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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6/24 20:36:31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창군 - 폭풍 전야 2


저번 편에서 빼먹었습니다만, 북한에서 영친왕 이은이 한국의 국방장관 내지 참모총장이 될 거라는 걱정을 했던 것이 채병덕이 한 번 잘린 직후였습니다. 사실 맥아더도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올라서 나름 경험이 많았던 프린스 리가 어린애들보다야 더 적합하다고 여겼구요. 하지만 이런 북한의 걱정은 기우였을 뿐, 이박사가 누굽니까. 자기를 위협할 만큼의 명성이나 실력이 있는 이라면 독립운동가 출신이든 친일파 출신이든 막던 사람 아닙니까. 특히 "프린스 리"는 그 자신 이외에 더 있었으면 안 됐겠죠. 그가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박정희 때, 이미 목숨이 오락가락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그가 와서 군의 요직에 올랐다면 그래도 좀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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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근이 주장한 한국전쟁 10대 미스테리는 상당한 허점이 있습니다.

우선 비상경계령은 6월에 갑자기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5월 10일에 있었던 2대 총선에서 좌익의 방해에 대비해 미리 경계를 하고 있었죠. 이것 자체는 북한이 허구헌날 빨치산을 투입하고 있었으니 나름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거기다 미군 쪽으로든 국군 자체의 첩보로든 북한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었고, 위기설은 매 달마다 업그레이드 됐습니다.

+) 그리고 이 2대 총선에서 무소속이 전체 210명 중 무려 126명이나 나와서 친이승만인 여당이나 다름 없는 대한국민당은 24명, 한민당의 후예인 민주국민당 역시 24명이 나왔습니다. 좌익 어쩌고를 떠나서 민심은 이미 이승만을 떠난 것이었죠. 이를 살려준 것이 바로 김일성이었습니다. -_- 원래 전시엔 여당이 강한 것도 있지만 김일성이 진짜 남침해서 이승만이 옳았다는 꼴이 돼 버린 거니까요. 여기에 김일성은 이승만과 맞설만한 정치인들을 대거 납북했죠. 김일성을 더 까야 될 이유입니다.

이미 3~4월부터 위기설이 시작됐고, 4월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져 6월까지 휴가부터 외출외박이 통제되고 있었던 거죠. 그런 가운데서 나갈 사람이야 나갔습니다만 -_-a

3개월째 휴가, 외출외박이 짤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거기다 북한에서 뭔 움직임이 있다고 할 때마다 부대가 들썩이는 상황이니 그 스트레스는 또 어땠겠습니까. 이미 이 때 장병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6월의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를 생각하면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원래 이승만을 제외한 평화통일 회담을 제안하고 있었지만, 6월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했죠. 봄 동안 있었던 스트레스와 6월 초에 또 다시 닥친 스트레스, 하지만 이번엔 유엔한위까지 끌어들이며 나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경계가 누그러진 거죠.

이런 점에서 본다면 장병들의 휴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름 안심이 됐으니 쌓아뒀던 것을 빨리 풀어줘야죠. 거기에 하나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쌀이 없어요 (...)

군량미는 바닥 났고, 정작 휴가 나가는 병사들에게 주는 건빵은 남아 돌았습니다. 이 비정상적인 상태를 풀기 위해서는 건빵을 주고 빨리 풀어줘야 했죠. 거기다 농업국가인 한국에서 모내기를 조금이라도 더 도와야 군에 돌아오는 쌀도 더 늘어날 수 있구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6월 중순에 있었던 급속한 지휘관 교체는 이전에 하려고 마음 먹던 것을 그 때 가서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경기에서 약간의 여유가 났을 때 급히 선수교체를 하는 것처럼요.

여기에 더 큰 압박이 들이닥쳤으니, 미군 뿐 아니라 UN에서도 빨리 비상경계령을 풀라고 난리쳤던 겁니다.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는 그들에게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일단 북한에서는 평화통일을 위한 기자단을 보냈고, 국군은 자기들도 함께 있는 기자단에 총질을 한 거예요 -.- 이런 상황에서 옹진 반도를 가니 17연대는 그 어느부대보다 더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적반하장, 니들이 그렇게 기관총을 깔고 하니까 북한에서 가만 있냐는 식으로 딴지를 걸고 정부에 압박을 해 대니 견딜 수가 있었겠습니까.

