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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09 10:04:01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창군 - 개략적인 얘기들
글 올리는데 하필 밑에 글의 내용이... 아우 진짜 이 대머리 안 죽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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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군을 우리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미군정의 주도로 하게 되었고 미군사고문관이 우리 경비대를 비이념적으로 육성코자 했으며 군사기술자(technocrat)를 중시했기 때문에 일본군출신과 만주군 출신이 빛을 보게 되고 광복군은 법통성 주장과 결부되어 빛을 잃게 되었다." - 창군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남한 내에서 군대를 만드려는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좌우익 합쳐서 30여개나 되는 조직이 만들어졌고, 서로 싸웠죠 -_-; 미군정은 이를 다 없애버린 후 군사영어학교를 세웁니다. 그들이 내세운 조건은 군대 경험과 미군과 호흡을 잘 맞출 수 있을지였습니다.

창군시 국군의 주요 자원은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 광복군으로 통칭되는 실제 광복군과 각 중국 군벌에 있던 이들이었죠. 일본군 내에서도 육사 출신과 학도지원병 출신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들은 각기 특징이 있었죠.

일본 육사 출신이야 "아시아 내에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일본군 경력과 군국주의 이념이었죠. 그리고 실제 더 큰 문제는 창군 후에 나옵니다. 나이도 나이고 영어도 잘 몰랐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너무 세서 -_-; 사사건건 충돌한 겁니다. 미국은 이들에게서 그 짜증났던 일본군을 떠올려야 됐죠. (...) 급히 필요할 때는 쓰긴 했지만 한국 전쟁 이전부터 주류에서 밀렸죠.

학도병 출신은 대전 후반이고 강제로 끌려간 것인데다 광복군으로 이탈한 이도 많았으니 이런 점에서 문제는 없었습니다. 반면 배운 기간이 짧으니 군사 실력은 부족했죠. 하지만 ROTC처럼 학교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았으니 훌륭한 재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들도 좌우로 갈려져 학병동맹(좌)과 학병단(우)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이죠. 거기다 강제로 끌려간 것이었으니 군대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만주군의 경우 군사적인 면은 일본군에 비해서는 딸렸지만, 일본 육사에 편입된 경우도 있으니 그렇게 딸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친일 문제가 있엇죠. 하지만 꽤 결정적인 부분이 있었으니, 이들은 고문관을 경험해 본 것이었습니다. 만주에서 일본군 고문관과 만주군 사이의 갈등을 겪어 본 이들이었고 덕분에 국군과 미 고문단 사이의 갈등에 익숙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광복군 출신은 정통성과 애국심 면에서야 두말할 나위 없었지만 군사적 자질에서 너무 뒤쳐졌습니다. 괜히 독립운동하면 삼대가 망한다고 했겠습니까. 이들은 배운 것도 적었고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는 게, 미국은 이들에게서 일본군에 진 중국군을 떠올렸습니다. (...) 그리고, 광복군 계열을 이끌던 김구는 이들에게 미군정에 참가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죠.

이렇게 창군의 시작은 일본군 출신과 만주군 출신의 독무대가 됩니다. 광복군 출신 중 여기 참가한 사람은 유해준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 뿐, 그 외에 이성가가 있는데 이 사람, 문제 있어요 (...) 여기서 국군의 컴플렉스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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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말에 세워진 군사영어학교를 기반으로 미군정은 창군을 시작합니다.


이런 미국에 협조한 것이 조병옥이었죠. 그가 미군에 소개해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이응준, 그는 대한제국무관학교를 졸업한 이였죠. 대한제국 멸망 과정에서 이들은 일본 육사에 편입되는데 이 때 지청천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한 무리와 홍사익처럼 일본군에 남은 무리로 나뉩니다. 남은 이들은 계림회를 조직했고, 일본군으로 계속 살아갔죠.

