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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17 06:56:34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창군 - 38선 : 분단의 시작
육군본부는 옹진 사건의 종결처리를 겸해서 앞으로의 분쟁 처리방침을 협의했다. 49년 6월 하순 이응준, 김석원, 유승렬 장군 등 육군의 원로와 사단장급을 집합시켜 회의를 개최했었다. 이때 두가지 논으로 나누어졌다. 적극반응파와 절도 있는 반응파였다.

(이하 축약)

적극반응파는 1선 지휘관 중에 찬성하는 사람이 많았고, 특히 1사단장 김석원 준장이 주장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관동군의 방침인 "군은 모욕당해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어딘가에 스며있었을 것이다.

절도 있는 반응이라 함은 주로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이 주장한 것이다. 침범해온 적은 가급적 전력을 집중해 격멸하지만 점령한다 해도 만족스럽지 못한 고지를 쟁탈하기 위하여 함부로 피를 흘릴 필요가 있을까. 장고봉이나 노몬한(할힌골) 사건은 체면 때문에 정치적이나 전략적으로 가치 없는 공격을 해 소련군에게 일본군의 허점을 보이고 말았다.

채병덕 참모총장의 부관이던 이상국 장군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48년 봄에 백선엽이라는 중령이 정보국장으로 부임해왔다. 들리는 바로는 만주군 중위 출신으로 만주에서 비적토벌과 열하작전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라고 했다. 알지는 못하나 만주군 출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아마 파벌인사로 한자리 했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이 거짓 없는 사실이다.

회의장 분위기는 자못 상기되었으며 "이에는 이"로 대응한다는 공기가 강하게 일었다. 5~6월에 빈번히 일어난 송악산과 옹진 전투가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회의는 격론 끝에 관동군의 국경분쟁 처리요강을 답습하려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침범하면 침범해준다는 강경한 방침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백선엽 정보국장이 조용히 일어나 원칙 없는 보복은 위험을 초래할 뿐이라는 이유를 설명했다.

- 지금까지의 분쟁을 보면 분명 북괴의 화력이 우수하며 훈련도 잘 돼 있다. 때문에 우리는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 10용사의 귀중한 피로 승리를 사야 했고 옹진에서는 실패했다.
- 더욱이 우리 군은 남파된 게릴라 토벌에 절반이 돌려져 있다. 장고봉과 노몬한 사건을 보면 원칙 없는 응수는 오히려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실력도 없는데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항하면 관동군의 전철을 밝게 될 것이다.
- 그러니까 당분간은 실력이 붙을 때까지 적을 쫓아내는데 그치고 보복하면 안 된다.

"실력을 갖출 때까지는 인내가 필요하다. 명예나 위신과 같은 명목 때문에 함부로 장병의 피를 흘리게 하고 나라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격 정신 안 배웠냐


그래서 일본이 망했지 말입니다

그러나 송악산 전투의 당사자인 김석원 장군은 화가 충천하여 수염을 매만지며 반박했고 기타 용감한 사람들도 강경론을 되풀이 하여 주장했다. 그러나 일상 때는 말 없는 백국장은 이때 사람이 달라진 듯 웅변조가 되고 언제 이렇게 연구하였는지 장고봉과 노몬한 사건의 전사 인용은 극히 정확한 것이어서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종국에는 백국장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 회의는 원로인 김석원 준장과 백국장의 정면대결의 토론장이었다. 김장군은 당시 56세의 일본군 대좌 출신이고 백국장은 아직 젊은 29세의 만주군 중위 출신이다. 그러나 처음엔 승부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장군께서 그 유명한 콧수염을 쓸어 올리며 영맹한 얼굴을 붉히고 지휘봉을 휘두르며 입에서 거품을 뿜을 때 우선 이를 설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국장은 비겁하지도 격하지도 않고 단지 얼굴에 지성의 표정을 띠우면서 조용하게 설파했다. 그 논리는 정연했고 더욱 전사로 뒷받침되었다. 어디서 언제 공부했는지 모르나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정확했다.

