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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16 10:46:51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창군 - 14연대 반란 사건
38선 분쟁에 대해서 제가 너무 대충 봤네요. 다시 공부 중입니다. -_-; 해공군부터 들어가길 잘 한 듯.

+) 공부 끝. 쓰는 중이예요~

우선 여순 사건부터 하겠습니다.

좌우 어느쪽이든 여수와 순천이라는 지명보다 반란을 일으킨 14연대를 중심으로 해 "14연대 반란사건"이라는 쪽을 선호하고 저도 이게 맞다고 봅니다만... 여순 사건이 너무 익숙하기도 하고 짧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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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북한 남침시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증언으로 보아 이같은 학살극의 시위를 당긴 것이 좌우 어느쪽이었던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같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왜 어느쪽도 재빨리 이 보복의 악순환을 끊지 못 했느냐는 데 대해 모두가 가슴 아파하고 반성하는 일일 것이다." - 실록 지리산, 백선엽

전라도는 애초에 곡창지대였던만큼 일제시대에도 곡창으로 키워집니다. 먹고 사는 건 그래도 다른 지방보다 수월했기에 해방 이후 닥친 기근에도 버틸 수 있었고, 우익이 우세했으며 (한민당이 전라도를 기반으로 했죠) 이를 기반으로 한 친일파 등 부유한 지주들도 많았지만, 이 지역의 좌익들도 비교적 온건했습니다. 경상도에서처럼 격하게 대립하기보단 경찰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공존하는 지역이 꽤 많았습니다. 미군은 당시 좌익의 세력이 강했던 지역은 직접 통치했고, 적절히 공존하거나 우익의 세력이 강한 곳은 한국인을 시켜 간접 통치했습니다.

그래봐야 총파업 때부터 격해지긴 했지만요. 선거를 저지하려는 좌익과 선거를 강행하려는 우익의 다툼은 계속됐습니다. 그저 다른 지역보단 나은 수준입니다. -_-a

창군 과정에서 단정에 반대했던 좌익들은 경찰의 눈을 피해 대거 군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은 이 점에서 오히려 좋게 볼 만한 판단을 했습니다. 군대에 들어오는 것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군 경험만이 필요할 뿐 사상은 관계 없다는 것이었죠. 솔직히 이게 좋은 말인데... 그 때는 그럴 수 있는 때가 아니었죠 -_-; 거기다 미군정을 이어 국군을 본격적으로 늘릴 때도 일단 양이 중요하다고 마구 받아 버렸습니다.

애초에 경찰을 보조하는 경비대로 시작한만큼 경찰과의 다툼이 생길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찰들은 일제 때부터 그대로 이어진 친일이든 아니든 교육도 받을만큼 받은 엘리트이자 이승만의 친위대였던 반면에 군은 신분이 낮은 이부터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아 한글도 몰랐던 이들이 잔뜩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기에 군에 안 갔으면 경찰에 잡혀가야 했을 범죄자들도 많았구요.

반면 군의 사병들은 전혀 다른 두 가지 시각으로 경찰들을 봤습니다. 첫째는 일제 때부터 이어진 기득권 친일파 집단이라는 것, 둘째는 일제 때 익숙해진 군국주의적인 시각으로 군을 당연히 경찰보다 높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일제 때 저항을 하든 군에 들어가 협력을 하든 일본 경찰에 당한 수모를 맨 처음에 두는 경우가 많은데, 참 일제 때나 해방 후나 경찰들의 콧대가 높긴 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갈등은 곧 대립으로 이어집니다. 군인이 경찰에 잡혀 가고, 그걸 항의하다가 집단 구타 당하는가 하면, 총격전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 때 군은 소총을 썼는데 경찰에서는 무려 기관총을 썼습니다 - -;;; 뭐 이건 경찰서가 하도 습격당한 것도 있습니다만.

이런 환경은 남로당이 침투하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수는 적었지만 장교들에도 침투했고, 남로당은 아니더라도 좌익 성향이었던 이들을 많이 포섭합니다. 사병은 두말할 필요 없었죠.

