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2/07/04 23:40:44
Name 눈시BBver.2
Subject [일반] 폭풍 - 5. 서울을 지키는가 포기하는가
채병덕이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아예 몰랐던 건 아닙니다. 개전 직전에는 안 되겠다 싶어 공작원을 투입했고 25일 08:00에 복귀할 예정이었죠.

그가 아무것도 안 한 채 최악의 사태를 만든 건 아닙니다. 가령 김포사를 급히 만든 것이나 옹진의 17연대를 죽을 때까지 버티라거나 하지 않고 철수하게 한 것은 그래도 못 한 건 아니죠.

문제는, 그가 북한의 남침이 전면전이라는 것을 계속 부정했다는 것입니다.

-------------------------------------------


"나는 채 총장의 명령이 무리라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가 조금이라도 적의 남하를 지체시켜 의정부를 막아놓고 후속할 증원 부대를 한강 북쪽에 전개시켜 서울을 고수하려는 의도로 보여 이해가 되었다. 내가 이 때 들은 후속 증원 부대는 약 5~6개 연대로 기억한다. 나는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하고 답변하였다." - 유재흥, 격동의 세월

유재흥은 마음을 다잡고 명령을 내립니다.

- 사단은 26일 08:00를 기해 동두천을 탈환한 다음 소요산-마차산 간의 원진지를 회복하려 한다.
- 공격간에 공군의 지원이 있을 것이다.
- 1연대는 덕정에서 3번 도로의 양 측방으로 돌진, 동두천을 탈취하라
- 18연대는 현 집결지인 녹양동에서 덕정-용암리 축선으로 진격하여 봉암리를 탈취하라

이를 지원할 부대는 5포병대대의 1개 포대와 "약간의 공군", 이전에 말씀드렸듯 하늘에서 수류탄과 폭탄을 떨구고 바주카포를 쏘는 식이었습니다. 이 때 적이 하도 많아서 쏘는대로 맞았다고는 합니다만. 그 때 2사단 역시 명령을 받고 포천을 탈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죠.

당시 1연대는 1대대가 고립돼 있었고, 3대대가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도 남아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거의 쉬지도 못 한 채 다시 전투를 해야 했죠. 다행인 점은 이런 상황에 몰리면서도 전의만은 남아 있었다는 것이었죠. 유재흥은 패잔병과 증원군을 긁어모아 혼성대대를 만들고 3대대와 함께 역습을 시작합니다.

"1연대는 공격을 개시한 지 2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마음이 탔는데, 이미 동두천을 탈취하고 북상중이란 보고를 받고 이대로 38선 회복도 무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역습은 정말 무난하게 성공합니다. 10:00에 혼성대대가 동두천 시내로 진격했으나 있는 건 경계병 몇 명 뿐, 적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죠. 혼성대대는 어쨌든 진격을 계속해 소요산까지 진격했지만 아직 마차산에 있는 1대대와는 연결하지 못 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4:00, 이들에게 충격적인 무전이 옵니다.

"신속히 창동으로 철수하라."

혼성대대가 동두천에 도착했을 무렵, 의정부 함락 소식이 들려옵니다. 동두천을 공격해 봐야 의미 없는 일이었죠. 이런 상태에서 1연대도 언제 공격받을 지 알 수 없는 상태였죠. 혼성대대와 3대대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 때 서북청년단 출신이 많았던 장병들은 철수를 거부했다고 하죠.

"내가 38도선을 넘어올 때에 후퇴하려고 온 줄 아느냐? 죽어도 여기에서 죽자!"


집결지는 창동, 이들을 겨우 설득하긴 했지만 돌아오는 길도 그리 편하진 않았습니다. 이미 혼성대대의 퇴로도 끊겨서 의정부 쪽으로 이동해 9연대와 3연대 후퇴 병력과 합류해서 의정부를 통과하기로 했는데 후퇴 과정 중에 계속 공격을 받으면서 우이동의 연대본부에 도착했을 때는 28일 09:00가 돼서였습니다. 한편 3대대는 우회해서 덕정으로 향하던 적 기계화부대를 발견하고 보고하려 했지만 통신 두절, 이 상황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불과 30분만에 분산됩니다.