이후 김장군님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고 이윽고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전의 용사인 김장군님이 “자네 쪽이 정론이네. 나는 약간 감정에 치우쳤다고 생각하네.”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로 분쟁은 때떄로 일어났지만 우리 국군이 월경하는 일은 없어졌고 10월의 옹진 3차 침공을 끝으로 대규모 무력충돌도 없었다. 군은 게릴라 토벌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만일 38선 분쟁이 계속 일어나고 게릴라를 철저히 토벌하지 못 한 채 6.25 남침을 당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모른다.

- 한국전비사

참 훈훈한 에피소드입니다. 일단 저 상황 자체가 오금이 저릴 정도죠. 56세의 노장과 29세의 딱히 전투부대를 맡아보지도 않은 햇병아리, 원래라면 위관급이었어야 될 대령과의 대결이었죠. 장고봉과 할힌골 전투 당시 김석원 등 대부분은 현역이었던 반면 그는 그 때 학생, 그런 상황에서도 논리와 지식으로 맞섰고, 노장은 그걸 인정합니다.

유교+일본군 콤보를 생각하면 저 때 귀싸대기 한 방 날리는 게 더 현실성 있을텐데 말입니다. (...)

그 외에 저렇게 후퇴를 싫어하던 김석원이 민간인도 무사히 철수시킨 포항 철수 작전을 하고 신중하던 백선엽이 다부동 전투에서는 사단장 돌격을 했다는 점이 또 참 재밌는 부분입니다.

이는 38선 분쟁에 대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로, 이렇게 해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더 큰 분쟁 없이 빨치산 토벌 후 개전을 맞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훈훈한 회고입니다만, 그 때의 상황을 보면 이게 크게 과장됐을 가능성이 크고(아니 거의 확실하고 ㅡㅡa), 아예 자작일 가능성도 적지 않죠.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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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발에 대해서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역시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이었습니다. 이 주장 자체의 가치는 충분합니다만, 그 때는 소련의 자료들을 얻을 수 없었죠. 지금도 은근히 남침유도설과 분쟁확대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긴 합니다만 ㅡ_ㅡa

해방 후 개전까지 38선 분쟁에 대한 것은 쉽게 말 하기 힘든 영역이었습니다. 남북 모두 남북침을 주장하기 위해서였죠. 마치 누구 역사냐로 더 싸우는 가야사나 발해사 같다고 할까요. 한국에서도 이에 대해 나름 연구를 하기도 했고, 국군이 넘은 것도 있었다는 것이 의외로 60년대부터 인정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북한의 남침에 맞선 반격이었다는 것이죠.

현재에 이르러 이에 대해 가장 잘 연구된 것은 역시 정병준 교수일 겁니다. 이걸 바탕으로 얘기를 진행해 보죠.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에 대해서 딱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정병준 교수의 주장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반론이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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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반도를 가리켜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만나는 곳이라고 하죠. 실질적으로 나타난 것은 근대가 시작할 때,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이었습니다. 이 때도 일본은 38선 분할을 제의했었죠.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요. -_-a 미소는 결국 38선을 나눕니다. 뭐 적당히 절반으로 가르는 것 같으면서도 (크기는 북한이 더 크구요) 인구의 2/3와 서울 부산 등 대도시를 얻을 수 있으니까였죠.

38선이야 뭐 그런 의미가 있고 미국이 급히 요구한 감이 있지만, 애초에 한국을 반으로 까른다(-_-)는 생각은 꽤 예전부터 나왔던 모양입니다. 네, 대륙과 해양의 어쩌구, 일본을 까르자니 소련이 해양으로 진출하는 길을 스스로 열어주는 게 되고 그냥 한국까지 다 먹자니 좀 그런 상황이었죠. 소련 역시 한반도의 일부는 차지해야 된다고 생각했구요. 그 전에 미국에서는 38도선 안과 40도 10분안(신의주-함흠, 근데 이 선이었다면 소련이 안 들었겠죠)을 생각했다가 38도로 확정했구요. 여기에는 관동군의 영역이 38도 이북까지 확장됐다는 것도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다른 지역에도 마찬가지라서 베트남의 경우 16도선에서 잘립니다. -_-; 참 잘 하는 짓거립니다.