미국은 물론 UN이 개전에 대한 책임이 큰 이유도 이겁니다. 어쨌든 신생국, 미국에 기대고 있던 정부가 미국이 계속 전쟁 없을 거라고 압박하고 오히려 니들 때문에 전쟁 나겠다고 하는 마당에 더 풀릴 수밖에 없죠. -_-;

북한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들의 화전양면전술은 이렇게 제대로 먹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평화 평화 해 대봐야 얼마나 믿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지금 북한이 딱히 휴전선의 병력을 빼거나 한 것도 아니었구요. 주한미군이 없는 상황에서 공격받은 게 그 때인데 주한미군 철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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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부분 역시 신성모와 채병덕만 다 뒤집어쓴 면이 큽니다.

애초에 기형적이었던 인사는 이 때 참 극단적이 됩니다. 김석원이 잘리고 이응준도 잘렸으며, 김홍일은 아직 군에 익숙해지고 있던 상황, 이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인재는 너무도 부족했습니다.

+) 사실 이런 노장들도 일본군에서 큰 역할을 맡아 보지 못 했으니 한계는 있었겠습니다만, 그래도 경험의 차이는 너무 크죠.

채병덕부터가 보급 쪽에서야 경험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그림을 짤 정도는 못 됐고, 그를 보좌하는 김백일, 장창국 등도 이런 면에서의 경험은 없다시피 했죠. 이는 개전 당시 마구잡이 축차 투입을 낳습니다. 후방의 사단들을 전방으로 올린다는 계획 자체는 3월에 이미 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급박한 전황과 혼란 속에 최악의 형태로 돼 버렸죠.

중요한 건 여기에는 그 10대 미스테리를 제시한 이형근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전부터 남침 징후를 신나게 알렸는데 무시당했고, 당일에도 남침이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 귀에 안 들어왔다느니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도 전면 남침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거든요. 4시에 전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광주와 대구에 있던 3, 5사단은 8시에 선발대를 기차로 출발시킨 반면, 대전에 있던 그의 2사단은 오후 2시가 돼야 출발합니다. 병사들은 10시까지도 태평하게 모내기하고 있다가 그 때 소식을 듣고 급히 복귀했죠. 개전 초 축차투입 의혹 역시 이형근에게도 가 있구요. 이런 면에서 본다면 10대 미스테리는 자기 잘못을 채병덕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의혹이 강합니다. 설령 채병덕이 간첩이라 하더라도 이건 뒷걸음질치다 쥐 밟은 것이죠.

신성모, 채병덕이 무능하다고 하지만 이건 그 둘의 잘못이 아니라 당시 국군 자체의 문제였다는 것이죠. 미군은 자기들과 의견이 안 맞는데다 일본군 스타일에 젖은 노장들을 홀대했고, 영어도 잘 하고 자기들과 의견도 잘 맞는 쪽을 중시했습니다. 여기에 이승만에 충성해야 된다는 것까지 들어가 있으니 수뇌부는 능력보다는 영어와 이승만에 충성이라는 조건을 가진 정치군인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죠.

흥미로운 건 정작 미군의 평가가 좋았던 장군들은 전방에 나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미군이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했던 이는 유재흥(...), 그래서인지 그는 가장 중요한 의정부 축선을 맡게 됐고 역시 평가가 좋았던 백선엽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유능한 이들은 직접 적과 얼굴을 맞대고 싸웠고, 무능한 이들이 뒤에서 이를 지휘한 것이었죠.

이런 점들을 보면 미군은 전면 남침보다 38선 분쟁 해결에 더 무게를 둔 걸 알 수 있습니다. 후방에 무능한 이들이 있어봐야 큰 일만 안 벌어지면 된다고 생각했겠죠. 어차피 정일권 같은 차세대 인재는 미국에 유학을 보내 미국식으로 가르치고 있었던 상황이구요. 혹은 그런 평가를 들은 이승만이 유능한 쪽은 전선으로, 무능한지는 모르겠고 자기한테 절대 충성하는 이들은 자기 주변으로 돌린 것일지도요.