27일 12:00까지 창동-우이동에 만들어진 방어선에 도착한 1연대 병력은 불과 400명도 안 됐다고 합니다. 처음 전방을 맡았던 2대대장 이의명 소령은 행방불명됐죠.

------------------------------------------

북한군의 목표는 동두천, 포천 같은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이었죠. 이들은 마치 예측이라도 한 듯 아군의 역습에 카운터 펀치를 먹인 겁니다. -_-; 1연대의 뒤를 따라 진격하던 18연대도 여기에 휘말립니다. 이들은 별 일 없이 진격해 가다가 12:00에 현지에서 방어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13:00에 편성을 완료했는데 14:00에 적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듣게 됩니다. 연대장 임충식 중령이 직접 각종 차량 300여대로 진격하는 북한군을 보았는데 그게 2km에 걸쳐 있었다고 하죠. 그는 대전차 특공대를 조직해 선두 전차에 공격을 가 했지만...


-_-; 알잖아요.

적은 18연대가 공격을 하거나 말거나 계속 진격했고, 연대는 전차를 포기하고 후속 보병을 상대하기 위해 대기합니다. 하지만 적 보병들은 1연대 3대대와 싸운 후 18연대 근처까진 오지도 않았죠. 이 과정에서 18연대는 후속부대를 공격해 13명을 생포하고 우마차 12대에 실린 전차 포탄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나름 후방 게릴라지만, 계속 이럴 시간은 없었죠. 의정부가 함락된 이상 모두 남쪽이나 동쪽으로 가는 것은 무리였고 계속 버티고 있던 1사단의 작전 지역으로 향한 것이었죠. 어디 적이 있을지 모르고 같은 편인 1사단에게도 공격받을 수 있었던 상황, 하지만 이들이 다시 집결할 무렵에는 이미 서울이 무너지고 1사단도 후퇴하는 상황이 돼 버렸죠. 18연대는 1사단처럼 중화기를 버리고 한강을 도하, 김포반도로 철수합니다.

서울이 함락되는 동안 한 개 연대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던 점은 좀 크죠. 그래도 괜히 축차 투입됐다가 병력을 잃는 것보단 낫군요. 자, 그럼 의정부로 가 봅시다.

-----------------------------------


회기에서 갈아탔군요. 저 회기도 이후 주요방어선이 됩니다.

3연대가 주둔지인 서빙고에서 출발했을 때는 25일 11:00, 하지만 대부분이 휴가, 외출 중이었고 출발 때까지 모인 병력은 1/4 수준인 65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래도 한 명이 더 급하다 싶어서 1개 대대를 혼성 편성하게 되었고 병사들은 물론 장교들도 자기 위아래가 누군지 제대로 모른 채 출발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1, 2대대장도 오지 않았고 중대장이 오지 않은 중대도 6개나 됐죠.

14:00에 의정부에 도착해 급히 9연대를 증원하러 갔지만, 9연대는 무너지고 포천은 점령된 상황이었죠. 1연대와의 차이는 컸습니다. 1연대는 어찌됐든 병력을 수습해 방어선을 짜고 역습도 가능할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9연대는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죠. 이들은 급히 송우리에서 방어선을 짰고, 후속 병력도 속속들이 도착했지만 적 역시 곧바로 다가옵니다. 병력도 적고 준비도 안 됐던 3연대의 앞은 뻔했죠. 17:00부터 시작된 공격으로 18:30에 전멸했고, 연대장 이상근 중령도 행방불명됩니다. 그나마 북한군의 후속 공격이 적어서 남은 대대장들이 병력을 8km 후방의 축석령으로 후퇴시켰고, 병력 부족으로 다시 의정부까지 퇴각하면서 이 지역은 급히 증원 온 2사단이 맡게 되었죠.

+) 저 이상근 중령의 이름이 누구와 비슷하죠?

-------------------------------------



잘 알려졌듯 2사단장 이형근 준장은 채병덕의 역습 명령에 항의합니다.

"'적은 이미 축석령에 접근하고 이 방면의 9연대는 지휘가 마비된 상태이다. 또한 지형도 생소하여 반격은 곤란하다.'고 말 하자, 채 총장의 엄숙한 일갈로 두 사단은 공격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채 종장의 일갈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화를 낸 것은 사실이었다."