자, 이제 반으로 갈라놨으니 입지를 다져아죠. 미소는 아주 대놓고 친미 친소 정부를 세웠죠. 미국의 경우 이승만을 세우는 거에선 좀 은근슬쩍한 모습을 보여줬고 소련의 경우 조선인들이 자치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차피 근대적인 국가로 나가는 데에는 다른 나라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이런 미소의 대립과 함께 절정에 다른 이념 대립은 이제 미소가 빠질 수 없는 상황에까지 다다라 버렸죠. 김구도 암살되기 한 달 전 양쪽이 무작정 발을 빼면 내전이 벌어질 거라면서 그들의 협조 아래 유엔이 통일된 나라를 세우는 걸 도와야 된다고 했습니다. 뭐 미소가 없었더라도 그 때의 좌우대립을 보면 충분히 내전이 일어날 만 하긴 합니다만 -_-;

어찌됐든, 그냥 쭉 그어놓은 선일 뿐인 38선은 점차 분단으로 이어집니다. 쓰다보니 짜증만 나는군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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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의 가장 큰 문제는 그냥 지도에서 쭉 그은 거라서 산이고 강이고 마을이고 그냥 잘려져 버렸다는 것, 그리고 제대로 측량이 되지 않아서 그 구분이 정확히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거였죠. 마을이 두동강나는 건 예사였고 결정적으로 집과 자기 소유의 논밭이 갈라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갖 문제점이 일어났죠.

처음에는 좋았습니다. 어쨌든 같이 싸워 전쟁에서 이겼으니까요. 38선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병사들과 하급 장교들이 잔치를 벌이며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후 미소 양군의 직통 무선, 전화가 만들어졌고, 본격적인 얘기가 시작됐죠. 그러면서 양쪽의 신경전도 슬슬 불이 붙어 갔습니다.

9월 25일부터 38선의 큰 도로에 차단기가 세워졌고, 미군과 한국 경찰이 경비를 섰습니다. 미군정이 경찰 조직을 그대로 쓴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죠. 군국주의 일제 하에서 경찰은 무장과 훈련도가 높은 편이었으니까요. 북한에서도 소련군과 함께 창설되기 시작한 북한의 경비대가 경비를 섰고, 47년 중반에 이르면 이들이 경비의 주력을 맡게 됩니다. 이들은 서서히 38선을 국경화하기 시작했죠. 그 계기는 46년 여름의 콜레라였지만 이게 가라앉은 후로도 38선은 더 굳어져 갔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38선에서는 꾸준히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긴 선을 통제할 수는 없었고, 만주에서, 북에서 계속 사람들이 내려오기도 했구요.

38선을 표시한 표지판이 갈수록 늘어나고, 38선이 관통한 마을의 소유가 조금씩 결정돼 갔으며 (아예 동강난 마을도 있었죠) 소련이 은근슬쩍 표지를 남쪽으로 옮기는 일도 일어납니다. 확실히 이를 결정하기 위해 47년 1월부터 미소 공동으로 38선을 측량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참 많은 곳에 표지판을 설치합니다. 문제는 역시 농민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반대쪽에 땅이 있는 농민들에 한해 자유로운 월경이 가능하게 했지만, 곧 1km로 줄어들었고, 여기에 북한에서 토지개혁이 일어나면서 남에 살면서 북에 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땅을 날리게 되었죠.

그리고 서서히 충돌이 시작됩니다.

"농부들은 곡물을 추수하려 했고, 많은 경우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곡물을 압수당했다. 나아가 몇몇 비공식적인 민간인, 경찰, 일부 사례에선 러시아 병사들로 구성된 약탈단이 38선 이남으로 내려왔다. 또한 대때로 남한 경찰 및 민간인 역시 유사하게 북으로 올라갔다고 보고되었다."

이런 대표적인 사건은 이른바 산직동 사건, 개성경찰서의 경찰 2명이 소련군 2명을 사살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연히 양쪽의 공식 입장은 정반대였습니다. 서로가 넘어와서 무장해제를 하려 하는데 쐈다는 것이죠. 47년 중반부터 양쪽에서 허구헌날 넘어와서 소규모로 치고받는 나날이 계속됐고, 화해 시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아예 잡혀가면 합의로 풀어주거나 할 뿐이었죠. 흥미로운 건 이 때 남한의 보고를 중심으로 했음에도 미군정의 기록에는 남한 쪽의 공격이 더 많았다는 것이죠 -_-a