이를 심어둔 박헌영부터 김일성, 스탈린까지 "해방"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부디 조용히 있어 주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북한에는 참 큰 절망을, 남한에는 정말 크나큰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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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근 제주도내에서 일고 있는 '4·3 조명'과 '4·3 치유'의 노력을 우려와 기대 속에서 보고 있다. 우려는 어느 쪽이고 상대방의 과오만을 과장하는 노력들이 가져올 결과적인 또 한번의 대립에 대한 것이다. 반면 기대는 활발한 증거 수집과 폭넓은 상황 조명을 통해 당시의 사태 전개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상처를 서로 싸매고 화합할 수 있는 분위기 성숙에 대한 것이다" - 실록 지리산

그 시작은 이성가, 1연대장이었던 그는 김창룡을 정보주임 보좌관으로 임명해 1연대 내의 남로당을 검거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1연대의 선임대대장이었고 당시 헌병대장이었다가 7연대장으로 부임됐던 이병위 소령도 포함돼 있었죠. 그 일당이 잡히고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 이재복의 비서 겸 연락책임자였던 김영식이 잡히면서 군 내부의 500여명의 남로당과 그들에게 포섭된 인사들의 명단이 확보됩니다. 여기에는 4여단장, 15연대장 등 군사영어학교부터 시작된 100여명의 고급 장교도 포함돼 있었죠. 1연대에서 시작된 숙군의 움직임은 이렇게 전군으로 확대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주도의 강경한 좌익 색출로 인해 위기를 맞은 제주도의 남로당이 4.3 사건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군 내의 좌익들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결정타는 6월 18일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문상길 중위에게 살해당한 것이었죠.

그 움직임은 여수의 14연대에도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연대장 오동기 소령은 김지회 중위가 의심스럽다는 비밀통보를 받고 그를 대전차포 중대장으로 임명, 교육을 위해 여단으로 보냅니다. 헌데 이 때 14연대에는 대전차포가 없었죠. 그와 함께 송호성 준장과 정일권 참모부장에게 구속을 건의하지만 아직 증거불충분이라는 답이 나옵니다. 이에 연대 정보부에 증거를 더 확보하라는 지시와 함께 헌병대장 이갑수 대위를 서울까지 보내 설득했지만 승인받지 못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김지회에게도 알려집니다. 헌데 여기서 참 어이 없는 일이 벌어지죠.

정작 그걸 알렸던 오동기 소령이 잡혀간 것이었죠. -_-; 혁명의용군 사건입니다. 여기에 최능진 등이 포함돼 있었죠. 이들은 우익으로 오동기의 경우 중국군 출신에다 이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갔음에도 점령 후 북한군이 귀순을 권유했지만 병을 핑계로 끝까지 거부했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국군이 탈환하자 부역자로 다시 붙잡혀 고문을 당했죠 (...) 이런 혁명의용군 사건 후 한 달도 안 돼 여순 사건이 터지면서 "극좌와 극우의 결탁"이라는 결론이 나 버립니다. 이를 통해 김구가 여순 사건의 연루자가 됐죠 -_-;

그러는 동안에도 남로당에 대한 수사는 계속되고 있었고 14연대가 제주도로 투입될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지창수 상사 등 연대의 남로당은 회의를 계속했죠. 자신들도 곧 숙군의 대상이 될 상황에 집단탈영해 북으로 갈 것인지, 제주도로 가서 무장대에 합류할 것인지 그냥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킬 것인지 등이었습니다. 일단 제주도로 가는 길에 선상반란을 통해 북으로 갈 것으로 결론이 났죠. 헌데 이 정확한 날짜는 기밀이었고, 자기들 사이에서도 합의가 확실히 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지창수는 남로당 전남도당의 연락책임자에 연결하려 했지만 거의 와해됐던 남로당은 이들에게 확실한 지침을 주지 못 합니다.

그리고 10월 19일, 남로당 전남도당과의 연락에 결국 실패한 지창수는 선상 반란을 포기, 연대 내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합니다. 그 신호는 출항 직전 총성과 비상나팔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곤경에 빠졌다. (중략) 일단 그들이 제주도로 가게 되면 연대병력이 재편될 것이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세포조직이 붕괴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었다. (중략) 공산주의자들이 결정을 내리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상륙용 주정은 제주도로 파견할 제 1대대 병력을 승선시키고 있었다." - 미 고문단 존 메릴

21:50, 지창수는 연단으로 뛰어 올라갑니다.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

반대하던 하사 3명은 바로 총살됐고, 반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다른 2개 대대도 합류하면서 병력은 2500명으로 불어났고, 마침 그 동안 친했고 미리 얘기가 통했던 수산학교 학생 23명이 길을 인도하면서 여수시는 순식간에 점령됩니다. 경찰은 순식간에 밀렸고 20일 9시가 되면서 여수는 완전히 점령돼 우익에 대한 색출이 시작됐죠. 이 중 2000명은 순천행 통근열차와 각종 차량으로 바로 순천으로 향합니다.