이러면서 전면전을 준비도 안 한 채 큰소리만 치다가 서울을 잃은 채병덕과 전면전에 대한 경고를 계속 했고 축차 투입도 반대했다가 명령을 거부 못 해 패전한 비운의 주인공 이형근의 구도가 만들어집니다만...

문제는 25일 20시에 도착한 2사단 5연대 2대대가 금오리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금오리와 3연대 사이에 있던 축석령은 방어하기 좋은 지역이고 채병덕은 이형근 자신 뿐만 아니라 5연대 2대대에게 직접 축석령 점령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이형근은 그저 주력이 올 때까지 대기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3연대는 밀려났고, 26일 03:00에 축석령으로 향하던 5연대 2대대는 3연대 패잔병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리고 이들이 축석령에 갔을 때는 이미 적 전차가 고개를 넘어 오고 있었습니다.

양 측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도 않았던 것, 이건 정말 컸습니다. 거기다 3연대는 2사단이 진지를 갖출 동안 버텨주기라도 해야되는데 분산돼 버렸죠. 이들의 재집결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데는 연대장 이상근의 공백이 컸습니다. 그는 적이 오자 여러 차례 도망갑니다. 29일 한강 방어선에서 배 아프다고 후방으로 가기까지 총 세 차례, -_-; 휘하의 대대장들만 고생 했고, 그는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7월 14일에 지뢰를 밟아 사고사(전사로 분류 안 되나 봐요 -.-)하는데 안타까운 생각이 들지 않죠.

이 이상근이 바로 이형근의 동생입니다. -_-;

이형근의 경우 변명의 여지는 있습니다. 일단 선발대가 너무 적었고 3연대가 더 버텨줄 줄 알았겠죠. 가장 큰 건 무기와 탄약의 부족, 각 병사들이 가지 총알이 많아야 15발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지형 숙지도 안 된 상태에서 지도 한 장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력을 기다리는 건 이해는 됩니다만, 이걸로 인해 축석령이라는 요지를 너무 쉽게 빼앗겨 버렸죠.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시작이었죠.

적과 조우한 5연대 2대대는 날이 밝으면서 강렬해지는 공격을 받고 패퇴, 여기서 5연대 1대대가 증원됐고, 마찬가지 운명에 처합니다. 이 때 그나마 도움이 됐던 것은 급히 증원된 포병학교 2 교도대대였습니다.


하지만 전차를 막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고, 이들을 이끌던 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결단을 내립니다. 야포를 직사로 전차와 상대하기로 한 것이었죠. 그는 전차가 50m 앞까지 오길 기다려 포격, 궤도에 명중시킵니다. 정말 무서운 생각이었고, 목숨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맨 후방에서 호위를 받으며 적을 상대해야 될 포병이 전차와 정면으로 맞붙은 것이었죠. 결국 제 2탄을 장전하기도 전에 후속 전차의 포격에 전사합니다.

이 희생은 국군에 결정적인 기회를 주었습니다. 진로가 막힌 북한군 전차에 포병의 화력이 집중됐고, 전차들은 축석령으로 다시 물러나게 되었죠.

그렇다고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 2사단 예하 16연대가 차례차레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들 역시 오자마자 투입됩니다. 16연대장 문용채 대령은 1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이형근은 거부했고 2대대가 단독으로 북진, 1대대도 뒤를 이어 투입됩니다. 이들 역시 제대로 탄약 보급도 되지 않은 상태였죠.

이렇게 2사단은 무너졌고, 적은 금오리까지 진격했으며, 사단 지휘부는 혼란에 빠집니다. 예하 부대와 병력 간에 연결은 제대로 되지도 않았으며 동생 이상근은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병력이 집결했으니 역습을 하자고 하질 않나 참 난장판이었죠. 이 때 2사단의 마지막 병력인 25연대가 창동에 도착해 탄약수령을 하고 있었지만 이들까지 투입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12:30, 사단 지휘부에 포병도 아닌 전차 포탄이 떨어지면서 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합니다.


그리고 13:00에는 의정부가 점령됐죠. 이렇게 서울로 들어오는 문이 활짝 열립니다.