이들 일본 육사 출신들은 친일파에 직접 해당되는 인물들입니다. 사병들이야 말할 필요 없고, 만주국군의 경우 일본군에 직접 입대보다는 낮고 계급도 위관급 수준이었으니까요. 이들은 나름 주요 인사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 참가를 홍보했던 이들이었구요.


"내가 그 때 한국 무관학교 폐교와 함께 조국을 떠나지만 않았던들, 나는 오랜 세월을 일본 군인이 되어 이유야 어찌 됐든간에 우리 민족에게 송구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국군에 대한 참여 과정도 많이 갈립니다. 이응준처럼 초반에 협조해 산파 역할을 한 이가 있는가 하면, 가장 계급이 높았던 김석원과 이종찬 등은 1949년까지 근신하다가 유동열의 설득으로 참가하게 됐죠. 신응균의 경우 초반에 참가하긴 했지만 모든 특혜나 육사 임관을 거부하고 사병 입대합니다. 한편 신태영의 경우 그의 아들을 사병으로 참전시켜 아들이 전사했죠. 6.25 때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다 하지만 이게 그거죠.


한편 원용덕은 만주군 중령 출신으로 만주군 출신을 이끕니다. 정작 자신은 능력이 영 없었는지 미국이 무시하고 자르고를 반복하면서 이승만 편에 붙어서 김창룡처럼 전형적인 정치군인이 됩니다만 -_-;

이들 만주군 출신들은 기본적으로 명함 한두개씩을 들고 옵니다. 소련 점령지 + 북한이라는 장벽이 있는만큼 만주 내에서의 우익 계열 조선인들을 보호했고, 역시 만주와 북한에 있던 우익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한 번 기용된 상태였죠. 여기다 김구의 임정이 이들 모두를 포섭하려 했고 광복군 출신이라는 명함을 뿌려댔구요. 마지막으로 이것을 모두 뚫고 오면서 반공주의자라는 확실한 인증을 하게 되구요. 이런 점들 때문인지 이들은 별 거리낌 없이 창군에 참여합니다. 뭐 이런 상태에서도 만주라는 특성상 좌익도 많아서 월북한 경우도 있었고 숙군 과정에서 많이 짤립니다.

이런 상태에서도 문제는 일어납니다. 이들을 긁어모아도 장교가 부족했어요. -_-;

결국 지원병(-_-) 출신들까지 불러모으게 됩니다. 김종오나 김병휘 등이 이 계열로 그의 경우 일단 백수라서 한 번 가 볼까 하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케이스라고 합니다.

이렇게 어찌어찌 장교들을 모으게 됩니다. 이제는 군을 만들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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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이 되면서 국방사령부를 만들고 국방군을 만들려는 계획이 시작됩니다.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여기에 동의했지만, 맥아더는 자기 권한이 아니라며 거부, 본국에 알렸는데 이게 거부됩니다.

소련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면서요. 결국 기껏 만든 국방이라는 이름은 "경비"로 바뀝니다. 6월 15일에는 그나마 국방경비대라고 돼 있던 게 조선경비대로 바뀌었죠.

이 모델은 필리핀에서 창군할 때 쓰던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필리핀에서는 장성을 미군 출신들(맥아더라든가맥아더라든가)이 맡았는데 그나마 여기서는 한국인이 맡게 된 거였죠. 하긴 군 만들고 미군이 거기 앉으면 소련에게는 더 큰 위협이 될 테니까요. 어쨌든, 드디어 모병을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경비대"였지만요.

Bamboo, 당시 국군 창설 계획의 명칭이었습니다. 여기서는 각 도에 1개 연대씩 총 8개 연대 25000명 규모를 편성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응준은 1개 사단씩을 만들어야 된다고 했지만 거부당했죠. 한편 자발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던 해방병단(해군)은 이 때에 비로소 편입돼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해군 창군에 대한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이야기는 다음 편에 하겠습니다

1. 남한의 각도에 1개 중대씩 8개 중대를 설치하되 편성은 중화기가 없는 미군 보병중대를 기준으로 장교 6명, 사병 225명으로 편성하고 장교는 중앙에서 양성한다.
2. 각도에 중대를 편성할 때는 정원의 20%를 초과 편성하도록 하여 그 중대의 편성이 완료되고 훈련이 끝나면 그 초과병력을 기간으로써 다음 중대를 추가 편성한다.
3. 이와 같이 중대를 확대 편성하여 대대를 편성하고 대대편성이 완료되면 각도에 1개 연대를 편성한다.