그 때 순천의 경찰들은 상황의 위급함을 알고 철도 절단을 건의했지만 경찰청에서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해 거부, 경찰 병력은 철수합니다. 그 때 순천의 유지들은 그저 늘 있었던 군경의 충돌인 줄 알고 군관민의 친선을 위한 잔치를 열려고 했다고 하구요 (...)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4연대에서도 1개 중대가 그대로 투항합니다. 상부에서는 여기에 제대로 맞서지 못 합니다. 4연대의 경우 연대장 이성가 중령이 서울로 출장, 부연대장 박기병 소령은 급히 1개 중대를 출동시켰지만 투항 -_-; 참모장은 14연대의 출동을 독려하려 여수에 가 있었죠. 그 동안 반란군은 진격을 계속했고 토착 좌익들이 호응하면서 빠르게 확산됩니다.

"일부 지역의 경찰은 반란군이 진입하기 전에 수감중이던 좌익 혐의자들을 미리 집단 살해하고 달아났고 뒤이어 들이닥친 반란군은 또다시 숨어 있는 경찰을 색출해 학살하는 피의 악순환이 거듭됐다."

이 반란은 전남 전체로 퍼져서, 구례에서는 토착 좌익들이 경찰을 습격해 점령했고, 보성에서는 경찰이 공격을 받고 바로 피신합니다. 여기에 벌교부터 고흥까지 모두 반란군의 손에 넘어가죠.

미군사고문단장 로버트(보트 잃어버린 그 양반입니다 - -a)는 급히 긴급회의를 소집, 국방부장관 이범석을 비롯한 수뇌부가 모여서 급히 채병덕을 선견대로 광주로 보냅니다. 한편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도 특별반을 구성해 광주로 갔죠. 육군은 21일 토벌사령부를 설치해 송호성 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해 역시 광주로 보냅니다. 그리고 20일 11:30에 이 사실을 발표하죠. 이 때 "극좌와 극우의 결탁"이라는 발표가 나옵니다. 14연대의 반란이 혁명의용군 사건과 관련 있고 연대장의 체포 때문에 시작됐다는 것이었죠.

솔직히 뭔가 들어맞긴 합니다. (...) 하지만 연대장 오동기는 반란 주모자들의 체포를 건의한 바가 있고, 이 사건 자체가 그의 체포보다는 14연대의 제주도 투입과 연결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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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한 작전은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았다."

3, 4, 6, 12, 15연대가 여기에 투입됐고, 미 고문관이 이끌던 4연대가 반란군과 조우하면서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들을 이끌던 모어 중위는 국군 장교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니었죠. -_-; 그 때 4연대 병사들은 반란군이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그냥 두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대화까지 했다고 합니다. 애초에 근처에 있었던 4연대와 14연대는 서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상 역시 좌 쪽이었죠. 그리고 반란군은 이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공격, 전멸시킵니다. (...) 고문관 3명은 후퇴하다가 체포됐죠. 그나마 이 때 반란군의 미국에 대한 적대가 그리 크지 않았고, 통역관 유창남 상사의 도움으로 선교사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반란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죽은 미국인은 없죠. -.-

다른 부대 역시 이런 문제와 장교 및 사병들의 능력 미숙, 인접부대간의 협동 부족과 통신 부족 등 온갖 문제점들을 다 보여주며 큰 성과를 올리지 못 합니다. 결국 여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해야 했죠.

22일부터 본격적인 탈환 작전이 시작됩니다. 주공은 김백일로 4연대가 참 어이 없게 당한 학구로 순천으로 진격, 오덕준의 부대는 보성을 경유, 벌교 쪽에서 순천 공격, 최남근 부대는 하동에서 광양을 경유해 순천을 공격하는 것이었죠. 여기서 김백일이 학구에서 반란군을 밀어붙이고 백인엽이 지휘하는 병력이 도우면서 승리를 거둡니다. 22일 오후가 되면서 순천은 포위,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전투가 지속됩니다. 이들은 200~300m를 두고 대치했죠. 반란군은 진압군 내에서도 분열이 있길 바랬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순천을 탈출합니다.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주력 병력은 백운산 등으로 도피, 순천 내에는 총과 죽창 정도의 무장을 지닌 치안대와 학생들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22일과 23일에 이은 토벌로 시가지가 완전히 소탕됐죠. 그 뒤야... 뭐 다들 짐작하시겠죠.