그 과정에서 38선을 조정하려는 움직임이 없진 않았습니다. 미군은 38선으로 육로가 끊긴 옹진반도와 강원도의 몇 개 군을 내 주는 대신에 경기도를 다 받는 협상을 제의했지만, 미군 내에서도 분단이 고착화된다는 반대가 있었고 소련도 거부하면서 나가리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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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좀 결정적인 문제가 걸렸으니 바로 전력 문제입니다. 소련은 남한에 공급된 전력을 쌀로 지불하게 했는데, 이 타이밍이 적절했습니다. 2차 미소공위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소련이 아닌 김일성이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요구한 것이었거든요. 즉, 김일성 정권을 인정하라는 강요였습니다. 이렇게 전기가 무기가 됐고, 김구과 김규식도 이걸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결국 전기가 끊깁니다. 남한의 5.10 선거나 대금이 지불되지 않았다는 건데 핑계일 뿐이었죠.

또 큰 문제는 물이었습니다. 구암, 예의에 있는 연백저수지는 38선 1km 북쪽에 있었고, 소련은 이걸 남쪽에 공급해주는 대가로 터무니없는 양의 쌀을 요구했죠 -_-; 여기서도 소련은 김일성을 앞에 내세웁니다. 미군은 김일성 정권을 인정하느냐, 쌀이없어요를 계속 외치느냐의 기로에 빠졌고, 결국 물도 끊깁니다.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고 미소의 냉전은 굳어져 갔습니다. 양국은 자신의 영향력을 한반도 전체로 뻗을 수 없는 이상 자기가 얻은 반쪽의 땅에 집중했습니다. 결국 두 개의 정부가 만들어집니다. 서로를 증오하고 있던 두 정부의 만남, 평화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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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부분에서 38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요충지 같은 걸 신경쓰지 않은 채 멋대로 그은 것이었습니다. 미소가 어느 정도 초소를 만들어 두긴 했지만, 기선을 확실히 제압하려면 방어에 좋은 곳을 차지해야 했죠.

여기에 측량이 제대로 안 돼서 어디서 어디까지가 38선인지도 불분명한 것도 컸습니다. 남북은 서로가 38선 이북/이남을 주장하며 각 고지를 점령해 갔고, 충돌이 시작됩니다. 이런 충돌이 컸던 곳은 주로 육로가 차단된 옹진 반도와 개성, 강원도 양양 등이었습니다.

옹진 같은 경우 고립돼 있는만큼 최대한 요충지를 잡아야 했고, 한 치도 밀리고 싶지 않았던 이승만 정권은 여기에 많은 병력을 쏟아붙습니다. 개전 시 포기해야 될 지역인데 말이죠. -_-; 헌데 나중에 알고보니 주요 전장이었던 은파산은 38선 이북 850m 지점에 있었습니다. (...)

개성의 경우 육탄 10용사로 유명한 292고지가 개성에 불과 2km 앞에 있었습니다. 이 곳을 북한이 장악하면 유사시 개성을 내려다볼 수 있었고, 대구경 대포로 개성 시내를 포격할 수 있었죠. 개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악해야 될 곳이었습니다.

이 육탄 10용사가 나온 292고지는 정말 애매한 곳입니다. 미군도 이를 초기에는 38선 이남으로 봤는데, 나중에는 38선 이북으로 정정했죠. 오죽하면 같은 보고서에서 이 고지가 38선 이남/이북이라는 게 혼동돼서 나옵니다. 실제로는 38선을 관통하는데 고지 자체는 이북에 있고 내려오는 길이 이남이었습니다. -_-;;