채병덕은 이런 2사단의 전멸에 대해 불 같이 화를 내며 이형근을 자릅니다. 이 때 채찍으로 이형근을 때렸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_-; 이형근이 이끌던 남은 병력은 유재흥에게 흡수됩니다. 적이 우회하긴 했지만 유재흥은 여기서 정말 열심히 싸웠고, 국군과 미군의 기록에도 유재흥을 좋게 평가하고 있죠.

--------------------------------------------------------

축차 투입, 축차 손실. 스타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운 일입니다. 소수의 해병을 보내다가 중간에 끊어먹히는 것과 수십기를 모아 한타를 노리는 것의 차이는 크죠.

의정부-포천 축선에 있었던 2사단의 축차 투입에 대한 통설은 채병덕의 잘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형근은 자기는 안 된다고 했는데~를 시전했죠. 확실히 채병덕은 쉽지 않은 역습을 주장했고, 이를 반대하는 이형근을 묵살했습니다. 또한 선봉인 5연대 2대대에게는 이형근에게는 별도로 공격을 명령했죠.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형근 자신도 많은 문제를 남깁니다. 채병덕의 명령은 어디까지나 2대대로 축석령을 점령하라는 것, 이형근은 이걸 한참 늦게 시작했고, 북한군이 3연대를 밀어내고 축석령에 도달할 때에야 도착했습니다. 또한 그 이후의 병력을 대대급으로 축차 투입한 것은 바로 이형근의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이형근에게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 그래도 무서웠던 전차인데 이를 막을 중화기는 물론 소총탄도 부족한 상태였죠. 하지만 그렇다면 보낼 거면 보내고 말 거면 말아야지 축차 투입한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실책입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긴 했습니다. 채병덕이 그를 꽤 짓눌렀으니까요. 애초에 군번 1번을 가지고 다퉜던 사이였습니다. 상관의 압박에 밀린 상태에서 오버는 나올 만 하죠.

하지만 채병덕의 명령이 그렇게 그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소부대로 축석령을 점령한 후 5연대 주력과 16연대 주력이 합류할 만한 시점인 08:00에 공격을 개시하라고 했습니다. 무리하게 축차 투입해서 역습을 하라는 건 없었죠.

이렇게 보면 양 쪽 다 할 말이 있긴 하고 양 쪽 다 실책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만 역시 싫은 것은 이형근이 여기서 자기 잘못은 없는 것처럼 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국군에서 내놓는 공식 주장과는 달리 미국과 한국전비사 등 일본의 기록에는 그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선 이전 편에 언급한 연합신문 이지웅 기자의 기록, 이형근은 여기서 전면전을 생각하기는커녕 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2사단장이 된 건 6월 10일로 2주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가 전면전을 생각했다면 유사시 그가 증원됐을 의정부 방면의 지형 등에 대해 신경 써야 했습니다. 최소한 그가 전면전을 걱정했다는 부분은 거짓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여기에 미국과 일본, 그의 부하들이 말 한 증언들을 보면 축차 투입의 문제는 바로 그에게서 나옵니다. 2개 대대를 끌고 왔던 25연대장 김병휘는 뜬금없이 자기 휘하 2개 대대를 3, 5연대에 배속시키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럼 자기가 할 일은 없게 되죠 -_-; 이 정도로 이형근은 패닉 상태였습니다. 미군의 기록에서는 이형근을 참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는데, 이 때 이형근은 2개 대대를 가지고도 그저 멍하니 있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양 쪽 병력의 차이를 생각하면 의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함락됐을 것이고,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형근의 행동은 이해할 만한 여지는 많습니다. 하지만 전후부터 채병덕이 죽었다는 것을 이용해 자기는 아무런 죄가 없이 억울하다는 것처럼 언플해 온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죠.

여기에 전쟁이 기세 싸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 큰 문제가 나옵니다. 소련군의 교리는 (다른 데라고 다를 바는 없겠지만 소련은 그걸 극대화시킵니다) 적의 약점에 최대한 집중하는 것이고 열심히 싸우는 7사단보단 제대로 못 싸우는 2사단에 병력을 더 집중했습니다. 딱히 주공 조공의 구분이 없었던 전선은 2사단이 방어하는 방향으로 쏠렸고, 2사단이 쓸린 후 7사단의 측면을 찌르면서 7사단 역시 붕괴된 것이었습니다.