이렇게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은 전국으로 흩어집니다.

1연대 46. 1. 15 태릉 정위 채병덕
2연대 46. 2. 28 대전 정위 이형근
3연대 46. 2. 26 이리 부위 김백일
4연대 46. 2. 15 광산 부위 김증준
5연대 46. 1. 29 부산 참위 박병권
6연대 46. 2. 18 대구 참위 김영환
7연대 46. 2. 7 청주 참위 민기식
8연대 46. 4. 1 춘천 부위 김종갑

이것이 최초로 만들어진 국군, 아니 남조선경비대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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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사람 수는 어떻게 맞쳐놓았지만, 군대에 필요한 것이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가령 춘천에서 만든 8연대를 만들러 갈 때 장교는 단 6명 뿐이었습니다. 도와주는 건 미군 고문관으로 온 소위 2명과 부사관 2명, 운전병 1명, 축구팀도 아니고 이들끼리 강원도로 가서 열심히 지원 포스터를 뿌립니다. 미군은 보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

가장 중요한 건 무기, 미군은 무기를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미군의 무기 등을 보급받은 건 경찰과 이범석 등이 주도하던 청년단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군대가 아니니까 소련을 자극하지 않아서 그런 거였는지, 이승만의 직접 친위대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둘 다겠죠. 결국 무기고 군복이고 일본군이 남기고 간 걸 털어서 무장합니다.

그 다음은 훈련인데... 이것도 준비한 게 없었습니다. orz 거기다 좀 더 경험한 사람들은 서울에서 도장 찍고 있었고 각 곳에 간 사람들은 위관급으로 몇 년 있지도 않았던 이들, 훈련에 필요한 것도 몰랐죠. 결국...

일본에서 배웠던 걸 기억을 되살려 시킵니다. 그리고 이 때 미군은...

그들이 알지도 못 했던 "미군식"으로 하라고만 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습니다 =_=... (수정) 가르쳐 주긴 했답니다

문제는 일본군과 만주군 등 출신이 각기 달랐던 곳들이었습니다. 서로 배운 게 달랐거든요.

결국 사관학교에 각 연대의 장교들을 불러서 훈련 과정을 통일해야 했습니다.


이 때 한국어로 된 확실한 명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를 실행한 사람이 장창국입니다. 그는 국어학자들을 불러모아 온갖 무기들과 명칭, 구호 등을 한국식으로 만듭니다. 어원이 참 궁금한 개머리판도 이 때 만들어지죠.

뭐 사실 현지에서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육사, 뭐 정확히 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는...

일본 육사 교재를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번역이라도 하면 다행 수준이었죠. -_-; 미군에서는 자기네 걸 가르쳐 주지 않았죠. 이종찬이 괜히 육사라도 광복군 출신이 맡아야 된다고 한 게 아닙니다. 배우는 게 다 일본식인데 최소한 가르쳐주는 사람이라도 광복군 정신을 말 해 줘야죠. 수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광복군 출신만은 꼭 육사 교장을 한 번씩 맡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게 부족했습니다. 미군은 약속한 것도 주지 않았고, 이 쯤 되면 무에서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죠. 일본식 + 미국식 사이에서 어떻게든 한국식을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정부를 수립해 가면서 미군에게 이를 넘겨 받은 대한민국 정부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든 국군을 완성해야 했죠.