한편 여수에서는 해군을 동원해 상륙작전을 벌이려 했지만 실패했고, 순천을 탈환한 부대와 함께 합동작전이 시작됩니다. 24일부터 재개된 작전, 이 때 총사령관이었던 송호성은 반란군의 매복에 걸려 부상을 입었고, 후퇴했습니다. 그 사이를 틈타 여수에 있던 주력부대 역시 탈출, 국군의 작전이 다시 시작됐을 때 여수에 남아 있던 병력은 200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호응한 1000여명의 노동자, 학생 등 뿐이었습니다.

+) 이렇게 14연대 주력과 이들을 따라간 젊은이들, 대구 5.10 사건 후 군으로 도피했던 6연대 등이 합쳐지면서 빨치산이 만들어지죠.

그 사이에 다른 지역들 역시 대부분 탈환됐고, 25일 아침부터 재개된 작전에 여수도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27일이 되면서 14연대 반란사건, 이른바 여순 사건은 완전히 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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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 친구들이 22일 밤 새벽엔가 밤 12시를 기해가지고 부대가 싹 빠져나가버렸어요. 군당에 연락도 안 주고 주력이 빠져나간 거예요."

"군당에 연락도 안 했어요?" "그랬지요." "그럼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그러니까 많이 죽어버렸지요. 더 많이 죽어버렸어요. 같이 도망을 가든가 해야 했는데, 생목을 거쳐서 해룡 쪽으로 해서 광양으로 빠져버렸어요."

- 당시 순천군당 간부 윤기남

여순 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얼마나 인기가 없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무리 선동을 했다 해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는 것은 그와 미군정의 실책을 확실히 보여주죠. 반란군의 점령지를 탈환한 후에도 집집마다 뒤져 잡아가고 마구 총살하는 등 많은 문제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이 책임은 그들에게도 있습니다.

일단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우발적으로 벌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남로당은 최대한 들키지 않기 위해, 들켜도 피해가 적기 위해 점조직으로 침투시켰고, 서로가 서로를 모르던 상황이었습니다. 반란 당시 죽은 14연대의 장교 20명 중 15명이 남로당 소속이었다고 합니다. -_-; 살아남은 건 김지회 중위 하나, 이 때문에 김지회가 여기에 가담한 것이 맞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며, 증언도 함께했다와 몰랐다로 갈립니다. 이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던 것이죠. 일단 장교들은 몰랐고 지창수가 반란을 주도한 후 장교들이 호응했거나 미처 호응하기 전에 (아마도 장교니까 당연히 반대할 줄 알고) 죽었다는 게 통설로 보입니다.

그 혼란스러움과 함께 우익에 대한 인민재판도 컸습니다.

작전이 끝난 후 계엄사령부에서는 여수와 순천에서 각기 1100~120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합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국군의 포격 등에서 죽었지만, 이걸 생각하더라도 많은 이들이 인민재판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나마 여수가 나았습니다. 여수에서 즉결처분과 인민재판으로 죽은 이는 최소 200명 정도. 그나마 "악질"이 아닌 사람 200명은 풀려나기도 했죠. 반면 순천에서는 경찰 400여명을 포함한 900여명의 관민이 죽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인민재판이 아닌 교전으로 전사한 이들도 포함돼 있으며, 지리를 잘 아는 고참이나 간부는 대부분 도망가고 지리를 잘 모르는 신참이나 타 지역 출신들이 많이 죽었죠.

아무리 우익에 대한 증오가 심했다 해도 지나치게 많은 수치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우익에 대한 것만이 아니죠.

"이현상이도 (중략) 1948년 말에 지리산에 도착해가지고 14연대 출신들 보고 한 이야기가 '당신들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과오를 범했는지 아느냐, 우리 역사를 우습게 만들어버린 것이 누군지 아느냐, (중략) 김지회도 혼나고, 조 동무란 사람은 총살명령을 받았습니다. 과오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해서 총살명령을 받은 것 아닙니까?"

제주 4.3 사건처럼 여순 사건 역시 남로당의 지령이 없었던 독단적인 결행이었습니다. 군에서 일을 일으키자 숨어 있던 남로당원들 역시 호응해야 했고, 이렇게 남로당의 실체가 드러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급했던만큼 선동도 과했죠. 38선이 이미 무너져 북한군이 내려오고 있다느니, 이승만은 일본으로 도망갔고 전라도에 인민군이 상륙하고 있다느니 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국군의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자 이들은 산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남은 것은 노동자와 학생들 뿐이었죠.