채병덕 역시 문제는 큽니다. 다만 앞으로 나올 서울 사수 문제에 비한다면 너무 이형근을 다그친 것 수준이죠. 오히려 이형근이 10대 미스테리를 크게 홍보한 것 자체가 자기의 모든 잘못을 채병덕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할 만한 것이죠.

어찌됐든 의정부는 함락됐습니다. 이제 서울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지역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

자.......... 그럼 그 동안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냐면요.

"침입한 적은 국군의 반격으로 퇴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였으니 앞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국토의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이다." - 신성모 26일 08시 KBS

채병덕이 한창 역습의 결과를 고대하고 있을 26일 10:00, 국방부에는 현역과 재야에서 원로급 군 경력자를 모읍니다. 이른바 '군 원로 회의'입니다. 여기에는 김홍일 소장, 송호성 준장, 이범석 전 국무총리, 이청천, 전 통위부장 유동열, 5사단장 이응준, 전쟁이 났다는 소식에 바로 김홍일 휘하로 자원한 김석원 예비역 준장, 공군 총참모장 김정렬 준장, 해군 총참모장 대리(손원일은 하와이에) 김영철 대령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신성모와 채병덕은 낙관론을 폅니다.

"현재 군은 의정부에서 북한군을 반격하고 있으며 전황은 유리하게 진전되고 있다." - 채병덕
"동해안에서는 300명의 적이 투항했고 17연대는 해주로 진격하고 있다" - 신성모

하지만 모인 군 원로들이 보기엔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죠. 아니 그 전에 그 흔한 상황도 하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때 나오는 많은 증언들은 어느 게 맞는지 갈피를 잡기 힘듭니다. 루머도 많고 회고록을 이용해 자기는 그 때 잘 했다는 식의 왜곡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다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군 원로들은 한강선 방어를, 채병덕과 신성모, 수도사단장 이종찬은 서울 고수론을 폈다는 것이죠.

일단 유명한 건 김석원이 채병덕과 신성모를 갈궜다는 것, 그 성깔 어디 가겠어요 (...) 그의 증언을 들어봅시다.


"신장관이 낙관하고 있어서 나는 그럴리가 없을 것이다. 확인해 보라고 하였으나 채 총참모장은 '반격, 북진한다'고 하며 그의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 노병의 한

"채병덕 총참모장은 김석원 전 1사단장의 채근에 아무 말도 못 했다. 김석원 장군은 한층 소리를 높이더니 뒤에 배석하고 있는 육군본부 참모들을 향해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 후방에 있던 3개 사단은 지금 어디에 있나'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그들도 대답을 못 했다. 병력은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왜냐하면 병력이 오는대로 '위급하다'는 곳으로 보급품 배달하듯 보내버렸기 때문이다. (중략) 이러한 소동 속에서도 주최측인 신성모, 채병덕, 김백일, 장창국 등은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 하고 있었다. 신성모는 상선의 선장 출신이고 다른 세 사람은 일본, 만주군 출신이지만 모두 전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부서에서 일해 전쟁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 이재전 회고록

그저 어이 없어 하던 원로들, 반면 이들을 보는 채병덕, 신성모부터 밑의 김백일, 장창국 등도 어이 없어 했던 모양입니다. 자기들 입장에선 1사단도 나름 잘 막고 있고 6, 8사단도 그런 모양이고 그 중요한 의정부에선 무려 역습까지 하고 있었으니까요.

경험의 차이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김백일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았다느니 하는데... 이 양반 전투 경험 없어요 (...) 게릴라 토벌이야 그냥 일본군에서 배운대로 밀어붙였을 뿐, 옹진에서 북한군과 싸울 때도 참 못 싸운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죠. 장창국도 마찬가지, 한마디로 이들은 전투도 제대로 경험하지 못 했고 배우지도 못 한 상태에서 이런 요직을 맡고 있었던 겁니다. 이러니 자기들 눈에는 뭐 잘 하는 것 같은데 원로들은 성깔만 내더라 이런 식이 되는 거죠.