뭐 그래도 남침만 없었다면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어차피 다들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태였고, 일본군이나 중국군 방식이 젖은데다 나이와 자존심으로 변화하기도 힘든 노장보다는 미국에 계속 유학 보내면서 젊은 장군들을 키우는 게 낫거든요. 남침만 없었다면 군의 규모도 그리 커지지 않았으니 여기에 잘 교육된 장교들을 차근차근 배치해 질을 조금씩 늘릴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남침으로 그게 안 됐죠. 노장들은 급히 나와서 구원 투수 역할을 한 후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다시 물러났고, 국군의 허접함은 정말 곳곳에서 드러났으며, 그러고도 군의 규모를 늘려야 돼서 능력이 없는 이들이 다수 요직에 올라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악폐습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남았구요. 그리고 잘 교육된 하급 장교들은 이것과 진급이 안 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 뭐 그렇게 됐죠. 참고로 독도법(지도 보는 법)도 모르는 사람이 장군직에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급한 상황에서야 그래도 맹장 역할은 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좋은 현상이 절대 아니었죠. 네, 남침만 없었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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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가 많이 돌아갔습니다만, 개전 초의 혼란은 채병덕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체적으로 썩었어요. 그런 것에 비한다면 전방의 부대는 정말 잘 해 준 편이구요. 그리고 그 10대 미스테리를 주장한 이형근도 그런 무능한 정치군인 중 하나일 뿐이었죠.

그 외에 장병들의 휴가 같은 경우 석 달간의 비상 상황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능한 수준이고, 미군과 유엔의 압박 하에서 더 풀어졌다고 봐야 되는 상황입니다. 북한의 화전양면전술이 정말 잘 들어맞은 거죠.

개전 초기에 북진이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답이 간단한데, 지들 자체가 아무것도 몰랐어요. (...) 채병덕이 대규모 남침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후, 이런 상황에서 민심을 안정시킨다고 늘 뱉던 말을 해 버린 거죠. 이게 또 북침설의 근거가 돼 버리고... 아무튼 이런 혼란 속에 죽어나간 건 일선의 장병들과 국민들 뿐이었죠.

뭐 그렇다고 이것으로 다 납득이 되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정말 무장해제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을 잘 맞춘 것이었으니까요. 이런 점에서 그들이 간첩은 아니었을지라도 요직에 간첩이 있어서 그렇게 유도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습니다. 김일성은 국군의 규모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니까요.

답은 어디 있을까요. 이 10대 미스테리 문제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분명 간첩이라 생각될 정도의 문제가 있었지만 이걸 그 둘만의 문제로 몰아 버린 것이고, 애초에 그런 게 국군 자체의 문제고 전면전에 대항할 수 없었던 수준이었다는 거죠. 전면전이 일어나니 그 문제가 정말 최악의 방식으로 나와 버린 거구요.

+) 하지만 다르게 보면 이렇게 모든 문제를 뒤집어 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채병덕이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죠. (...) 이형근이 자기 문제의 어느 정도를 떠넘겼는가도 참 머리 아픈 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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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 왜 그렇게 쉽게 남침했고, 내려올 수 있었냐는 것은 이렇게 국군의 수준과 미국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던 게 큽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죠. 국군도 남침을 진심으로 대비했는지입니다.

일단 국군도 북한군이 강해진 것을 알고 있었고, 3월부터는 남침에 대한 방침을 정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걸 진짜 위협으로 생각하진 않은 것 같아요.


"형 왔다."

맥아더는 남침 소식과 북한군의 진격이 빠르다는 것을 듣고 중요한 것 하나를 묻습니다. 대전차지뢰였죠. 수가 많진 않았지만 대전차지뢰 같은 방어용 무기는 국군에 보급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북한의 주요 공격로에 없었고, 북한군 전차는 너무도 쉽게 남진해 왔습니다. 길도 좁고 전차 기동이 힘든 논밭이 많았기에 하나하나의 효과가 참 컸을 텐데도 말이죠.

결국 국군에서도 이걸 진심으로 걱정하진 않은 거예요. 미국의 탓도 크지만, 북진 드립만 계속 늘어놓은 한국 정부의 탓도 큽니다. 북진 북진 하면서도 대비는 확실히 해 놓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최소한 지뢰라도 깔아놨으면 서울이 점령되는 수준이라면 몰라도 국군 전체가 붕괴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로 전차에 대한 충격은 컸으니까요.

유사시 어떻게 할 것인지도 제대로 교육되지 않았고, 요충지에 대한 방어 진지 구축도 부족했습니다. 옹진이나 춘천 등 주요 분쟁이 일어났던 곳에서는 시민들까지 동원해 열심히 진지를 쌓았지만, 종심방어, 몇 겹으로 방어진을 두르고 이걸 총체적으로 관리하지 않았죠. 어디까지나 38선 분쟁에만 신경 쓰고 적의 대규모 공격에 대해서는 그냥 생각만 해 두는 정도였죠.