이런 꼴이니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감제고지의 이점은 어마어마했고, 이게 한국전쟁 후반부에 고지전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됐습니다. 그을 거면 좀 제대로 긋기라도 하든가 ㅡ.ㅡ 이게 뭡니까 대체. 그렇다고 시가지 코 앞에 있는 걸 포기하고 멀리 후퇴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과, 남북 수뇌부 및 지휘관들의 호전적인 성향이 겹치면서 38선은 전쟁터가 돼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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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일본 군국주의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한낱 도구로서 나는 일본 군인이 된 것이다."
"한 쪽은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을 하는 독립군 장교요, 또 한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가로막는 일본군의 장교였다. (중략) 우선 이종혁을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이 중심에 있었던 것은 김석원, 그는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중일전쟁 당시 단 2개 중대로 국민당군 1개 사단을 막아낸 경력이 있는 용장이었습니다. 당시 자기가 종전후 하고 싶어했던 학교를 만들면서 군에는 참여하고 있지 않았던 그는 여순 사건이 일어나자 자원 입대합니다. 몇 번이나 그를 찾아갔던 유동열 등 국군 수뇌부는 반갑게 맞이했죠. 아직 김홍일이 귀국하지 않았던 때, 전쟁 경험이 가장 많았던 그는 꽤 환영 받습니다.

... 그래봐야 대대 정도였습니다만 - -a 그는 곧 개성을 맡는 1사단장으로 부임합니다.

+) 태평양 전쟁 때는 편의를 위해 영관급으로 바꿨지만, 일본군에서는 이게 좌관급입니다. 해방 후 국군에서는 이를 영관으로 바꿨고, 북한에서는 좌관을 그대로 썼죠.


대충 이런 양반이었습니다 - -a
http://parizal.egloos.com/3812236

그는 진짜 공격밖에 몰랐던 사람으로 고전적인 용장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전투에 언제나 앞에 나섰고,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사병부터 민간인, 학생들도 개전 때 그의 밑에서 싸우고 싶어 했죠. 오죽했으면 학병 동원에 당연히 참가했음에도 해방 후 그 지원병 출신들이 "일제 때 우리에게 민족 정신을 불어넣어 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국군 내에서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그에 대한 호오가 극단적으로 엇갈립니다. 여기에 미 고문관들은 그를 정말 싫어했죠. 왜냐면...

정말 전형적인 일본군이었거든요. orz 총이 나오기 전까지야 이런 용장 스타일이 표준이었지만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런 개돌을 선호하는 스타일은 밀려나기 마련이었거든요. 그리고 이 스타일을 끝까지 유지한 게 일본군이었구요 -_-; 다른 작전 없이 정면 돌격만 선호하는 일본군 스타일,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 없죠.

거기다 좋게 말하면 호탕, 나쁘게 말하면 자존심만 센 게 -_-; 컸습니다. 미 고문관과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죠. 그래서 고문관들은 그를 최대한 짜르려고 노력했고, 성공합니다. 그를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 그가 구식이었다는 것에는 다들 동의하구요.

그의 회고록 노병의 한은 정말 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중국에서 친분이 있던 독립운동가를 만나 자괴감을 느꼈던 부분(오히려 그가 김석원을 위로해 줍니다) 등 곳곳에서 그 때에 대한 후회가 가득차 있고, 해방 후에 대해서도 참 많은 한이 깔려 있습니다. 뭔가 죽어라 일 했는데 신세대에게 밀리고 쓸쓸히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떠오른다고 할까요. 뭐 나름 잘 살긴 했지만요.

이건 뭐 그렇다 치고, 미국을 제외한다면 다들 그의 명성과 통솔력을 높이 쳤습니다. 특히 그와 싸워 본 이들이 그랬죠. 이승만은 장개석과 만난 자리에서 쓸만한 장수가 없다고 하자 장개석이 김석원의 이름을 직접 거명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북한군이 그를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생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a

당시 38선 서쪽, 옹진과 개성 방면을 맡던 북한군 사령관은 최현이었습니다. 그는 김석원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죠. 이 원한은 37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보천보 전투 이후 그들을 토벌했던 일본군은 국민당 보안대와 간삼봉 전투를 벌이는데, 이 때 일본군을 지휘한 것은 김 소좌, 김일성과 최현 등은 김석원을 그 김 소좌로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김석원과 동기인 영친왕 이은의 시종무관을 지냈던 김인욱이었죠. 이 착각은 70년대까지도 계속 됐다고 합니다.

그 말고도 아니더라도 국군에 많았던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대한 증오는 컸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만주의 좌익 계열들을 토벌하고 이후 이들이 몸 담았던 팔로군과 계속 싸웠으니까요. 이건 광복군이나 중국군 계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임정을 부정하고, 인민을 괴롭히는 썩어빠진 국민당-_-에 몸 담은 이들과 (오히려 일본군보다 더 -_-;) 싸워 왔으니까요.