최소한 국군이 그냥 도망만 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았어야 되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주력부대가 산으로 도망갈 거면 최소한 남은 이들이 어떻게 될 지는 생각해야 되는 것 아닐까요. 남은 이들은 고립된 채 싸우다 죽습니다. 전투훈련을 받은 적 없었던만큼 쉽게 진압됐죠. 그리고 여기에는 "양민"도 대거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압군은 이들은 물론 집 하나하나를 뒤지면서 체포했고, 곳곳에서 즉결 처분이 진행됐습니다. 흔히 머리가 짧다거나 미제 팬티를 입은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갔다고 강경 진압을 비판하는데, 이는 오히려 온건한 쪽입니다. 머리가 짧으면 군인으로 의심해 봐야 되고, 군대에서 미국제 팬티가 보급되니까 의심하는 거죠. 당시 상황을 보면 오히려 이해가 갑니다.


반란군에 가담해 저항했던 여학생들

보도연맹 때 왜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됐겠습니까. 그 때 여학생들도 총을 쥐고 진압군과 싸웠으니까요. 여기 참가한 계층이 넓으면 넓을수록 군경의 수색과 검거도 더 강화됐고, 더 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예, 이들이야 진짜 북한이 통일할 거라 믿고 함께 싸워준 거겠죠. 하지만 이들을 버리고 도망갈 거면 남은 이들이 어떻게 될 지는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무기를 놓고 항복해도 봐줄 리가 없는 상황인데 버려놓고 총 들고 마지막까지 싸우라 했으니 죽은 이들도 더 많아질 수밖에요. 효율성으로 따져도 이들이 그냥 선량한 양민인 척 해놓고 북한군이 내려올 때 호응하게 하는 게 더 이득 아닐까요.

그냥 총알받이로 내몬 거나 다름없죠. 안 그래도 좌익을 마구 때려죽이던 상황에서 이러니 좌익에 대한 학살은 더 정당화 돼 갔습니다. 양민에 대한 구분은 더 어려워졌구요. 이건 6.25 때도 마찬가지였죠. 피난민 사이에서 총알과 수류탄이 날아오고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이 무전기를 들고 포격을 유도한 걸 알게 된 미군도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쳐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좌익계 색출, 처형 과정도 가혹해졌다. 당시 가장 악명이 높았던 사람은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제 5연대의 김종원 대위였다."

죽인 건 남한의 우익과 미군 등이겠지만, 이 때의 남로당들 역시 그 책임이 큽니다. 그리고 이들도 결코 적게 죽인 게 아니구요. 죽은 우익계열의 자식들은 우익계 청년단체를 만들어 복수를 다짐합니다. 이렇게 증오는 다시 되풀이됐죠.

이후, 이승만은 이걸 자신의 반대파 공격에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김구 등 중도파는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쓸려나갔고, 국가보안법이 제정됐으며, 이승만의 반공노선은 공고해집니다. 보도연맹이 결성됐고, 이는 전쟁의 혼란 속에 끔찍한 참사를 낳았죠. 미국은 이승만 정권의 취약성을 알게 됐고 주한미군 철수를 늦췄구요.

이승만에게는 참 좋은 기회였고 이를 잘 이용해 먹었지만, 한국 전체로 봐도 참 기적 같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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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은 로버트 단장에게 '이게 다 당신들이 불러들인 일'이라며 '미군정이 국방경비대 모집 때 군 요원을 아무런 검증 절차 없이 선발하면서 이렇게 군대 내부에 좌익을 키웠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라'면서 보따리를 던지다시피 건넸다고 한다."

미 고문단장 로버트는 이 일을 총참모장 이응준에게 상의했고 이응준은 국방부 정보국장으로 있던 백선엽과 헌병사령관 신상철을 불러 숙군을 맡깁니다. 이렇게 "대숙군"이 시작됩니다.


안 그래도 유명했던 김창룡은 이 일로 정말 유명해지게 됩니다. 회고록들마다 이 때 김창룡이 막나가는 걸 적고 있고, 자기가 신원보증을 해서 누구를 살렸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어느 중대에서 노래를 부르라 했는데 이북 출신이라 이북 노래밖에 모른다고 했고, 그거라도 부르라는 말에 불렀더니 걸려서 거기 있던 모두가 체포됐더라... 하는 얘기죠. 이걸 말리는 경우에도 "너도 빨갱이다"고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밀어대서 참 많은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뭐 어쨌든 능력은 있는 인간이라서 많이 잡기도 했습니다. -_-;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참 유명한 인물도 끼어 있죠.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입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던 남로당 명단을 모두 넘겨서 살아납니다.