가령 1사단 같은 경우는 유사시 개성을 포기하고 임진강에 방어선을 만든다는 계획을 세웠고, 전체적으로 남진 속도를 늦추기 위해 다리를 파괴한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느 전선에서든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공병의 수준이 낮아서기도 했지만요. 한강교 파괴에는 이런 압박감도 어느 정도 이유가 될 겁니다.

종심 방어가 됐다고 할 만한 곳은 의정부 축선,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됐고 그에 대한 훈련이 됐다 하긴 힘들고, 그 곳을 맡았던 유재흥은 사단장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다 너무 많은 적이 왔다 하더라도 그의 지휘에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듭니다.

여기에 국군의 주요 물자들은 38선과 서울 사이에 있었습니다. 이건 뭐 조금만 후퇴하면 바로 나 잡아 잡수 하는 거죠. 그리고 북한군은 실제 잡아 잡쉈구요. 국군에 의해 파괴라도 됐으면 다행입니다.

+) 미군도 이걸 지적하긴 했지만 제대로 바꿀 생각은 안 했습니다. 가령 미 고문관은 김석원을 깔 때 1사단 모든 병력이 전선 전체에 흩어져 있고 그 중요한 예비대가 하나도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미군이 그를 싫어해 짜르려고 더 나쁘게 말한 감이 있고 실제로 잘렸지만, 어쨌든 전방에서도 방어는 전혀 신경 안 쓰고 38선 분쟁만 생각했다는 것이죠.

국군은 이렇게 전면전 방어를 생각하지 않은 채 개전을 맞이합니다. 그 결과는 처참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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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 6.25 전쟁 얘기를 할 때마다 늘 나오는 말입니다. 준비를 해야 맞설 수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참 슬픈 말이기도 합니다.

그 때 그 상황에서는 미군도, 국군도 북한의 전면전만을 가정하고 제대로 준비를 했어야 전면 남침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준비가 아니죠. 10만 육군의 수를 있는대로 늘리고, 또 얼마가 필요할 지 모르는 미군이 한반도에 상주하고, 오늘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는 준비가 됐어야 가능했다는 것이죠. 서울은 너무 가까웠고, 어떤 준비를 하든 큰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거기다 38선 바로 밑의 개성도 생각해야죠.

그 때는 그러지 못 했습니다. 미군과 유엔은 북한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만 믿고 있었고, 국군 역시 허구헌날 북진을 얘기하고 남침 가능성을 말 하긴 했지만 정작 그걸 진심으로 믿은 이는 없어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북한의 평화 통일 공세는 성공했구요. 평화를 바라거나, 바라진 않았더라도 평화가 얘기되는 것을 보고 경계를 푼 순간 정말 제대로 당한 것이었죠.

적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각오로 경계를 해야 되는 상황은 그 때부터 시작됐고 지금까지도 쭉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적은 같은 민족이구요.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그런데 어떡합니까. 그게 실제로 일어나 버린 걸요.

지금 북한이 전면전을 벌인대봐야 6.25 때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북한이 100만이 넘는 병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때처럼 여전히 서울은 가깝습니다. 피해가 아무리 적더라도 그건 분명 "피해"이고,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입니다.

평화를 아무리 얘기하더라도, 통일을 아무리 추구하더라도 안보가 확실히 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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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았고, 무능한 이들만 큰 목소리를 냈던 그 때, 믿을 건 세 개 뿐이었습니다.


"거기서 제 5사단장 이응준 소장을 만났어요. 그 때 환갑의 이 장군이 '나라가 왜 이 지경이 됐느냐'고 한탄하는 것을 위로하면서 함께 수원으로 갔습니다. (중략) 참 가슴이 뜨끔하더군요. 3일에 한국의 존망이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첫째는 장교와 병사들의 애국심, 부대가 수 없이 와해되고 후퇴하고 도망가는 이들이 수 없이 많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북한군에 투항한 단위부대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단장이 여기 있다.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버릴 것인가,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싸우자"

숙군의 영향은 컸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남은 이들에게 있어 이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먼저 월북했던 이들은 80년대까지도 북한 tv에 나와서 선전을 했습니다. 친일파 출신이더라도 북에 투항한다면 높은 자리는 못 오를지라도 협조만 잘 하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배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이 나라가 지켜진 것이죠.