한편 일본도 반공 국가였고 만주군 역시 마찬가지, 거기다 만주군 출신들은 소련 점령지와 북한을 목숨을 걸고 빠져나온 이들이라서 반공 의식이 더 강해졌습니다.

여기에 광복군 등 우익 계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자유시 참변으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해 적개심을 제대로 가지게 됐고, 팔로군에 대해서는 민생단 사건으로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보다 소련-팔로군에 의해 죽은 이들이 더 많았죠. -_-; 예전에 다뤘듯 이들은 한미중이 연합해 북한과 팔로군을 쓸어버리는 계획을 세웠고, 심지어 여기엔 일본군도 동원한다는 것도 있었습니다. (...) 국민당이 밀리면서 나가리 됐지만요.

이렇게 서로를 극단적으로 증오하는 두 집단이 부딪힙니다. 이 충돌은 4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들은 서로 "남조선 해방" "북진 실지 회복"을 외쳤고, 절대 밀리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핑계는 서로가 먼저 쳐 올라와서 반격한다는 것이었죠. 이는 그들을 후원해 주던 미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좀 갈립니다.

미국은 지원은 해 줬지만 국군의 움직임을 최대한 막으려 했습니다. 이승만의 계속되는 북진 발언은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포였습니다. 제발 좀 가만히 있길 바랬죠. -_-; 북한에서 일어나고 있던 움직임을 몰랐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대규모 남침은 없을 거라 생각했죠. 이 영향은 너무 컸습니다.


반면 소련은 자기가 직접 개입하지 않는 선에서 북한을 지원합니다. 스탈린은 소련과는 관련이 없게 보이려 했고, 남침의 방식 역시 "도발 받은 정의의 반공격전"으로 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남침 계획인 "반격 작전"으로 이어지죠. 49년 초에 이미 북한, 중공, 소련은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 동안 남한은 그저 떠들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48년은 남한이 불리했지만, 4.3 사건과 여순 사건을 진압하고 좌익-중도를 확실히 쓸어버리면서 자신감이 붙게 됩니다. 49년에서 더 공격적이었던 건 남한이었습니다. 하지만 떠들기만 할 뿐, 남한 역시 대규모 남침을 전혀 생각하지 못 했고, 덕분에 북한에 명분만 쌓아주게 됩니다.

자, 그럼 49년 당시 38선으로 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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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제대로 못 한 티가 풀풀 나는 글이네요. 봐 주세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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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연소
12/06/17 08:33
수정 아이콘
일요일이라서 그런가요? 제가 첫플의 영광을 다네요.
잘 읽었습니다. ^^
Je ne sais quoi
12/06/17 10:14
수정 아이콘
전부터 계속적인 충돌이 있던거야 알았지만 그 원인이 기본적으로는 부실한 측량이었군요 -_- 뭐 당시 이 나라에 부실하지 않은게 있을리 없었겠지만요.
12/06/17 10:30
수정 아이콘
그래도 김석원 장군도 대단한 사람이네요.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인물이라면. 저런 지휘관(상사)이 그리 많지는 않죠.
사티레브
12/06/17 14:29
수정 아이콘
시작하나보네요... !!
감모여재
12/06/17 23:38
수정 아이콘
6.25에 6.25를 맞추시려고 계획을 짜놓으셨을 것 같아서 기대중입니다.
사실 저 당시 에피소드 중에는 재밌는것도 많아서 자세히 봐도 좋을 것 같은데 바쁘게 달려나가셔야해서 간단히 마무리하신것 같아서 조금 아쉽습니다! 예전에 pgr 독서모임이 있었는데 pgr 역사스터디 같은게 있어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온라인상으로라도..?)
앉은뱅이 늑대
12/06/18 11:08
수정 아이콘
민감하기 이를데 없는 부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비사를 많이 인용하는 것은 긍정적인 영향보다는 부정적인 영향이 클 것 같아 살짝 염려가 되네요.
해방후부터 전쟁까지의 역사는 최대한 건조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많은 걸 놓칠수 있다고 봅니다.
감정적으로 선을 긋고서 바라보면 그때의 비극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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