+) 딱히 흥미롭진 않지만, 백선엽은 그의 회고록에 저 사실은 모두 뺀 채 울락말락 하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박정희를 괜찮게 보고 그를 살리는 데 힘 썼다고 애썼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많은 남로당원을 잡을 수 있어서 살아났다고 하고 현재는 오히려 이걸 배반자로 보는 경향도 많은데, 왠지 둘 다 오버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때 김창룡이 너무 많이 잡아들이는 바람에 이걸 명령한 이응준까지 나서서 많은 사람들을 구했고, 불명예전역이라는 방식이었지만 별 처벌 없이 풀려나온 이들이 많았습니다. 박정희도 이들 중 하나라고 봐요.

뭐 어쨌든 억울한 사람들 연루시킨 것보다는 낫고, 이후 대통령이 될 때까지도 남로당이었던 전적은 그를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군에 돌아와 소장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있기는 했다는 거죠. -_-a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외에도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 때 걸린 장교들 중 많은 수가 일본 육사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극단적인 일본 육사 분위기가 역시 극단적인 공산주의와 맞아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은 있는데 이 때문에 채병덕은 참 절망했다고 하죠. 이게 일본군 출신 대신 만주군 출신이 뜨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이후 이응준이 직접 나서 혐의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직접 면담 후 90%는 훈방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렇게 처벌된 사람이 4749명, 군의 약 5%에 해당하는 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억울한 사람은 남아서 사형 전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죽은 이들이 많았다고 하죠. 이후에도 소규모의 숙군은 계속됐고, 이를 피하려는 남로당계의 반란이나 도주도 계속됩니다. 해군에서는 배를 훔쳐 월북하는 경우가 많았고, 육군에서도 38선에 있던 2개 대대가 한꺼번에 월북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이 일로 이응준이 짤리고 채병덕이 참모총장이 됩니다.

참... 이렇게 여순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목숨을 참 길게 연장시켜 줬습니다. 근데 이게 또 대한민국을 살려 준 것이었죠. 이렇게 군 내의 남로당이 사라지면서 6.25 전쟁 당시 박헌영이 그렇게 믿었던 20만의 봉기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엔 박헌영과 김일성의 오판도 들어있었죠. 적당히 선동하면 알아서 호응해주니까 정말 남한 국민들이 자기들을 따르는 줄 알았지만, 그 때 원했던 건 공산주의가 아니라 평화와 통일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제주도와 여순에서의 일로 자기들의 절대 지지자들만 쓸려나갔구요 -_-; 이건 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포로를 그대로 석방해 줘도 안 돌아가던 국민당군과는 달리 국군은 오히려 병력이 와해된 상황에서도 알아서 모여줬죠.

아무튼... 참 대한민국에 있어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승만도 참 하늘의 운을 받긴 한 것 같네요. 이 두개가 여기선 겹치니까 기분이 참 미묘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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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성은 이 때 일로 미군에게도 단단히 찍힙니다. 이후 그는 호국군 같은 (비교적) 한직에 머물다가 이범석 등에게도 천시받으면서 납북당합니다. 하지만 정황상 월북이라는 느낌이 강하죠. 그대로 남한에 있었으면 초대 참모총장으로 기록됐을 수 있었겠습니다만. 관련 없을 수도 있구요 -.-


김창룡은 이후 더욱 탄력을 받습니다. 이승만은 그에게 전권을 일임했고, 그의 칼날은 공산주의 뿐만 아니라 이승만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리고 개전 당시, 보도연맹 학살과 수복 후 부역자 학살을 주도했죠.

뭐 군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6.25 전쟁 당시의 학살에 대해 다시 한 번 방침을 정하고자 합니다.

이전에 적었듯 전쟁 기간 중에는 그저 이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서술하겠습니다. 아마 수명에서 수십명 단위 정도는 나오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쓰는 저도, 보시는 여러분도 그냥 익숙해 질지도 모르겠습니다만 -_-a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에 대한 멘붕이 먼저일지 익숙해지는 게 먼저일지는 모르겠군요.

당시의 학살은 몇 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투 중에 피아 구분이 힘든 상황에서 민간인들에게도 공격이 가해졌던 것, 각종 오폭, 개인적인 원한 등이죠. 처음과 두번째는 그나마 이해가 가는 상황이고, 미군의 네이팜탄 같은 게 아닌 이상 피해도 적습니다. 반면 세번째는 좀 크죠. 남북한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니까요. 이념 문제 뿐만 아니라 개인의 원한도 많이 끼어들어 있었죠. 가령 초기 빨치산 토벌 중에 마을 하나가 통비(공비에 협력하는) 부락으로 몰려 집을 모두 불태웠는데, 그 진상을 알아보니 그 마을의 머슴 출신이 무시당했던 원한으로 한 짓이었습니다. -_-;