이 자리에서 가장 발언권이 높았던 건 역시 김홍일이었습니다. 단지 광복군 출신이었다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 어떤 일본군, 만주군 출신도 그보다 더 높은 직위에 있지 않았고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지휘해 보지 못 했던 거죠. 성깔만 내던 김석원에 비해 그의 말은 논리정연하고 담담했습니다.


"일전에 총참모장께 대전, 광주, 대구에 있는 3개 사단을 전쟁 발발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전방 지역에 미리 갖다 놓을 것을 건의한 바 있습니다. 이는 저의 첫째 방책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책으로 어제 다시 3개 사단을 한강 방어선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전개시키고 한강 이북의 모든 부대를 강남으로 철수케 해 재정비한 다음 반격작전을 실시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채택이 안 됐습니다. 첫째 방책보다 둘째 방책이 차선책입니다."

이어서 그는 이 상황에 맞는 마지막 방책을 주장합니다.

"셋째 방책은 그보다 못 한 최후의 방책이 될 것입니다. 이는 대한민국과 국군을 위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결론을 말씀드리지요. 때는 늦었습니다. 호기도 지났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부터 수도 사수만을 고집, 아까운 병력을 뭉텅뭉텅 소모시킬 게 아니라 즉시 한강을 방어선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 후방부대 병력과 학생들을 동원, 한강 남안에 진지를 구축케 하는 한편 시민들을 한강 이남으로 철수시키고 효과적인 지연전으로 병력을 철수, 한강선을 방어해야 합니다. 한강을 방어하는 동안 우리의 역량을 키워 반격준비를 하는 한편 미군의 개입을 요청, 연합군을 편성해 북진합시다."

순간 조용해진 회의장, 곧 원로들은 여기에 찬성합니다.

"김홍일 장군의 한강 방어선 설정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지금 상황 하에서 최상의 수단은 한강 방어 뿐" - 이범석, 김석원

이에 대한 답을... 들어봅시다.

"김홍일 장군의 방책이 훌륭한 방책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저도 그 방책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가카의 명령은 서울 사수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몸을 바쳐 서울을 사수할까 합니다."

"채장군 말대로 서울은 사수해야 한다. 대통령 각하의 명령이다. 우리 모두 죽는 한이 있어도 서울을 사수하자." - 신성모

.........................

-_-a

의정부 패전에서의 축차 투입은 이형근의 잘못이고 2사단의 붕괴를 낳았습니다. 정부와 원로들에게 아주 자신만만하게 역습을 주장했던 채병덕이 더 화가 났을 거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죠. 하지만 그 외의 병력들을 투입하고 계획을 세운 것은 채병덕이었습니다. 이들이 의정부에서처럼 축차 투입되진 않았지만, 방어하기 어려운 곳에 서로 연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탄약 등의 부족으로 너무도 쉽게 뚫려 버립니다.

채병덕의 군사 지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가 북한군의 남침을 방관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말 열심히 일 했죠. 하지만 원로들의 눈에 보기에 사상누각과 같았던 서울 방어전을 그는 너무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한강 남쪽에서 집결해 방어하고 이후 차근차근 반격했다면, 상황이 그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치적인 이유도 많이 있을 겁니다. 채병덕과 뜻을 같이 하고 계속 그를 지지했던 이종찬은 여러 구체적인 이유를 들며 서울 사수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서울 사수에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었고, 채병덕과 정부는 그걸 하지 않았죠.

서울, 한강 이북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게 내릴 수 없는 결정이긴 합니다. 특히 정치적인 문제가 걸려 있는 상황에서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법이죠. 하지만 포기를 하지 않겠다면 군관민이 합동이 돼서 죽을 각오로 지키기라도 해야 했고, 군인이 총알받이가 돼서라도 민간인들은 철수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서울 방어전에서 그건 단 하나도 되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건 사수도, 국민들의 피난도 말이죠.

다음 편에서 한강교가 폭파될 겁니다. 창동에서 미아리, 회기동까지 계속된 방어가 실패하면서 익숙한 지명들이 점령되는 것을 보게 되겠죠.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스타나라
12/07/05 00:05
수정 아이콘
쌍콤한 첫플...

이제 곳 이승만의 잘 막고있습니다 여러분~ 이후 혼자 도망 신공과 한강교 폭파! 를 보게 되겠군요...