"그 순간 나는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앞에 있던 노 소령을 나도 모르게 끌어안았다. 또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두번째는 북한군의 삽질, 역시 신생국에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상태이니만큼 북한군도 참 많은 삽질을 했습니다. 국군의 삽질 역시 커서 주르륵 밀린 덕분에 주목은 안 됐지만 이 역시 그리 작지는 않죠. 이것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싸운 국군의 방어와 맞물려 최악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강선 결전은 서울시민을 버리는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서울 시민을 버린 채 도망쳤으나 결국 죽었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서울을 사수하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게 낫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지원, 해방 이후 참 많은 삽질을 했던 게 미국이었지만 한국이 위기에 처하자 그들은 바로 왔습니다. 그리고 수 많은 피를 흘리며 이 나라를 구해줬죠.

하루 하루가 나라가 망하느냐 아니냐의 기로에 처해 있었습니다. 국군 장병의 피로 하루를 버텼고, 북한군의 삽질로 하루를 넘겼으며, 미국의 지원으로 하루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일이 터진 것 자체가 비극이었고, 수많은 학살 사건과 전쟁통에서도 그치지 않는 부정부패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때의 희생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흘린 피는 존경 받아 마땅합니다. 그렇게 온갖 실책과 부정을 욕 할 수 있는 나라라도 있다는 것은, 최소한 나라 잃었던 아픔에 비한다면 천국인 것이니까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전 부대에 폭풍이라는 암호가 도착합니다. 폭풍은 언제나 두 번 붑니다. 만주에서 시작된 첫 번째 폭풍은 한반도까지 이르렀고, 분단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폭풍은 한반도 내에서 불었고, 동족상잔이라는 최악의 비극을 시작하는 신호였습니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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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주인공이신 분입니다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면서 얘기하는 것보단 각 전선에서의 상황을 얘기하는 게 낫겠죠. 아마 내일 04:00에 올릴 것 같진 않지만, 드디어 이 얘기를 시작하게 되는군요.

1. 개성-문산 전투 -> 1사단의 얘기입니다
2. 웅진 함락, 김포지구전투사령 -> 별로 안 알려졌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일이 일어나죠
3. 8사단, 대한해협 해전 -> 동해에서 일어난 일 역시 별로 안 알려졌더군요
4. 적은 서울로 -> 멘붕은 각오하셔야 될 겁니다
5. 서울 함락 -> 이제 시작일 뿐이예요
6. 춘천-홍천 전투 -> 마지막은 희망으로 끝내야죠

한국 전쟁 1부, [폭풍]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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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독백
12/06/24 20:48
수정 아이콘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맞는말 같습니다.
사회생활할때도 타인을 믿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있는거지, 처음부터 믿지 않는다면 욕은 들을 지언정 되돌릴수 없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으니까요.
혹시 그 전쟁중에 25사단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알려주실수는 없나요?(제가 그 부대 출신이라 궁금한건 아닙니다만(..))
가을독백
12/06/25 22:09
수정 아이콘
눈물이뚝뚝T^T 님// 전 71R 3BN 10co 출신입니다. 72R이면 저희 아버지가 복무하셧던 연대군요.
눈시BBver.2 님// 웬지 다행이면서 아쉽습니다.(?)
전시에 뻘짓을 할 수 없었다는게 다행이고, 큰 전쟁 수행때 뭔가 큰 역할 했기를 내심 바랬는데 말이죠.
시나브로
12/06/24 20:51
수정 아이콘
12/06/24 21:06
수정 아이콘
흥분을 감출수가 없네요. 하악하악
감사히 잘보겠습니다 크킄
Grow랜서
12/06/24 21:25
수정 아이콘
참 가슴아픈 이야기의 시작이군요...
Je ne sais quoi
12/06/24 21:55
수정 아이콘
시작이군요...
Langrriser
12/06/25 02:33
수정 아이콘
한국사 전공분들에게는 펜 놓고 깡소주를 들이붓는 '기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바로 첫번째가 임진왜란때 '원균'이고,
두번째가 근대 일제강점기이며 세번째가 바로 이...6.25...!
때마침 이미 6월 25일이네요. 건필을 기원합니다.
하심군
12/06/25 08:32
수정 아이콘
사실 이 때 당시에 허풍으로 북진과 남진을 와쳤던 사람은 없었다고 봐요. 미국이 유난히 군대를 억제하려고 했을 뿐이지 소련도 전면전은 원하지 않았던 것 같고 반면에 갈라진 나라를 원했단 시람은 아무도 없고요. 결국 김일성이 조금 더 미치고 경솔한 것 같습니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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