그리고 그보다 가장 큰 것은 현지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 철저한 계획 하에 일어난 것이죠. 북한의 인민재판, 남한의 보도연맹 학살 사건입니다. 사실 보도연맹과 비교할 만한 것은 북한이 후퇴 중에 저지른 반동분자 처형이지만요. 이는 위의 세 번째 경우에 해당되지만, 그 규모가 국가였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잔인한 말이지만 대량 학살에 필요한 요건은 분노 말고도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기술과 인력, 시간입니다.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학살을 저질렀던 이들도 북한과 직접 맞설 때는 잘 싸웠고, 북한군과 직접 대결한 부대보다 후방에 있던 부대가 대량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이를 주도한 것은 김창룡이었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군인에게는 자기의 적이 확실한 게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그 외에 빨치산 토벌을 보면... 그저 비참할 따름입니다. 게릴라전은 기본적으로 지역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민간인들이 끼어 있기에 가장 비인간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슬픔은 더 커지는 게 게릴라전인 것 같습니다. 정말 독립운동 수준의 확실한 정당성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이런 게릴라전을 좋게 볼 순 없을 것 같네요.

전쟁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그리고 적에 강한 사람이 아군에게 강한 경우도 많죠. 말 그대로 미친 개인 경우입니다만 -_-a 이런 상황에서는 적이든 아군이든 그래도 좀 정상적인 사람을 찾는 방법밖에 없죠. 전공이 적더라도요.


남원 빨치산 토벌 전시관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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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BBver.2
12/06/16 10:47
수정 아이콘
제가 백선엽 장군을 그렇게 옹호하는 이유가 그겁니다. 그렇게 큰 전공을 올리고도 정말 정상적인 사람이었거든요. 민주화 후에는 황의지 등 남부군 생존자들을 만나 자기한테도 욕이 되는 말들을 담담하게 받아서 책으로 냈구요.
이런 학살 사건 등에 대한 정리는 전선이 좀 교착된 이후에 한꺼번에 하겠습니다. 그 때까지... 부디 익숙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럼, 이제 38선으로 가 보도록 하죠.
쌀이없어요
12/06/16 13:55
수정 아이콘
한동안 글이 올라오지않아 엄청 기다렸어요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되겠군요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Je ne sais quoi
12/06/16 14:20
수정 아이콘
아깝군요. 엄한 사람 잡지 말고 잡을 놈좀 잡지 -_-;
잉크부스
12/06/16 17:20
수정 아이콘
좋은글 감사하게 보고있습니다.
여순반란사건은 남로당에 의한 공산반란이라고 보기보단
일제 지배세력이 그대로 권력을 승계하면서 생긴 이승만 정권의 민심이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동 세력이야 한줌의 남로당일수 있으나. 14연대 2500명 전원이 남로당도 아니었으며
후에 투항한 다른 대대병력도 남로당이어서가 아니죠

말씀하신데로 제주 민간 학살명령에 대한 반감과 기존 일제경찰->이승만견찰 에 대한 반감
그리고 토착 친일 지주세력의 이승만 세력화에 대한 반감이 군과 민사이에 널리 깔려있었단 말이죠.
저는 이걸 공산분자의 남한내 군반란 사건으로 보는 시각에는 약간 이견이 있습니다.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였죠.

일본 항복하고 도망갔던 일제 압잡이와 친일파 놈들이 몇일있다 돌아와 요직을 차지하고
미군정을 대리 했을때 일반 백성이 느끼는 그 심정을 관통해보면 알수있지 않을까요?
12/06/16 17:56
수정 아이콘
간혹 일선의 교사나 강사 중에 잉크부스님 같은 주장을 하는 분도 있긴 하던데

지창수의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이 되자'는 주장이나
반란군이 여수 순천 온 시내에 인공기를 달고 인민해방을 부르짖었던 것만 생각해봐도
남로당이 한줌에 불과했다거나, 여순반란의 본질이 남로당에 의한 공산반란이 아니라는 건 무리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죠.

민심이반도 어느 정도껏이지, 정권에 대한 반감으로 남한을 무너뜨리고
북한군의 남침과 호응해서 북한에 나라를 넘겨주려고 했다? 이건 그냥 단순한 민심이반의 정도를 넘어선 겁니다.
12/06/16 19:26
수정 아이콘
저 위의 예시대상은 제 실제 경험 속에서 저런 주장을 했던 분들을 들었을 뿐입니다. 뉘앙스에 대해서는 잉크부스님의 오해니까 죄송해하시고요.
대신 매우 부적절하다고 하시니 '일선의 교사나 강사가 아닌 사람 중에'서도 잉크부스님 같은 주장을 하는 분도 있다고 추가하겠습니다.