얼마나 더 지나야 한국군이 연전연승을 하고있습니다! 라는 글을 보게 될런지요^^;
잿빛토끼
12/07/05 00:22
수정 아이콘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Je ne sais quoi
12/07/05 00:36
수정 아이콘
잘 읽고 있습니다. 지하철 노선도 아이디어는 참 좋네요. 대략적인 걸 이해하기 참 편합니다 ^^
세미소사
12/07/05 00:37
수정 아이콘
책내도 되겠네요. 잘보고 있습니다.
soleil79
12/07/05 04:32
수정 아이콘
왜이렇게 기다려지고 가슴아프고 그런지. ㅠ ㅠ

항상 감사합니다. [m]
나루호도 류이
12/07/05 14:52
수정 아이콘
왠지 손자병법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왕이 군사에 대해서 모르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은 장수의 재앙중의 하나다'
blue wave
12/07/05 16:03
수정 아이콘
잘 봤습니다.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좋은 글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rechtmacht
12/07/05 16:07
수정 아이콘
열받아서 스크롤 내리기가 힘들 지경이네요..-_-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8698 [일반] 낙동강 - 2. 포항에서 [3] 눈시BBver.25700 12/08/19 5700 2
38634 [일반] 독도 [11] 눈시BBver.27582 12/08/15 7582 2
38632 [일반] 낙동강 - 1. 뚫느냐 막느냐 [16] 눈시BBver.27895 12/08/15 7895 4
38627 [일반] [오늘] 8.15 [7] 눈시BBver.25795 12/08/15 5795 6
38580 [일반] 희망과 절망 - 완. 낙동강으로 [18] 눈시BBver.25952 12/08/12 5952 2
38571 [일반] 희망과 절망 - 8. 후퇴, 또 후퇴 [10] 눈시BBver.26669 12/08/12 6669 5
38539 [일반] 희망과 절망 - 7.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 [31] 눈시BBver.27780 12/08/09 7780 4
38502 [일반] 희망과 절망 - 6. 가장 성공한 기동 [10] 눈시BBver.28765 12/08/06 8765 0
38495 [일반] 희망과 절망 - 5. 북한군 2차 공세의 끝 [12] 눈시BBver.28220 12/08/05 8220 4
38481 [일반] 희망과 절망 - 4. 미군은 무너지고 [15] 눈시BBver.27177 12/08/03 7177 1
38375 [일반] 희망과 절망 - 3. 한강 방어선 붕괴 [6] 눈시BBver.27407 12/07/29 7407 0
38318 [일반] 희망과 절망 - 2. 적과 아군, 누가 더 빠른가 [27] 눈시BBver.27617 12/07/25 7617 5
38306 [일반] 오래전 그날 [105] 눈시BBver.210125 12/07/25 10125 1
38283 [일반] 빨치산 [20] 눈시BBver.26650 12/07/23 6650 2
38212 [일반] 희망과 절망 - 1. 한강, 3일 [23] 눈시BBver.28028 12/07/18 8028 0
38204 [일반] 친일파의 군 장악을 옹호하는 어떤 글 [77] 눈시BBver.28044 12/07/17 8044 4
38181 [일반] 폭풍 - 완. 가장 뜨거웠던 3일 [27] 눈시BBver.26539 12/07/16 6539 2
38147 [일반] 폭풍 - 9. 적의 날개를 꺾다 [12] 눈시BBver.26271 12/07/13 6271 2
38133 [일반] 폭풍 - 8. 춘천-홍천 전투 [18] 눈시BBver.27953 12/07/12 7953 11
38060 [일반] 폭풍 - 7. 서울 함락 [12] 눈시BBver.26240 12/07/07 6240 1
38048 [일반] 폭풍 - 6. 누구를 위해 싸웠는데 [17] 눈시BBver.25553 12/07/06 5553 3
38010 [일반] 폭풍 - 5. 서울을 지키는가 포기하는가 [11] 눈시BBver.25932 12/07/04 5932 0
37980 [일반] 폭풍 - 4. 포천 동두천 전투, 풍전등화의 서울 [19] 눈시BBver.27412 12/07/03 7412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