송호성은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갔다가 시험에 떨어져 빠꾸(-_-) 먹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에 광복군 백으로 특별임관했죠. 당시 광복군 출신들의 상황을 말 해 줍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 했고, 예의 같은 것도 딱히 배운 게 없어 다른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코를 풀 정도였다고 합니다. (코 한 쪽 막고 코 푸는 거 있잖아요)

그는 이렇게 특별임관해 46년부터 정부 수립 때까지 2년간 경비대 총사령관 직을 맡습니다. 47년에는 육군총사령관으로 바꾸고 국군 최초로 장성이 됩니다. 준장이었죠. 이후 48년 여순 사건 때까지 총사령관 직을 맡다가 잘립니다. 그 이후 명칭이 육군참모총장이 되는데, 2년이나 했으니 초대 육군참모총장으로 기록될 수 있었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납북당했는데, 아무리 봐도 월북 같거든요 -_-;

+) 그 후에는 짧으면 2개월, 길면 6개월로 돌려막기 했습니다.


광복군 참모총장으로 있었던 유동열은 귀국 후 조병옥의 추천에 의해 통위부장에 임명됩니다. 국방장관의 전신입니다만, 역시 국방이라는 말을 쓰지 못 했죠.


정부 수립 후에는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 및 국방부 장관이 됩니다.

그 동안 15연대까지 창설을 완료, 건국 때까지 5개 여단으로 재편됩니다.

1여단 47. 12. 1 서울 송호성 대령 1, 7, 8연대
2여단 47. 12. 1 대전 원용덕 대령 2, 3, 4연대
3여단 47. 12. 1 부산 이응준 대령 5, 6, 9연대
4여단 48. 4. 29 서울 채병덕 대령 7, 8, 19연대
5여단 48. 4. 29 광주 김상겸 대령 3, 4, 9연대

이렇게 규모가 늘면서 지원부대의 창설 역시 시급해졌고, 보급부대부터 병기, 공병, 병참, 의무, 통신대대 등이 47년부터 48년 초까지 만들어집니다. 그와 함께 육군병원도 처음 만들어졌죠.

병력은 계속 늘고 있었습니다만 역시 상황은 열악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이범석은 국방부장관으로 있으면서 국회에 사병의 급식 개선을 위한 추가 예산 편성을 요청하는데, 이 때 병사 한 명의 일일 칼로리 섭취량이 2322칼로리에 불과하다고 발언합니다. 이 때 육군의 기준치는 3162칼로리, 미군은 한국전쟁 당시 4200~4500 칼로리를 먹어댔었죠. 부식 같은 건 꿈도 못 꿔서 밥 위주였고, 그나마 상태가 나은 훈련소의 경우에나 3600칼로리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온갖 사건이 벌어집니다. 음식이나 땔감을 얻기 위해 소총을 팔아버리는 거였죠 (...);;;; 한국전쟁 때는 더 심해져서 북한군 포로수용소의 포로가 더 영양상태가 좋았습니다. -_-;

장교들도 그리 다르지 않아서 봉급만 받고는 살기 힘들었고, 그나마도 제대로 못 받는 상황이었죠. 해방 후 계속된 인플레이션 때문에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는 감 잡기가 힘들군요.
장교들에 대한 대우고 좋지 않아서, 이들은 미군에게 권총 같은 것도 받지 못 했고, 집 같은 거야 자기 월급으로 해결해야 했죠.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또 있죠.

당시 장인 이응준 집에서 살던 이형근은 태릉의 육사까지 걸어서 출퇴근 했는데, 그래도 장군이니 차 한 대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미군이 준 것은...


... 쓰리 쿼터(3/4톤) 트럭이었습니다. -_-; 열 받은 그는 걸어서 출퇴근을 계속 했고, 그제야 미군이 지프를 줬다고 하네요.

이런 상황에서 장교들은 뭐라도 꾸미긴 꾸며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차고 다닌 것이...

일본 군도였습니다. -_-; 기타 일본군 망토를 두른다든가, 이범석처럼 말을 타고 다닌다든가 했다고 하죠.

그리고 미군은 여기서 일본군을 연상시키면서 양 쪽의 사이가 더 안 좋아지고 (...)