뭐 지엽적인 말놀음은 이쯤하도록 하고, 당시 정세에 대한 성의있는 글은 잘 읽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이유와 결과를 혼동하시고 계시군요.

당시 민심이반이 있었다는 것과 여순반란이 공산반란이 아니라는 것과는 아무 연관성이 없습니다. 민심이반이 없이도 공산반란이 일어날 수 있고, 민심이반이 있다고 꼭 공산반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실제 발현된 것이 어떤 형태를 띤 사건이었냐는거죠. 남로당 군인들이 수십명의 장교들을 습격, 사살해서 지휘계통을 붕괴시키고 자파 군인들에 의한 지휘체계를 새로 구축한 후, 북한에 호응해서 남한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하면서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이 되자고 한 사건에서 공산반란을 배제한 채 단순히 민심이반만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밑 리플에 구구절절이 써놓으신 저 이유를 통해 군인들이 설복당할 계기가 있었고, 이를 당시 남로당에 소속된 군인들이 진두지휘한 결과 남로당에 의한 공산반란이 일어난 겁니다. 그게 여순반란, 혹은 14연대 반란사건이죠.
눈시BBver.2
12/06/16 19:16
수정 아이콘
넵. 감사합니다.
중요한 건 한 줌도 안 되는 남로당이 그걸 이용해 먹었다는 거죠.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민심 이반으로 울고 있을 때 손 내밀어 주면 다들 좋아하겠죠. 근데 승산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을 부추기고 총을 쥐어줘서 또 다시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이미 전국에서, 특히 대구에서 그랬고 제주도에서 그랬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준비도 없이 일을 일으킨 거죠. 결말이 뻔히 예측된 상태에서 무모한 짓을 한 겁니다. 민심이 아무리 이반됐다 한들 그들이 총을 쥐어주지 않았다면 피가 그렇게 흐르진 않았을 겁니다. 그들이 뭐 억압받는 전남 인민들을 위해서 그런 건 아니었죠. 여자와 아이들을 산으로 대피시키고 자기들이 끝까지 싸웠다면 인정하겠습니다만, 그게 아니었잖아요. 오히려 그 여자와 아이들, 합쳐서 여학생들에게도 총을 쥐어주고 죽을 때까지 싸우라고 시킨 후 도망갔죠.
이승만 정권의 과가 어떻든간에 그렇게 민간인을 선동하고 책임지지 않고 도망간 건 반란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 때의 희생자들은 거기에 이용당한 거구요. 이는 제주도도 마찬가지예요. 미군정이 뭘 했든 평화적인 시위나 파업이 어떻게 됐든 직접적인 이유는 좌익에 대한 탄압 중에 자기 조직이 붕괴될 위기에 처한 남로당 제주도당이 멋대로 일을 벌인 것이었습니다.
요이라토
12/06/16 20:33
수정 아이콘
이승만 정권의 초대내각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장차관급 인사들이 독립운동가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반대로 김일성 정권의 초대내각은 절반 이상이 친일파)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 정권을 일제 지배세력이 그대로 권력을 승계했다고 봐야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가 독립운동가 출신인걸요.

물론 실무자급에서야 친일파를 기용하지 않으면 당장 나라가 굴러가지 않을 지경이니
(1945년의 조선은 프랑스와 상황이 아주 다르죠),
어쩔 수 없는 기용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민심이반이 나타나지는 않은 것으로 압니다.
당장 이승만이 살려줬다는 대표적인 친일파 세력들인 한민당이 전라도를 기반으로 했던 것을 보면요.

14연대 반란사건은 도저히 쉴드를 칠래야 쳐줄수가 없는 그냥 반란사건이죠.
강가딘
12/06/16 19:00
수정 아이콘
잉크부스님/ 사회보험을 처음 시행한 사람은 히틀러가 아니고 비스마르크 아닌가요?.
이유는 맞습니다만 사람을 햇깔리신듯 합니다. [m]
잉크부스
12/06/16 19:05
수정 아이콘
아~ 비스마르크 맞습니다. 혼동을 ^^; 수정하였습니다.
HealingRain
12/06/16 19:36
수정 아이콘
오늘따라 한번에 읽히지 않아 여러번 다시보네요. 혼란의 연속입니다. 그 와중에 애꿎은 사람들은 계속 죽어가고... 에휴~
이런 거지같은 시대 운운하다가도 저 시대의 혼란상을 보면 그저 감사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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