문무왕은 상복을 벗고 직접 백제부흥군을 공격했습니다. 그 유명한 쌀배달(-_-;)을 마치고 온 김유신부터 김흠순, 김양도, 김천존(다 김씨여 - -;) 등 신라를 이끌던 주력 장수들이 반격을 개시했죠.

이 때 왜에서 보낸 2만 7천명에 달하는 원군이 도착합니다. (정확한 규모는 각기 다릅니다) 복신을 죽여도 되겠다 했던 이유가 이게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죠.

4. 백제 부흥군, 궤멸
2차 여당전쟁이 끝나고, 복신이 죽었으며, 당과 왜의 지원군이 모두 도착한 663년 8월, 나당 연합군은 적의 수도인 주류성에 총공격을 가합니다. 이 때 당의 수군을 이끌던 장수 중에 옛 백제의 태자, 의자왕의 셋째아들 부여융이 있었죠 (...) 당은 부여융의 존재로 부여풍을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수군이 왜의 수군과 맞섰고, 땅에서는 신라군이 쳐들어 갔습니다.

이 때 왜군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이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고 쉽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 분명 숫자에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왜군은 철저하게 전멸했고, 이 영향으로 주류성도 함락됩니다.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

삼국사기의 묘사입니다.

663년 9월, 주류성이 함락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도주하면서 백제 부흥군은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흑치상지는 당에 투항했고, 지수신만이 남아 임존성에서 미약한 투쟁을 계속했지만 결국 임존성도 함락되었죠. 흑치상지 역시 이 전투에 선봉으로 나섰다고 합니다.

만약 백제 부흥군이 패했다 해도 어느 정도 여력을 남기고 있었다면, 분열되지 않았다면 백제는 충남에서는 힘들어도 그 이남에서 어떻게든 이름을 유지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철저히 깨지면서 남은 백제의 땅은 다른 운명을 맞게 되었죠.

당에서는 백제의 유민들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동시에 백제의 땅을 요구했고 부흥군을 치는 데도 큰 공을 세운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태자였던 셋째 아들 부여융을 끌어들입니다. 그를 웅진 도독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문무왕과 맹약을 맺게 했죠.

기껏 안간힘을 쓰며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킨 신라였지만, 아직 넘아야 할 산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문무왕이 이를 이겨내지 못 했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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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유... 이제 마지막 편만 남았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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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24 16:11
수정 아이콘
10편짜리 대작의 마지막편이 오겠군요. 흐흐.

중간에 '외성을 허물로' 오타요.
눈시BBver.2
11/12/24 22:07
수정 아이콘
휴 ㅠ_ㅠ; 그렇죠. 예고편, 0편까지 합치면 총 12편 되겠네요.
아차 수정할게요
주인공
11/12/24 17:05
수정 아이콘
적절한 브금이네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Je ne sais quoi
11/12/24 21:57
수정 아이콘
그림이 교과서 풍인데, 백강 전투가 교과서에 설명이 있었나요? 제 기억엔 없었던 거 같은데... 물론 제가 학교를 다닌 건 매우 오래 전... -_-;
11/12/24 22:33
수정 아이콘
잘봤습니다.!!!!! 연재 속도 안올려주면 테러할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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