이 쯤 되면 싫어하는 수준인데요? -_-; 미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계급장 맞출 돈도 없어서 경찰 계급장을 쓰기도 했는데, 각 지역마다 경찰들의 텃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허구헌날 두들려 맞고, 싸움 나면 당연히 경찰 쪽이 유리했으며, 경찰이 먼저 써야 된다고 소총을 뺏기기도 했습니다. orz 그래서 여순 사건 때 선동하며 했던 말이 "경찰이 잡으러 온다" 였죠 (...) 단지 좌익 잡으러 온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 사실 애초에 창군의 목적 중 맨 첫번째가 "경찰을 도와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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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셌군요. 이런 많은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38선에서 시작된 분쟁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38선은 미군이 맡았다가 국군이 생긴 후 중대 단위를 배치하면서 시작됐죠. 분쟁은 점차 심해져 갔습니다.

이를 위해 이범석은 장교와 병력을 최대한 늘려야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첫째는 광복군 및 중국군 계열의 입대, 육사 7기부터 이들에 대한 특별임관이 시작됩니다. 이는 49년 중국군 소장으로 있던 김홍일이 귀국 후 바로 준장으로 임명되면서 완료됩니다. 왜 소장이 준장이 됐냐고 하는데 그 때 국군은 준장까지밖에 없었습니다. 마 어쨌든 이렇게라도 해서 구색이 겨우 맞춰졌습니다. -_-a

+) 이 때 중국군 출신으로 분류되는 사람들 중에 두 명이... 남경국민정부군 출신입니다. 일본이 중국에 세운 괴뢰군이요 -.- 나중에 밝혀진 건지 자기가 속인 건지 국군 단위에서 속인 건지 모르겠는데 이게 바뀌지 않네요. 국군의 컴플렉스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근신하고 있던 일본군 출신들, 유동열은 김석원, 이종찬 등을 직접 찾아가 설득합니다. 이들은 즉각 전력이 됐죠. 하지만 바로 뒷전으로 밀린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 그러고보니 이종찬이 쿠데타를 꿈 꾼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는데, 미국 측에 얘기는 했더군요. 결국 안 하고 군의 불개입 원칙을 다시 내세웠지만요.

이범석은 국방부장관을 맡으면서 육사 8기에 1300여명을 임관시켜 장교를 늘리고, 병력도 10만에 맞춰 늘렸습니다. 각 여단은 사단으로 승격되는데, 말만 사단이지 후방의 사단들은 2개 연대를 채우는 수준이었죠.

1사단 49. 5. 12 대령 김석원 11, 12, 13연대
2사단 49. 5. 12 대령 유승렬 5, 16, 25연대
3사단 49. 5. 12 소장 이응준 22, 23연대
5사단 49. 5. 12 준장 송호성 15, 20연대
6사단 49. 5. 12 대령 유재흥 2, 7, 9연대
7사단 49. 5. 13 대령 이준식 1, 19연대
8사단 49. 6. 20 준장 이형근 10, 21연대
수경사 49. 6. 20 대령 권준 3, 8기갑연대

그래봐야 양적으로 늘어나는 것 뿐이었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수만 늘렸으니 보급 문제는 더 심각해져 갔죠. 거기다 솔직히 양도 많지 않았구요 -_-; 근데 이 때 북한은 이미 16만을 넘기고 있었거든요. 미군은 이를 알면서도 여전히 국군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습니다.

10만명을 만드는 것도 이 모양인 걸 보면 60만으로 늘리려 했던 국민방위군의 비극은 이미 예정돼 있던 것이었습니다.

1950년, 미국은 국군에 원조하는 금액으로 1천 20만 달러를 할당합니다. 하지만 이는 이전에 받기로 했던 장비와 수리를 위한 부속품에 대한 규모였고, 이 해에 정부에서 새로 요청한 장비에도 할당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의 고문단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최고 2천만 달러는 되야 한다고 했죠. 하지만 최종 결정된 것은 1천 97만 달러, 그나마 6월 25일 당일까지 도착한 것은 천달러 정도였습니다. 아니 중화기는 둘째 치고 (전차는 아예 생각도 안 했고 ㅡㅡ) 소총도 필요한 게 5만정이나 돼서 달랬는데 준다고 한 건 1만 5천정, 이마저도 구형 스프링필드 소총을 2만정을 줬는데 도착한 게 50년 6월 19일이었습니다. -.-

미 군사 고문단은 6월, 이렇게 판단합니다.
"전투부대에 대한 보급과 정비는 필요한 최저한도에 그치고 있으며 모든 종류의 부품은 떨어지고 한국군 무기의 15%, 수송수단의 35%는 사용할 수 없어 당시 장비로는 인민군의 남침시 15일 이상 지탱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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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군 내의 인사를 보면 참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군 내의 실세들을 보죠.


채병덕은 해방까지 인천의 육군조병창 공장장에 재임돼 있었습니다. 해방 후 그는 보급부대를 주로 맡으며 주로 보급 쪽을 맡게 되었죠. 보급을 맡을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되니 그가 맞았고, 여기에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가 독립운동가 내에서 신망이 좋았기 때문이었죠. 조병창을 맡고 있어서 그와 접촉해 보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없을 정도였거든요. 일제의 감시로 무기를 주진 못 했지만 신고한 적도 한 번도 없었구요. 미군이 돼지라고 꽤 싫어했는데도 그가 계속 실세였던 건 이런 이유였던 거죠.

... 그리고 그는... 뭐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이 때 그의 나이를 봅시다. 50년 기준 37세입니다.


이형근은 이응준의 사위로 국군 군번 1번입니다. 자신의 자서전 등에서 군사영어학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서라고 하는데... 그냥 이응준 백 맞는 것 같긴 해요 (...) 채병덕과 군번 1번 문제로 다툰 사람이고,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를 주장하며 채병덕과 신성모 간첩설을 주장한 사람입니다. 근데 왠지 이걸로 자기 잘못을 덮는 것과 함께 채병덕 깔려고 한 것 같긴 합니다만 이건 나중에 얘기하죠.

이 때 그의 나이 31세였습니다. 이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정일권은 50년 당시 34세였습니다. 백선엽은 당시 31세였구요. 이들이 창군 후부터 두각을 드러내 6.25까지 국군 3대장으로 활약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이 쪽의 나이를 보죠.


이응준은 당시 60세, 전쟁 당시에는 후방의 3사단장으로 있었습니다. 김석원은 당시 58세였습니다. 입대가 뒤늦긴 했습니다만 -_-a 그는 오자마자 채병덕과 싸우다 잘리고, 재입대 후에는 한참 어린 김백일(34)에게서 명령을 들어야 했습니다. 김홍일은 당시 53세, 그래도 준장으로 임관해 곧바로 소장으로 오른 후 전쟁 초에 나름 결정적인 활약을 합니다만... 곧 중장으로 예편한 후 51년부터 대만 대사가 됩니다.

+) 참고로 이 때 4.19 소식을 듣고 빨갱이의 난동이라고 했습니다. (...) 타국에 있었다지만;

가장 압박인 건 이거죠.


유승렬은 당시 58세로 49년에 임관했는데, 자기 아들보다 계급이 낮았습니다. 뭐 순수 군인이라서 사석이 아니라면 존댓말을 쓰고, 정중하게 경례를 했다고 하죠. 에 근데 그의 아들이...


유재흥이라는 게 함정 (...)

출신은 둘째 치고 전쟁을 오래 겪었던 노장들은 짤리거나 후방에 있었고, 노장으로서 전공을 올릴 경우 바로 쫓겨난 것이죠. 그래서 육군의 중앙부터 전방에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장군들로 이루어져 있었구요. 이게 국군 초기 패전의 주요 원인 중 제법 큰 부분일 겁니다.

그 이유로 몇 가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적었듯, 노장들은 미 고문단과 맞지 않았습니다. 고문관들이라 해봐야 젊은 위관급에 솔직히 노장들에 비해 전쟁을 모르는 이들이었기도 하구요 (...) 거기다 영어를 잘 해야 손발이 맞는데, 젊은이들 중에서도 그건 찾기 어려웠고 그들이 실세가 되었죠. 어쨌든 미군은 일본군과 중국군의 영향이 너무 깊은 노장들을 최대한 뒷전으로 미루고 어느 정도 배운 건 있는 젊은 장교들을 미국식으로 새로 키우려고 했죠.

둘째는 이승만의 견제, 노장들은 그에게 부담되는 상대였죠. 그의 명령을 잘 들으려면 젊은 쪽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 젊은 쪽도 너무 잘나졌다 싶으면 자르고 직책을 바꾸고 외국으로 보내고 했습니다. 경찰이나 각종 청년단과는 달리 군은 그의 친위대라고 하기에는 좀 먼 존재였고 그가 폭주해 가면서 갈라서게 돼 갑니다. 그로 인해 군 내에서도 김창룡 등 이승만 친위 세력과 이형근, 백선엽 등 실세와의 다툼이 계속 벌어졌죠.

마지막으로 그들 자신도 어린애들이랑은 딱히 놀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_-; 김석원 같이 뼈 속까지 군인(근데 일본군 -.-)이라면 모르겠는데 다른 이들은 쌓아 둔 재산도 있겠다 대충 군 원로라는 이름만 얻고 빠지고 싶었을 겁니다. 애들이랑 동급인 것도 그럴 건데 애들의 명령을 받는 위치였을 테니까요.

이런 점들이 쌓이면서 초기의 군은 참 기형적인 형태가 됩니다. 어찌 보면 이 쪽이 맞죠. 미국식으로 새로 배워서 천천히 키우는 게 나았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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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좀 대 놓고 말 하긴 그렇지만 눈여겨 볼 부분이 있습니다.

국군의 파벌은 백선엽의 평안도파, 정일권의 함경도파, 이형근의 이남파로 나뉩니다. 그 중 세력이 컸던 것은 위 둘이죠. 단지 만주국 출신이라서 이렇게 된 거라면 만주파로 불렀을 겁니다. 이들 외에도 월남한 이들이 군에 많이 들어왔다는 얘기죠.

+) 광복군 계열은 파를 만들지 못 했습니다. 광복군으로 묶어 부를 뿐 살던 곳도, 군인으로 있었던 곳도 다 달랐거든요. 오히려 이들끼리 대립하거나 그냥 위의 파에 합류합니다.

살기 힘든 거야 다 마찬가지였지만,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기반이 없었습니다. (이후 38 따라지라 불렀다고 하죠. 북에서 내려왔는데 성공하면 38광땡 (...))

애국심이나 반공주의 같은 것도 영향이겠지만, 이런 걸 보면 군에 들어오는 이들은 기반이 없었던 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창군 후 좌익 계열에서도 많이 들어온 이유 역시 이거였고, 남로당이 침투할 기회를 주었구요.

일본군 출신들의 경우 국내에 어느 정도 기반이 있었습니다. 청산이나 재산 몰수가 안 됐으니까요. 반면 독립운동가들의 경우에는 그 명함으로 주변의 지원을 받고 인정받을 수 있었구요. 이범석 같이 명성 높은 이들은 군을 만들긴 했지만, 군에 들어올 생각은 없었습니다. 6.25 때도 이범석의 임관을 정부와 미군에서 부탁했지만 거부했죠.

물론 김홍일, 김석원 같은 순수 군인들이 있긴 했지만, 결국 군 실세로 남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기반이 없어서 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장교든 사병이든요.

지금도 그러잖아요. 군은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 간다구요. 그 때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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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혼란스럽고 못 살았던 그 시절, 군도 참 못 살았고 바닥부터 시작해서 참 많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군은 제대로 돕지 않았고 북한 때문에 규모는 키워야 됐고, 군 경험들은 다 없었고 온갖 부정과 비리들이 생겼죠. 솔직히 나라가 안 망한 게 기적입니다.

북한에서도 이런 문제가 있긴 했습니다. 무장 해제하고 들어온 일부가 아닌 이상 대규모 전투 경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들에겐 소련과 중국이 있었습니다. 3만이 넘는 병력이 사단 째로 들어왔고, 북한의 주력 사단들은 국공내전을 겪은 이들로 채워집니다. 병력에서도 두 배인데 실력도 넘사벽이 된 것이죠.

"한국군은 지휘능력을 갖춘 인재가 부족하다. 주된 원인은 지휘관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인력이 부족한 데 있다. 여러해 동안 한반도에서는 외국인들이 지도층을 구성했다. 한국인들 스스로가 지도층의 위치로 올라가는 것은 심하게 억제되었다"

이런 장교들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 중에 정말 수많은 문제점들이 발견됐죠. 전쟁이 끝나고 안정적으로 군대를 키우면서 미국에 많은 유학을 보내고 나서야 문제가 겨우 해결됩니다. 베트남전까지 가면 한국군 장교들에 대한 인식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가 더 있었죠.

스탈린 : 남조선 군대 내부에 침투하였는가요 ? 남조선군 내부에 당신 측 사람들이 있는가요 ?
박헌영 :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으며,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스탈린 : 그것은 올바른 것이며, 현재 그들은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됩니다. 남쪽 사람들은 아마 북조선에 첩자들을 파견할 것이며,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947년 3월 15일

이미 창군 당시부터 박헌영의 남로당이 깊게 침투해 있었던 것이죠. 남로당이 아니더라도 좌익 계열이라면 여기에 넘어가기 쉬웠구요. 그런 면에서 여순 사건이 없었으면 끝장이었습니다. -_-;

정말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믿을 건 하나 뿐이었습니다.

"사병들은 훌륭합니다. 개인적으로 한국군 사병들은 6개월 정도의 훈련이면 상당히 좋은 병사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군 사병들의 주의 깊음, 극기정신, 훈련에 대한 욕구, 명령에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의지, 완고함은 미군 병사들이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한 번 잃었다가 다시 세운 나라, 아무리 배 고프고 위에서는 삽질을 해 대도 병사들은 다시 찾은 이 나라를 다시는 잃을 수 없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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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이런 저런 얘기 했으니 다음부터는 좀 자세히 들어가 보겠습니다. 시작은 해군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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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6/09 10:32
수정 아이콘
아.. 팀원 5명짜리 팀 하나 만드는 데도 정말 힘든데, 한 나라의 군대를 무에서 만들어내야 하다니 정말 안습하네요.
Je ne sais quoi
12/06/09 10:39
수정 아이콘
참 이런 거 보면 조직력(?)이라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군요.
wish burn
12/06/09 10:53
수정 아이콘
해군 손원일제독관련 일화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후덜덜하더군요;;
HealingRain
12/06/09 12:29
수정 아이콘
이렇게 보면 6.25때 초반에 그렇게 일방적으로 발렸던것도 납득이 가네요. 이건뭐...;
12/06/09 12:30
수정 아이콘
아... 군대 만드는게 이렇게 힘들줄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완성품의 질은 모르겠지만 그 노력부터가.
12/06/09 12:35
수정 아이콘
여순반란이 없고 그 대신 6.25 때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네요. -_-;
세미소사
12/06/09 13:15
수정 아이콘
노장의 경험을 무시한 이승만.. 또
일본만주군 출신이 6.25때 보여준 능력차 국군도 참 창군부터 드라마틱하네요.
유리바다
12/06/09 14:0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9th_Avenue
12/06/09 16:44
수정 아이콘
암울한 표정으로 읽다가 유재홍 발견~!!! 크크크
갑자기 빵터지면서 웃프네요. ㅠㅠ
포프의대모험
12/06/09 19:31
수정 아이콘
하..함정!
진짜 고생 많이하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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